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61
어둠 속에서 부르는 소리 있어 (3)
뾱뾱뾱-뾱!
누구는 해가 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 했다.
그리고 지금 도시 모시암에서는 가장 어두울 시간에 무거운 안개를 헤치는 두 남자가 있었다.
아주 경망스러운 소리와 함께.
“이거 언제까지 당겨야 하는데?”
“찾을 때까지입니다.”
“언제 찾는데?”
“보일 때까지겠죠?”
“······.”
쉴 새 없이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블라드의 이마에는 이미 자그마한 혈관이 떠올라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훈증기였으나 무섭도록 뻑뻑한 것이 블라드의 악력으로도 오래 쥐고 있기는 힘든 물건이었다.
“어쨌거나 빨리 찾아야 한다고. 지금 우리 상태가 영 수상하거든.”
“동의하는 바입니다.”
블라드의 말처럼 지금 둘의 모습은 경비병에게 걸리기라도 한다면 감히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수상한 차림이었다.
기이해 보이는 까마귀 가면을 쓴 니벨룬과 마스크로 입가를 가린 블라드.
지금 이들의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 것이나 둘에게도 이렇게 차려입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마스크는 벗으시면 안 됩니다. 훈증기 안에 있는 것은 독초(毒草)예요.”
“알았다니까.”
은근슬쩍 마스크를 벗으려 하는 블라드에게로 날카로운 경고가 날아들어 왔다.
거짓을 불태우기 위해서는 그보다 악독(惡毒)한 것이 필요한 법.
거짓된 안개를 불태우는 훈증기 안에는 니벨룬이 특별히 제작한 독초 가루들이 가득했다.
‘빌어먹을 고양이 자식.’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차마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지금과 같이 낯선 상황 앞에서는 블라드라 할지라도 길잡이가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마법사인 니벨룬은 길잡이를 해낼 충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잠시만요.”
“찾았어?”
잠시 멈추라는 니벨룬의 말에 블라드는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기사의 자존심이 있어 말하지는 못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뻑뻑한 훈증기를 잡아당기는 일은 블라드로서도 충분히 버거운 일이었다.
“······네. 찾은 것 같습니다.”
니벨룬은 긴장한 눈빛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위에서 춤추고 있는 자그마한 봉제 인형.
만든 사람의 손재주가 영 좋지 않아 단추로 만든 눈이 덜렁거리고 있었으나 춤추는 움직임만큼은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저기로군요.”
“흠.”
춤추는 인형이 가리키고 있는 곳.
골목 벽에 바짝 기댄 블라드와 니벨룬은 인형의 뭉특한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찾아온 건 맞는 것 같네.”
“그러게 말입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도시의 변두리.
두 사람의 시선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바람에 흔들려 천천히 삐걱거리고 있는 표지 하나가 있었다.
-성 포커스 공동 묘지-
거짓된 안개를 불태우며 인형의 안내를 따라온 그곳은 도시 모시암에 마련되어 있는 공동묘지였다.
“왜 안 들어가십니까?”
“계속 네가 앞장섰잖아.”
“목적지를 찾았으니 이제 되었습니다. 앞장서시죠.”
“······생각해보니까 나는 고양이가 싫었던 것 같아.”
역시 개가 최고라는 투덜거림과 함께 자리를 바꾼 블라드와 니벨룬.
묘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입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
모시암의 아이들에게 퍼졌던 기이한 저주는 다음과 같은 증상을 동반하고 있었다.
깊은 잠, 같은 꿈, 그리고 점점 내려가는 체온.
그리고 여기, 지금 막 깨어난 어린 부제에게도 같은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추우세요? 이불 좀 가져다드릴까요?”
“흐으으으······. 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몸서리를 치는 쟝을 보며 주위에 있던 성기사들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곳 모시암에는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가득했고 그들이 토해내듯 말하는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은 지금 쟝이 보이는 행동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혹시 꿈속에서 무언가 수상한 낌새를 느끼지는 못했나요?”
떨고 있는 쟝의 어깨를 감싸 안은 유스티아는 소년이 겁먹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나 그렇게 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보여 버렸다.
침대를 둘러싸고 있는 성기사들과 자신이 하는 말을 빠짐없이 적어 내리는 사람들.
아무리 멍청한 아이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그게.”
“말해보세요.”
유스티아의 목소리는 따뜻했으나 쟝의 입술은 그저 우물거리기만 할 뿐.
