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68
황금색의 기사 (1)
안개가 걷히고 난 뒤의 모시암은 깊이 새겨진 상처만 가득한 곳이었다.
단단했던 성벽은 무너지고 도시의 중심지였던 광장은 흔적도 없이 쓸려 나가버린 상황.
모시암에서 발생한 변고에 다급히 달려온 북부연합군을 맞이했던 것은 거의 반파(半破)되었다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히 쓰러져 있던 도시의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광경이 고작 두 명이 벌인 일이라고?”
온갖 잔해가 휘날리는 도시를 보며 강철공은 가만히 눈썹을 긁어대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보고였다.
군대가 들어와서 부숴도 이 정도로 할 수는 없을 텐데 그것도 단둘이서 한 일이라니 말이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바예지드의 애송이고 말이지?”
“······정교회의 기사단장인 귄터의 증언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볼코프의 보고를 들은 강철공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믿기 힘든 말이라 할지라도 북부정교회의 기사단장이 똑똑히 증언하고 있었으니 의심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군.”
건물이었던 잔해를 밟고 있던 티무르는 저 멀리 보이는 모시암의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 처참한 잔해 위에서 홀로 꿋꿋이 서 있는 황금색의 나무.
온통 색을 잃어버린 이 도시에서 홀로 확연히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성기사들의 단장인 귄터는 증언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뒤틀려버린 도시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그려낸 기사가 있었다고.
이제는 북부 최고의 권력자도 확실히 기억할 그의 이름.
그 기사의 이름은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했다.
※※※※
“그래서 피에르 주교는?”
창틀에 걸터앉아 차를 마시던 블라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는 찻잔 하나 들어 올리기 버거워 보였지만 보이는 눈빛만큼은 온전히 제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게요. 어디 가셨는지 모르겠네요.”
“네가 마지막까지 같이 있지 않았어?”
“그렇기는 했었지요.”
뾱뾱뾱-
사용했던 훈증기를 마지막으로 점검한 니벨룬은 마법 도구들을 배낭 안에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들어갈 리 없는 부피였건만 꿀떡꿀떡 잘도 받아먹는 배낭을 보며 블라드가 수상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들어오는 연합군을 보고서는 화장실 가신다고 사라지셨는데 아직까지 안 오시네요.”
“튀었네.”
음미하며 마셔야 할 차를 한 번에 털어 넣은 블라드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생긴 것은 목석이었으나 하는 짓은 여우 같은 노인네.
면죄부 사건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역시 방심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있어야 확실한 내막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블라드의 말처럼 닥쳐온 사태는 어찌 해결했다고 볼 수 있었으나 정작 이 사태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에 대해서는 지금도 전혀 알아낸 것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도시를 망쳤어야 할 목적은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이름까지도.
아쉽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는 블라드를 보며 니벨룬이 품속을 뒤적거렸다.
“사실 이런 게 나무 밑에 떨어져 있었는데요.”
“이게 뭔데.”
신비를 쫓는 마법사인 니벨룬.
본디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발견한 신비의 단서들을 보물처럼 생각하며 쉽사리 남에게 보여주지 않았으나 니벨룬은 블라드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범상치는 않아 보이더군요.”
니벨룬이 건넨 것은 유리 조각같이 생긴 무언가의 파편들이었다.
마치 깨어져 나간 구슬같이 생긴 조각들은 왜인지 모르게 낯익어 보이는 것이었다.
“한참 조사 중인데 함부로 가져와도 되는 거야?”
“땅에 떨어진 것은 본래 주인이 없지 않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
참으로 수인족다운 대답이었고 뒷골목 출신다운 납득이었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고?”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는 것 정도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너무 처참히 깨져나가서요.”
들여다본다고 알 리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무료했던 블라드는 햇빛에 유리 조각들을 비추어보았다.
반짝이는 조각 안에는 선명한 파란색이 자리 잡고 있었다.
[씨앗이로군.]“음?”
깨어졌으나 오묘한 빛을 머금고 있는 유리 조각.
블라드의 시야를 통해 그것을 바라본 키하노는 단번에 파편의 정체를 간파해내었다.
[세계로 바라봐라. 다른 기사들이라면 몰라도 너라면 알아볼 수 있겠지.]평범한 기사들이라면 몰라도 키하노의 세계에 영향을 받은 블라드라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
그의 말에 가만히 왼쪽 눈을 감은 블라드는 내면의 세계를 통해 들고 있던 유리 조각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세상 밖으로 내뻗을 수 있을 정도로 단단히 자리 잡은 블라드의 세계.
“응?”
그 세계로 바라본 유리 파편에는 하나의 장면이 깃들어 있었다.
짙푸른 바다 위로 넘실거리는 파도의 모습들.
바다 끝 절벽 위에 서 있던 나무는 파도 아래서 헤엄치고 있는 어린 정령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하벤이 알려주었던 오징어라는 생물처럼 생긴 정령들이었다.
“이거······.”
짧았으나 강렬한 파란색으로 다가오는 파편의 기억.
