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63
다시 돌아온 사람들 (2)
남자는 걷고 소년은 뒤따른다.
어둠을 헤쳐나가는 남자의 발자국 뒤로 새로이 소년의 발자국이 겹치고 있었다.
둘의 뒤를 따르고 있는 별빛만이 겹쳐져 있는 발자국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그 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요.”
[그래?]낯선 길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었고 앞서 있는 목소리의 뒷모습은 신기하리만큼 가까워지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싼 어둠마저 희미하게 느껴질 때 문득 별빛에 반짝이는 검 하나가 블라드의 시야로 들어왔다.
색색의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은색의 검.
그러나 화려함 뒤에 감춰진 익숙한 형태만큼은 블라드의 기억 어딘가를 자극하고 있었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데. 그거 그쪽 거에요?”
[그쪽이라니. 굉장히 없어 보이는 호칭인데.]“그럼 어떡해요. 딱히 뭐라 부를만한 이름이 없는데.”
어깨를 으쓱이는 블라드를 보며 목소리는 그만 웃고 말았다.
하긴 생각해보니 우리는 아직 이름조차 나누지 못한 사이였다.
“여전히 이름이 기억이 안 나요?”
[글쎄.]“뒤통수를 맞아도 아주 세게 맞으신 모양이네. 이러면 여기저기 찾아다닌 보람이 없어요.”
[그럼 한번 말해봐라. 여태껏 네가 찾아본 내가 누구였는지.]앞서가던 목소리가 우뚝 멈춰서며 블라드를 돌아보았다.
가까이 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희미해 보이는 그의 모습.
촛불같이 일렁이는 그의 모습에 블라드는 서둘러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일단은 정령들이랑 관계가 있거든요. 아무래도 당신은 길 잃은 정령들을 여기저기 옮겨 다닌 것 같거든요.”
[계속해봐.]대답을 유도하는 목소리를 따라 블라드는 생각에 빠진 채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멀기만 하던 그의 뒷모습이 조금은 더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다른 종족들이랑도 관계가 있어요. 엘프나 드워프들이요. 당신의 흔적이 거기까지 연결되어 있었어요.”
[그리고.]“데어마르의 하얀 뱀이 그쪽을 알아본 걸 봐서는 하이날의 초대 가주와도 연관이 있어요.”
대답을 하면 할수록 블라드의 발걸음이 천천히 목소리를 따라잡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블라드는 대답하는데 정신이 쏠려 점점 가까워지는 목소리와의 거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블라드는 그동안 항상 생각해왔었다.
목소리는 어떤 사람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검은 번개를 타고 나에게까지 흘러들어온 것일까.
“제가 쓰는 검술이요.”
[응.]“이거 황실에서 쓰는 검술이라던데요?”
[그래? 그게 그렇게 되었나?]정체 모를 목소리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검술은 황실의 기사들에게만 전해진다는 귀하디귀한 검술.
황실의 검이라는 말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 목소리를 보며 블라드는 그만 입술을 우물거리고 말았다.
“저기 혹시······. 아니죠?”
[뭐가.]차마 밖으로 내뱉기에는 너무 대단한 단어 하나가 블라드의 목구멍에 걸려있었다.
여태까지의 여정을 통해 얻은 단서들은 다들 하나같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고 그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단 한 명뿐이었다.
내가 실수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큭!”
[다 왔다.]한참 고민하던 블라드는 어느새 바짝 다다른 그의 등에 이마를 부딪치고 말았다.
어느새 가까워진 남자와의 거리는 이제 겨우 발걸음 하나 차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마터면 나도 길을 잃을 뻔했다. 누가 이었는지는 몰라도 꽤나 거칠게 붙여놓았어.]바로 앞에 있는 목소리의 등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블라드는 저 멀리 허공에 떠 있는 커다란 나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가지는 땅으로 뿌리는 사납게 하늘로 솟구친 괴이한 형상의 나무였다.
“······방금까지는 보이지도 않았거든요.”
[타자(他者)의 존재라는 것이 그래. 바로 옆에 있어도 안 보일 수 있고 저 멀리 있어도 선명할 수 있거든.]나라는 세계에 경계까지 와닿은 블라드는 그제야 맞닿은 다른 세계를 넘볼 수 있었다.
그곳은 잠들어 있는 쟝의 세계.
현실에서는 바로 옆에 누워있었으나 인연을 따라온 어린 부제의 세계는 이토록 멀리 있었다.
[내 이름은 키하노다.]“네?”
[그냥 키하노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다른 이름들은 전부 마음에 들지 않거든.]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악수를 건네는 목소리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나의 이름을 찾은 사내는 자신을 키하노라 소개하고 있었다.
