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50
뿌리는 대로 거두리라 (2)
마치 땅에서 솟아오른 것만 같은 거대한 협곡이 있었다.
송곳처럼 날카롭게 솟은 협곡의 끝은 하늘을 찌를 듯 사나웠으며 급격하게 기울어져 있는 모양새는 지금이라도 황무지를 향해 덮쳐들 것만 같아 보였다.
“여기까지로군.”
메마른 흙먼지가 떠도는 황무지.
페테르는 입을 가린 천을 내리고는 가만히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협곡을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두 눈 사이로 멀리 보이는 커다란 성문이 하나 있었다.
“저게 말로만 듣던 올랑바르 관문이군요. 아버지.”
“그래.”
조용히 옆으로 다가온 아들의 말에 페테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트거가 말했듯 좁다란 협곡을 가로막듯 서 있는 저 성문은 서부가 자랑하는 문턱 중 하나인 올랑바르 관문이었다.
교류가 별로 없던 북부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천혜의 요새는 협곡의 안쪽에 자리 잡고 있어 서부로 향하는 길목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과연 서부의 성벽이라더니 듣던 대로 쉽게 뚫을 수 없어 보입니다.”
루트거는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며 저 앞에 있는 올랑바르 관문을 바라보았다.
뱀이 지나간 것처럼 좁고 구불거리는 협곡의 사이는 아주 오래된 옛날에는 강이 지나가던 자리라고 했었다.
아마 그때였다면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은 메마른 황무지가 아닌 거대한 강줄기 중 하나였을 것이다.
“진군은······. 여기서 멈추도록 하지.”
페테르가 명을 내리자 협곡의 입구까지 다다른 수천의 병사들이 정연히 멈춰 섰다.
정확히 저 멀리 관문 위에서 꾸물거리는 병사들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점이었다.
“여기라면 충분하겠군.”
명령을 마친 페테르는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자신들이 들어와 있는 협곡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저 앞에 자리 잡은 관문의 위치만큼은 못했지만, 이곳 또한 좁고 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설픈 요새라도 일단 짓기라도 한다면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지형이었다.
“연합군은?”
“이틀거리 뒤에서 내려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백작님.”
“좋다.”
조언자 라그무스의 보고를 들은 페테르는 올랑바르 관문을 바라보았다.
과연 듣던 대로 어떤 침입도 불허할 것만 같은 서부의 성문.
“······뚜껑을 덮기만 하면 이번 전쟁은 끝이로군.”
그러나 좁고 깊은 길목은 들어가려는 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오려는 자 또한 그사이를 꿰뚫고 나와야 했으니 자연이 만들어 준 불이익은 모두에게 동등할 것이다.
“연합군이 도착할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한다.”
“알겠습니다.”
페테르의 명에 수천의 바예지드 군이 협곡의 입구 안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 앞에 있는 서부의 군세들은 그 장면을 바라보기만 할 뿐 섣불리 나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전쟁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페테르의 나지막한 말에 주위에 있던 간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은 가이다르였으나 끝은 바예지드가 낸다.
서부의 관문인 올랑바르 협곡을 봉쇄함으로써.
지금도 뒤에서 내려오고 있을 북부연합군은 강철공의 지시에 따라 협곡 입구에 요새를 설치하기 위해 오는 자들이었다.
이제부터 새롭게 지어질 요새는 서부를 틀어막음과 동시에 중부를 노리는 북부연합군의 최남단 전초기지가 될 예정이었다.
※※※※
햇볕이 비치는 오후의 쇼아라.
창을 넘어 들어오는 빛이 따스했지만 정작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고트는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다.
“······그래. 고트. 쇼아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햇빛을 등져서일까, 아니면 못 본새 눈그늘이 더 짙어진 탓일까.
고트를 바라보고 있는 요제프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감, 감사합니다.”
팽- 팽-
그러나 고트는 요제프의 어두운 얼굴이나 자야르가 보내는 살벌한 눈빛보다도 더 감당하기 힘든 것이 있었다.
“매듭이 이게 아닌가?”
“······.”
옆에서부터 들려오는 블라드의 밧줄 소리.
종자의 잘못은 곧 기사의 잘못이었고 그로 인해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오고만 블라드는 지금 옆에서 조용히 매듭을 짓는 중이었다.
성인 남성 하나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것 같은 굵은 밧줄이 블라드의 손끝에서 점점 불길한 매듭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치 교수대에서나 쓸 법한 그런······.
