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45
발걸음을 따라 (3)
땀이 흥건한 이마, 새하얗게 질린 입술.
달빛이 내려앉는 침대 위에서 한 소녀가 괴롭다는 듯 몸을 뒤틀고 있었다.
“······으, 으으.”
사방에서 다가오는 밤안개의 냄새가 지독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이유 모를 진득함이 소녀에게 불길함을 안겨다 주고 있었다.
“따라가요. 빨리요······.”
평범한 안개가 아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세계수의 신녀는 블라드의 허리를 붙잡고는 어서 가자 재촉하고 있었지만 아마 그녀의 말은 블라드에게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현실이 아닌 꿈이었으니까.
오직 세계수의 신녀만이 자각할 수 있는 그런 꿈.
-짹. 짹짹.
어둠을 헤치며 힘겹게 걷고 있는 블라드의 앞으로 어린 카나리아 한 마리가 지저귀고 있었다.
마치 블라드를 인도라도 하겠다는 듯 카나리아는 횃불처럼 어둠 속에서도 앞을 밝혀주고 있었다.
“빨리요. 빨리.”
신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오직 저 아이만이 블라드를 어둠 속에서 빼내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다가오는 어둠은 짙고 깊었으나 그에 대항하는 어린 카나리아의 지저귐은 너무나 연약할 뿐이었다.
훅-
마치 누군가의 입김이 와닿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레 사라져버린 어린 새.
그 빛에 의지해 나아가고 있던 신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
순식간에 블라드와 신녀의 주위로 안개가 꾸물거리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직 어둠만이 가득한 그 공간에서 세계수의 신녀는 서둘러 블라드의 허리를 껴안고는 카나리아가 사라졌던 곳을 향해 매섭게 노려보았다.
-······.
누군가가 그곳에 있었다.
마치 비웃기라도 하는 듯 새빨갛게 웃고 있는 입술과 함께.
이제는 빛을 잃어버리고만 자그마한 깃털 하나가 그녀의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너한테는 절대 안 줄 거야.”
블라드를 인도하던 그 빛은 꺼져버린 것이 아니었다.
잡아먹힌 것이었다.
지금도 어둠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그녀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지 않았다.
※※※※
오후의 햇살이 가득한 알리시아의 집무실.
창밖에 보이는 하이날의 언덕을 보며 블라드는 가만히 앞에 있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저 멀리서 보이는 언덕 위의 하얀 뱀은 오늘 일광욕이라도 하겠다는 듯 똬리를 틀고는 가만히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던칸 경이 말하기를 당신처럼 특수한 계약을 맺은 기사는 몇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블라드를 바라보는 알리시아의 물빛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 들어갔다.
아름답게 반짝이지만 무언가 굶주려 있는 것만 같은 그녀의 눈빛.
그런 알리시아 눈빛을 마주한 블라드는 조용히 들고 있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마 7년이 아니라 더 긴 기간이었다 해도 승낙했을 겁니다.”
블라드는 알리시아가 자신과 요제프와의 계약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 요제프가 알려준 것이겠지.
그렇다면 요제프는 지금의 상황 또한 예측하고 있을 것이다.
“기간은 짧았으나 저에게는 과분한 계약이었죠.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알리시아는 블라드에게 영입에 대한 운을 띄우고 있었다.
귀족과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블라드라도 눈치챌 수밖에 없는 노골적인 분위기.
그러나 그동안 숱하게 자신에게 관심을 표했었던 알리시아였기에 블라드 또한 지금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놓은 답변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요제프 님과의 계약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지금처럼 앞으로도요.”
“아.”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표정이 안쓰러웠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대답해 주기로 했다.
불확실한 대답으로 그녀에게 허튼 고민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알리시아의 기사이기도 한 블라드는 그녀에게 나름의 애착이 있었고 가능하다면 이번의 제안을 좋게 넘어가고 싶었다.
“······그런가요.”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블라드는 애써 웃음 지으려 하는 그녀의 처연한 모습이 물빛 머리카락 색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이래서 요제프 님이 물어보아도 좋다고 하신 것이었군요.”
흔들리지 않을 것을 확신했기에 이런 기회를 준 것이었구나.
이제야 요제프의 속내를 짐작한 알리시아는 속에서 차분히 끓어오르는 울분을 느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요제프 님보다도 저와 먼저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요.”
“만약 그랬다면 분명 알리시아 님과 계약을 했을 겁니다.”
