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43
발걸음을 따라 (1)
엘프들의 대장로이자 가장 늙은 엘프인 제로니모는 말했었다.
그는 서쪽을 향해 떠나갔다고.
“······자네가 어째서 그의 행적을 찾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소리의 흔적을 쫓아 다다랐던 엘프들의 숲이었건만 정작 그곳에서 맞닥뜨린 것은 목소리가 아닌 소드마스터에 대한 흔적이었을 뿐.
의문을 해소하면 해소할수록 더 큰 의문들이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의 흔적을 찾고 싶다면 먼저 이해해봐야 할 걸세.”
“······무엇을 이해해야 합니까?”
내가 쓰는 검은 황실의 검이었다.
그렇다면 목소리는 왜 황실의 검을 쓰고 있는가?
목소리의 행적은 분명 정령들을 지키며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목소리는 왜 정령들을 지키고 있었는가?
“건국왕 프라우센이 아닌 그저 한 명의 인간일 뿐인 키하노 프라우센을 말이지.”
“······.”
꼬리를 물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음들은 분명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건국왕 프라우센.
최초의 소드마스터.
그리고 영광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인간 키하노.
“어째서 그렇게 했는지 그에 대한 고민들을 읽어보길 바라네.”
늙은 만큼 현명해진 제로니모는 블라드를 위해 나아갈 방향을 말해줄 수 있었다.
끝을 알기 위해서는 시작을 봐야 한다.
아마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 그는 오래된 기억들을 수없이 들춰보았을 것이다.
“서쪽으로 가보시게. 그는 그곳으로 떠난다고 했었으니.”
“서쪽입니까?”
모두가 프라우센이라는 남자의 영광된 시작은 찬양했을지라도 그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치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신비롭게 사라져버린 프라우센의 대한 흔적.
어쩌면 지금의 블라드는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 흔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래. 서쪽. 우리의 어머니 세계수가 있던 자리.”
자신이 누굴 찾는지도 모른 채 이곳까지 걸어왔다.
그러나 희미한 흔적은 분명 남아있었으니 그것은 아마 지키고자 노력했던 자들의 발버둥일 것이다.
“그곳에 있는 드워프들을 찾아가 보게나.”
늙은이가 세워놓은 이정표가 어린 기사를 위해 다음의 방향을 가리켜주고 있었다.
이제는 황무지가 되어버린 서쪽.
어머니 세계수가 있던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드워프들을 향해서.
“드워프······.”
또다시 낯선 세계를 접하고만 블라드의 얼굴 위로 고고한 은빛의 색깔이 머물렀다.
고이 놓여 있던 은색의 검에서부터 시작된 빛줄기.
고민하고 있던 블라드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은은하게 퍼져나간 그 빛은 마치 찬찬히 살펴보기라도 한다는 듯 그렇게 오랫동안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
알리시아는 지금 뛰어오르는 심장을 붙잡은 채 간신히 평정을 연기하고 있었다.
“······저희 가보에 대한 보상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그리운 아버지에 대한 흔적이자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가문의 가보.
알리시아에게 있어 너무나 소중했던 그 호박석을 블라드에게 내어준 것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끌렸기에 내어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투자였다.
데어마르의 미래를 내다본 투자.
블라드라는 전도유망한 기사는 분명 데어마르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메꿔줄 수 있는 훌륭한 조각이었고 알리시아는 그 빛나는 조각을 정말이지 갖고 싶었다.
“그렇습니다. 인간들의 영주. 하이날의 알리시아 님.”
자신을 바라디스라 소개한 엘프는 실로 정중한 태도로 알리시아를 대하고 있었다.
인간들을 배척한다던 그간의 소문과는 전혀 딴판인 모습.
하이날의 가신들은 그런 엘프들의 모습을 보며 혼란스러운 마음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께서 블라드에게 쥐여주신 가문의 소중한 가보는 저희 아우슈린에게 있어서 정말이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블라드가 가져온 엘프들의 편지가 있었지만 그것은 단지 인사였을 뿐.
