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54
돌아와야 할 자리 (2)
색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선명하다.
“······.”
아무도 없는 수녀원의 커다란 예배실.
그곳에 홀로 서 있던 블라드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자신에게 와닿는 색색의 빛들을 움켜잡아보았다.
그러나 잡으려 했던 빛들은 공허하게 흩어질 뿐.
색유리를 통해 와닿은 빛들은 화려했으나 움켜쥔 손바닥 안에는 그저 작은 먼지들만이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뭐라고.”
블라드는 햇빛 속에서 산산이 흩어지는 먼지들을 보며 허탈하게 웃음 짓고 말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렇게 커다랗고 높아 보였건만.
“······.”
자그마한 한숨을 내쉰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창가의 빛살조차 닿지 않는 저 끝에 오래된 수녀원의 문이 있었다.
추웠던 겨울날, 끝끝내 마르셀라를 안으로 들여 보내주지 않았던 문이기도 했다.
“겨우 저거 때문에.”
처녀는 안으로, 창녀는 밖으로.
순결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정결했던 창녀는 들어설 자격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신이 아닌 그저 누군가가 세운 기준은 마르셀라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오직 마르셀라만이 아닐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내가 아닌 남이 평가하는 기준에 그렇게 평가되고 재단되어간다.
“암만 봐도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블라드는 그것이 싫었다.
뒷골목의 블라드였을 때도 쇼아라의 블라드였을 때도 블라드는 그저 블라드였을 뿐.
모두에게 자신처럼 안드레아가 있을 수 없음을 알기에 수녀원의 문을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빛이 매서워지기 시작했다.
※※※※
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였으나 쇼아라 성문 앞의 분위기는 후끈했다.
병사들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며 맞부딪히는 창들의 소리.
그러나 그 소리 끝에는 누군가의 비명이 아닌 기뻐하는 함성이 들려오고 있어 가장 중심지에 있는 시청에까지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돌아오셨습니까. 아버지.”
“그래.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정중히 고개 숙인 요제프의 앞으로 그와 닮은 얼굴의 남자가 걸어갔다.
겉보기에는 말끔한 차림이었으나 걸어왔던 여정의 거리를 짐작게 하는 먼지가 그의 어깨 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나 또한 그렇다. 데어마르를 지킨 너의 공을 치하한다. 아들아.”
밖에서는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가득했지만, 이곳 쇼아라의 시장실 안의 분위기는 조용할 뿐이었다.
조언자 라그무스도, 요제프의 기사 자야르도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오직 두 부자(父子)가 나누는 눈빛만이 가득했다.
“건강은 괜찮으냐?”
“많이 나아졌습니다.”
아들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여전히 힘이 넘쳤으나 온통 검었을 그의 머리에는 이제 흰색이 더 많아 보였다.
페테르는 이제는 자신이 나아갈 길보다 남아 있을 자들이 따라올 길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였다.
“형님은 같이 안 왔습니까?”
“루트거는 새로이 만들어질 관문이 설치될 때까지 그곳에 머무를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결정해주어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번 전쟁은 짧았으나 강렬했고 자신의 아들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그렇습니까.”
페테르는 점점 깊어지는 요제프의 눈빛을 보며 아들의 속내를 짐작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영민한 저 아이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새로이 만들어질 서부의 요새는 북부연합이 내딛는 기념비적인 첫걸음이었으며 연합의 맹주인 강철공 티무르가 특별히 신경 쓰는 곳.
바예지드의 대표로서 요새에 남아 있을 루트거는 그곳에서 수많은 북부의 인사들을 만나게 될 것이며 정치적인 입지 또한 같이 다지게 될 것이었다.
“드워프 해방 전선인 니다벨리르의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지금 쇼아라의 부둣가에는 그들이 타고 온······.”
“알고 있다.”
차가운 페테르의 말 끊음에 안쓰러운 눈그늘이 깊어졌다.
페테르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짐작한 듯 요제프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수고했다. 훌륭했고.”