“······.”
그랬을 거라 말하는 블라드의 미소가 괜히 얄미로웠다.
만약이라는 가정을 붙인다면 못 해줄 말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알리시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블라드였고, 그는 지금 막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뒤였다.
역시 데어마르보다는 쇼아라겠지.
알리시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그것이 못내 분했다.
“게다가 쇼아라에는 제미나라는 친구도 있으니까요.”
“······네?”
갑자기 들려오는 제미나의 이름에 블라드는 당황했지만 알리시아의 미소에는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아직 우리에게는 4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고 미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마치 방금의 말은 내뱉지도 않았다는 듯 다시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알리시아.
블라드는 예전과는 무언가 달라 보이는 그녀의 기세를 보며 조용히 눈치를 볼 뿐이었다.
“장원을 드리겠어요.”
“······네?”
더는 훌쩍이고 있을 뿐인 물망초 꽃은 이곳에 없다.
이제 알리시아의 눈빛에는 그저 숨길 수 없는 욕망이 가득할 뿐.
“장원이요. 당신의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질 세습되는 땅 말이에요.”
장원(莊園). 모든 기사가 주군에게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보상.
그 단어를 들은 블라드는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앞에 있는 알리시아를 바라볼 뿐이었다.
“다행히 이번 전쟁을 통해 저희도 영역을 넓힐 수 있었어요. 물론 바예지드의 배려가 있긴 했지만.”
그동안은 하나의 도시와 2개의 마을뿐인 하이날 남작령이었지만 이번의 전쟁을 통해 2개의 마을을 더 가질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블라드가 오징어 떼와 함께 도착했던 어촌 마을은 이제 위치상 도시가 될 수 있을 만한 입지를 가지게 되었으니 블라드에게 장원을 내어주겠다는 그녀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이건 아무리 요제프 님이라 할지라도 내걸 수 없는 조건일 거예요.”
내게 필요한 것이라면 빼앗아라도 와야 한다.
짙은 눈그늘의 사내에게서든, 빨간 머리의 여자에게서든.
블라드라는 존재는 이 두 명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꼭 맞는 조각이라는 것을 알리시아는 잘 알고 있었다.
※※※※
‘······장원, 장원이라.’
블라드는 이제는 익숙해진 저택의 복도를 걸으며 복잡해진 머릿속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장원이 그렇게 좋은 건가?’
꿈꿔본 적 없었기에 가치조차 모르겠는 장원이라는 단어.
그러나 분명 고딘은 말했었다.
기사에게 있어 장원이란 존재는 귀족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입구 같은 것이라고.
비록 거짓된 이름을 알려주었던 고딘이었지만 장원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다던 그때의 웃음만큼은 진실된 것이었다.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언젠가 때가 되면 기억해 달라는 것이지.’
자신에게 장원을 주겠다 말했던 하이날의 군주는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당당한 목소리로 블라드에게 제안했다.
‘저뿐만 아니라 데어마르에 있는 모든 영지민은 블라드 경을 아끼고 좋아하고 있어요. 태어난 쇼아라만큼은 아닐지라도 이곳이라면 당신에게 또 다른 고향이 되어줄 수 있을 거예요.’
가장 먼저 알아봐 준 사람은 아닐지라도 가장 아껴주는 사람은 될 수 있다.
알리시아의 돌직구 같은 제안을 들은 블라드는 지금도 하염없이 복도를 걸으며 눈썹을 찌푸릴 뿐이었다.
“······모르겠는데.”
전부 다 모르겠는 것 투성이었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번의 고민만큼은 요제프나 다른 바예지드의 기사들과 나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알리시아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블라드에게 고민을 떠넘겼고 아마 그것이 그녀가 블라드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였을 것이다.
감히 자신을 거부한 괘씸한 기사에게 주는 그런 복수 말이다.
“이럴 때 탁 튀어나와 주면 참 좋을 텐데.”
복잡해진 생각만큼 어지러운 발걸음을 따라 복도를 걷던 블라드는 절로 목소리의 존재를 떠올리고 말았다.
오직 자신만이 알기에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인 목소리.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상식은 해박한 존재였으니 분명 이럴 때 큰 도움이 되어주었을 텐데.
“응?”
순간 복도를 걷던 블라드는 귓가를 울리는 익숙한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귀를 쫑긋거렸다.
“목검?”