“그래.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잠시 밧줄에 정신이 팔려 있던 고트는 애써 정신을 다잡으며 요제프의 말에 집중하기로 했다.
비록 유명무실하기는 했지만, 자신은 백작가의 자제를 모욕한 사람이었고 그에 대한 처분은 앞에 있는 요제프가 내리는 것이었으니까.
“중부에서부터 올라왔다고 들었다. 그곳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
“넵! 알겠습니다!”
요제프의 눈빛이 고트의 행색을 훑기 시작했다.
홀쭉 들어간 볼과 여기저기 찢어지고 더러워진 옷차림.
슬쩍 보기만 해도 그동안의 여정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는 몇 달 전, 도시 마르시나에서 블라드 경과 헤어졌었습니다······.”
기억의 시작은 고트의 고향에서부터.
흙멧돼지 콜린과의 전투 이후로 다급하게 피난을 떠났던 고트는 결국 가족을 외면하지 못했기에 블라드와 헤어지고 말았었다.
“마르시나라면 나름대로 기반이 갖춰진 도시일 텐데.”
“그렇습니다. 분명 그러했는데.”
요제프의 말대로 도시 마르시나는 나름 괜찮은 곳이었다.
비록 전쟁을 앞두고 있었으나 쉽게 점령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였고 그렇기에 블라드에게서 받은 돈으로 가족의 안전만 확보한다면 다시 쇼아라로 떠날 생각이었던 고트였다.
“지금 중부는 난리도 아닙니다. 마치 지금을 기다렸다는 듯 곳곳에서 전쟁이며 도적 떼의 약탈이며······.”
그러나 고트는 결국 가족들을 내려놓을 안전한 땅을 찾지 못했다.
마르시나가 함락당하기 직전, 겨우 도시를 빠져나온 고트와 가족들은 근처의 여러 도시를 떠돌아다녔지만, 그들이 마주한 것이라고는 곳곳에서 번지기 시작한 전쟁의 겁화(劫火)뿐이었다.
“그렇게나 심각한가?”
“말도 마십시오. 불이 나지 않은 도시가 귀할 정도로 중부는 지금 곳곳에서 영지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트의 표정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북부의 도시인 쇼아라까지 늙으신 어머니를 이끌고 왔겠는가.
깊이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고트가 허튼짓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요제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군.”
비록 까마귀가 보내오는 전보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은 바예지드의 주인인 아버지의 것이었고 요제프는 그저 단편적인 정보들밖에 얻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경험자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으니, 요제프는 자신의 예상보다 중부의 상황이 훨씬 심각함을 인지할 수 있었다.
“잠깐 쉬었다 이따 저녁에 다시 이곳으로 오도록. 자네가 걸어온 길을 지도에 상세히 표시해 봐야겠다.”
“알겠습니다. 요제프 님!”
고트의 말대로라면 황제의 죽음 이전부터 삐걱거리고 있던 중앙의 통제력은 결국 무너지고 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황제가 죽은 지금이라면 더욱더 흔들리기 시작하겠지.
가뜩이나 정통성이 약한 황제를 내세우고 있었으니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귀족들에게는 지금만 한 호재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나에게 오기 전에 샤를 양에게 먼저 사과를 받아와야 할 것이다. 블라드?”
“······알겠습니다.”
요제프의 명령에 자리에서 일어선 블라드는 혀를 차며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고트는 자신이 살아남았음에 안도하고 있었지만, 곧 블라드가 다른 모양으로 매듭을 짓고 있는 것까지는 보지 못했다.
끝을 뭉뚝하게 만들고 있는 그 매듭은 얼핏 보아도 채찍 같아 보이는 형상이었다.
※※※※
“으으으······.”
“엄살 좀 그만 부려.”
블라드는 닿지도 않는 등을 향해 허우적거리는 고트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 정도 자국은 있어야 봐줄 거 아냐.”
“그렇긴 한데······.”
고트의 옷 위로 매섭게 가로지른 생채기 몇 개가 새겨져 있었다.
요제프는 샤를에게 사과를 받아오라 가볍게 말했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임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암만 봐도 영락없는 마구간지기였다니까.”
“매듭 바꿀까?”
“······왜 그러고 있었대. 도대체 왜?”
눈치 빠른 고트조차도 샤를의 겉모습만으로는 귀족인 것은커녕 여자아이인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소녀의 눈빛에 독기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모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거기 가면 죽은 듯 납작 엎드려 있어라.”