“······블라드예요.”
[그래. 블라드. 만나게 되어 반갑군.]온통 뒤틀려버린 나무 앞에서 남자와 소년이 이름을 나누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 어느 한 곳에서도 겹칠 수 없는 둘이었지만 맞닿은 세계에서만큼은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다.
※※※※
[우리가 쟝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 알아챌 거다. 너도 그랬잖아.]“저는 그쪽이 말을 걸어서 안 거였든요.”
쟝의 세계 앞에 선 두 명의 기사는 깊이 심호흡을 하며 세계의 경계면으로 발을 내디뎠다.
키하노는 말했다.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큰 위험을 내포하는 행동이라고.
“가죠.”
[그래.]하지만 가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길이었다.
지금도 쟝의 세계에 떠 있는 기이한 나무는 천천히 내려앉으며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여긴 뭐야.”
[현혹되지 마라.]굳은 각오와 함께 내디딘 발끝.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이었건만 주위는 어느새 회백색 벽돌로 가득한 복도가 되어있었다.
[교회로군. 하긴 부제라고 했으니.]“바르나의 교회 같아요. 한 번 와본 적이 있거든요.”
[잘 아는 건물이냐.]“······지하 정도만?”
[모르는 곳이군.]쟝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은 바르나의 교회였다.
평생을 부제로 살아온 쟝에게 있어서 가장 선명한 장소는 바르나의 교회일 테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교회 하면 예배실이겠지.]“쟝이 그곳에 있을까요?”
[그거야 가봐야 알겠지.]지금의 둘에게 있어 가장 최우선인 목표는 바로 쟝의 안전일 것이다.
3일 후면 먹혀버릴 어린 부제의 세계는 지금도 어딘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울어지는 중이었다.
[일단 가보자.]“예배실은 1층이에요.”
구조를 통해 자신들이 지하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 둘은 서둘러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앞장설게요!”
[그래.]바르나의 교회는 블라드에게 있어서도 의미 있는 곳이었다.
안드레아에게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이름을 건네받은 곳이기도 했으니까.
블라드는 저주받은 여인의 관을 옮겼던 기억을 떠올리며 서둘러 계단이 있는 위치를 찾아내었다.
“저기요!”
[좋아.]기억보다 훨씬 길어져 있는 복도 끝에 다다른 블라드는 익숙한 문을 박찼다.
쾅!
이미 알아챘을 테니 조심스러운 태도는 의미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빠른 행동일 뿐.
나가떨어지는 문짝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나선형의 돌계단.
그러나 그 모습은 블라드의 기억과는 전혀 딴판인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거 왜 이렇게 높아?”
[아무래도 쟝이라는 아이는 지하를 무서워했나 보다.]끝없이 위로 솟아있는 돌계단은 블라드가 관을 들고 내려왔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마치 1층과 지하를 아예 갈라놓는 듯한 계단의 모습에 블라드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일단 올라가자.]어린 부제가 간직한 공포만큼이나 길어진 돌계단을 두 명의 기사가 오르기 시작했다.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계단의 끝으로 어느새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돌자, 돌자, 주위를 돌자.
-성냥이 전부 타 버릴 때까지.
[아무래도 찬송가는 아닌 것 같지?]“꿈속에서 들어 본 노래 같네요.”
길고 긴 계단이었으나 마침내 계단의 끝까지 다다른 둘은 마주한 문 너머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에 조심스레 검을 잡아들기 시작했다.
[네가 할래. 아니면 내가?]“지금까지는 제가 했잖아요.”
[젊은 놈이 패기가 없군.]문고리를 통해 밀어본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열리지 않는 문은 감옥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키하노는 서둘러 자신의 왼쪽 눈을 감았다.
“저기, 키하노.”
[왜?]“재촉하는 건 아닌데 빨리했으면 좋겠어요.”
[왜?]“지금 밑이 심상치가 않거든요.”
키하노가 준비하는 동안 계단 밑을 내려다본 블라드는 그만 혀를 차고 말았다.
마치 물이 차오르듯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하는 어두운 안개.
그 안개를 따라 블라드도 키하노도 아는 낯익은 여인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내가 분명 관에 못까지 박아줬는데?”
[부제는 아무래도 그때의 기억이 강렬했나 보다!]저 아래서부터 검은 눈물을 흘리며 올라오는 여인이 있었다.
자신의 아이를 찾으며 요제프에게 달라붙었던 여인.
아무래도 어린 쟝에게 있어 그날의 기억은 감당하기 힘든 공포였던 모양이었다.