낯선 환경과 사람들 속에서 불안을 느끼고만 어린 부제는 낯익은 금발 머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치 도움을 구하는 듯한 소년의 눈빛에 블라드는 조용히 침대맡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해보세요. 부제님. 말하시지 않으면 도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블라드는 불안에 떠는 쟝의 어깨를 붙잡고는 곧은 눈빛으로 어린 부제를 바라보았다.
“보세요. 저는 아직 부제 님을 놓지 않았습니다.”
안드레아의 부탁으로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해 준 인도자.
너는 아직 내 소관이라 말하는 블라드의 말에 흔들리던 쟝의 눈빛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사특한 기운은 잘 모르겠지만······.”
“네.”
“확실히 느껴지는 건 있었습니다.”
평범한 아이가 아닌 주교 안드레아의 직속 부제.
오랫동안 신의 품에서 자라온 소년이 증언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모닥불, 그 안에서는 분명 신성함이 느껴졌었습니다.”
“······네?”
갑작스러운 쟝의 대답에 질문하던 유스티아도, 뒤에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귄터도 모두 하던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고 안락했던 모닥불.
어린 부제는 그 안에서 신성한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신성한 기운이라니.”
“이게 도대체.”
불길한 꿈에 섞여 있는 신성한 기운이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쟝의 대답에 모두가 동요하는 가운데 홀로 재빨리 움직이는 남자가 있었다.
“익!”
“수고하셨습니다.”
쟝은 갑작스레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따끔함에 새된 비명을 질렀지만 정작 쟝을 감싸 안은 블라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시고. 이제 좀 쉬세요.”
“······네.”
당황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적이는 쟝을 보며 블라드는 서둘러 이불을 덮어주었다.
어린 부제를 쓰다듬어주는 블라드의 손끝에는 어느새 축축이 젖어있는 머리카락 몇 가닥이 들려있었다.
쟝의 머리카락이었다.
※※※※
“제가 건 저주가 가리키는 곳이니 확실합니다. 앞장서시죠.”
“알았다니까.”
지금도 춤추고 있는 인형에는 쟝의 머리카락이 묶여 있었다.
불길한 마법사, 죽음을 쫓는 역병 의사.
꿈으로 전염되는 저주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 니벨룬이 선택한 방법은 자신도 쟝에게 저주를 거는 것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조금 있으면 동이 틀 테니까요.”
“나도 안다니까.”
정체 모를 꿈의 끝에 자신의 실을 묶어낸 니벨룬은 블라드가 원한대로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방금 니벨룬이 말한 것처럼 블라드가 앞장서야 할 때였다.
‘지원을 불러올 수도 없고······.’
소속이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문제였다.
모시암을 감도는 저주는 안개 속에 숨어 있었고 희미한 거품처럼 곳곳을 떠도는 중이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면 애써 찾아낸 이곳조차 조만간 무용지물이 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저는 벽을 못 넘는데요?”
“너 고양이 아니야?”
“고양이가 아니라 수인족입니다.”
“······지랄을 하네. 진짜.”
날렵하게 공동묘지의 벽을 올라탄 블라드였지만 밑에 있던 니벨룬은 눈만 껌뻑거리며 가만히 서 있는 중이었다.
“끄힉!”
“손 많이 가는 놈이네.”
니벨룬을 들쳐업다시피 해 벽을 넘은 블라드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방금의 짜증도 단박에 가라앉혀 버리는 공동묘지의 분위기.
자욱이 깔린 안개 아래에는 수없이 많은 망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안개가 더 짙어졌어.’
점점 짙어지는 불길함에 항상 정신한 구석이 빠져있는 니벨룬조차도 바짝 긴장한 채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딛고 있는 땅 아래에서 자그마한 진동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부르는 소리 있어 내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면······.
비석 사이에 숨어 숨죽이고 있던 둘에게로 들려오는 주문 소리.
누가 들어도 수상한 주문은 묘지의 가장 안쪽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가자.”
“네.”
저주를 풀고 싶은 기사와 죽음을 보고 싶은 마법사가 동시에 눈을 빛냈다.
들려오는 주문을 따라갈수록 인형의 춤사위도 격해지고 있었다.
-당신과 함께한다면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그 눈에도 현혹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셋, 넷?”
“제가 봤을 때는 넷입니다.”
동이 터오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의 공동묘지.
그곳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는 마법진이 있었다.
망자들의 땅을 겉도는 정체 모를 사내들이 그려놓은 마법진이었다.
“주문을 통해 진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완성하기 전에 막는 게 좋다는 말이군.”
