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56
검은 말과 어린 나귀 (1)
돌자, 돌자, 성냥 주위를 돌자.
즐겁게 노래하는 성냥 주위를 돌자.
새빨갛던 머리가 시꺼멓게 될 때까지.
부르던 노래가 끝날 때까지.
돌자, 돌자, 성냥 주위를 돌자.
모두 넘어질 때까지 성냥 주위를 돌자.
※※※※
바짝 얼어붙어 있는 겨울의 가도.
그 위를 달리는 말발굽 소리와 마차의 삐걱거림이 요란했다.
딱딱한 길바닥만큼이나 건조한 북부의 바람은 가뜩이나 무거운 일행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군.”
추운 날씨에도 굳이 창을 열고 있던 요제프는 블라드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한참의 침묵을 깬 요제프의 목소리에 기사들 모두가 앞을 바라보았다.
쭉 뻗은 가도 앞으로 갈라져 있는 두 개의 길.
저 앞에서부터 다가오는 갈림길에 다다르면 일행과 블라드는 헤어져야 했다.
“부디 몸조심하고.”
“요제프 님도 건강 조심하세요.”
요제프와 기사들은 스투르마로 돌아가야만 했다.
가주 경쟁에서 탈락한 요제프가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를 따르던 기사들은 아마 새로운 임무를 하달받아 다들 뿔뿔이 흩어지게 될 것이다.
헤어짐에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지만 지금의 일행에게 있어 그 끝이 무거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발 부탁이니 평소처럼 날뛰고 다니지 마라. 이번에 수녀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보죠.”
그 와중에서 변함없는 자야르의 핀잔은 차라리 반가운 것이었다.
누군가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반갑지 않았으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실웃음 소리에 분위기가 조금은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다가올 봄에는 아마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거다. 그때 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요제프 님.”
하얗게 뜬 입술로 다음을 약속하는 요제프의 모습은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 것이었지만 블라드는 요제프의 말이 빈말이 아닐 것임을 믿고 있었다.
그가 보았던 요제프는 언제나 최악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했던 말 잊지 말고.”
“네.”
속삭이듯 말하는 요제프의 마지막 말에 블라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요제프가 나지막이 건네준 충고는 교황청에서 뿌리고 다녔다는 기이한 소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부제 님께서도 뜻하신 바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요제프 님의 귀환길에 신의 평안함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눈 요제프는 조용히 눈짓하며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그레고리, 막심, 그리고 케이드.
마주치는 눈빛 하나에 마지막 인사를 담은 블라드는 이윽고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가 반대편 갈림길로 꺽어들어 갔다.
점점 멀어지는 검은 말과 작은 나귀 한 마리.
불어오는 겨울바람 속에서도 잠시 멈추어 선 요제프와 기사들은 점점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봐주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어린 부제의 앞길을 이끄는 블라드의 모습은 이제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
“아마 기사님은 모르셨을 거예요.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이름이 들려올 때마다 안드레아 님의 어깨가 으쓱했었거든요.”
타고 있는 늙은 나귀는 무덤덤함 그 자체였으나 그 위에 타고 있는 어린 부제는 이제야 제 세상을 만났다는 듯 힘차게 떠벌이고 있었다.
“큰 값 받고도 팔 수 있는 보증이었는데 땅바닥에 버렸다고 다들 얼마나 뭐라 하던지. 그래도 지금 그 소리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지금도 재잘거리고 있는 어린 부제의 이름은 쟝이라 했다.
북부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한 글자짜리 이름을 가진 소년은 블라드가 마치 자신의 자랑이라도 된다는 듯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름을······. 보증을 돈 받고도 팝니까?”
“그럼요. 알음알음 다들 팔고 다녔죠. 특히 교황청에서 나온 사람들은 특히나 더요.”
안드레아의 직속 부제여서인지는 몰라도 쟝은 교황청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명망 높았으나 광야만을 떠돌았던 안드레아의 사정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쟝이었다.
“하긴 쇼아라의 원장 수녀도 뭘 팔긴 팔았었죠.”
