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47
끝과 시작 (2)
밤이 되자 골목 곳곳에서 희미한 등불이 피어올랐다.
해가 져야만 빛을 밝히는 쇼아라의 뒷골목.
그러나 요즘만큼은 낮이나 밤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불야성을 이루는 중이었다.
-여기 술 한 잔 더!
-소시지 한 번 기가 막히는구먼.
뒷골목 곳곳에서 요란한 사내들의 함성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으나 쇼아라로 복귀한 이들은 승리자였고 각자의 주머니에는 짤랑거리는 금화 몇 개씩은 담겨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다들 돈 많이 벌어왔나 봐?”
“이기긴 했으니까.”
한창 바쁜 시간이었으나 제미나는 블라드와 함께 4층에서 로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술꾼들 사이에서 바삐 움직이는 종업원들이 보였으나 이미 진이 빠져버린 제미나에게는 잠깐의 휴식이라도 필요했다.
“너도 돈 많이 벌어왔어?”
“기사는 연말에 한 번에 받아. 성과급이라.”
저 아래 있는 로비에서 몇몇 병사들이 난간에 기대어 있는 블라드를 알아보고는 술잔을 높게 치켜들기 시작했다.
뒷골목의 많은 가게 중 특히나 장미의 미소가 붐비는 이유에는 분명 블라드라는 존재가 한몫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리 표정이 썩었어. 교회 다녀온 다음부터 영 그러네?”
“마르셀라는 어디 있어? 그러고 보니까 안 보이네?”
자신을 유심히 살피는 제미나를 피해 블라드는 서둘러 화제를 돌리기 시작했다.
평생을 걸쳐 가장 오랫동안 같이 지냈던 소녀 앞에서는 도무지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마르셀라는 요즘 가게에 잘 안 나와.”
다행히 제미나의 시선을 돌리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또 다른 고민이었다.
“왜? 어디 아프기라도 해?”
“아픈 건 아닌데······.”
내 말 좀 들어보라는 듯 블라드 옆으로 다가온 제미나는 까치발을 들고는 난간에 양팔을 얹어놓았다.
“이제 은퇴하고 싶대. 그럴 나이도 됐다 그러고.”
“······아아. 그래.”
제미나의 고민을 들은 블라드는 손에 있던 술잔을 기울이며 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아직 은퇴할만한 나이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블라드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그동안 그녀가 겪은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퇴는 모르겠으나 분명 쉴 때가 되긴 되었다.
“그럼 여기는 어쩌고?”
“······.”
블라드는 진지한 어조로 물었으나 정작 기대했던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질문에 답해야 하는 제미나는 그저 난간에 머리를 올려놓은 채 가만히 블라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왜 사람이 물어보는데 대답을······.”
“나는 어때?”
북적이는 가게, 시끄럽게 떠드는 취객들.
그러나 블라드의 귀에 와닿는 것은 고요한 그녀의 질문일 뿐.
“나는 어때 보여? 할 수 있을 것 같아?”
블라드를 올려다보는 제미나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간절했다.
많은 것을 빼먹은 채 물어보는 제미나였으나 조금씩 흔들리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블라드는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말해 줄 때가 되었다는 것을.
“······할 수 있지 그럼.”
진창 위에 서서 하염없이 검을 바라보던 소년의 옆에는 언제나 붉은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평생 모으지도 못할 5골드나 되는 검이었지만 그까짓 검 따위 자신이 사주겠다고 말해주었던 소녀였다.
“마르셀라에 비해 이것저것 작기는 하지만 너 정도면 충분하지.”“······야. 미쳤냐.”
길길이 날뛰려 준비하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는 실실 웃기 시작했다.
역시 고민하는 제미나보다는 움직이는 제미나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받았으니 돌려줘야 한다.
나는 아직 장식 없는 검의 대가를 그녀에게 지불하지 못했으므로.
그날 소녀에게 받았던 용기와 위안을 블라드는 이제부터 돌려주기로 했다.
※※※※
어젯밤, 밤의 물결을 따라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다다른 블라드와 하벤은 곧 마중 나온 사제의 안내를 따라 안드레아가 있는 주교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야. 이거 얼마나 닦았는지 바닥이 얼굴까지 비쳐보이네.”
“제발 촌티 나게 두리번거리지 마. 하벤.”
정작 하벤에게 조용히 하라 말하고 있었지만, 교회를 걷는 블라드의 발걸음 또한 긴장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곳에 왔던 경험은 살벌했던 재판을 위해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으니 좋은 기억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기사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응?”