누군가가 목검 같은 것을 들고는 허공을 내려치는 소리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미묘하게 어긋나는 바람 소리는 목검을 들고 있는 사람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뭐야 이거.’
열심히 내리치고는 있으나 길을 찾지 못한 그 소리에 블라드는 복도 위에서 가만히 멈춰 섰다.
열심히는 하나 조금의 나아짐도 없는 그 소리는 오직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알아챌 수 있는 안타까움이 섞여 들어있었다.
“······.”
블라드는 왜인지 모르게 자신을 잡아끄는 소리를 따라 여태껏 가본 적 없던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오래된 만큼 좁고 구불구불한 데어마르의 복도.
빈약한 재정에 줄어든 사용인들 때문인지 오랫동안 손길이 닿지 않은 복도에는 자근자근 밟히는 먼지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좁고 어두운 복도를 따라 나온 곳은 여태껏 블라드도 모르고 있던 아주 자그마한 정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초라한 공터.
그리고 그곳에서 블라드는 있는 힘껏 목검을 내려치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흐으, 흐······.”
샤를 라브노마.
이제는 마지막 라브노마이기도 한 녹색 머리카락의 소녀.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에서 샤를은 목검 같지도 않은 몽둥이를 들고는 열심히 허공을 향해 휘두르는 중이었다.
“······엉망이구만.”
내려치는 것인지 올려치는 것인지 모르겠는 의미 없는 동작들.
전혀 길이 잡혀 있지 않은 샤를의 모습을 확인한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복도 옆에 붙어 모습을 숨겼다.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나.”
아마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저런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어설픈 라브노마의 작위는 소녀를 붕 뜨게 만들었을 것이며 전쟁 때문에 날카로웠던 그간의 분위기는 분명 소녀를 위축시켰겠지.
결국, 낯설기만 한 이 도시 안에서 샤를은 아무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샤를의 사정을 짐작한 블라드는 가만히 볼을 긁으며 들려오는 목검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손 내밀 수 없음에도 쉴새 없이 내려치는 목검.
가만히 복도 벽에 기대어 있던 블라드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흠.”
들으면 들을수록 귀에 익은 소리.
지금 샤를이 내는 소리는 뒷골목 공터에서 홀로 목검을 내려치던 소년이 내던 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마치 어리고 부끄러웠던 예전의 자신을 마주하는 것만 같아 블라드는 그만 복도를 나서 자그마한 정원에 들어서고 말았다.
“······야.”
“네?”
갑작스레 나타난 블라드를 보며 동그랗게 치켜뜨고 있는 두 눈에는 당황감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아주 조금의 반가움이 비치는 것은 분명 블라드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무언가 기대감에 가득 차 있는 샤를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블라드는 괜히 나섰나 하는 곤혹감에 목소리까지 떨리고 말았다.
배우는 것에는 익숙했어도 알려주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뒷골목의 소년은 아직 남에게 나의 것을 내어주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냥 내려치지 말고 팔꿈치 각도를 좀 좁혀보지.”
그렇다 할지라도 받은 것이 있다.
이제는 안다.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평생 뒷골목 공터에서 묶여 있었을 거라는 걸.
“네?”
“선을······ 이렇게 그어보라니까.”
익숙한 소리를 따라 내디딘 발걸음 끝에는 예전의 광경과 꼭 닮은 장면이 있었다.
다만 그때와 다른 모습이 있다면,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것.
“이렇게요?”
“······너는 파지법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경직된 듯 꽉 접혀 있는 소녀의 손을 펴주는 블라드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아무도 찾지 않는 저택의 자그마한 정원.
-소년은 내려치는 팔꿈치 각도를 좀 더 좁혀야 할 거 같은데.
그곳에서부터 들리는 소리의 시작은 아마 어두컴컴한 뒷골목의 어느 공터에서부터였을 것이다.
귀향
데어마르의 언덕 위로 홀로 올라오는 남자가 있었다.
입고 있는 근사한 차림새와는 달리 들고 있는 손에는 청소도구가 가득한 남자.
짧아진 낮만큼이나 길어진 노을을 확인한 블라드는 언덕 가운데 서서 청소도구들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
올라오는 블라드를 향해 꼬리를 흔들고 있던 하얀 뱀이었으나 오늘의 블라드는 녀석을 보러온 것이 아니었다.
언덕 가운데 자리 잡은 하이날 가문의 가족묘를 돌보러 온 것이었다.
“알리시아 님이 많이 바쁘셨나 보네.”
