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58
검은 말과 어린 나귀, 그리고 고양이 (3)
엘프들은 어머니 세계수를 잃었다.
드워프들은 영원히 타오를 용광로를 잃었으며 인간들은 빛나는 왕국을 잃었다.
종족마다 다른 것을 잃었지만 결국 그것들 모두는 가능성을 뜻하는 또 다른 이름들일 것이다.
단 하나의 존재가 이 세상 모든 가능성을 독식하던 시대가 있었다.
떠오르려 하는 별빛들을 모아 자신의 발 아래 가두었던 그런 시대.
사람들은 그 시대를 용의 시대라 불렀다.
그리고 여기, 그 험난한 시대에 가능성을 잃어버린 또 하나의 종족이 있었다.
짐승의 귀를 지닌 종족, 수인족.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바로 ‘신비’라고 했다.
※※※※
“기사님! 사제님!”
자그마한 오솔길을 따라 걷는 검은 말과 어린 나귀.
그러나 조용했어야 할 그들의 여정은 뒤에서 따라붙는 수인족 사내에 의해 무참히 깨어지고 있었다.
“같이 가시죠! 제가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블라드와 쟝이 불구덩이 속에서 구해준 니벨룬이라는 사내는 여전히 둘의 뒤를 쫓아오며 같이 가자 소리를 지르는 중이었다.
“어떻게, 못 따라오도록 다리만 살짝 부러뜨리고 오면 안 되겠습니까?”
“신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저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블라드 님.”
“그러셨죠. 참.”
쟝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머리를 긁적이며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검과 폭력을 다루는 기사들의 세계는 비록 높았다 할지라도 자신과 통하는 면이 있었지만 쟝이라는 어린 부제만큼은 여전히 대하기가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그럼 부러뜨리지는 말고 따라오지 말라고 욕 정도 하는 것은 괜찮겠지요?”
“······그 정도는 봐주시겠지요.”
연장자이자 인솔자는 블라드였으나 이 여행의 주체인 사람은 바로 쟝이었다.
지켜야 할 대상이자 지켜야 할 규칙인 사람.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어린아이였으나 블라드는 쟝에게 무시 대신 존경을 표하기로 이미 결심한 상태였다.
“이봐. 죽음을 따라다니는 니벨룬 씨.”
“네. 네! 기사님!”
그렇다 해도 쌓여버린 화가 어디 가지는 않는 법.
시근거리는 블라드만큼이나 화가 난 누아르의 콧김이 니벨룬의 쫑긋거리는 귀를 스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뒤를 따라다닐 거야. 내가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으르렁거리는 기세가 매서웠으나 니벨룬은 그저 양손을 맞잡고는 둥글게 웃었을 뿐이었다.
“아이고, 그렇게 귀찮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여기저기 낡아버린 검은 로브.
그리고 지금은 쓰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등 뒤에 매달아 놓은 기이한 가면은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인족 사내에게 있어 불길한 기운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이래 봬도 쓸만할 겁니다. 저는 마법사니까요!”
“세상에 어느 마법사가 사기꾼들한테 걸려서 바비큐가 되는데?”
죽음을 쫓아왔다고 말하는 니벨룬은 자신을 마법사라 소개하고 있었다.
그것도 병(病)과 저주를 쫓아다니는 마법사.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온통 피하고 싶은 단어만 내뱉는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는 다시 한번 인상을 구겨대었다.
“제 마법의 특성상 발동을 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거든요.”
“그래. 들으면 들을수록 참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마법이라니까.”
들고 있는 것들이 충분히 괴상하였으니 본인이 주장하는 대로 마법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산적만도 못한 사기꾼들에게 잡혀버릴 정도라면 그 수준 또한 알만할 것일 테다.
“진짜 이게 마지막 경고야. 계속 쫓아오면 다리 한 군데는 분질러질 줄 알라고.”
도움이 안 되는 군식구 따위는 필요 없었다.
거기다 그 대상이 척 보아도 유쾌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블라드는 아직도 니벨룬이 매달고 있는 까마귀 가면이 영 꺼림칙할 뿐이었다.
“우트만 남작령!”