희미하게 들리는 주문이 진행될수록 땅 위에 그려놓은 마법진이 점점 빛나고 있었다.
그 마법진이 빛날수록 블라드의 마음에도 조급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래도 적을 알고 상황을 파악해야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어둠을 가르는 오귀스트의 가르침이 블라드에게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묘지를 떠도는 사내는 넷.
그중에서 진 안에 들어가 있는 자는 둘.
그리고 마법진 안에 놓인 정체 모를 항아리 하나.
“저 항아리 깨트릴 수 있겠어?”
“항아리만이라면요.”
“좋아.”
블라드의 말에 이번에는 배낭에서 주섬주섬 새총을 꺼내 드는 니벨룬.
준비를 마쳤다는 듯 귀를 쫑긋거리는 그를 보며 블라드는 가만히 왼쪽 눈을 감았다.
‘기선제압은 화려하게.’
깊은 심호흡 속에서 예전 목소리가 해주었던 조언 하나가 블라드의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감고 있는 블라드의 왼쪽 눈에는 그 어떤 색보다 화려한 황금빛이 깃들어 있었다.
※※※※
“······!”
“누구냐!”
이곳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황금빛 줄기 하나.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블라드의 일격은 사내들이 감히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컥!”
‘한 놈!’
진 밖에 있던 둘 중 하나를 베었다.
그는 블라드가 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막아!”
“아니! 주교님부터!”
진 안에 있던 남자가 다급히 검을 빼 드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늦었다.
빠악-!
‘둘!’
두 번째 사내는 블라드가 오는 것은 보았으나 미처 검을 뽑지 못했다.
그는 화려한 블라드의 색에 현혹되고 말았다.
“성물을 지켜라!”
-꺄아아아악!
일행의 대장인 듯한 남자가 서둘러 항아리를 가리켰으나 수상한 항아리는 니벨룬의 몫이었다.
쏘아낸 새총 사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날카로운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쨍강-!
여인이 울부짖는듯한 소리와 함께 깨어진 항아리.
그 안에서부터 퍼지는 향기는 청명한 허브의 냄새였다.
“누군가 했더니!”
순식간에 넷 중 둘을 베어 넘기고 수상한 항아리까지 깨버린 블라드.
무리의 대장인듯한 남자의 앞에 선 블라드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사나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겨눠진 검을 보며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남자는 블라드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여기는 무슨 일입니까. 피에르 주교!”
“이런 젠장!”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유일하게 제압되지 않은 사내가 다가가려 하였으나 이미 니벨룬의 새총이 그를 겨누는 중이었다.
“당신이 여기서 저주를 퍼트렸습니까!”
“나는 신실한 신의 종이자 교황청의 주교다! 그따위 일을 저질렀을 것 같나!”
“그러면 여기 왜 있는데!”
깨어진 항아리와 제압된 사내들.
그리고 점점 빛을 잃어가는 삼각형의 진까지.
피에르는 자신이 계획한 모든 일을 망쳐버린 블라드를 향해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저주를 해소하기 위해 온 거란 말이다! 이 멍청한 녀석!”
“그 말을······.”
믿을 리가 있나.
당신은 거짓된 면죄부를 팔고 나에게 그 죄를 덮어씌운 사람인데.
두드드드득-
그러나 블라드는 입가에까지 다다른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이제 다 글렀다! 이게 네놈 때문이야!”
“······!”
가장 어두운 하늘 아래서 점점 빛을 잃어가는 삼각형의 진.
그 아래서부터 느껴지는 진동이 점점 커지며 기어이 블라드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당신 여기서 도대체 뭐한 거야!”
“끄아아악!”
블라드의 목소리마저 삼킬 정도로 거대한 진동.
그러나 그 진동마저 가르는 누군가의 비명이 있었다.
“살려줘!”
니벨룬의 새총이 겨누고 있던 사내.
그가 지금 허공에 들린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의 발끝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촉수 더미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클리포트(Qliphoth)의 나무다! 거꾸로 말하는 신의 뜻!”
기어이 망자들의 땅을 뚫고 나온 거대한 몸체.
가지는 땅으로 뿌리는 하늘로.
그리고 빛 대신 어둠을 먹는 잎사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세상의 법칙을 온통 거꾸로 매달고 있는 한 그루의 나무였다.
“주교님-!”
파아아악!
허공에서 애처로이 울고 있던 사내가 기어이 뿌리를 따라 반으로 찢어지고 말았다.
후드득 쏟아져 내리는 내장들이 깨어진 항아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저게 도대체······.”