“······알았어. 대장.”
풀죽은 고트의 대답을 들은 블라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샤를의 유모인 마르타를 떠올렸다.
그녀는 화살에 꿰뚫렸던 상황에서도 자신보다는 샤를을 감쌌던 여인이었다.
비록 몰라서 한 일이기는 했으나 고트가 저지른 일은 엄연히 귀족을 모독한 행위였으니 아마 그녀의 분이 쉽게 풀리지는 않겠지.
“몇 대 더 때려놔야 하나?”
“······그럴까?”
블라드가 고트의 등짝을 보며 이 정도 상처면 그녀의 화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고심하던 차, 저 밖에서부터 웅성거리는 병사들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뭔 일 났나?”
“네 일이나 신경 쓰지.”
“아니, 다들 뛰어 들어오는 모양새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저기 좀 보라는 고트의 고갯짓에 블라드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과연 고트의 말대로 경비병들이 시청 안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서둘러 말을 타고 오는 사람,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매우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뭐야?”
지금 시간이라면 모든 경비병들이 도시를 순찰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 그들이 시청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은 다급히 보고해야 하는 사건이 생겼다는 뜻.
“이봐.”
“네? 넵 블라드 님!”
한참 복도를 뛰어가던 경비병은 블라드를 알아보고는 서둘러 경례를 취했다.
“무슨 일이지?”
“그게, 그것이!”
숨은 잔뜩 차 있었으나 차라리 잘되었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이 도시에서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기사는 블라드 뿐이었으니까.
“지금 강을, 강을 거슬러서 수상한 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수상한 배?”
입으로는 수상한 배라 말하고 있었으나 두 손으로는 잔뜩 팔을 벌리고 있는 경비병이었다.
“엄청 커?”
“넵!”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엄청 큰 수상한 배.
헐떡이는 경비병 앞에서 기사와 종자가 서로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
저게 뭐야!
내 평생 저런 배는 본 적이 없는데!
쇼아라의 경비병들이 부둣가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창대로 밀어내고 있었다.
다만 이미 그 안에 있던 뒷골목의 무리만큼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보스!”
“······저게 뭐냐.”
뒷골목의 보스 캡틴 후버는 자신의 건물 가장 높은 곳에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배를 보고 있었다.
수십 년을 바다 위에서 떠돌던 그로서도 입을 크게 벌릴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저게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지?”
경험이 풍부한 후버는 알 수 있었다.
저 정도 크기의 배는 절대 강을 거슬러올 수 없음을.
쇼아라의 강은 넓었으나 수심은 얕았기에 저 정도 크기라면 배 밑바닥이 강바닥에 닿고 말 것이다.
이번 나사우 원정 때 나포해왔다던 두 척의 배가 아직도 바다에 정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물레방아?”
그러나 점점 위용을 드러내는 그 배를 보며 후버는 입을 크게 벌릴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바다를 누벼왔던 늙은 선장조차도 처음 보는 형태의 배가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수상한 자들이 아니다! 창을 거둬라!”
갑판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남자의 말과는 달리 지금 사람들의 앞에 나타난 배는 누가 보아도 수상한 배였다.
돛을 접어놓았으나 움직이고 있는 정체불명의 배.
그 기묘한 배의 양옆에는 지금도 물레방아들이 쉴 새 없이 물살을 밀어내는 중이었으니까.
“인간들의 영주. 요제프 바예지드를 불러다오! 우리는 그의 편지에 화답하기 위해 이곳 쇼아라에 왔다!”
몸집은 작았으나 옹골차 보이는 사내의 목소리가 쇼아라의 부둣가에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치 뿔나팔을 목에 붙여놓은 듯 걸걸한 목소리가 쇼아라의 부둣가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요제프 바예지드가 없다면! 인간들의 기사 블라드라도 불러다오!”
이제야 막 부둣가에 막 도착한 블라드는 난생처음 보는 사내가 자신을 찾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뭐야. 대장이 아는 사람이야?”
“저거······. 사람 아닌 것 같은데?”
고트의 물음에 블라드가 가늘게 눈을 뜨며 멀리 보자 곧 배 위에서 휘날리는 깃발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깃발에는 여태껏 보아왔던 문장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드워프 해방전선에서 왔다!”
망치가 모루를 내려치는 듯한 문양.
그것은 드워프 해방전선 니다벨리르를 뜻하는 깃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