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46
끝과 시작 (1)
시간 앞에 고개 숙이지 않는 것은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언젠가는 시들며, 강인하던 검이라도 언젠가는 녹이 슬고 마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것은 하늘 위로 떠 올랐던 태양도 마찬가지.
제국의 수도 브리간테스로 점점 붉어지는 노을빛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점점 기울어지는 해를 따라 휘청이며 이어지던 그림자는 마침내 브리간테스에서도 가장 영화로운 건물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제국의 중심. 황궁(皇宮)에까지.
댕- 대앵- 댕-.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도시에 있던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울려야 할 때가 아님에도 울리기 시작하는 종소리.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던 사람들은 곧 황궁 위로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하는 검정색의 깃발을 볼 수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제국의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던 해가.
마침내 쓰러진 노을의 끝에서부터 새까만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벽지 바꿨나 보네.”
노곤한 목소리와 함께 눈을 뜬 블라드는 멍하니 천장에 박혀 있는 문양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러나 숫자를 세면 셀수록 시야는 흐릿해져만 갈 뿐이었다.
단 하룻밤만의 휴식으로 그동안의 피로를 풀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잘까.”
잘까라고 말했지만 이미 더 잘 생각이 충만했던 블라드는 굼벵이처럼 꿈틀거리며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쇼아라에서 추방된 지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동안 몸 뉠 곳은 있었지만 편하게 뒤척일 곳은 없었던 블라드는 실로 오랜만에 늦장을 피우기로 결심했다.
“좋네.”
진짜 오늘만큼은 코가 삐뚤어지게 자야지.
그동안 쌓인 피로는 너무 끈적였고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따뜻했으니까.
가을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코끝을 맴돌고 있는 차가워진 공기가 블라드의 이불을 꽁꽁 동여매고 있었다.
“야.”
“······.”
“야. 야.”
“······건들지 마라.”
그러나 블라드의 결연한 결심에도 망설임 없이 그를 흔드는 손이 있었다.
자그맣지만 거침없는 손.
조심히 어깨를 흔들고 있던 그 손은 어느새 대담하게 올라가 블라드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내가 머리 건들지 말라고 했지.”
“내가 므리 근들지 마라고 해찌.”
“······야.”
볕이 잘 들지 않는 거리였으나 들춰낸 이불 사이로 보이는 붉은 머리카락은 블라드의 눈가를 밝히기에 충분했다.
“좀만······. 더 자자고. 점심까지만.”
“지금이 점심이야.”
둥글게 휘어진 제미나의 눈이 어느새 창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려진 커튼 사이로 비치는 오후의 햇빛.
언제나 새벽의 어스름한 빛에 깨어났던 블라드에게는 낯설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더 잘 거면 점심이라도 먹고 자. 마르셀라가 너 온다고 새벽같이 재료 준비해놨으니까.”
머리를 헝클이던 제미나의 손이 블라드의 옷깃을 잡고는 천천히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일어서는 상체만큼이나 점점 가까워지는 제미나의 얼굴이 싱그러웠다
“너. 화장했냐.”
“흐.”
콧잔등에 가득했던 주근깨가 보이지 않았기에 물어본 말이었건만 제미나는 그걸 이제야 알았냐는 듯 의기양양하게 웃기 시작했다.
“어때? 봐줄 만하지?”
“이 정도면 범죄야.”
아직 잠에서 덜 깬 탓일 것이다.
어쩌면 방이 어두워서일 수도 있고.
그만큼 지금 눈앞에 있는 제미나는 블라드가 보아왔던 그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빨리 나와. 점심 거의 다 됐다니까.”
“······.”
끼이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닫히는 문.
블라드는 그 틈 사이로 보이는 제미나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건방져졌어.”
블라드가 기대했던 주근깨 가득했던 제미나는 없었다.
비쩍 마른 손으로 걸레를 쥐어짜던 가련한 소녀도.
지금 블라드의 앞에 있는 그녀는 어느새 스스로 일어서버린 장미의 미소 제미나였을 뿐.
“화장 좀 했다고 저렇게까지 변하나.”
제미나가 떠나간 자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향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블라드는 막연히 그 향기를 분 냄새라 생각했지만 정작 제미나가 바른 화장은 옅고도 옅었을 뿐이었다.
※※※※
“잘 잤니. 블라드.”
“네. 마르셀라도 잘 주무셨나요.”