“이제는 도망도 못 치겠군!”
블라드와 니벨룬, 그리고 피에르만이 서 있는 망자의 땅.
그 아래서 그려진 삼각형의 진은 그저 희미한 빛만을 내뿜고 있을 뿐.
“살아남고 싶으면 도와라! 진을 완성해야 해!”
“블라드 님! 빨리합시다! 여기 할아버지 말이 맞아요!”
진을 완성해야 한다며 소리치는 피에르의 말에 사태를 파악한 니벨룬은 서둘러 블라드를 삼각형의 꼭짓점 한 곳에 세워놓았다.
“뭐 어쩌라고!”
“오러를 뿜어라!”
재빨리 깨어진 항아리 자리를 찾아 들어간 니벨룬.
자신이 베어 넘긴 사내의 자리에 서 있는 블라드.
“네놈이 그렇게 자랑하던 자신만의 세계를 불러일으키란 말이다!”
그리고 기도문을 외우는 피에르.
삿된 나무 앞에 서 있는 세 사람.
-어둠 속에서 부르는 소리 있어 내 그곳으로 고개를 돌릴지라도······.
목소리는 말했었다.
사특한 저주를 깨트릴 방법은 오직 세 가지뿐이라고.
-당신과 함께한다면 나를 지켜보는 그 눈에도 현혹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기사.
세상의 규칙을 거스르는 마법사.
그리고 신의 뜻을 휘두르는 구마사제.
가장 어두운 하늘 아래서 외치는 기도문이 모시암의 안개를 따라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빛나는 삼각형의 진.
그것은 삿된 존재를 내쫓는 퇴마진(退魔陳)이었다.
맞닿은 세계
마땅한 주인이 없어 슬픈 도시가 있었다.
일곱 가문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으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도시.
아이 잃은 부모들조차도 숨죽여 우는 도시였지만 그곳에는 밤 깊은 지금까지 불을 밝히고 있는 집무실이 하나 있었다.
“······찾을 수가 없군.”
흐릿한 촛불 아래서 눈을 찌푸리고 있던 귄터.
그는 지금 오래되어 보이는 고서를 펼친 채 무엇을 찾느라 집중하는 중이었다.
“도저히 맞는 것들이 없어.”
그가 지금 펼친 두툼한 책은 구마전서(舊魔全書)라는 것으로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모든 마(魔)들을 기록해놓은 책이었다.
그러나 교단의 보물이나 다름없는 책을 뒤적이면서도 귄터의 표정은 도통 풀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새로운 마(魔)인가?”
모든 사특한 것들은 그 흔적을 남긴다.
오랜 세월에 걸쳐 변할 수 있고 의도를 통해 숨길 수 있지만, 그 본류만은 숨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귄터는 구마전서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야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 모시암을 감도는 사특한 기운은 교단의 긴 역사에서도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존재라는 것을.
쿠우우우웅-!
“큿!”
책을 덮으며 한숨을 내쉰 귄터는 순간 발밑에서 느껴지는 커다란 진동에 비틀거리며 책상을 붙잡고 말았다.
“지진인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떨어져 내리는 집무실의 집기들.
그러나 귄터는 지금 발밑에서 울리는 진동보다도 안개를 타고 퍼지는 섬찟한 기운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
다급히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본 귄터.
그가 창문을 열자 처음으로 맞이한 것은 따끔하게 달라붙는 안개의 느낌이었다.
마치 날이 선 듯한 그 느낌에 귄터는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쿠구구구궁-!
갑작스러운 사태에 서둘러 성기사들을 깨우려 했던 귄터였지만 이윽고 벌어진 광경은 그조차도 그만 넋을 놓게 만드는 것이었다.
“장엄······구마(莊嚴驅魔)?”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
저 멀리 도시의 변두리에서 그 어둠을 꿰뚫는 빛의 기둥이 있었다.
아직은 옅고 가늘었지만 분명 하늘에 닿은 그 기둥은 안개로 만들어진 바다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등대였다.
※※※※
“······!”
입으로는 쉼 없이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지만, 피에르의 눈만큼은 두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비천한 수인족 마법사와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금발 녀석.
그러나 둘을 바라보는 피에르의 눈에는 분노가 아닌 그저 색다른 이채만이 감돌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야······.’
피에르에게 있어서도 지금의 상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땅속에서 갑작스레 튀어 오른 사특한 나무도 그랬지만 그것보다 피에르를 놀라게 하는 것은 하늘에 맞닿아 있는 빛의 기둥이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어쩌라고!”