쟝의 말에 쇼아라에 있던 수녀원을 떠올린 블라드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없는 자들을 위해 세워진 수녀원이었건만 그 안에 있던 여자들은 전부 유력자들의 자식뿐.
신에게 가까운 순결한 처녀들.
쇼아라의 원장 수녀는 신의 이름을 빌려 그 칭호를 팔아먹는 장사꾼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단 육포는 이걸로 바꿔 드시죠.”
“네?”
쟝은 블라드가 갑작스레 건네는 종이 뭉치를 보며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어딘가 두툼해 보이는 그 종이 뭉치 위에는 칸노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칸노르 가문 거네요?”
“그쪽이랑 자그마한 친분이 있거든요.”
어린 부제도 알 정도로 칸노르 가문의 고기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비싸기도 하고.
그리고 블라드는 그런 칸노르 가문에서 크게 후원하는 기사중 한 명이었다.
“처음으로 나서는 먼 길이니 잘 먹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디 앓아눕기라도 하면 부탁받은 제가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아. 아. 감사합니다!”
애써 감추려 했지만 발개지는 볼이 쟝의 심정을 알려주고 있었다.
한창때의 소년에게 고기를 들려주었으니 그 기쁨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 청빈한 삶을 살던 안드레아 밑에서는 이런 육포는 구경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편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으나 쟝의 입을 통해 알아차린 안드레아의 은혜는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어느새 육포 하나를 꺼내 우물거리는 쟝을 보며 블라드는 저 어린 사제의 고행길을 통해 안드레아에게 자신의 이름값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기를 바랐다.
※※※※
“오······.”
“어떡할까요. 부제님.”
우트만 남작령의 주도인 모시암으로 향하는 길.
지도가 이상했는지, 지도를 들고 있는 사람이 이상했는지는 몰라도 블라드와 쟝은 며칠을 걸친 야영 끝에 겨우 조그마한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을을 보고 기뻐했던 것도 잠시, 둘은 곧 언덕 아래 보이는 기이한 장면을 보고는 멈춰서고 말았다.
“어쩔까요. 내려갑니까?”
“잠시······. 잠시만요.”
쟝은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을 찌푸리며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한껏 고민하는 쟝을 보며 블라드는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
이번 고행길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어린 부제였고 그 길을 통해 얻을 소년의 성장이 곧 주교 안드레아가 바라는 것임을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내려가죠. 막아야겠네요.”
“알겠습니다.”
어린 부제의 말에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이 고행의 첫 길.
쉬운 길이 아닌 어려운 길을 따라 내려가는 언덕 아래에는 지금 축제가 한창이었다.
블라드가 들고 있는 지도에 이름조차 적혀있지 않은 작은 마을.
그러나 그런 작은 마을이라 할지라도 마을 사람들이 죄다 몰려나왔는지 언덕에서 내려다본 광장 안에는 사람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어 있었다.
“살려줘-! 나는 아니라니까!”
축제에는 무릇 그에 걸맞은 제물이 있어야 하는 법.
축제를 위해 사로잡힌 누군가가 발버둥을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누군가가 씌워놓은 듯 딱 붙어있는 가면의 모습이 꽤 기이해 보였다.
“내가 안 했다니까! 당신들 지금 실수하는 거야!”
기이한 가면뿐만 아니라 온통 검은색 옷으로 뒤덮은 사내는 쉴새 없이 소리를 질러대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저 장작을 쑤셔 넣으며 불을 키울 뿐이었다.
개중에는 아예 듣기 싫다는 듯 손가락으로 귀를 막은 사람들도 있었다.
“다들 속지 마시오! 본래 사특한 것들은 세 치 혀를 굴려 사람들을 속이고는 하는 법이니!”
새하얀 법복을 입은 사내 한 명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어느 소속인지는 모르겠으나 겉모습으로만 보았을 때는 분명 사제의 모습이었다.
“다들 모시암에서 비롯된 사특한 존재에 대해 알고들 계실 거요!”
사제의 입에서 모시암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불길하고도 두려운 이름으로 각인된 도시.
먼 곳에 있는 이 마을에서조차도 모시암과 관련된 것이라면 치를 떠는 중이었다.
