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48
끝과 시작 (3)
창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을 맞으며 서로를 마주하는 두 남자가 있었다.
넓고도 화려한 방이었으나 둘의 사이에는 침묵만이 가득했고,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로지 달칵거리는 찻잔 소리뿐.
그런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저물어가는 노을보다 더 오래된 것만 같은 노인이었다.
“······5살짜리 황제라니, 그것도 어디에 있었는지도 몰랐던 방계의 아이를.”
찻잔을 든 그의 늙은 손가락이 세월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주하는 그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날카롭고 매서운 것.
“이 계승은 절대 인정할 수 없소이다. 사르누스 공작.”
노인의 얼굴이 깊은 주름들을 구기며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감히 세월의 흔적만으로는 지울 수 없는 분노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 아이가 남아있는 혈족 중 가장 프라우센에 가까운 것을 어찌하겠나.”
“그 아이가 가장 가까워지도록 만든 것이겠지.”
흘러가는 시간은 노인에게 많은 것을 앗아갔으나 그만큼 날카로운 통찰력을 남겨주고 갔다.
공정공(宮廷公) 아르망.
공작의 작위 대신 위대한 성(姓)을 포기한 그는 지금 눈앞에 있는 늙은 용이 이 모든 비극의 시발점임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긴, 400년이라는 세월을 가만히 참고 있었으니 오죽 답답하셨겠소. 사르누스 공작.”
“······.”
400년이라는 세월 동안 남아있던 용들로부터 제국을 지켜왔던 용살기사단의 주인.
그 긴 시간을 넘어 이제야 속내를 드러낸 푸른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 들어갔다.
점점 저물어가는 노을빛이 사르누스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건국왕 프라우센과의 맹약에 따라 지금도 제국을 지키는 데 여념이 없다. 이 아이를 지지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제국을 유지하기 위함이지.”
“그 아이는 황제의 자격에 오를 자격이 없소.”
“자격이 없다 해도 어쩔 텐가. 프라우센의 대를 끊어버리기라도 할 건가?”
“······.”
아르망은 사르누스의 말에 감히 답할 말이 없었다.
프라우센의 대를 끊는다면 오히려 좋아할 것은 사르누스일 것이다.
400년 동안이나 이어졌던 그의 충성은 어디까지나 건국왕 프라우센과의 맹약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었으니까.
늙은 용과의 맹약과 더불어 그의 모든 유지를 받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황제의 직위에 오를 후계자뿐이었다.
“그럴 수는 없지.”
끝을 직감한 늙은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실상 핏줄은 끊기고 말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의지뿐.
“······제국의 시작은 단 한 자루의 검 끝에서부터였소.”
거대했던 용의 발톱 아래에서도 별처럼 찬란히 떠오른 남자가 있었다.
키하노 프라우센.
사람들은 모든 종족의 명운을 담아 휘둘렀던 그를 가리켜 검들의 주인, 소드마스터라 불렀다.
“소드마스터의 의지라면. 그리고 그가 다뤘던 검의 선택이라면.”
프라우센이라는 성은 황실이 잇고 있었지만 키하노라는 이름을 잇는 것은 한 자루의 검일 것이다.
그 남자가 든 검은 가장 완벽했던 용을 갈랐고 시대의 끝을 그었으니까.
“그것이라면 당신이 내세우는 저 빈약한 핏줄보다야 더 나을 테지.”
“······아르망. 이러지 마시게.”
희미해진 전설을 쫓는 늙은이를 보며 사르누스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끝을 알리지 않았기에 전설이 되어버린 건국왕의 이야기는 이제는 어린아이들이나 믿는 동화와도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으니까.
“수백 년을 찾았어도 찾지 못한 검일 진데······”
“아무리 오래되었다 할 지라도 분명 어딘가에는 존재하겠지.”
소드마스터의 검을 말하는 아르망의 목소리에는 분명 기이한 확신 같은 것이 깃들어있었다.
