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52
뿌리는 대로 거두리라 (4)
남자가 머금고 있는 붉은색이 진했다.
흔들리는 와인잔 안에서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 끈적임.
그러나 사르누스는 진한 만큼 무게 있는 목 넘김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결국, 아르망 공작이 뜻대로 움직여 주었군.”
떠오르는 아침 해 앞에서도 여유롭게 잔을 기울이고 있는 사르누스.
기름을 먹여 단정히 뒤로 넘긴 금발과 유행을 타지 않는 고풍스러운 옷차림은 누가 보아도 전형적인 귀족의 모습 그 자체였다.
“중부 곳곳에서 산발적인 영지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르망 공작 때문만이 아니라도 다들 그동안 쌓였던 게 많은 모양입니다.”
“너무 오래도록 묶어두기는 했지. 인간이란 본래 욕망을 따라가는 존재거늘.”
사르누스는 미르셰아의 보고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제국이라는 거대한 세계를 세웠던 기사는 언제까지나 하나일 줄 알았겠지만, 용이란 존재는 사실 모두의 영혼 속에 잠들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짓밟는 만큼 높아지고 먹어 치우는 만큼 커지니 그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평화로웠던 만큼 움츠리고 있었고 힘과 명분을 쌓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자그마한 잔에 물을 따르다 보면 언젠가는 넘치기 마련.
더 넓은 세계로의 확장은 서부만이 염원하던 목표는 아니었다.
“누구라도 나처럼 할 테지.”
사르누스는 마지막 남아 있던 와인을 털어놓고는 조용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몸을 돌려 바라본 거울에는 고귀한 귀족 사르누스 드라굴리아의 모습뿐.
어둠 속에 숨어 쪼그라들어 있던 예전의 모습 따위는 지금의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번 녀석은 순수하지 못하군.”
환하게 빛나는 금발 사이로 붉은색 새치가 하나 보였다.
그것을 발견한 사르누스는 찌푸리듯 웃으며 머리를 헤집기 시작했다.
시원치 않았던 만큼 마지막까지 말썽이로군.
“우스운 꼴로 돌아오기는 했다만 그래도 우트만 남작령의 일은 잘 수행하고 왔으니 칭찬은 할 만했다.”
“······그렇습니까.”
무심히 뽑은 머리카락 하나.
금발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머리카락은 누구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색이었다.
“북부에 있다던 아이는 좀 더 진했으면 좋겠군. 그 녀석도 이제는 거둘 때가 되었으니.”
뿌렸으니 이제는 거둘 때가 되었다.
저 먼 북부까지 가 굳이 진창 위에 심어두었던 나의 씨앗은 과연 어떤 가능성을 보여줄 것인가.
비어 있는 와인잔과 뽑아 든 붉은 새치.
그것들이 새로이 채워질 때를 기다리며 늙은 용은 웃고 있었다.
※※※※
“흐음, 흐음.”
시구르손은 집중하고 있었으나 그의 옆에 서 있는 블라드는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였다.
처음 보는 해괴한 외눈 안경을 쓴 시구르손이 자신의 검을 핥듯이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 손에 의해 낱낱이 벗겨지는 푸른 검을 보며 블라드는 지금 당장이라도 녀석을 주워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맞는 것 같은데.”
광란의 밤이 끝난 다음 날 아침, 드워프들은 그렇게 좋아하던 술잔도 내던지고는 다들 시구르손 주위에 몰려있는 중이었다.
수염 긴 사내들끼리 바짝 붙어있는 모습이 영 우스웠지만, 그들이 보내는 눈빛만큼은 진중하고 신중했다.
“······불씨가 맞아.”
나지막이 선언하는 시구르손의 말에 드워프들은 하나같이 두 손을 불끈 움켜쥐고 말았다.
온갖 아우성이 그들 사이에서 몰아치고 있었으나 다만 소리 하나 내지 않는 것은 아마 검 위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어린 도마뱀 때문일 것이다.
그 누구도 이 어린 정령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될 테니까.
“이 녀석을 어디서 데려왔다고 했지?”
“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우슈린이라고.”
시구르손의 물음에 블라드는 자신의 검을 빼앗듯 가져와 버렸다.
외눈 안경 속 기이하게 커진 시구르손의 눈동자가 검 사이로 들어가는 어린 도마뱀을 안타깝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어린 정령이 있을 수 있지? 애초에 정령들은 가장 완벽한 용이 전부 다 먹어 치웠을 텐데······.”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세한 것은 엘프들에게 물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블라드는 뭐에라도 홀린 듯 점점 달라붙어 오는 사내들을 밀쳐대며 으르렁대었다.
사내들에게서 느껴지는 따끔한 수염의 감촉이 블라드의 정신을 사납게 만드는 중이었다.
“이거 만들어준 사람들이 엘프들이니까요. 진짜 달라붙지들 좀 마십시오!”