다른 이의 가족묘지이긴 했으나 이끼가 잔뜩 올라온 묘비들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긴 도무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기에는 산 사람들도 살아남기에 바쁜 시기였으니까.
“돌아가기 전에 닦아놓고 가야겠네.”
무심히 내려놓은 도구들 사이에서 물에 적신 짚 뭉치를 꺼내든 블라드는 꺼끌한 면을 이용해 묘비들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는 너무 많았으나 자신에게는 하나도 없는 그 묘비들을 보며 블라드는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이끼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일단은 다친 데 없이 잘 살아남았으니까.”
격렬했던 전투였던 만큼 살아남았기에 감사하다.
누구는 신에게, 누구는 조상들에게 그 감사를 표시하겠으나 블라드는 마땅히 그럴만한 대상이 없었다.
눈앞의 이들과는 달리 묘비 하나 없이 묻히고 만 어머니의 존재는 이제는 블라드의 기억 속에서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돌봐주셔서.”
그러나 희미하다 할지라도 없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블라드는 비록 다른 이의 것이었지만 눈앞의 묘비들을 다리삼아 저 먼 하늘을 향해 읊조리기 시작했다.
“후우.”
알리시아의 부모님 묘를 닦고.
그 부모님의 부모님을.
그렇게 계속해서 하나씩 닦아낼 때마다 마음속으로 한 마디씩을 읊조려가던 블라드는 이윽고 가장 오래된 묘비 하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구나.’
세월에 닳아버린 글자 사이로 가장 오래된 하이날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노란색 호박석을 알리시아에게까지 물려준 사람이자 지금 하얀 뱀이 있는 나무를 심어낸 초대 가주.
‘······.’
처음 마주했을 때는 몰랐으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하이날의 초대 가주는 분명 목소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정령이 깃든 나무를 심은 하이날의 초대 가주와 정령들을 찾아다니며 지켜냈었던 목소리의 행적은 분명 공통점이 있었고 그 공통점의 가장 위에는 소드마스터라는 이름이 달려 있었다.
“여기서 뭐 하시나요. 블라드 경.”
“······아.”
소드마스터라는 단어와 함께 한참 상념에 빠져들어 가던 블라드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알리시아 님.”
“저보다 더 정성이시네요.”
그곳에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미소 짓고 있는 알리시아의 모습이 있었다.
이제야 막 정신을 차려서일까.
선명한 노을빛과 함께 흩날리는 그녀의 물빛 머리카락.
갑작스레 너무 진해진 색들을 보며 블라드는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끼고 말았다.
“기사들은 함부로 뒤를 잡히면 안 된다면서요. 너무 넋 놓고 있던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변명할 여지가 없네요.”
분명 농담이었으나 블라드는 웃을 수가 없었다.
알리시아의 말은 사실이었고 그녀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마 알리시아가 블라드의 뒤가 아닌 앞에서 다가왔다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소드마스터라는 단어를 생각하던 블라드의 두 눈이 저절로 자신의 세계를 끌어내고 있었다는 것을.
“으이차.”
블라드가 다 해버려 자신이 돌볼 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알리시아는 별수 없다는 듯 블라드의 옆에 앉고는 가만히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또 해주셨네요.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요.”
혼자 멀뚱히 서 있기가 뭐 했던 블라드는 자연스럽게 옆에 앉으며 그녀와 같이 데어마르를 내려다보았다.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그저 주고받는 한 마디일 뿐이었지만 그 안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정당하지 않은 계승자에게서부터 그녀를 지켜주었고 서부의 찬탈자로부터 데어마르를 지켜주었다.
그 과정에서 소년은 기사가 되었고 마침내 목표했던 달을 마주할 수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도, 하이날의 알리시아 남작도 결국 서로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도시로······. 꼭 다시 한번 오고 싶네요.”
그렇기에 지금 블라드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블라드라는 사람은 쇼아라에서 태어났으나 기사 블라드는 이곳에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얼마든지 환영할게요.”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알리시아는 블라드의 말에 빙긋이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노을에 물들어가는 블라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내일이면 떠나가는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봐두고 싶었으니까.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보고 싶은 것을 보는 두 사람이었으나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있었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둘을 바라보던 언덕 위의 하얀 뱀이 지금만큼은 따뜻한 바람이 불 수 있도록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
“만나서 반가웠어요.”
