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44
발걸음을 따라 (2)
낯선 집무실에서 바라본 창밖은 푸른 바다로 가득 차 있었다.
창가에 서 있던 페테르는 그 푸른빛 위로 점점 번져가는 노을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드워프들은 잘 보내주었나?”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바예지드의 가주.
그런 페테르를 바라보고 있던 흉터투성이의 남자는 그의 물음에 답했다.
“그렇습니다. 약 스무 명은 되는 인원이더군요.”
눈을 좁힌 채 바라본 창가 너머에는 조금씩 노을을 향해 나아가는 배 한 척이 있었다.
노예로 잡혀 있던 드워프들과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잠입했던 불카누가 타고 있을 작은 배.
“명하신 대로 그들을 내보내 주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비록 블라드는 몰래 내보냈다고 생각하겠으나 이미 도시 나사우는 바예지드의 것.
요제프의 소망을 담은 저 배는 페테르가 허락했기에 떠날 수 있던 것이었다.
“결국 저 녀석은 루트거가 아닌 요제프를 선택하는군.”
지금도 홀로 항구에 서서 떠나가는 배를 지켜보고 있는 어린 기사.
페테르는 언제나 그러했듯 높은 곳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블라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름의 각오가 단단해 보였습니다. 요제프 님은 분명 좋은 기사를 얻었습니다.”
“그래.”
페테르는 들려오는 마커스의 보고에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온전한 것은 하나이나 받으려 하는 것은 두 사람.
페테르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는 요제프의 발버둥을 보며 많은 고민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나사우는 겨울에도 따뜻한 곳이지.”
영민하고 사려 깊지만 타고나기를 허약하게 태어나고만 자신의 아들 요제프.
그것은 분명 그 아이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때로는 누군가에게 부당한 짐을 지워주고는 하는 법이었다.
“이런 날씨라면 아마 북쪽에 있는 것보다야 훨씬 몸에 무리가 덜 가겠지.”
페테르는 조용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저물어가는 노을빛이 비치는 그의 손바닥은 새빨간 빛이 물들어 있었다.
마치 핏빛으로 물든 것만 같은 손.
아마 평생 지워낼 수 없을 그 빛깔을 보며 페테르는 이제는 세상에 없는 자신의 형제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래도 아비 된 도리로서 대안 하나 정도는 제시해주고 싶군.”
아들들이 장성한 만큼 또다시 반복되어야 하는 바예지드의 역사.
그러나 페테르는 그들에게 반복될 비극에서 탈출할 수 있는 자그마한 비상구 하나 정도는 마련해주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백작님.”
가주로서의 의무와 아버지로서의 연민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페테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그의 심정을 느끼며 마커스는 조용히 집무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이름 없는 그림자가 떠난 자리.
이제는 홀로 서 있는 페테르는 붉은빛으로 물든 손바닥을 꽉 쥐고는 고개를 들어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보아도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넓은 바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낯설기만 한 넓음이더라도 누구에게는 숨 쉴 수 있는 통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페테르는 바라고 있었다.
※※※※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무리가 말을 탄 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아게가 이끄는 부다아트 족과 슈테판이 이끄는 가시나무 용병단,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앞장서 있는 블라드까지.
나사우를 떠난 이들은 지금 데어마르를 향해 북상하는 중이었다.
“마침 잘됐군요. 아마 이 상태로 겨울까지 뛰었다면 골병 꽤나 들었을 겁니다.”
다행히도 사망자는 없었지만 나름의 부상자는 있던 상황.
격렬했던 전쟁의 초반부터 싸워왔던 이들이었기에 슈테판의 말대로 다들 나름의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알고 있었다며.”
“무엇을 말이야.”
“북부정교회 말이야.”
아게를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빛이 제법 날카로웠다.
감히 부관 주제에 대장에게 숨기는 것이 있었다니.
그 날카로운 추궁을 마주한 아게는 적당히 블라드의 눈빛을 뭉개며 실실 웃을 뿐이었다.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눈치채고 있었던 거지.”
무심히 블라드가 챙겨온 맥주를 마시던 아게의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차가우니까 더 맛있네?”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지.”
북부의 기사와 중부의 용병, 그리고 야만족.
공통점이 있을 수가 없는 이들이 그나마 대화를 나눠볼 만한 주제는 요즘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북부연합과 북부정교회에 대한 이야기 정도일 것이다.
