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69
황금색의 기사 (2)
아우레오(áureo).
블라드의 머리색과 꼭 어울리는 그 성(姓)은 폐허 위에 자리 잡은 황금색의 나무를 보며 교황이 직접 생각한 것이라 했다.
“북부에 오래 남았으면 하는 아주 귀한 성이 될 거야. 교황이 직접 하사한 성은 제국 역사를 뒤져봐도 몇 없거든.”
“저 또한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블라드는 굳이 찻잔 위에다 술을 들이붓는 티무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록 세월에 의해 하얗게 센 백발이었으나 목 주위로 꿈틀거리는 근육.
블라드보다도 머리 한 개 정도는 더 큰 그의 덩치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페테르 바예지드가 날카롭게 벼린 검 같은 분위기였다면 강철공 티무르는 뭐든지 깨부술 것만 같은 단단한 도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황실은 인정해주지 않겠지만 말이야.”
술병을 탈탈 털어낸 티무르는 블라드와 눈을 마주치며 빙긋이 웃기 시작했다.
“자네에게 있어서는 귀하며 소중한 명예겠지만 결국은 지엽적일 뿐이라는 뜻이지.”
“······그렇습니까.”
블라드는 티무르가 지금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조금은 이해하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이 아니기에 제국 명부에도 오르지 못할 것이며 대립교황(Antipope)이 내린 성이니만큼 교황청에서도 인정받지 못할 이름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 북부에서만큼은 존귀하게 불릴 이름이겠지.”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이곳 북부에서만큼은 아우레오라는 이름의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마시게.”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블라드를 향해 티무르가 손끝으로 술이 담긴 찻잔을 밀어냈다.
제국에 넷뿐인 고귀한 공작이 직접 내미는 술잔.
그 술잔 끝에 앉아 있는 젊은 귀족은 아직 이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이번에 열릴 북부 회의에 오시게. 영주들과 나란히 앉을 자리는 아니더라도 자네를 위한 의자 하나 정도는 마련해 둘 테니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북부가 낳았고 바예지드가 키웠으며 정교회가 귀하다고 인정하는 남자. 블라드.
건네는 술잔을 통해 그를 후원하겠다 말한 티무르는 까만 말 뒤에 메여져 있는 블라드의 작은 깃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차게도 모았군.’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작은 깃발 하나.
오래된 전통을 따라 온갖 가문들의 인장이 박혀 있는 그 깃발에는 아직 문장 하나 정도 새겨 넣을 자리는 남아있어 보였다.
※※※※
“흠흠.”
티무르의 천막에서 나온 블라드는 자신에게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막심! 여기 있었네요?”
“흐흐. 어쩌다 보니 말이야.”
반삭 머리에 새겨진 길다란 흉터가 인상적인 남자.
지금 멋쩍게 웃고 있는 남자는 교황청의 병사들 앞에서 장미의 미소를 지켜주었던 기사 막심이었다.
“그나저나 이제는 감히 후배라고 부르지도 못하겠군. 블라드 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냥 블라드라고 불러요. 뭐 제대로 가진 것도 없는데.”
비록 성을 하사받은 귀족이라고는 하지만 지금의 블라드는 영지는커녕 장원도 없는 신세였다.
그동안 모아둔 돈은 하벤의 배를 사는 데 다 써버렸고, 딱히 투자한 곳이라고는 쇼아라에 있는 장미의 미소뿐.
그러나 텅텅 비어있는 두 손일지라도 뭐라도 잡을 자격을 갖췄다는 것 자체가 기사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명예이자 수확일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귀족 나리이신데 함부로 이름을 불러댈 수야 있나.”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요. 그럼.”
느슨한 분위기를 파악한 막심이 실실 웃어대자 둘의 곁으로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이고 귀족 나으리. 어쩐지 데스웜 때부터 잘 뛰어다닌다 생각하고는 했었지요. 제가.”
“나중에 잘 풀리시더라도 저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이슈트반 놈한테서 이길 수 있는 필살의 대검 파훼술을 가르쳐 드렸지 않습니까.”
“그거 가르치느라 얻어맞은 것까지 기억해내면 오히려 손해 아닌가요?”
과장된 몸짓으로 손바닥을 비벼대는 선배 기사들을 보며 블라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유스티아의 죽음으로 침울해져 있던 블라드가 실로 오랜만에 짓는 미소이기도 했다.
“태어나기를 애초에 쇼아라에서 태어났다니까! 순혈 바예지드 출신이야!”
“외부에서 유망주들 영입하는 다른 가문들이랑 다르다 이거야. 우리는 직접 키운다고!”
그러나 블라드의 의도와는 달리 점점 커지는 목소리.
대로에서 소리치는 기사들의 행동이 비록 눈꼴 사납기는 하였으나 그들도 아무런 생각 없이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세대교체에 실패했다는 평을 듣고 있던 바예지드 가문이었으니 일곱 가문의 기사들이 잔뜩 모여 있는 지금만큼이나 바예지드의 건재함을 알릴 기회는 몇 없을 것이다.
[여기서 같이 너절대지 말고 빨리 가서 그 녀석부터 잡아둬라. 옛말에도 쓸만한 고양이는 매우 귀한 법이라고 했다.]‘알았다니까요.’