그 장면을 마주한 블라드는 마치 하이날의 가보에서 보았던 그때의 느낌과도 흡사하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나무라 생각했건만 역시 이런 방법이었군.]키하노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이 무언가의 파편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하얀색 뱀이 있던 데어마르의 언덕.
하이날의 가보였던 노란색 호박석.
그리고 도브레치티의 숲에서 목 없는 트롤이 서 있던 곳.
그 모든 곳에는 언제나 한 그루의 나무들이 서 있었다.
“······그 여자 꼭 잡아야겠다.”
“네?”
정령들을 품어주던 나무들처럼 거꾸로 선 나무 또한 어린아이들의 영혼을 품어주던 것이었다.
비록 방향은 잘못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처참히 깨어져 나간 정령수(精靈樹)의 핵을 보며 블라드는 조심스레 그것들을 움켜쥐었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정작 방의 주인도 아니었건만 들어오라 말하는 니벨룬의 말에 빼꼼히 문이 열렸다.
“몸 상태는 괜찮으세요?”
방문을 두드린 것은 안드레아의 어린 부제인 쟝이었다.
새하얀 법복을 차려입은 쟝을 보며 블라드는 서둘러 찡그리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부제님은 어떠십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뭐 한 게 있어야지요.”
쑥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자신이 한 게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블라드는 여인의 노랫소리에 대항했던 쟝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장례식이 준비되었다고 알려드리러 왔어요. 혹시 아직 몸이 불편하시면······.”
“아닙니다.”
블라드는 끄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대 옆에 세워져 있는 갑옷을 향해 손을 뻗은 블라드는 자신을 기다리는 쟝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유스티아 님의 마지막 모습일 테니 꼭 배웅해드리고 싶습니다.”
“알겠습니다.”
가겠다 말했으나 여전히 끙끙거리는 블라드에게 다가가 갑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는 어린 부제.
창을 통해 들어오는 샛노란 햇빛이 둘의 등 뒤로 내려앉고 있었다.
가만히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니벨룬은 저 멀리 보이는 교회를 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
대애엥- 댕-
정갈히 갑옷을 차려입은 성기사가 울리는 모시암의 종.
비록 종탑에서 떨어져 내려 찌그러진 종이었으나 그래도 본연의 역할만은 다하고 있었다.
“다 날아가 버렸군요.”
“그래도 1층만큼은 온전하게 남아 있어요. 다행인 일이죠.”
2층 위부터는 아예 날아가 버린 교회였으나 쟝의 말처럼 예배실이 있는 1층만큼은 기적처럼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천천히 줄을 서시오!
-부상 당한 사람들은 옆으로!
그렇기에 사람들이 모일만한 곳은 그곳밖에는 없었다.
연합군의 병사들은 아직도 모시암에 이렇게나 많은 생존자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바예지드의 블라드 님이십니다. 길을 열어주세요.”
쟝의 말을 들은 병사들이 놀란 듯 블라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변에 있던 모시암의 주민들까지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길을 열어주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절도 있었다.
이곳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고작 하룻밤이었으나 밖에 있던 그들에게는 두 달이라는 긴 시간.
내막을 잘 모르는 병사들은 지금 블라드를 그 긴 시간 동안 마(魔)에게서 모시암을 지켜낸 영웅으로 오해하는 중이었다.
“왔는가?”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님.”
그리고 교회 앞에서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던 강철공 티무르는 그런 오해를 굳이 해소하려 하지 않았다.
깊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기쁨이 있어야 할 테니까.
도시 모시암은 무너지고 북부의 위신이 크게 떨어진 이때, 크게 흔들리는 민심을 잠재울만한 돌파구는 오직 정교회의 성기사들과 블라드라는 기사의 이름 이 둘 뿐이었다.
“소문이 자자한 북부의 신성을 드디어 직접 보게 되는군. 물론 그동안 볼코프에게서 귀가 닳도록 듣기는 했지만 말이야.”
블라드는 티무르 옆에 서 있는 기사를 알아보고는 자그맣게 목례를 건넸다.
지금 티무르를 수행하고 있는 그는 과거 린드부름의 토벌에서 본 적 있던 투창의 볼코프였다.
“들어가지.”
“네.”
스스럼없이 어깨를 감싸 안는 티무르였지만 블라드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블라드의 머릿속에는 고귀한 공작의 기꺼움보다도 자신을 위해 검을 막아주었던 유스티아의 마지막 모습만이 가득했으니까.
-바라노프 공작님 입장하십니다!
아직 채 치워내지 못한 잔해들을 따라 들어선 예배실에는 이미 갑옷 입은 자들이 가득 서 있었다.
북부연합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일곱 가문의 기사들.
이미 안면이 있던 바예지드와 하이날의 기사들이 강철공 티무르와 함께 들어오는 블라드를 보며 자랑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 옆에 서 있게. 자네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
“······.”
자격이 있다는 티무르의 말에 블라드는 그만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언제나 당당할 자격을 찾던 블라드였으나 지금만큼은 그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말았다.