그러나 니벨룬은 그런 블라드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이 할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저를 그곳 안까지만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블라드 님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분명 다른 이들에게는 도움이 될 겁니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사는 사람이구만.”
블라드는 지금도 니벨룬이 소중히 들고 있는 두툼한 책을 바라보았다.
그가 기절했던 동안 살펴보았던 그 책에는 온갖 풀잎들의 그림과 효능들이 빼곡히 적혀있던 책이었다.
마법사 니벨룬.
그는 마법사이자 역병(疫病) 의사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
“죽음을 따라왔다고?”
“그렇소. 아니, 그렇습니다.”
이제야 깨어난 수인족 사내는 아직 정신은 몽롱해 보였지만 자신을 죽음을 따라온 사람이라 말하고 있었다.
“무슨 죽음? 이곳에 죽음이 있나?”
북부 사람들에게는 낯선 수인족의 모습, 여기저기 기워진 초라한 검은 로브, 그리고 기이해 보이는 까마귀 가면까지.
불길한 모습의 총체인 니벨룬의 모습을 보며 가만히 뒤에 서 있던 촌장은 역시 그때 불태웠어야 했다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저는 죽음을 따라왔고······ 말씀하신 것처럼 여기에 죽음이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 있으면 어차피 다 죽을 테니까요!”
“기사님. 제발 저 미친 고양이를 불태우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놈이 자꾸 저희 마을에 저주를 겁니다!”
“이미 마을은 망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빨리 사람들을 내보내야 합니다.”
“기사님 제발!”
애초에 니벨룬은 굳이 사기꾼 일당이 아니었어도 스스로 화형대에 올라갈 사람처럼 보였다.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두서없이 내뱉는 말에는 자신의 안위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으니까.
“이미 땅이 오염된 겁니다. 단순히 흉작에만 그치지 않을 겁니다.”
“······.”
아직 화형대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며 발광하는 촌장.
그러나 니벨룬은 주위의 모든 것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이것 좀 보라며 지도 하나를 꺼내어 블라드에게 들이밀 뿐이었다.
“이것, 이것 좀 보십시오.”
“어째 갈수록 더 수상해지네.”
니벨룬이 내보인 지도는 일개 여행자가 지니고 다니기에는 너무나 상세한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대략적인 길의 위치뿐만 아니라 강, 언덕의 높이, 근처에 있는 마을의 규모까지.
단순한 여행 목적으로 들고 다닌다기에는 수상쩍은 것이었다.
“딱 첩자들이 들고 다니면 좋을 것 같은 지도인데.”
그러나 블라드의 의심쩍은 눈초리에도 니벨룬이라는 남자는 귀만 쫑긋거릴 뿐, 딱히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블라드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동그라미들은 뭔데.”
“역병들이 퍼진 상태를 표시한 겁니다.”
상세하게 그려져 있는 지도 위에는 새까만 동그라미들이 가득했다.
니벨룬이 그려 놓은 것처럼 보이는 동그라미는 지금 블라드와 쟝이 있는 마을까지도 표시된 참이었다.
“그런데 이거······.”
한참 그 지도를 들여다 본 블라드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역시 이상하죠?”
블라드가 알아본 것이 기쁘다는 듯 니벨룬은 지도 위에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것만 본다면 아무래도 교황청이 제대로 된 정화를 하지 않은 것 같지 않습니까?”
“······.”
지도 위에 동그라미들은 어느 한 곳을 향할수록 커지고 많아지며 또한 짙어지고 있었다.
그 동그라미들이 가리키는 곳은 우트만 남작령의 주도인 모시암이었다.
※※※※
아직 어린 부제가 침낭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한 이른 아침.
타다만 장작이 희뿌연 연기를 내는 모닥불 사이에서부터 새벽빛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것 보십시오. 제가 도움이 될 거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마법사가 맞기는 맞았네.”
괜스레 다 식어버린 모닥불을 뒤적거리던 블라드는 니벨룬의 말에 동의하기 싫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있었다.
일행의 주위를 돌듯 둘러쳐진 커다란 원.
어제 니벨룬이 불침번을 서지 않아도 된다면서 그려 놓은 그 원은 블라드의 감은 왼쪽 눈으로 보았을 때도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왜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모시암에까지 가서 뭘 하겠다는 거야.”