“빨리요!”
[잠깐만 이거 오랜만에 하려니까 좀 힘든데.]한 번 고개를 갸웃한 키하노는 이제야 감을 잡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파직- 파지직-!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번개의 잔상들.
뽑아낸 은빛의 검에서부터 그에 걸맞은 색깔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찬란히 빛나는 하얀색의 세계.
지금 눈물을 흘리며 기어 오는 여인조차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그런 빛이었다.
[흐읍!]키하노의 심호흡과 함께 잘려나간 커다란 문.
먼지 하나 들썩이지 않은 채 예리하게 잘려나간 단면을 보며 블라드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이런 기술은 안 알려준 것 같은데?”
[이건 기술이 아니라 그냥 실력이다.]처음으로 마주한 키하노의 검을 보며 놀란 블라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은 눈물의 여인이 따라올까 뒤를 돌아보았다.
“······!”
그러나 그곳에는 어느새 새롭게 생겨난 문이 지하를 가로막은 채 서 있었을 뿐.
마치 방금의 일격은 있지도 않았다는 듯 그렇게 서 있는 모습에 그제야 블라드는 자신이 꿈속 세상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할 수 있었다.
[예배실, 예배실. 예배실이 어디지?]“따라오세요!”
한 번밖에 들어오지 않은 건물이었지만 블라드는 뒷골목의 버릇대로 길을 파악해놓았었고 예배실로 향하는 복도만큼은 아직 머릿속에 확실히 남아있었다.
“여기요!”
[좋아. 여기에 부제가 있다면 금상첨화일 텐데.]예배실에 안쪽에서는 아까 들었던 기이한 노랫소리가 들려왔지만, 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부디 이곳에 쟝의 모습이 있기를 바랄 뿐.
“으아······.”
그러나 열어젖힌 문 너머에는 둘이 기다리고 있던 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새까맣게 물든 수많은 시선이 있었을 뿐.
“얘네들이 왜 다 여기에 있죠?”
[이미 저주가 파고든 것 같다. 당연히 부제의 세계에는 없는 아이들이겠지.]예배실 안에 있던 것은 수많은 아이들이었다.
깔끔한 옷차림과 함께 곱게 빗은 머리가 인상적이었지만 정작 블라드와 키하노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동자는 공허할 뿐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아이들에게 집착하는 거지?]아이들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한 키하노는 예배실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시선을 올려보았다.
색유리로 화려하게 치장된 예배실 가장 높은 자리.
여태껏 아이들이 바라보고 있었을 그곳에는 불길한 모습으로 뒤집힌 교회의 문양이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보았던 문양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
안개 가득한 모시암의 성문 앞.
그곳을 향해 다가오는 행렬이 있었다.
수십 명의 사람이 호위하는 한 대의 마차.
마치 귀족이라도 모시는 듯한 모습의 행렬이었지만 기이한 것은 이곳에 있던 어떤 경비병도 그들이 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지! 앞에 있는 행렬은 정지하시오!”
점점 안개가 짙어 지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행렬이 안개를 내뿜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제는 바로 옆에 있는 병사들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자욱한 안개 속에서 경비대장은 직접 나서 신원미상의 행렬을 멈춰 세우기로 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
가까이 다가가자 보이는 마차는 마치 관이라도 되는 온통 새까만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러나 불길한 색과는 달리 만들어진 이음새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소속을 밝히시지 않는다면 들여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누구 하나라도 나서 대답할 법하건만 기이할 정도로 조용한 행렬의 모습.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몇몇 경비병들이 천천히 쥐고 있는 창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다들 고향에 돌아왔다고 기뻐하네요.”
마차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경비대장은 귀를 기울였다.
정작 기대하던 대답은 아니었지만, 안개를 따라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는 누구라도 귀를 기울일법한 맑고 고운 소리였다.
“그래. 이제 우리 내릴까? 여기가 모시암이란다.”
“잠시만······.”
마차에서 내리려 하는 소리에 경비대장은 서둘러 제지하려 했으나 순간 느껴지는 기이한 위화감에 숨을 죽이고 말았다.
끼이이익-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경첩 소리.
그러나 경비대장은 천천히 열리는 마차의 문보다는 그 밑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건······.”
시선을 땅으로 내린 경비대장은 그제야 이들이 어떻게 소리 하나 없이 성문까지 다다랐는지 알 수 있었다.
땅과 맞닿아 있어야 할 마차의 바퀴.
그러나 지금 자욱한 안개 너머로 보이는 마차의 바퀴는 허공에 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내리는 여인의 발끝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