“멀쩡하던 보리밭이 왜 썩고 멀쩡하던 우물물이 왜 말랐겠습니까! 그것이 다 모시암에서 튀어나온 저놈 때문이오!”
사제의 손끝이 기둥에 묶여 발버둥 치고 있는 사내를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러니 불태워야 합니다!”
“이 미친 새끼가! 멀쩡한 사람은 왜 태우는데!”
기이한 행색의 사내는 있는 힘껏 악다구니를 쳐댔지만 이미 그는 묶여있었고 밑에서는 천천히 시뻘건 연기가 올라오는 중이었다.
멀리서 바라본 그의 모습은 마치 장작불에 구워지는 까마귀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아, 이거 수상한데.”
얼마 없는 자경단의 눈을 피해 마을의 중앙까지 파고든 블라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불타고 있는 축제의 한 가운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죠?”
“네. 아닌데요.”
지금 블라드의 어깨 위에는 목마를 타고 있는 쟝이 있었다.
쟝 또한 새하얀 법복을 입고 있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저 앞에 있는 사제에게 쏠린 지 오래.
그 틈을 타 자그마한 돋보기를 꺼내든 쟝은 지금 화형 당하기 직전의 사내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암만 봐도 보이지가 않는데요. 물론 이 돋보기로도 찾을 수 없는 존재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면 애초에 저렇게 잡혀 있을 리가 없겠죠.”
부제일 뿐이기에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으나 그 정도쯤 되는 존재라면 애초에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힐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뭐,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습니다.”
블라드와 목마를 타고 있던 쟝은 동시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기를 더 키워야 하오! 저 위에 계신 신께서도 볼 수 있게!”
점점 장작의 불이 새빨갛게 번져나갈 때마다 사제 앞으로 쌓여가는 제물들.
광기 어린 외침을 따라 나온 마을 사람들은 들고 온 재물들을 사제 앞에 내려놓고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외치는 것은 신의 이름이었으나 바라보는 것은 거짓된 사제.
앞에 있는 제물의 산이 쌓여갈 때마다 점점 커지는 사제의 목소리를 들으며 블라드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저거 사기꾼이네요.”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는 법.
정말로 사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얄팍한 수를 알아챈 블라드는 어깨 위에 있던 쟝을 잡아 내렸다.
“어쩔까요?”
“막아야 해요. 신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비극을 그냥 보고 넘어갈 수는 없어요.”
서둘러 품속에 있던 성경을 꺼내든 쟝은 단호한 눈빛으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육포 조작에 기뻐하던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알겠습니다. 부제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쟝은 블라드의 끄덕임에 힘을 얻었는지 서둘러 성경을 펼치고는 종이를 넘겼다.
주교 안드레아가 한 글자, 한 글자 자신의 어린 부제를 위해 정성스럽게 새겨넣은 성경책.
그 성경을 넘기던 어린 부제의 손이 멈춘 곳은 신을 위한 찬송가가 적혀있는 페이지였다.
-세상의 헛된 우상 버리고.
-인간의 모든 거짓과 불의도 버리고.
-부름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이름 모를 사내의 비명을 따라 천천히 화형대를 따라 돌기 시작하던 마을 사람들.
그러나 새빨간 불 주위를 돌던 사람들은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고아한 목소리에 다들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거기 당신.”
“뭐, 뭐요.”
어린 부제의 목소리가 길을 만들자 그 길을 따라 걸어 나오는 한 명의 기사.
그 기사의 왼쪽 눈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황금빛이 맺혀있었다.
“당신 진짜 사제 맞아?”
“······으어어.”
거짓된 사제는 자신의 귀와 눈을 때리는 형형한 형상들을 보며 그만 간사한 혀를 깨물고 말았다.
쌓여있는 제물들과 말 못 하는 사제, 그리고 지금도 불길 위에서 발버둥 치는 결백한 제물.
“우리 일단 불부터 꺼놓고 이야기를 나눠볼까?”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자들.
주교 안드레아의 검과 어린 목소리가 거짓된 불길을 붙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