그렇게 이름 모를 사제의 안내를 따 안쪽까지 다다르자 그곳에서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낯익은 소년의 얼굴이었다.
“아아. 부제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별고 없으셨나요.”
나이는 아마 샤를과 비슷해 보이는 소년.
아무리 높게 보아도 13살은 넘지 않았을 것 같은 그 소년은 언제나 안드레아를 따라다녔었던 어린 부제였다.
“반갑습니다. 부제님이 알려주신 기도문은 아직도 아침저녁으로 외우고 있습니다.”
“오. 그 기도문은 그럴 때 외우는 게 아닌데요.”
바르나의 교회에서 처음 기도를 하는 블라드를 도왔던 것은 지금의 부제였다.
처음 신 앞에 무릎 꿇었던 그때를 블라드는 잊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기도문이라는 건 여러 개를 외워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진심만 담겨 있다면 신께서는 알아주실 테니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제님.”
처음 보았을 때보다 조금은 성숙해진 부제는 어느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블라드의 실책을 감싸주었다.
뒤에서 비웃고 있는 하벤의 웃음소리가 거슬렸지만 블라드는 오랜만에 마주한 인연을 보며 참기로 했다.
“주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오. 주교님이.”
주교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하벤이 재빨리 선장모를 벗고는 손질하기 시작했다.
뒷골목 출신 주제에 높디높은 도시의 주교를 만난다니.
아마 하벤에게 있어서는 배를 처음 가졌을 때만큼이나 감격스러운 순간일 것이다.
“어때. 뭐 묻은 것 없지.”
“······차라리 뭐라도 묻었으면 닦아내기라도 할 텐데 말이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재빨리 서로의 복장을 확인한 둘은 부제의 인도에 따라 주교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똑똑-
“주교님. 블라드 경이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마주한 주교실을 보며 블라드와 하벤은 동시에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낯선 건물에서 길을 확인하는 것은 뒷골목 출신들의 버릇 같은 것.
그러나 어린 부제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고개를 까닥이는 앵무새 같다 생각하며 웃을 뿐이었다.
“들어오시게! 기사 블라드!”
“들어가시죠.”
자신을 힘껏 환영하는 안드레아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손잡이를 돌렸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열린 그곳에서는 성문에서와 마찬가지로 블라드를 향해 손짓하는 안드레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저녁은 들었는가.”
“먹었지만 또 먹을 수 있습니다.”
“하하! 하긴 한창때이니.”
블라드를 바라보는 안드레아의 시선이 넉넉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주교 안드레아는 블라드를 보증하고 있었으나 어느새 자라버린 청년은 이제는 도리어 안드레아의 명예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되어 있었으니까.
“여기는?”
“하벤입니다. 자그마한 배를 몰고 있습니다. 주교님.”
블라드에게 배워서인지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인사였으나 하벤을 바라보는 안드레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절뚝거리는 다리 옆으로 보이는 것은 분명 지팡이였으나 하벤이라는 사내는 자신을 선장이라 표현하고 있었으니까.
“파도와도 같은 고난에도 굴하지 않으셨군. 대단하시네.”
“아닙니다. 주교님.”
장애를 가졌음에도 바다를 누비는 뒷골목의 청년을 보며 안드레아의 얼굴에는 또다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역시 쇼아라의 뒷골목을 후원해보겠다는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 그래. 다들 앉지.”
주교답지 않게 직접 손님들을 테이블로 안내한 안드레아는 익숙한 손길로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린 부제 또한 그를 돕는 움직임이 능숙해 보였다.
“시끄럽군요.”
“아직 급식소가 다 만들어지지 않아서 말이야. 급한대로 교회 건물을 쓰고 있다네.”
한 모금의 차와 함께 긴장을 넘기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높은 것이 아무래도 자신들과 함께 교회에 도착한 뒷골목의 아이들인 듯싶었다.
“안 그래도 제가 이 일에 관심이 있어 자그마한 기부를 하고 싶은데······.”
“오. 오. 안 그래도 되네. 요즘은 기부금이 꽤 많이 들어오거든.”
블라드의 주머니 사정을 짐작하고 있던 안드레아는 손을 내저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블라드에게 담요까지 받았다는 아이들의 말이 있었으니 아마 이미 이래저래 돈을 썼을 것이다.
“새로운 주교가 왔으니 다들 인사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사실 이런 게 싫어서 주교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일세.”
누구에게는 귀중한 목적이었으나 신실한 사제에게는 그저 귀찮은 짐일 뿐.