블라드가 기사에게는 지켜야 할 간격이 있다며 윽박지르자 드워프들은 그제야 혀를 쩝쩝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자리로 돌아갔음에도 그들의 시선에는 미련이라는 두 글자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여기 있는 드워프들은 정령이라는 걸 처음 보나?’
엘프들의 장로 제로니모는 소드마스터는 드워프들에게 갔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지금 드워프들은 어린 정령의 모습 하나에도 크게 기꺼워하고 있었으니 아무래도 소드마스터의 흔적은 그들에게 닿지 못한 것만 모양이었다.
양피지 기록 따위로 정령을 확인하는 그들의 모습은 분명 엘프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어제도 말했다시피 내가 자네 갑옷을 한번 봐주고 싶은데 말이야.”
뜬금없는 갑옷 타령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라도 시구르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외눈 안경이 저절로 확대해버린 시구르손의 눈은 지금도 블라드의 검을 아쉽다는 듯 쳐다보는 중이었다.
“어차피 이 기회에 우리 배에 있는 장비들도 몇 개는 손보고 싶기도 하고 말일세.”
“······그거 진담이셨습니까?”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는 시구르손을 보며 블라드는 속으로 웃음 지었다.
검을 내준 것은 불쾌한 경험이기는 했지만 드워프들에게 장비를 점검받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 흔치 않을 것이다.
서부가 왜 그토록 드워프들을 유출시키지 않으려 애썼는지 이번에 한 번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근처에 비어 있는 대장간이 있긴 한데······.”
작고 초라하기는 했지만 블라드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대장간이 하나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쓰는 이가 없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지만 간단한 작업 정도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나 블라드는 다급히 자신의 옷깃을 붙잡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곳에는 놀란 듯 큰 눈을 부릅뜨고 있는 제미나가 있었다.
‘안돼. 거기는!’
얌전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으나 제미나의 눈동자는 블라드에게 쉼 없이 말을 걸고 있었다.
아무래도 붉은 머리 소녀는 둘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대장간을 저 술꾼들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
“······저거 오래 갈 텐데.”
“어쩔 수 없잖아. 비어 있는 대장간이 그곳밖에 없는데.”
하벤은 지금도 입을 꾹 다문 채 테이블을 닦고 있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에게 속삭여대었다.
드워프들이 한숨 자야겠다고 올라간 후부터는 계속 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앞에서는 아니라고 말 좀 해주지.”
단순히 대장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던 블라드에게서 무심한 대답이 나오자 화가 난 것이겠지.
그동안은 무던히도 참고 있었지만, 장식 없는 검과 관련된 추억만큼은 제미나도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나저나 너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어제부터 여기는 출입금지 구역이었던 거 몰라?”
“화풀이를 나한테 하면 안 된다. 너희 싸움은 둘이 알아서 풀어야지.”
하벤은 능글맞게 웃으며 블라드의 질문을 빠져나가려 했다.
방금의 말 대로 어제 장미의 미소는 출입이 금지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하벤은 그들과 자리를 마련해보고 싶었다.
아직도 눈에 아른거리는 그들의 배를 단 한 번만이라도 타보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뭣 좀 얻은 건 있고?”
“얻은 건 없는데 들은 건 좀 있지.”
알았음에도 굳이 들어왔고 눈치챘음에도 딱히 쫓아내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둘은 한배를 타고 있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공동의 이익이라는 것이 있었다.
“드워프들이 타고 온 배 말이지.”
“응.”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들었다는 듯 목소리를 줄이는 하벤.
그런 하벤을 따라 귀를 기울인 블라드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드워프라는 존재만큼이나 그들이 타고 온 배는 쇼아라를 흔드는 화제 중 하나였고 배에 관해서는 잘 모르는 블라드마저 시선을 빼앗길만한 물건이었다.
“거기 안에서 물을 데운다고 그러네.”
“뭐?”
그러나 잔뜩 기대하고 있었음에도 들려오는 대답은 영 황당한 것일 뿐.
물은 데운다.
그러면 물레방아가 돌아간다더라.
“그게 무슨 개소리지?”
“······그러게. 말하고 보니까 개소리네.”
머릿속에 있었을 때는 그럴싸했으니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영 이상한 말일 때가 있다.
하벤은 퍼뜩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물을 데우는 것과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것 사이에는 참 많은 과정이 생략되어 있었다.
“뭐 배 안에 목욕탕이라도 가져다 놨다는 거야 뭐야.”
“아니, 그게 수증기가······. 그다음에 뭐 어쨌다고 그러더라?”
기회를 마련해 주었건만 결국 헛술을 마시고 만 하벤을 보며 블라드는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뭐라도 하나 배에 관한 비밀을 알아냈으면 큰 이득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비켜. 시청에 보고하러 가야 하니까.”
“내가, 내가 오늘까지 생각을 한번 정리해볼게. 할 수 있을 거야.”
“너 어제 드워프들이랑 후버가 만든 술까지 마셨어. 절대 기억 못 해.”
“······아.”