어머니 세계수의 소중한 흔적을 보관해주었고 또한 잃어버리고 만 인간들의 영주를 위해 엘프들은 그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내어주기로 결정했다.
“비록 얼마 되지 않는 것이지만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중히 고개 숙인 바라디스의 뒤에서부터 고풍스러운 나무상자 하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상자만으로도 충분히 제값을 할 것만 같은 모양새.
엘프라는 이름만 앞에 붙어도 가치가 훌쩍 뛴다는 것을 알기에 모두가 숨을 죽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는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것은······뭐죠?”
이윽고 상자가 열리자 그와 함께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
우울한 냄새로 가득 차 있던 이곳을 순식간에 환하게 만드는 그런 향기였다.
“사프란입니다. 저희가 특히 아끼는 향신료이죠.”
마치 꽃잎을 말려놓은 것만 같은 붉은 줄기들.
그 안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는 마치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이 확연한 실체를 내보이고 있었다.
“어, 음. 이게 그러니까.”
어찌 내뱉고는 있으나 차마 끝을 맺을 수는 없었던 알리시아의 목소리.
난생처음 엘프들의 문물을 접하고만 알리시아는 눈앞에 있는 사프란이 대단한 가치를 가지는 물건임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알리시아 남작님. 저희는 이번 기회를 통해 하이날 가문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굳이 돌려 말하지 않는다.
말속에 진의를 숨겨 이득을 보려 하는 인간들과는 다르게 엘프들은 그저 곧고 바르게 전할 뿐이었다.
“비록 먼 곳에 있긴 하지만 그곳에 믿을 수 있는 자들이 있다면 고민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부디 저희의 제안을 깊게 생각해주십시오.”
풍겨오는 향기는 아찔하고 들려오는 말은 달콤하다.
알리시아의 가신들은 귓가에 맴도는 바라디스의 말에 숨조차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기회가 있나.
가장 어려운 시기, 가장 믿을 수 없는 기회를 맞이한 가신들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영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알리시아를 향해 돌아갔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 있는 유일한 하이날인 알리시아 하이날.
가신들의 눈빛을 마주한 그녀의 어깨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펴지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먼 곳에서 오신 여러분들.”
엘프들을 향한 알리시아의 미소가 환히 데어마르의 홀을 밝히고 있었다.
누구보다 가치를 알아보았던 알리시아의 앞에 있는 것은 그간 지난했던 세월에 보답하는 블라드의 선물이었으니까.
※※※※
인간들과의 대화는 성공적이었다.
제국에 비해 빈약할 수밖에 없는 엘프들이었기에 언제나 그들에 대한 불안 속에 살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야 마주한 커다란 세상에는 이미 큰 변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북부 연합이라는 세력이 준동한 것은 분명 저희에게 이득일 겁니다.”
“어쩌면 제국에게 대항할 수 있는 대안이 되어 줄 수도 있습니다.”
북부 연합이 내세우고 있다는 북부정교회는 분명 다른 종교나 믿음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다.
하나의 기준만이 아닌 너와 나의 가능성.
그것을 보장해준다는 새로운 종파는 분명 엘프들에게 있어 또 다른 선택지를 보여주는 존재일 것이다.
“여기로군.”
여태껏 무지했던 세상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성공한 레인저들은 본래의 목적을 해결하기 위해 언덕 위에 있는 하이날의 나무를 살펴볼 수 있도록 알리시아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들이 아우슈린을 나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으니까.
“이게 바로 블라드가 말했었던······.”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누가 보아도 오래되어 보이는 레몬 나무 한 그루.
그곳에서 느껴지는 진한 향기는 분명 어린 세계수의 냄새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역시 뱀이었군.”
왼쪽 눈을 감지는 않았지만 눈동자 속에 떠오른 오망성이 바라디스의 눈을 밝혀주고 있었다.