여기까지 뻗으리라 상정한 퇴마진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퇴마진 위로 떠 오른 장엄구마의 기둥은 피에르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고 빛나는 것이었다.
“저희가 서 있는 이 진(陣)은 일종의 증폭진입니다! 모서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 힘을 몰아주는 것입니다!”
당황스럽기는 니벨룬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신비를 쫓는 마법사는 지금 자신이 밟고 있는 진(陣)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베라는 것이지요! 저놈을요!”
피에르의 기도가 커질수록 장엄구마의 빛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깨어진 항아리를 보며 눈치껏 자신의 역할을 깨달은 니벨룬은 서둘러 수인(手印)을 짚으며 신성의 빛을 신비의 선으로 잇기 시작했다.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되는 겁니다!”
점과 선이 맞닿고 선과 점이 이어지는 삼각형.
그리고 그것들이 이어지는 마지막 모서리에는 바로 블라드가 서 있었다.
‘끄으으으!’
잡고 있는 세계수의 검이 뜨거워진다.
다만 그 뜨거움은 고통이 아닌 깨어지려 하는 껍질의 울부짖음이었을 뿐.
커다란 진동이 울리는 것은 도시 모시암뿐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경계를 접한 블라드의 세계도 지금 함께 흔들리는 참이었다.
‘이거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안팎으로 맞닥뜨린 사태에 블라드는 덜컥 겁이 났지만 그렇다 해서 쥐고 있던 검을 놓을 수는 없었다.
끄르르르아아아—!
이변을 알아챈 거꾸로 선 나무가 울부짖기 시작했으니까.
안개를 구름으로, 땅을 하늘로 삼은 클리포트(Qliphoth)의 나무는 옳은 방향으로 올라가는 빛의 기둥을 향해 날카로운 뿌리를 치켜들었다.
“블라드 님!”
“이 멍청한 녀석! 빨리 휘둘러라!”
기도문과 주문식 사이에서 피에르와 니벨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성과 신비의 세계는 내면에 있었고 다가오는 위협은 현실에 있었으니 지금 그것을 쳐 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파랗게 달아오른 블라드의 검뿐이었다.
“이런 젠장!”
어둠보다 더 짙은 뿌리의 그림자.
머리 위로 드리워진 파멸의 시작을 본 블라드는 이를 악물고는 검을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새까맣게 다가오는 세상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이다.
어른이 되었다고 믿었지만 아직은 어색한 나에게도.
“······!”
경계에 접한 신성과 신비 덕분에 마구 뒤흔들리던 블라드의 세계.
그 세계 깊은 곳에 감춰져 있던 거품 하나가 드디어 수면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흔적만이 남아있는 그 세계의 이름은 바로 목소리였다.
[너의 세계에 높이를 더해라!]나의 세계는 점.
너와 닿은 것은 선.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은 면.
그것들이 기대면 만들어지는 것은 또 다른 세계.
소년의 세계는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읏!”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의 조언을 따라 블라드의 세계가 점점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접해진 면을 따라 신성을 접고 신비를 접고 나의 세계를 접어 만들어낸 삼각뿔.
그렇게 하늘을 향해 올라서는 블라드의 세계는 마치 나무의 형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크아아아-!
하늘에 닿았던 장엄구마의 빛이 급격히 좁혀지기 시작했다.
마치 삼각뿔의 가장 높은 곳에 맺히는 빛무리처럼.
그러나 좁혀진 만큼 날카로워진 빛은 여전히 블라드의 검 끝에 매달려 있었다.
“끄으으으!”
태산보다 무거운 빛을 짊어진 블라드는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자그마한 조언과 격려일 뿐.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면 누구라도 옳게 휘두를 수 있다.
“으아아아!”
검의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 가느다란 선.
하늘에 닿았던 빛이 도시 모시암의 위를 가로지르며 힘차게 하나의 반원을 만들었다.
크아아아아아!
신성에서 시작해 신비가 이끌고 가능성이 그어낸 궤적.
온통 거꾸로 되어있는 나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을 향해 가련한 뿌리들을 내뻗을 뿐이었다.
촤악-!
동이 터오는 도시의 공동묘지 위.
그곳에는 지금 검붉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온통 거꾸로 되어있었으나 흐르는 피만큼은 온전히 땅을 향해 내리고 있었다.
※※※※
“······이건 도대체.”
서둘러 성기사들을 이끌고 공동묘지에 도착한 귄터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온통 검붉은 핏물로 가득한 공동묘지.