“나도 반가웠네. 인간들의 기사. 블라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의 반가운 비도, 여름의 시원한 비도 아닌 차가움을 머금은 비는 지금도 데어마르 앞에 모여 있는 사내들의 어깨를 때리는 중이었다
“언젠가 또 볼 기회가 있겠지. 안 그래도 북부도 한번 조사해볼 생각이었으니까.”
바라디스의 시선이 내리는 빗방울들을 뚫고는 블라드 옆에 서 있는 누아르를 향하고 있었다.
초원의 아들인 검은 말.
일각수의 피를 이은 것이 확실한 누아르는 분명 엘프들의 입장에서 한 번 정도는 조사해봐야 할 존재일 것이다.
“전해준 계시는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부적처럼 가슴에 품고 있으면 언젠가는 직관으로 알아차릴 날이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바라디스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괜스레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신녀의 그림을 건드려보았다.
노란 새, 자신, 그리고 그 주위를 불길하게 감싸고 있는 검은색의 색깔들.
분명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는 그림이었으나 정작 그 그림을 전해준 신녀는 그 이상의 의미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었다.
아마도 어젯밤 꾸었던 꿈처럼 희미해진 기억 사이로 흩어졌던 모양이다.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자그마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블라드는 떠나가지만 엘프들은 이곳 데어마르에 남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들의 세상은 낯선 바다와도 같았으니 겨우 찾아낸 데어마르라는 섬에 잠시 동안은 정박해 있을 예정이었다.
“준비되었답니다. 요제프 님.”
“······좋다. 출발하지.”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요제프의 안색이 창백했다.
고질적인 그의 기침병은 온도에 민감한 것이었고 지금 같은 날씨에는 특히 더 조심해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요제프의 허락에 블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귀환행렬을 책임지고 있는 것은 바로 쇼아라의 블라드.
경험 없는 블라드에게는 아직 조금 이르긴 하였으나 요제프는 이번 귀환행렬을 지휘하는 것을 맡겼고 블라드는 지금의 광경으로 그의 믿음에 보답했다.
부대 차렷-!
블라드의 눈짓과 함께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목소리.
그 목소리와 함께 잔뜩 물을 먹은 바예지드의 깃발들이 데어마르의 성벽 앞으로 늘어서기 시작했다.
비록 지치고 상처 입긴 했으나 지금의 이들은 승리자.
그렇기에 엉망인 깃발이라 할지라도 들 자격이 있을 것이다.
“······.”
알리시아는 성벽 아래에 있는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는 블라드의 눈빛이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데어마르의 위기를 구원하기 위해 와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떠나야 하며 보내줘야 할 때.
자신의 입으로 작별을 고해야만 하는 알리시아의 목소리가 조금은 떨리고 있었다.
“저희는 여러분의 피로 세운 지금의 평화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여름에 도착하였으나 가을이 되어서야 떠나는 병사들.
서부와의 전쟁 중 가장 격렬했던 전투를 치르고 만 그들을 위해 알리시아가 힘껏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그녀의 치사(致謝)가 이들에게 있어 자그마한 자부심이라도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데어마르는 언제든지 돌아올 여러분을 환영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외치는 마지막 말은 온전히 한 사람만을 위한 것.
모두를 바라보던 알리시아의 눈동자였으나 지금만큼은 깃발 아래 서 있는 블라드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언제든 나를 향해 돌아와도 좋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
비록 가을비 아래서 패잔병처럼 서 있는 병사들이었으나 그들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미소 하나씩이 맺혀 있었다.
※※※※
“제미나! 제미나!”
도시의 끝자락. 해가 들지 않은 거리.
아직 저녁이 아니었기에 문을 열 준비를 마치지 못한 장미의 미소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저 자식은 하라는 일은 안 한고.”
자그마한 핀 하나를 입에 물고는 한참 머리를 올리고 있던 제미나는 아래서부터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전임 초팔이와 다르게 이번에 새롭게 고용한 녀석은 영 제미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쾅-! 쾅-!
“제미나! 거기 있어?”
예의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숙녀의 방을 가차 없이 두드리는 목소리.
오타르의 동생인 네드는 지금 제미나의 방을 가차 없이 두들기는 중이었다.
“뭐야?”
“······있으면서. 왜.”
그러나 다급했던 방금과는 달리 네드는 이제야 막 문을 연 제미나를 보고는 조금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데 이 난리야. 별거 아니면 가만 안 둬 너.”