정말 자격이 있는 자들은 지금 저 앞에서 가지런히 누워있는 사람들일 테니까 말이다.
-오늘 우리는 고귀한 뜻으로 행한 이들을 그분의 곁에 보내기 위해 이곳에 서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유일한 북부의 공작이었으며 앞에 있는 노인은 고귀한 정교회의 교황.
누구라도 원할 거대한 인맥들이었으나 블라드는 그저 저 앞에 누워있는 하나의 관을 향해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햇빛을 따라 반짝이는 그녀의 백금발은 처음 만났던 그때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거대한 악(惡) 앞에서도 자신들의 의무를 다한 이들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교황의 집전 아래 시행되는 성기사들과 사제들의 장례식.
그러나 천천히 퍼져나가는 교황의 목소리만큼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충분히 닿을 것이다.
오늘 이 자리는 누구의 것이라 할 것 없이 모시암에 있는 모두를 위한 자리였기에.
“······.”
저 앞에서는 교황이 무어라 말하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그저 멍하니 유스티아의 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감싸 안은 채 죽어가던 고귀한 성기사.
많은 인연을 쌓지는 않았으나 블라드는 그녀에게 받은 것이 많았고 그리고 이제는 그 빚들을 갚을 기회조차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세.”
“네.”
새겨진 상처가 깊은 만큼 그에 대한 어루만짐은 최대한 격식이 있었다.
북부의 기사들이 죽은 이들을 위한 추모를 마치자 이제 남아 있는 사람은 강철공과 블라드 뿐.
“너무 놀라지 마시고.”
“네?”
계단을 오르던 블라드는 넌지시 건네오는 티무르의 말에 반문했으나 그는 그저 웃으며 앞에 있는 교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주겠다고 하시니 감사히 받으시게.”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티무르는 들고 있던 꽃들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누워있는 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
쟝과 블라드를 위해 기도 올리던 사제들과 사특한 여인을 향해 검을 치켜들던 성기사들.
그들을 위해 하나씩 꽃을 내려놓던 블라드는 마지막으로 유스티아의 관 앞에서 멈춰 섰다.
“고마웠어요. 유스티아.”
안나의 검은 눈물을 닦아주었을 때도 그녀는 블라드의 뒤에 서 있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앞에 누워있는 그녀를 위해 블라드는 조심스레 들고 있던 꽃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예전 그녀가 깎아주었던 사과의 짠맛이 혀끝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바예지드의 블라드. 모시암을 지켜낸 기사.”
마지막으로 들고 있던 꽃을 조심스레 유스티아에게 내려놓은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교황을 보았다.
오랫동안 지은 미소만큼이나 자연스레 자리 잡은 주름들.
“슬픈가?”
“네?”
지금도 쉼 없이 출렁이는 블라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늙은 교황이 미소 짓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떠나게 되는 법이지.”
블라드에게 다가온 교황은 가만히 그의 가슴팍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우리지만 그럼에도 허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무언가를 남기고 가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네?”
교황의 손끝이 어느새 블라드의 갑옷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손끝이 닿은 곳은 갑옷을 바꿨음에도 굳이 매달아두었던 블라드의 자부심이 있던 자리였다.
“이 글귀를 꼭 자네에게 전해야 한다고 유스티아가 말했었지.”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
산 로지노에서 선물한 글귀는 아직도 블라드의 가슴팍에 새겨져 있었다.
세찬 비를 뚫으며 종탑을 향해 기어올랐던 소년을 향해 유스티아가 선물해 준 글귀였다.
“유스티아는 그분의 곁으로 갔어도 결국 무언가를 남기고 가게 되었군.”
치이이익-
글귀를 덮은 교황의 손바닥 위로 새하얀 연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
뜨겁게 달아오르는 갑옷을 느끼며 블라드는 당황했지만, 정작 이적(異蹟)을 만드는 교황의 표정은 평온할 뿐이었다.
“부디 자네가 죽어간 모든 이들을 위한 증거가 되어주기를 바라네.”
죽은 자들은 떠나지만 남아있는 자들은 짊어져야 하는 법.
콘라드 교황은 자신의 자식과도 같은 이들을 위해 블라드의 가슴에 또 하나의 글귀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죽음이 지금의 이름 아래서 찬란히 빛날 것임을 확신하면서.
“그렇게 해주리라 나는 믿고 있네. 쇼아라의 블라드.”
“······교황님,”
블라드는 뜨거워진 자신의 흉갑을 내려다보며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새하얀 연기가 걷히고 나자 보이는 것은 유스티아가 선물한 글귀 아래 새로이 새겨진 두 개의 단어.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
블라드.
블라드 아우레오(áureo).
“태어난 이름은 블라드이겠으나 그분의 이름 아래서는 아우레오일지니.”
가진바 이름조차 제대로 외치지 못한 소년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이름 뒤에는 언제나 찬란히 빛나는 단어 하나가 따라붙게 되었으니.
일곱 가문의 기사들을 증인으로 삼은 그 단어는 블라드의 피를 따라 영원히 이어질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