“잠이야 못 잤지. 네 덕분에.”
장난스럽게 건네는 마르셀라의 말에 블라드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녀린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퉁퉁 부은 두 눈.
어제 귀환한 블라드를 껴안고는 펑펑 울어댔던 것은 제미나보다는 오히려 마르셀라였었다.
“나이가 드니까 감정이 잘 안 추슬러져. 나도 이제 은퇴할 때가 됐나 봐.”
“아직도 한창이세요.”
전직 초팔이의 감각이 외치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라고 말해 줄 때라고.
“그래?”
과연 그 말이 정답이었다는 듯 접시 위에 담긴 고깃덩이들이 한가득이었다.
아마 지금 같은 눈치가 알리시아에게 발동되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
블라드는 마르셀라가 내밀어준 음식들을 먹으며 조용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막 귀환했던 어제는 너무 바빴고 혼잡스러웠으며 정신이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지 못했었다.
“마르셀라.”
“응?”
“여기요.”
4층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블라드는 조심스레 마르셀라에게 자그마한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게 뭔데.”
“······그걸로 될지는 모르겠네요.”
그날 푸른 달빛에 사로잡혔던 사람은 오직 블라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날 밤, 가장 큰 것을 잃은 사람은 마르셀라였으니 그녀를 위해서라도 이 정도의 증거는 필요했다.
“이게 뭐니. 반지?”
“고딘 거예요.”
무심히 움직이는 숟가락 너머로 너무나 큰 이름이 들려왔다.
“고딘?”
블라드의 말에 당황했는지 주머니를 여는 마르셀라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무서운 것일 수도.
아직도 장미의 미소 곳곳에 스며들어있는 푸른 달빛은 마르셀라에게 있어서는 악몽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제가 죽이지는 못했는데 어쨌거나 죽긴 했거든요.”
블라드가 건네준 주머니에 들어있었던 것은 반지였다.
정확히 편지를 봉인할 때 쓰는 인장 반지였고 그 반지에는 가이다르의 상징인 독수리의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건 마르셀라 거에요.”
“······그래.”
승자가 아닌 패자였기에 온전한 것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래도 훌륭한 전리품이 될 수 있는 물건이었건만 블라드는 고딘의 반지를 마르셀라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블라드에게서 반지를 받아든 마르셀라는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 사이로 수없이 지나가는 것은 아마 누군가에 대한 기억과 그때의 고통일 것이다.
“에잇!”
“큽!”
그러나 마르셀라는 그 반지를 원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화로 위로 던져진 반지를 보며 블라드는 머금고 있던 물을 뱉어내고 말았다.
“마르셀라?”
“뭘로 만든 거야. 반지인데도 잘 타네.”
화로 위에서는 새빨갛게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고딘의 반지.
그러나 당황하는 블라드와는 달리 마르셀라의 얼굴에는 어느새 언제나와 같은 미소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가끔 남자들을 보면 여자들보다 더 감상적이란 말이야.”
“네?”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는 것은 복수가 아닌 시간일 것이다.
마르셀라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고딘의 반지를 화로 위로 던져버렸다.
이 반지는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닌 자꾸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였을 뿐이니까.
“나 생각해서 가져온 게 대견하긴 한데 이제 나한테는 이런 거 필요 없어.”
블라드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기에 마르셀라는 블라드를 위해 과거의 반지를 던져버리고는 오늘의 요리를 꺼내놓을 뿐이었다.
“너도 이제 필요 없지?”
“······네.”
포크를 집어 든 블라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마르셀라를 보며 희미하게 웃기 시작했다.
역시 쇼아라의 장미는 아직 시들지 않았고 그녀의 삶에서는 배울만한 것들이 남아있었다.
“그러게요. 이제는 필요 없겠어요.”
타들어 가는 반지가 데우는 솥 위에는 오랜만에 보는 마르셀라의 요리가 담겨있었다.
으깬 감자와 구운 소시지, 그리고 소의 피로 만든 블랙 푸딩까지.
모두가 호르헤가 좋아했던 메뉴들이었다.
※※※※
“점심은 잘 먹었어?”
“같이 와서 먹지 그랬어.”
밖으로 나서려 1층으로 내려온 블라드의 옆으로 하벤이 달라붙어 왔다.
머리에 쓰고 있는 선장모는 멋들어지게 바뀌었지만 짚고 있는 지팡이만큼은 여전히 허접한 채로.