딛는 땅이며, 보이는 묘비며 모조리 새빨갛게 칠해진 땅 위에서 귄터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블라드 경.”
“끄응.”
터오르는 동이 여전히 희미하게 남아있는 퇴마진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헐떡이며 쓰러져 있는 세 사람.
그 셋 중에서도 가장 큰 부담을 짊어졌던 블라드는 실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누워서 귄터를 맞이했다.
“범인을 발견했습니다.”
“무슨 범인?”
“아이들을 데려간 범인이요.”
귄터는 블라드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 보이는 것은 반쯤 갈라져 있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마치 백 년은 자란 것만 같은 커다란 나무였다.
“······숨을 쉰다?”
그러나 귄터는 그 나무를 보며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핏물을 뱉어내는 그 나무는 이곳에 있는 성기사들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기이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으니까.
“쿨럭······. 흐. 이 멍청한 녀석.”
성기사들 모두가 클리포트(Qliphoth)의 나무에 정신이 팔린 사이, 피에르 주교는 기어 오듯 지친 몸을 이끌고 와 조용히 블라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옛날 소드마스터는 신의 뜻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는데, 너는 고작 주교 한 사람의 신성조차 감당하지 못했구나.”
“······.”
나무를 갈랐으니 기뻤고 살았으니 다행이었으나 블라드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숨어들었으니 이번에야말로 끄집어내기 쉽지 않을 거다. 이제 어쩔 거냐?”
“좀 닥치시지.”
지금도 피를 토해내고 있는 뿌리의 옆에는 짙게 자리 잡은 핏자국이 하나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잡아끈 듯 주욱 늘어진 핏자국 끝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구멍이 하나 파여 있었다.
감히 쳐다보기도 두려운 그 깊은 구멍은 온통 거꾸로 된 나무가 기어올랐던 곳이기도 했다.
“······후.”
불안의 구멍을 바라보던 블라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나무는 놓치고 옆에 있는 피에르는 이죽거리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블라드는 조급해 하지 않기로 했다.
[잘했다. 처음인데 이 정도면.]지금은 다시 들리지 않지만 아직 귓가에 남아있는 목소리의 격려는 분명 잘했다고 말해주었었다.
가만히 그 소리를 되새겨 본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떠오르는 오늘의 아침 해가 블라드의 금발에 머무르고 있었다.
※※※※
제국의 역사보다도 더 오래된 그 숲이 있었다.
정확히는 북부의 우트만 남작령과 도브레치티가 있는 중부 변경지대를 접하는 숲.
마치 손톱으로 긁어놓은 듯 정확히 두 지역을 가르던 그 숲은 너무나 넓고 깊어 모험가들조차 들어가기를 꺼리는 그런 곳이었다.
“아아······.”
그곳 한가운데 있는 무너져 가는 저택에서 어느 여인의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떠오르는 아침 해와 함께 북쪽을 바라보고 있던 여인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두 손을 모으던 중이었다.
“도대체 누가 내 아이들을 괴롭혔을까요.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들인데.”
정당한 거래를 통해 겨우 뿌린 씨앗이었건만.
북쪽을 향해 있는 그녀의 눈빛에는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것은 마치 다친 자식을 바라보는 어미의 눈빛과도 같은 것이었다.
“안 되겠어요. 제가 직접 가봐야겠어요.”
분명 서 있었으나 땅을 딛지 않은 그녀의 발끝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마치 어딘가에 묶인 듯 둥실 떠 있는 그녀의 발끝은 살아있는 것들이 거쳐야 할 땅의 존재를 거부하고 있었다.
“같이 가주실 거죠? 저기 북쪽에는 제 아이들뿐만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것도 있답니다.”
무너져 가는 저택 안에는 죽었어도 죽지 않은 자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자는 따로 있었다.
“저기 용이 있어요. 당신이 죽이려 했던 그 용이요.”
“······.”
속삭이듯 전하는 그녀의 말에 천천히 눈을 뜨는 남자.
그러나 그가 눈을 뜨는 이유는 같이 가자 말하는 그녀의 말보다 귓가에 들려오는 하나의 단어 때문이었을 것이다.
“······용.”
“그래요. 용이요.”
오랫동안 쓰지 않은 듯 잔뜩 갈라져 있는 남자의 목소리.
그러나 듣기에는 거북했어도 외치는 단어만은 확실했으니.
용이라는 단어에 감았던 눈을 뜬 남자.
새하얀 백발이 가리고 있는 그 눈에는 아무런 빛도 담지 못한 회백색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