요제프는 분명 해야 할 일을 훌륭히 완수했고 할 수 있는 일을 빠짐없이 해내었다.
그러나 페테르는 온전히 기뻐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아들을 축하해 줄 수 없었다.
황량했던 서부의 바람을 맞이하며 그는 많은 고민을 해왔고 이제는 그에 대한 답을 요제프에게 해줄 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나사우는 어떻겠느냐.”
요제프의 한 발 뒤에 서 있던 자야르는 페테르의 말에 그만 움찔하고 말았다.
많은 설명을 생략한 말이었으나 흐르는 분위기가 있었고 그것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그곳은 쇼아라보다 따뜻하고 공기도 좋은 곳이지. 너의 약한 몸을 다스리는데도 분명 알맞을 곳일 거다.”
“······.”
바예지드를 대표하는 세 개의 도시. 스투르마, 바르나, 그리고 쇼아라.
그러나 페테르는 요제프로 하여금 이 세 개의 도시가 아닌 서부에서 얻어온 도시를 권하고 있었다.
나사우는 분명 훌륭한 도시였지만 바예지드의 역사와 전통이 함께하는 곳은 아니었다.
“······아버지.”
“나는 너에게 선택지를 주고 싶다. 아들아.”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며 바예지드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의 세계.
페테르는 아직도 자신의 검에 꿰뚫렸던 형제들의 표정이 기억나는 것만 같았다.
“나사우의 총독(總督)직을 내어주마. 지금보다 더 많은 권한과 지원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가주직을 포기해라.
그래야만 네가 살 수 있을 테니까.
“······여기가 끝입니까.”
“그래.”
요제프는 페테르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원하지는 않았으나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던 길고 길었던 시험.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시험을 위해 허접한 몸뚱이로 최선을 다했건만 나의 발버둥은 결국 여기까지였다.
시험은 끝났다.
결국, 아버지가 선택한 사람은 내가 아닌 형이었다.
“너의 어미와도 많은 대화를 나눠왔다. 그녀 또한 너의 안위만 확실할 수 있다면 이 결정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동안 애써 억누르고 있던 깊은 패배감이 요제프의 온몸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마치 균열이 생긴 둑처럼 이성으로 억눌러놓았던 감정들이 세차게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결정을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지금의 세상은 난세이며 그런 난세를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강인한 군주가 필요할 테니까.
고작 수성 한 번에 고꾸라지고 마는 연약한 군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쯤은 요제프도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기분은.
평생을 달려온 목표가 쓰러진 나의 기분은 도대체 누가 이해해 준단 말인가.
“이번 겨울이 지나면 짐을 꾸려 나사우로 가거라. 너의 어미도 함께할 것이다.”
“아버지.”
아들에 대한 배려가 가득했지만 결국은 일방적인 통보일 뿐인 페테르의 발언 속에서 요제프가 기어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좌절과 패배감,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분노가 억누르고 있던 요제프의 고개였다.
“제가 모자랐습니까?”
“······아니다.”
그러나 마주한 그의 눈빛 안에는 끈적이던 감정은 어느새 잠재워진 후였다.
루트거처럼 강인하지는 않았으나 요제프는 그동안 많은 고통을 감내하며 이때까지 살아왔었다.
“혹시라도 제가 아버지에게 부끄럽거나 감추고 싶은 아들이었습니까?”
“······아니다. 너는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아이들은 큰다.
비록 부모가 정해놓은 방향과 한계와는 다를지라도.
다져졌기에 진득해진 요제프의 영혼은 페테르의 생각보다 끈질긴 것이었다.
“그렇다면 죽겠습니다.”
부모라는 존재가 시작은 정해주었으나 끝을 정해줄 수는 없다.
내 인생은 오롯이 나의 것이고 그 끝을 정할 수 있는 것 또한 나일 테니까.
“저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 중에 제 이름을 단 별 하나 정도는 새기고 죽고 싶습니다.”