“지금 내 눈앞에 용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처럼 말이외다.”
“······.”
이제는 소식이 끊겨버린 기사가 보낸 전보가 있었다.
비밀스러운 암호들로 적힌 그 짧은 전보에는 분명 적혀있었다.
아우슈린. 소드마스터의 검.
뽑히다.
그것이 전 헌병 대장 오귀스트가 보내온 마지막 전보였었다.
※※※※
뒷골목 어둠 끝에서 태어난 소년은 저물어가는 해를 좋아했다.
골목 너머 큰 길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루의 끝이었지만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시작을 알리는 해였으니까.
블라드가 밤하늘의 별을 동경했던 것은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였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랫소리가 좋지?”
“······그렇네요.”
창밖을 보던 블라드는 안드레아의 말과 함께 가만히 눈을 감았다.
침대에 누워있는 케이드의 숨소리.
그리고 피와 고름들을 씻어내는 찰박거리는 물소리.
그 소리 사이에 섞여 들어오는 어린 부제의 노랫소리가 저물어가는 황혼과 함께 블라드의 귓가로 다가오고 있었다.
“과연 요제프 님의 예측대로 조금만 늦었어도 후유증이 생길 뻔했군. 이 친구가 활을 다룬다고 했던가?”
“네.”
안드레아는 아마 자신이 조금만 늦었어도 케이드가 기사로서 활동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말했다.
가이다르와의 전쟁은 데어마르뿐만 아니라 요제프의 기사들에게도 많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고, 지금 누워있는 케이드가 바로 그 증거였다.
“감사합니다. 주교님.”
“원래부터 해왔던 일이니 고마워할 건 없네. 본래 세속의 일은 관여치 않는 것이 그동안의 관행이긴 했지만······.”
안드레아의 착잡한 눈빛이 창밖에 걸려있는 검은색 조기(弔旗)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의 죽음을 알리는 깃발들.
그 깃발들이 불러올 수많은 죽음을 직감했기에 신실한 사제는 이제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주교직 같은 건 맡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이제는 정치의 영역까지 신경 써야만 하는 안드레아는 자그마한 한숨을 내쉰 채 침대 옆에 있던 의자에 철퍼덕 앉아버렸다.
두 사람이 대화를 멈추자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있었다.
검은 눈물을 흘리는 여인을 달랬던 소리. 찬송가였다.
“······본래 교황청과 틀어지지만 않았어도 저 녀석을 트라마슈 성가대에 보낼 예정이었네. 신의 목소리라던 그녀의 흔적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지만 영 안타깝게 되었지.”
“그런가요.”
딱히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블라드는 안드레아의 안타까움에 대해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어느 분야에서나 자신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어린 존재들은 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어린 부제는 그 세계를 펼칠 수 있게 도와줄 적확한 스승이 없는 상태였다.
안드레아는 분명 훌륭한 사제였으나 어린 부제와 같은 개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래도 훌륭하네요. 노래를 통해 사람을 치유한다는 소리는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허허. 이제 나의 위안은 자네와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저 녀석뿐이지.”
능력의 발현은 개인의 개성이겠으나 노래 속에 치유의 성질을 담은 것은 분명 안드레아의 지도 덕분일 것이다.
어린아이를 이끌어 준 자가 있었기에 지금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일 테다.
“저라는 존재도 주교님께 위안이 되나요?”
“······그럼 물론이지.”
안드레아는 왜인지 모르게 침울해져 있는 블라드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저물어가는 황혼이 블라드의 얼굴을 짙게 감싸고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는 분명 나의 위안이자 자랑이지. 분명 자네를 가르쳤던 모든 기사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세.”
“그런가요?”
노을빛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던 블라드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비록 잠시 멈춰서 뒤돌아봤던 길에 확신하지 못할지라도, 앞서 있던 자들이 고개를 끄덕여준다면 어두운 밤을 걷는 것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당연하지.”
어린 부제의 찬송가와 함께 짙게 깔리는 밤하늘.