“모자도 새로 산 김에 지팡이도 바꾸지 그랬어.”
“이거? 이걸 내가 왜 바꿔.”
하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지팡이를 집어 들고는 과장되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하도 오래 써서인지 반딱거리는 지팡이에는 광까지 비쳐 보일 정도였다.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덕 많이 봤거든. 네가 만들어 준 거라고 하니까 거친 바다 놈들도 말을 잘 듣더라.”
“그래?”
북부의 신성. 쇼아라의 블라드.
오랫동안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바예지드의 젊은 기사 중 가장 빛나는 존재이며 눈엣가시처럼 도발하던 서부를 꿰뚫어버린 남자.
동향에 대한 자부심과 다음 세대에 대한 안심까지도 모두 책임지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의 블라드였다.
“그리고 요즘에는 네 이름 뒤에 엘프라는 단어도 붙고 있더라. 진짜 엘프들이랑도 아는 사이야?”
“비켜봐. 나 교회 가야 해.”
하벤의 말이 괜히 쑥스러웠던 블라드는 서둘러 장미의 미소를 나서기 시작했다.
늦장을 부린 탓인지 쇼아라의 뒷골목 사이로 노을이 감돌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쇼아라의 노을.
지는 해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하루의 끝이겠지만 뒷골목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떠오르는 하루의 해와도 같은 것이었다.
“네가 언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그래.”
“오늘부터.”
그동안 교회에 가지 않은 것은 자의에 의한 판단은 아니었다.
받아들여 주지 않았기에 가지 못한 것이었지.
신은 영광된 존재였으나 그에게 향하는 길은 뒷골목 사람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먼 길이었다.
“······쟤는 뭐 저리 바뻐.”
한참 밖으로 나서려던 블라드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장미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크게 변한 것은 없었으나 무언가 달라진 것만 같은 소년의 둥지.
그 둥지 사이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제미나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 애들은 빨리 크지?”
“쟤 나랑 동갑이야.”
“그러니까 말이야.”
멀리서 바라본 제미나의 모습은 꾀죄죄했던 예전의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낯설기도 했지만, 적잖이 안심되는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배는 괜찮아?”
“작아서 그런지 별 탈이 없네.”
“아니, 제미나 말고.”
“그래. 제미나 말이야.”
서로가 다른 제미나를 말하며 낄낄대기 시작하는 블라드와 하벤.
이제야 조금은 제 모습은 같아 보이는 블라드를 보며 하벤은 선장모를 바로 고쳐 썼다.
“그나저나 교회 가는 거면 나도 좀 데려가 주지.”
“네가 언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그래.”
“사실 네가 안 데려다줘도 상관은 없어.”
“응?”
블라드는 하벤의 고갯짓을 따라 뒷골목 중에서도 작고 초라한 구석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해가 들지 않는 거리.
어두운 밤 속에서부터 조심스레 빛을 밝히는 것들이 있었다.
“저번 주교는 소아성애를 금지했었는데 이번 주교님은 뭘 금지한 줄 알아?”
“······뭔데?”
서서히 지는 땅거미 사이로 천천히 뒷골목에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부터 조심스레 기어 나온 것들이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별 금지.”
어린아이들이었다.
여태껏 빛을 피해 숨어 있던 뒷골목의 아이들이 조금씩 블라드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쟤네 지금 다 교회 가는 거야. 이제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거든.”
교회로 향하던 블라드는 어느새 자신의 뒤로 죽 늘어선 아이들의 행렬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모두가 굶주리고 지쳐있었지만 그래도 교회로 향하는 아이들의 발걸음만큼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여기서 언제 또 쇼아라의 블라드 같은 놈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러시잖아.”
“······.”
가능성 있는 어린 것들은 어디서라도 존재할 수 있다.
쇼아라의 블라드가 그것을 증명했으므로.
그렇기에 가장 가까이서 그 광경을 지켜본 사제 안드레아는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교회 간다며. 안 가?”
“······가야지.”
해가 진 뒷골목 사이사이로 새로운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뒷골목에 번져가는 어둠 사이로 자그마한 별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별들이 향하는 곳은 쇼아라의 교회.
아마 오늘 이 아이들은 겨울날의 블라드가 그랬던 것처럼 신실한 사제에게서 따뜻한 저녁 한 끼를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