니벨룬의 애걸과 쟝의 부탁으로 일단 모시암까지는 같이 가기로 한 일행.
그러나 블라드는 그 안에까지 이 수상한 마법사를 집어넣기 위해서는 기사인 자신의 보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 안 하면 절대 못 들여 보내줘.”
“오······.”
블라드의 말에 빈틈이 보인 것을 느낀 니벨룬은 호박색 눈동자를 반짝이기 시작했다.
“들여보내 주시는 겁니까?”
“정확히 왜 들어가려는 지 말부터 해보라니까.”
이미 도시 모시암에는 혹시나 모를 사특한 존재를 찾기 위해 북부정교회의 성기사들이 모여있을 것이다. 주교 안드레아가 자신의 어린 부제를 모시암으로 보내는 이유도 결국 그들과 함께 움직이며 경험을 쌓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미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역병과 저주를 쫓는 마법사인데······.”
블라드는 비록 자신을 불태우려 했던 마을이었지만 마지막까지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외쳤던 니벨룬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제대로 된 설명 없이 곧장 본론에 들어가 버린 경고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니벨룬을 비난했지만,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해야 할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왜냐하면, 죽음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때와 마찬가지로 니벨룬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말들을 정리하지 않은 채 내뱉고 있었다.
아무래도 변하기 힘든 천성 같아 보였다.
“죽음이 왜?”
“죽음은 모르는 것이지 않습니까?”
가슴에 진득이 담아두고 있었으나 그것을 밖으로 내뱉을 때는 너무 단편적인 것들뿐.
블라드는 니벨룬이라는 수인족 사내가 뒷골목에서 살았던 자신보다도 더 화법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신비란 모르는 것 안에 있거든요. 미지의 세계 속으로 숨은 것입니다. 저희는 평생 그것을 찾아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저희?”
다만 니벨룬은 이번의 질문만큼은 어떠한 오해도 없이 입이 아닌 손을 통해 대답해주었다.
“수인족들?”
“네, 네. 언제 어디서나 갈 곳 없이 떠도는 저희들이지요.”
니벨룬이 가리킨 것은 머리 위에서 쫑긋거리고 있는 자신의 귀였다.
“저를 모시암으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그곳에는 죽음이 있고 죽음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에 꼭 보고 싶습니다.”
“······.”
신비를 찾아 죽음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수인족 마법사.
이제야 완전히 꺼져버린 모닥불 위로 오늘 첫 태양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 빛에 비치는 니벨룬의 호박색 눈동자는 흐릿한 그의 화법과는 다르게 또렷한 색을 간직하고 있었다.
-조만간 흉작에 이어 역병이 돌지도 모른다는 첩보가 있다. 너는 그것을 특별히 조심하도록 해라.
요제프는 떠나기 전 블라드에게 자그마한 목소리로 이것을 조심하라고 속삭여주었다.
그 소문은 은퇴한 기사 라문드가 들고 온 것이었으며 어설픈 교황청의 문양이 새겨져 있던 쪽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일단 그곳에 있을 책임자에게 말은 해주도록 하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고 감사합니다. 기사님!”
때를 가리지 않은 니벨룬의 큰 목소리 덕에 작은 침낭에서 쟝이 퉁퉁 부은 얼굴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검은 말과 어린 나귀, 그리고 고양이 하나.
그 셋이 지금 오늘의 태양 아래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안개 낀 야영지에서 울려 퍼지던 어린 부제의 노래 소리.
그 소리 속에서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블라드에게 목소리는 말했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혹시 지금 오러를 쓸 수 있겠냐.]“지금 나랑 장난해요?”
[들어봐라.]안개 너머에서 검은 눈물을 흘리던 여인.
그 여인은 자신의 아이를 찾아 울던 가엾은 여인이었다.
[저 저주를 깨기 위해서는 신의 뜻을 휘두르는 구마사제,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기사. 그리고 세상의 규칙을 거스르는 마법사가 필요하다.]목소리는 말했었다.
오직 단단히 세계를 굳힌 이 셋만이 저 사특한 존재로부터 여인의 눈물을 끊어낼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