이제 자신의 이름이 누군가의 자부심이 되었다는 말에 밤하늘에 물든 블라드의 웃음이 밝게 빛났다.
목소리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밤 아래 어딘가.
하늘 위에 떠있는 별빛들조차 구름을 뚫지 못하는 밤, 아무도 모르는 숲길을 달리는 무리가 있었다.
분명 말을 몰고, 마차를 타고 움직이는 행렬이었으나 기이하게도 그들의 주위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기입니다.”
“······.”
빛 한점 없었기에 보이는 것은 새까만 어둠이었으나 마차에서 내린 여인은 그보다 더 어두운 베일을 쓰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에서부터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싶어 하는 듯이.
“명하신 대로 정령들의 핵(核)을 찾아다닌 도중 발견한 것입니다.”
갑옷을 입은 기사가 그녀의 손위로 빛나는 구슬 하나를 올려놓고는 눈앞에 있는 나무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아주 잠시 구름이 지나가자 그사이를 비집고 나온 달빛이 기사를 비추었다.
분명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목 위에는 달려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안내하세요.”
“네.”
기괴한 무리의 모습과는 다르게 여인의 목소리는 한 마리의 새와 같았다.
당장이라도 베일을 벗겨 얼굴을 확인하고 싶을 정도의 영롱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내린 명에 따라 숲속으로 진입한 기사들은 곧 여태껏 빽빽하게 들어차 있던 나무숲과는 달리 넓게 펼쳐져 있는 풀숲을 발견할 수 있었다.
“······.”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썩어버린 나무 한 그루.
커다란 동체를 눕힌 채 쓰러져버린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남긴 시체와도 같아 보였다.
“안쪽입니다.”
목 없는 기사의 인도에 따라 나무 밑동을 향해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텅 비어버린 나무의 안쪽이었다.
워낙 거대했기에 마치 거대한 공터 같아 보이는 그 안에는 짙은 구름 속에서도 비치는 한 줄기 별빛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죽었군요.”
비록 구름은 짙었으나 바늘이라도 찔러 낸 듯 새어 들어오고 있는 별빛 아래에는 이름 모를 남자의 시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쳤다는 듯 자그마한 바위 옆에 기대어 있는 남자의 시체.
그 시체를 확인한 여자는 흥미가 돋는다는 듯 쓰고 있던 검은 베일을 벗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천천히. 두둥실.
땅에 발을 딛지 않은 채로.
“죽은 지는 오래되었는데······.”
가까이서 살펴보니 이미 죽어 있는 나무의 뿌리들이 남자의 시체를 떠받들 듯 받쳐주고 있었다.
마치 관이라도 만들어준 것만 같은 그 모양새에 여인은 지금 누워있는 시체가 범상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시체는 썩지 않았고.”
시체는 썩지 않았으나 쌓여있는 먼지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려주듯 두꺼웠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건드리기만 해도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차가운 여인의 손끝에서부터 점점 흩어져가는 옷에서 보이는 것은 이제는 쓰지 않는 아주 오래된 황실의 문장.
“그리고 들고 있는 검은······.”
신비한 모습의 시체였으나 정작 들고 있는 검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시체가 쥐고 있는 검보다도 그의 손끝이 담고 있는 강렬한 흔적을 보며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고 말았다.
“용의 피······?”
시체의 손끝을 통해 사내의 역사를 확인한 여인은 뛰지 않는 심장과는 달리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마치 용의 심장이라도 쥐어 터트린듯한 그의 손끝에는 도저히 그냥은 지나칠 수 없는 강렬한 용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이 사람은······. 아니,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길래······.”
아무도 찾지 않는 제국의 끝, 울창한 숲속.
정령이 머물고 있던 거대한 나무가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시체 한 구가 있었다.
마치 지친 듯 쓰러져버린 그 시체의 손끝에는 분명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강한 용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 세상 모든 용을 죽였어도 갖지 못할 진하디진한 흔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