“나도 사실 과정은 잘 몰라. 바예지드가 낌새를 던져줬고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채셨다 뭐 이 정도지.”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이 있다.
마치 서로 다른 신을 믿고 있는 제국민과 야만인들처럼.
그러나 두 세계를 구분 짓던 가장 큰 장벽에 북부정교회라는 이름의 구멍이 뚫려버렸으니 야만인들로서도 한 번 정도는 고민해볼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모시는 조상신까지도 인정해준다고 하니까 말이지. 아마 그 약속이 아니었다면 우리라도 절대 협조하지 않았을 거야.”
린드부름의 습격과 용살기사단에 의해 세력이 크게 기울어가던 부다아트 족이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자신들을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는 제국에 쉽게 협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이 아닌 새로이 만들어진 북부의 그릇은 충분히 확장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었기에 야만인들의 입장에서도 한번은 고민할 법한 대안이었다.
“그래도 몇몇 부족들은 우리까지 죽이겠다고 날뛰고 있다 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이번 겨울에는 부족으로 돌아가 볼 생각이었지.”
그렇다 할지라도 서로가 오랫동안 반목해왔던 역사까지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부다아트의 족장은 자신의 아들을 미리 세상 밖으로 보내본 것이었다.
바예지드에게 계속 협조하는 것이 옳을지에 관한 결정은 아마 아게의 입에서부터 시작될 모양이었다.
“그래?”
질문은 날카로웠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짧았다.
자신은 까마득히 몰랐던 북부연합의 일을 들으며 블라드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올라섰다 믿었지만, 세상을 떠도는 파도는 여전히 블라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몰아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앞에 데어마르입니다!”
순간, 침묵을 깨는 누군가의 보고가 있었다.
숲길을 나서자 보이는 아직 피 냄새가 가시지 않은 초원.
그러나 불길한 냄새와는 상관없이 그 앞에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어느새 정겨울 뿐이었다.
“응?”
모두가 마침내 도착한 목적지를 보며 들떠있었지만 블라드는 데어마르에서부터 느껴지는 낯선 감각을 느끼며 눈을 잔뜩 좁히고 말았다.
“왜 그러십니까? 블라드 님.”
“······잠깐만.”
서둘러 왼쪽 눈을 감으며 오러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하는 블라드.
블라드의 기감이 예민한 것을 알고 있던 사내들은 서둘러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합을 맞춰왔던 만큼 용병들과 야만족들이 순식간에 어우러지며 확고한 방어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뭐야 저건.”
그러나 이들의 날선 경계에도 무색하게 블라드는 그런 의도로 오러를 끌어올린 것이 아니었다.
익숙하지만 어딘가 달라 보이는 데어마르.
“축제라도 하는 건가?”
“네?”
점점 저물어가는 황혼 너머로 멀리서 보이는 하이날의 나무가 요란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흥겨운 느낌으로 쉴 새 없이 깜빡이고 있는 나무의 위에는 하얀 뱀이 높게 고개를 쳐든 채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중이었다.
“음?”
한참 하얀 뱀의 해괴한 짓거리를 보고 있던 블라드는 자신의 어깨로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내렸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 씨. 비 오잖아.”
조금만 더 가면 데어마르였건만.
그러나 그 새를 참지 못하겠는지 어느새 주변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불러낸 여름의 마지막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이 닿기 전에 내린 그 비는 여전히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
“······사프란, 사프란이라.”
돋보기를 통해 마주하는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커져 있었다.
엘프들이 건네준 사프란이라는 향신료.
본인들은 주로 요리를 할 때 쓰는 향신료라고 했지만, 향수로 써도 무방할 것만 같은 좋은 향기였다.
“이것도 혹시 그런 것 아닐까요? 압실론이라는 엘프들의 차가 사실은 마약이었다는데······.”
노회한 던칸은 갑작스레 와닿은 호재를 보며 기뻐하기보다는 경계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저 멀리 브리간테스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숙청은 엘프들의 차인 압실론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들었으니까.
“본인들은 몰랐다고 하니 일단은 믿어보는 수밖에요.”
엘프들에게는 평범한 차였지만 인간들에게는 마약.
신체구조가 다르기에 그렇게 작용한 것이라 설명한 바라디스의 말은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실제 의도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유통하기 전에 우리끼리 먼저 실험을 해보면 되겠지요. 이건 그만한 부담을 감수할 만한 물건이에요.”