단지 사나운 그녀의 눈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직 채 마치지 못한 화장이었으나 주근깨만 가렸어도 피어나는 꽃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화려한 핀들과 함께 틀어 올린 붉은 머리.
그 붉은 색과 이어지는 가느다란 목덜미는 충분히 소년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 이게 아니지!”
한참 제미나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던 네드는 손바닥을 마주치며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기 시작했다.
“지금 교회에서 사제들이 다 성문으로 뛰쳐나가고 있거든!”
“그런데 뭐.”
교회가 뭐 어쨌다고.
수녀원에서의 경험 때문인지 특히나 더 교회에 대해 냉소적이게 된 제미나였다.
“주교님도 나갔다고 하더라고. 그 새로이 부임하신 분 말이야!”
“······주교까지?”
그러나 교회에 좋은 감정이 없다 할지라도 심상치 않은 신호만은 감지해야만 했다.
지금의 제미나는 장미의 미소를 이끄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왜 그런다는데? 그것까지 알아 왔으니까 지금 이 난리를 피우는 거지?”
제미나의 큰 눈망울이 가느다랗게 좁혀지자 네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아무리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지금의 제미나에게는 예전의 부엌데기였던 모습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작아진 마르셀라가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있으면 도착한다고······. 데어마르에 갔던 병사들이 온다고 다들 마중을 나갔다더라고.”
“······뭐?”
그러나 지금 보이는 제미나의 얼굴에는 실로 오랜만에 예전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데어마르에 갔던 병사들이 지금 돌아왔다고.”
네드의 말에서부터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의 흔적이 느껴졌으니까.
“블라드도?”
“아마도?”
순간, 네드의 눈으로 반짝이는 빛들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제미나의 귓가에 매달린 귀걸이 한 쌍이 보내는 빛무리.
그 귀걸이는 기사 블라드가 쇼아라를 떠나기 전 레이디 제미나에게 선물했던 것이었다.
※※※※
“왜 저렇게들 나와 있는 걸까요.”
“교황청의 사제들이 아니니까.”
저 앞에 보이는 쇼아라의 정경을 보며 행렬 곳곳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길었던 파병을 끝내고 돌아왔으니 병사들이 들뜨는 것은 이해하겠으나 지금의 블라드는 이 행렬을 지휘하는 책임자.
그런 블라드였기에 성문 앞을 가득 메운 사제들의 모습에 반가움보다는 경계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북부정교회면 이렇게 나와주는 겁니까?”
“꼭 그렇지는 않겠지.”
데어마르를 떠날 때보다 조금은 더 창백해진 요제프였으나 그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미소 하나가 걸려있었다.
비록 블라드는 자리에 맞게 경계하고 있었으나 요제프는 이들이 어째서 이렇게 나와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수상해 보인다면 앞서가서 확인해봐라. 그것이 네 임무 아니냐.”
“알겠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사제들의 환영에 의심을 품은 블라드는 홀로 쇼아라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추방당했기에 오랫동안 마주하지 못한 나의 고향.
그러나 지금의 블라드는 교회에 밉보인 초라한 추방자가 아닌 바예지드 군을 인솔하는 지휘관의 모습이었다.
-저건 누구지.
-너무 젊어 보이는데.
-블라드다! 쇼아라의 블라드!
성문 앞에 있는 병사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블라드를 보며 웅성이기 시작했다.
그가 들고 있는 깃발이 지금 블라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아니.”
홀로 성벽 앞까지 다다른 블라드.
그러나 잔뜩 경계한 자신과는 다르게 그곳에는 환영한다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어떤 사제가 서 있었다.
“이제야 돌아왔군. 쇼아라의 블라드. 어디 다치지는 않았나.”
이제는 하얀색의 법복이 아닌 붉은 색의 주교복을 입은 사제 안드레아.
자신이 내어준 이름을 맞이하는 그의 얼굴에는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사제님!”
“하하! 키도 더 컸군!”
이제야 안드레아를 알아본 블라드는 서둘러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지친 길을 걸어온 블라드를 안아주는 그의 품은 태어나 처음 맛보았던 하얀 밀빵만큼이나 포근하고 푹신했다.
마주 안은 사제와 소년의 위로 오늘의 황혼이 지고.
닿았으나 넘지 못했던 푸른 달이 다시금 밤하늘로 떠오르고 있었다.
소녀의 눈물과 함께 떨어져 내렸던 소년은 오늘 푸른 달빛과 함께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