손대서는 안 될 술까지 마셔댔다는 블라드의 말에 하벤은 조용히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몇 번 마셔보았던 경험상, 블라드의 말처럼 어제의 일은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나 간다.”
“으어.”
신음과도 같은 하벤의 말을 뒤로 한 블라드는 장미의 미소를 나서 시청으로 향했다.
어제 명했던 대접도 훌륭히 끝냈고 그들이 만족할만한 숙소도 마련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요제프에게 보고하는 일뿐이었으니까.
“······한 번 보고 가야겠네.”
다만 조금은 길을 돌아서.
말이 나온 김에 블라드는 오랜만에 노인의 대장간을 한번 들렀다 가기로 했다.
거의 평생을 걸어왔던 길이었으나 밝은 대낮에 걷는 뒷골목은 영 어색할 뿐이었다.
밤과 낮이 보여주는 모습은 확연히 달랐으며 그것은 문이 닫혀 버린 낡은 대장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고향의 모습은 반가운 만큼 어색해졌다.
“누가 들어온 흔적은 없고.”
비어 있는 집이었으나 어느 부랑자 하나도 얼씬을 안 하는 집이기도 했다.
딱히 관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뒷골목에서 좀 굴러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블라드와 관련된 이곳을 함부로 침범하지는 못할 테니까.
“쿨럭쿨럭. 커윽.”
추웠던 겨울날과 같이 비틀 듯 열어낸 대장간의 문에는 그동안 쌓여있던 먼지가 수북했다.
노인이 앉아 있던 의자도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했던 낡은 모루도.
그리고 언제나 불이 밝혀져 있던 자그마한 모루까지도.
“이 정도면 쓸 만은······ 한 건가?”
쌓인 먼지만큼이나 복잡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본 블라드는 이곳을 드워프들에게 내어줘도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정말 제미나의 말대로 추억의 한 장소로 남기는 것이 나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
그러나 한숨짓고 있는 블라드와는 다르게 어느새 검에서부터 고개를 삐죽 내민 어린 도마뱀은 두 눈을 반짝이는 중이었다.
비록 차갑게 식어있었으나 낯이 익은 고로.
세계수의 꽃 위에서 망설이던 어린 도마뱀은 분명 노인과 함께 불타올랐던 낡은 고로를 기억하고 있었다.
“뭐,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대장간 찾아달라고 했겠지.”
그동안 함께 검을 타고 왔었던 친구들은 자신들에게 맞는 곳을 찾아 하나둘씩 떠났지만, 어린 도마뱀만큼은 마땅히 마음에 맞는 곳을 찾지 못했었다.
그러나 작고 볼품없는 저 낡은 고로는 여태껏 보아왔던 어떤 장소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끼이이익-
조용히 닫히는 문틈 사이로 어린 씨앗 하나가 조용히 검에서 내려앉았다.
실룩이는 엉덩이가 고로 속으로 사라지자 방금까지만 해도 죽은 듯 침묵하고 있던 대장간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어디와도 다를 것 없는 익숙한 밀밭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검은색 물감 한 방울이 더 해진듯한 모습이었다.
밀밭뿐만 아니라 이 영지에 있는 모든 것이 전부 그렇게 느껴지는 그저 기분 탓일까.
“유스티아 님. 여기.”
“······.”
예전에는 산 로지노 소속이었으나 이제는 북부정교회의 소속이 된 성기사들.
그들은 지금 예전에는 우트만 남작령이라 불렸던 영지로 와 사특한 존재의 예후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다 썩어 버렸군요.”
“썩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 좀 보라는 듯 기사는 곧 손바닥 사이로 밀알을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시커멓게 썩어 있는 밀들 사이에서도 그나마 제 빛깔을 가지고 있던 것들.
그러나 그 밀 안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들도 전부 쭉정이가 되어 있습니다.”
“······.”
유스티아는 손바닥 위에서부터 힘없이 흩날리는 밀의 잔해들을 바라보았다.
바람결을 따라 힘없이 떠도는 부서진 밀알들.
“왜 여기만 이렇게 되었을까요?”
사상 최악의 가뭄이었다.
그러나 기이한 것은 우트만 남작령을 제외한 다른 곳은 예년과 다름없이 평범한 수확량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마치 이곳의 밭들만 잉크 묻은 손가락으로 찍어낸 듯한 모습에 유스티아뿐만 아니라 다른 성기사들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더 깊이 조사해봐야겠습니다. 지원을 요청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유스티아 님.”
지금도 그들의 뒤에서는 올해의 농사를 망쳤다며 울고 있는 농민들이 있었다.
보호해 줄 영주도, 그렇다고 받아 줄 땅도 없는 그들에게 있어 시꺼멓게 죽어버린 밀밭은 사형선고와도 같은 것일 테다.
“······.”
그들을 바라보는 유스티아의 얇은 눈썹이 양미간 사이로 깊은 자국을 만들고 있었다.
북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우트만 남작령은 사라졌으나 그들이 남기고 간 상처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