바라디스가 가져온 것은 그저 선물만이 아니었다.
아우슈린은 진심으로 데어마르와의 관계를 원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증거로 가공된 사프란뿐만 아니라 그 꽃의 구근까지도 가져와 안겨주었다.
아마 다른 곳은 몰라도 데어마르라면 꽃을 피울 거라는 아리송한 말과 함께.
“정말로 이걸 키워보실 생각이십니까?”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돋보기를 내려놓은 물빛 눈동자가 날카로웠다.
“우리 같은 자그마한 영지에서는 값싼 것을 키워봤자 손해에요. 겨우 영지민들이나 먹여 살릴 정도일 뿐이라고요.”
알리시아는 이번 전쟁을 통해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데어마르는 정말이지 작은 영지라는 것을.
“우리는 지금 완전 거지에요. 돈이 없다고요.”
거대한 가문들의 사이에 껴서 이러저리 흔들렸을 뿐인 데어마르를 보며 알리시아는 속으로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수모는 결국 힘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레몬 사업에 주력하신 것일 테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작물이 필요해요. 그래야 돈을 벌고 기사들을 모으죠.”
전대 가주인 알리시아의 아버지 또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봤지만 하이날의 힘만으로는 한계라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그러나 지금 알리시아의 앞에는 레몬보다 열 배는 더 가치 있을 작물이 놓여 있었으니 고민할 이유 따위는 없을 것이다.
“······바예지드가 이번 일을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도 돈 냄새 정도는 맡을 줄 아는 자들이니까요.”
엘프들의 방문에 놀란 것은 알리시아뿐만이 아니었다.
병상에 누워있던 요제프조차도 벌떡 일어나 그들을 만나보고 싶어 했으나, 이번 일 만큼은 아무리 바예지드라도 양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래도 상관없다.
알리시아는 이미 결심을 굳혔고 승부를 본다면 바로 지금이었다.
“이것만큼은 양보 못 해요.”
분명 저 멀리 동쪽에 있는 비츠카야도 엘프들과의 교역을 통해 단숨에 가세가 확장되었다고 했었다.
데어마르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똑똑똑-
한참 고민을 거듭하던 알리시아의 귀로 정중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엘프들이 도착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정한 소리였다.
“알리시아 님. 지금 막 블라드 경이 데어마르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집사의 말을 들은 알리시아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지금, 그녀에게 있어 가장 반가운 존재는 역시 블라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블라드 경에게 바로 저에게 오라고 전해주세요.”
언제나 내어주는 것보다 더 큰 것을 가져와 주는 남자.
아마 블라드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기회 또한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저번에는 너무 바빠서 미처 고맙다는 말도 못 전했잖아요.”
알리시아는 수상쩍다는 던칸의 눈빛을 보며 다급히 변명을 주워섬겼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블라드를 데려오라는 명에는 변함이 없었다.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사프란.
언덕 위를 누비고 있는 이들은 엘프들.
그리고 지금 도착한 사람은 자신의 기사인 블라드.
무언가 형체를 갖추고 있는 것만 같은 조각들을 보며 알리시아의 얼굴에는 미소 한 줄기가 비치고 있었다.
※※※※
“그렇게 반갑나? 그래?”
어둑한 하늘과 함께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성문 앞.
서둘러 성문 안쪽으로 들어간 바라디스는 자신의 어깨 위에서 조잘대고 있는 고양이 형상의 정령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건강해 보이는 고양이 모양의 정령은 그동안 하얀 뱀이 이 아이들을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 네 말대로 저기 오는구나.”
냥냥거리는 정령의 말대로 경비병들의 외침 속에 블라드라는 이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는 데어마르의 성문.
어두운 틈 사이로 보이는 화려한 금발을 확인한 바라디스는 품속에 고이 품어두고 있던 편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건 그 아이가 말한 대로 빨리 전해주는 것이 좋겠지.”
지금도 단풍나무의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그 편지는 자신의 동생인 세계수의 신녀가 건네준 것이었다.
봉인조차 되어 있지 않은 신녀가 보낸 편지.
그러나 편지 안에는 글귀 대신 마치 어린아이가 그려놓은 것만 같은 유치한 그림이 그려져 있을 뿐.
오직 그때가 닥쳐야만 이해할 수 있는 신녀의 예언에는 어린 카나리아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금발 기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