도시의 유력자들이 보내는 기부금을 진심으로 귀찮다고 말하는 안드레아를 보며 하벤은 들고 왔던 금화 주머니를 재빨리 속으로 감췄다.
“혹시 저를 따로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지.”
블라드의 성정을 잘 알고 있던 안드레아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자신이 보아왔던 블라드는 돌려 말하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던 사내였다.
“북부정교회······는 사실 산 로지노에서 시작한 것이지. 자네도 그것은 알고 있지?”
“그렇습니다.”
북부정교회는 북부 교구 산 로지노에서 비롯된 종파였다.
북부에 대한 차별은 영역을 가리지 않았으며 그것은 교황청과 산 로지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도 쥐꼬리만 하긴 했지만 그래도 교황청에서 보내주는 지원들이 있었단 말이지. 그런데 이제는.”
“다 끊겼군요.”
블라드는 안드레아가 자신을 이곳에 부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말처럼 단순히 돈이 모자라는 것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북부정교회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바로 인재였다.
“부탁을 하고 싶었네만 의외로 기사 중에서는 신실한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네. 당장 이곳 쇼아라에서도 자네 만한 사람이 없기도 하고.”
신실하다는 말과 함께 블라드의 가슴팍을 가리킨 안드레아.
그곳에는 산 로지노가 인정한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요제프님에게도 허락은 받아두었네. 잠시동안 내가 자네를 써도 되겠냐고 말이지.”
“얼마든지 가져다 쓰십시오. 쇼아라의 블라드는 주교님에게서부터 비롯된 것이니까요.”
안드레아는 명망 높은 사제였으나 그가 가진 능력의 특성상, 이단심문관이나 성기사같은 특수한 직위에 사람들에 대해서는 영 인연이 없었다.
다시 말해 무력을 사용하는 일에서는 바예지드의 협조를 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네라면 그렇게 말해 줄줄 알았지.”
블라드의 시원스러운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안드레아가 웃음을 터트리자 아무것도 모르는 하벤 또한 같이 따라 웃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분위기를 따라가려 하는 그의 노력이 가상했다.
“그렇다면 정확히 어떤 일을.”
“일단 쇼아라 안에서도 부탁할 일이 있기도 하지만.”
안드레아는 이미 블라드의 사용처를 정해놓았다는 듯 곧장 자신의 어린 부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을 좀 도와주었으면 해서 말이지.”
“부제님을요?”
전혀 예상치 못한 안드레아의 말에 블라드는 천천히 다기를 정리하고 있는 어린 부제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부제에서 정식 사제가 되어야 하는 시기라서 말일세. 그에 대한 시험을 치러야만 하거든.”
오랫동안 함께 해왔던 만큼 안드레아는 자신의 어린 부제를 아끼고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데려와 키우다시피 하였으니 사실상 자식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시험입니까?”
“그럴걸세. 시험이라는 것이 앉아서 종이에 끄적거리는 그런 시험이 아니거든.”
교회에서 말하는 시험이라는 것은 곧 시련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었다.
안드레아가 평생을 몬스터 퇴치에 힘써왔던 것처럼 진실된 사제들은 신의 뜻을 설파하기 위해 자신만의 시련을 찾아 떠나고는 했었다.
“이 아이를 우트만 남작령으로 보낼 생각일세. 비록 교황청이 그곳에 있던 사특한 존재들을 해치웠다고는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어둠이 있을 수도 있으니.”
“······우트만 남작령.”
우트만 남작령과 사특한 존재.
안드레아의 이야기를 들은 블라드는 가만히 찻잔을 내려놓고는 어린 부제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능력이 있으신 분이었죠.”
“그렇지. 그때 자네도 들었지 않았는가.”
안드레아의 말처럼 블라드는 분명 들었었다.
한치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울려 퍼지던 어린 부제의 찬송가를.
목이 쉬어라 외쳤던 그때의 노래가 아니었다면 아마 요제프는 검은 눈물을 흘리던 여인에게 살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허허. 얼굴 좀 피시게. 지금 당장 가달라고 하는 것도 아닌 데다 이제는 그렇게 위험한 곳도 아닐 테니.”
“네?”
안드레아의 느슨한 핀잔에 블라드는 재빨리 옆에 있던 거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잔뜩 찌푸려져 있는 눈썹과 굳은 표정.
방금까지만 해도 어린 부제를 향해 있었을 그 표정은 분명 신녀의 그림에서 보았던 표정과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