“······.”
몸이 약해서, 재능이 모자라서.
할 수가 없었기에 그저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인생은 원하지 않는다.
당신의 자랑스러운 아들인 나는 그렇게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닐 테니까.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아들인 저는 다음 대 바예지드 가주가 되고 싶습니다.”
밤하늘에 떠 있었으나 아무도 봐주지 않았던 요제프는 이제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인생을 모두 불태워보기로 했다.
오롯이 자신의 의지대로.
모두가 안 된다 할지라도 하고 싶었기에 가치 있는 일을 따라서.
※※※※
쾅—!
요란한 파격음이 쇼아라의 수녀원을 뒤흔들고 있었다.
어찌나 커다랬던지 바닥이 들썩일 정도의 굉음이었다.
“저저저! 저런!”
커다란 소리에 놀라 뛰쳐 내려온 원장 수녀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찢어지라 뜨고 말았다.
아직도 희뿌연 연기가 가득한 수녀원의 예배실.
여기저기 흩날린 나무판자들이 엉망인 모습으로 뒹굴고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주교님! 아무리 제가 교황청을 따르는 사람이라 해도!”
“······허허.”
한참 원장실에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안드레아도 소리에 놀라 따라 내려오고 말았다.
점점 웅성거리며 모여드는 수녀들과 그런 그녀들을 보며 초조한 듯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 용병대장 슈테판.
그러나 정작 그 모든 시선을 받고 있는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금 왼쪽 눈을 감을 뿐이었다.
“문이 안 열렸더라고 하더라고요.”
익살스럽게 웃고 있었으나 감은 눈 사이에서 흐르는 황금빛만큼은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다.
“창녀인 사람한테 안 열리고, 없는 사람들한테도 안 열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한테도 안 열리고.”
고귀한 뜻에 의해 세워졌으나 쥐고 있는 자들의 기준에 따라 열리고 닫히는 문.
그 기준의 얄팍함을 알아차린 블라드에게 있어 굳게 닫힌 수녀원의 문은 제거해야 할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한 번 고쳐보려고 했는데 잘 안됐네요.”
“······그래?”
옆에는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악다구니를 쳐대는 원장 수녀가 있었지만, 주교 안드레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괜찮네! 어차피 새로 달아놓으려 했던 문이었지!”
광야를 떠돌던 그가 굳이 주교직을 맡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어차피 부술 생각이었다.
당신들이 만들어 놓았던 높은 문턱 따위, 사제였던 시절부터 진절머리나던 것이었다.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이 있지 않나. 이곳은 힘쓸 사내들이 없으니 자네가 마지막까지 다 부숴주게!”
안드레아의 말대로 아직 덜렁거리고 있는 문짝이 있었다.
블라드는 오히려 신이 나 더 부수라 말하는 안드레아를 보며 놀랐지만, 허락도 받았으니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주교님.”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블라드의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 위에서 비치는 색색의 유리들도 지울 수 없는 오직 자신만의 빛.
비록 달을 넘지는 못했으나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블라드는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이었다.
첫 번째 일격은 창녀를 위해서.
두 번째 일격은 소녀를 위해서.
그녀들 모두가 태어난 대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던 사람들이었다.
“······!”
고귀한 바예지드의 허락과 주교의 보증을 받은 기사의 일격이 쇼아라 가장 높은 언덕을 통해 뿜어져 나갔다.
콰아앙-!
아까보다 더 크게 울려 퍼지는 굉음에 이제는 저 밑에 있던 병사들까지도 놀라 수녀원을 바라보고 말았다.
분노어린 블라드의 일격을 따라 터져나가고 만 수녀원의 문짝.
누군가가 세워놓은 기준은 나를 온전히 판단할 수 없으니.
해야 할 일을 따라 할 수 있는 일을 해온 뒷골목의 소년은 기어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내고 말았다.
오직 진실된 사제만이 알아봐 주었던 소년의 가능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