세계수와 함께 하는 엘프들의 세계.
그곳을 통해 보이는 색이 진한 곳에는 자신들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하얀 뱀이 있었다.
“살아남아 있었군요.”
“전에 보았던 도브레치티의 두더지와도 같은 느낌입니다.”
블라드가 말해주었던 대로 정령들의 흔적을 따라왔던 바라디스와 엘프들.
그들을 아우슈린을 떠나 도브레치티의 두더지를 먼저 만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머니 세계수의 기어이 깃들어 있던 이곳 데어마르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살려놓았을까?”
오래된 지난날, 오직 살아남기 위해 세계수의 씨앗만을 챙긴 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엘프들.
그러나 모든 것이 타들어 가는 순간에도 남아있는 것들이 있었고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몰래 세상 밖으로 흩뿌려 준 흔적들이 있었다.
그 흔적 중 하나가 아마 지금 보이는 하얀 뱀일 것이다.
“바라디스 님. 저기.”
“음?”
부하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바라디스는 곧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하얀 뱀의 등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어린 것들.
그것들은 분명 블라드의 검에 담아 보냈었던 어린 세계수의 정령들이었다.
“자리를 잡았군.”
멀리까지 왔지만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
단순히 살아있는 것을 넘어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 것을 보았으니까.
아우슈린에서 태어난 어린 정령들을 보며 엘프들의 표정에서 환한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하이날의 영주에게 당분간 이곳에 머무를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해야겠다. 어쩌면 또 다른 흔적들이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하나가 되어버린 제국 안에서 흔적도 없이 구겨져 버린 작은 세계들.
그러나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온 엘프들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작은 세계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흔적들은 자신들이 따라 나온 어린 기사의 행적을 따라 죽 늘어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주 오래전 자신들을 찾아왔던 소드마스터의 행적과도 유사한 것이었다.
※※※※
서서히 땅거미가 져가는 항구의 부둣가 앞.
그곳에서 서 있던 블라드는 조용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사우를 떠나갔던 그 배 위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드워프들이 블라드가 있는 항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루트거 님이 좋아하지는 않을 거야.”
“······알고 있어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마커스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러시겠죠.”
내가 한 이 일에 대해서 루트거가 당연히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은 오롯이 요제프만을 위한 일이었으며 이는 곧 가주직을 손에 넣기 위한 형제들의 싸움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으니까.
“후회하지 않겠나?”
파도 소리와 함께 퍼지는 마커스의 물음이 블라드의 귓가로 퍼져오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을 거냐.
너를 아껴주었던 루트거가 분명 실망할 텐데.
“후회는······. 할 것 같습니다.”
루트거 바예지드.
나와 함께 용을 잡았던 남자.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은 가슴 뛰는 경험이었고 돌이켜보면 즐거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안 하면 더 크게 후회할 것 같아서요.”
루트거의 호의를 배반한 것은 분명 뼈아픈 결정이었다.
그러나 고딘은 말했었다.
지금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어느 곳인지부터 살펴보라고.
“저는 요제프 님의 기사니까요.”
“······그래.”
가이다르와의 전쟁은 요제프의 숨통을 틀어막음과 동시에 루트거의 가치를 드높이는 변수였다.
이대로 간다면 결국 요제프는 제 빛도 발하지 못한 채 스러져 갈 것이 분명할 터.
그렇기에 블라드는 드워프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보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여기서 해야 할 일도 다 한 것 같네요.”
블라드의 말과 함께 지평선에 와닿은 배가 황혼 속을 향해 자그마한 점이 되어 사라져갔다.
아마 지금 사라져 간 배 안에서는 여전히 블라드가 있을 항구를 바라보는 드워프들이 있을 것이다.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자신을 진창 위에서 끄집어내어 준 요제프를 위해, 그리고 목소리를 위해.
블라드는 불카누라는 드워프를 비둘기 삼아 여태껏 보지 못했던 세상을 향해 편지 한 장을 띄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