애써 선배들을 무시한 블라드의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떠들썩한 기사들의 말처럼 바예지드의 자랑이 된 블라드는 이것저것 준비해야만 할 일이 많았다.
※※※※
폐허가 된 도시에서 대접할만한 마땅한 것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지금 블라드와 니벨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살짝 금이 간 나무잔에 담긴 물 한잔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둘의 대화를 시작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벌써 가려고?”
“할 일을 다 마쳤으니까요.”
블라드는 방 한구석에 놓인 니벨룬의 배낭을 보며 아쉽다는 듯 혀를 빼물었다.
진득하게 잡아보고 싶었지만, 방랑자답게 니벨룬의 행동은 조금의 막힘도 없어 보였다.
“어디로 가려고?”
“오라 하는 곳은 없지만, 발걸음 닿는 곳이야 많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갈 곳 없다는 니벨룬의 말에 블라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를 쫓아 평생을 헤매고 다니는 수인족 마법사들.
그들의 고단한 인생을 이미 키하노에게 들어 알고 있던 블라드는 들고 있던 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신비를 찾아다니는 거지? 신기하고 이해할 수 없는 뭐 그런 거.”
“그렇지요. 신비에 대한 해석은 제 개인의 향상뿐만 아니라 종족 전체의 염원이기도 하니까요.”
“······그래?”
니벨룬의 대답을 들은 블라드의 눈이 빛났다.
호르헤는 말했었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이라고.
“그럼 이런 건 어때? 돛 없는 배라던가.”
“네?”
그리고 지금 블라드는 니벨룬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돛이 없는데 막 움직여. 물을 끓이면 알아서 앞으로 나간다고 하더라고.”
고양이는 본래 호기심이 많은 동물.
거기다 마법사라는 단어까지 합치면 더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배에 달린 바퀴를 묘사하는 블라드의 손짓에 니벨룬은 흥미가 생겼다는 듯 귀를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조만간 드워프들의 섬으로 초대받을 것 같거든. 드워프들 모여 사는 곳이 아직까지 안 알려진 거 알지? 가이다르가 그렇게 이 잡듯이 뒤졌어도 못 찾은 섬 말이야.”
“오오.”
니벨룬에게 계약을 제안하려 하는 블라드는 최대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알았고, 숨기려 했던 비밀까지 쥔 채 나를 흔들어대었던 요제프를.
비록 요제프가 가진 무게감까지 담아내지는 못했으나 나고 자라왔던 뒷골목의 방식이 블라드의 입안에서부터 술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사실 내가 엘프들이랑도 좀 알거든. 그쪽 장로들이랑은 편지도 주고받는 사이야.”
“오오오.”
난생처음 듣는 배의 존재와 여태껏 위치조차 알려지지 않았다는 드워프들의 섬.
그리고 모든 방문자를 거부한다는 신비를 간직한 엘프들의 숲까지.
인간들의 도시조차 들어가기 어려운 니벨룬에게 있어서는 꿈에서나 바라볼 수 있는 장소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소개해주면 같이 들어갈 수도 있을 거야. 신비를 찾아다닌다며? 이런 데야말로 신비가 가득하지 않겠어?”
“그럼요. 그렇지요.”
전인미답의 땅들을 들먹이는 블라드를 보며 니벨룬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신비를 찾아다니는 마법사에게 있어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그런 맛 좋은 미끼들이었다.
“뭐, 마법사가 귀하기는 하지만 이래저래 통하면 소개 못 받을 것도 없거든. 그래도 한번 손발 맞춰본 사람이랑 하는 게 편하지 않겠는가 싶어서 말이야.”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등을 깊게 기대는 블라드의 모습에는 속마음과는 달리 여유가 가득해 보였다.
뒷골목의 양아치가 부리는 협잡과 거짓된 여유는 키하노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페테르 옆에는 조언자 라그무스가.
루트거의 옆에는 마법사 도로테아가.
입지가 부족했던 요제프조차도 마법사 하나씩은 어떻게든 구해 옆에 두고는 했었다.
그리고 이제 블라드도 마법사 한 명 정도는 데리고 있어야 할 만한 시기였다.
“······진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실 겁니까?”
“당연하지.”
“엘프랑 드워프랑······.”
“그뿐인가? 야만족, 정교회, 북부 귀족들의 땅.”
어느새 몸을 크게 기울이고 있는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는 확실한 일격을 날려보았다.
“다 된다니까. 네가 당분간 내 마법사만 해주면.”
“하겠습니다. 제발 하게 해주십시오.”
실실 웃는 블라드를 보며 니벨룬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마구 끄덕여대고 말았다.
아직 땅이 없기에 이리저리 방랑할 수 있는 귀족이자 기사.
그러나 빛나는 명예만큼은 확실한 블라드라는 존재는 확실히 니벨룬의 입장에서는 거부하기 힘든 존재였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여기 네 방 아니잖아.”
“제가 대신 말해드린 겁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또다시 주인 대신 들어오라 외치는 니벨룬이었지만 블라드는 딱히 나무라지는 않았다.
방금의 태도로 둘의 계약이 성사되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블라드 아우레오 님.”
그렇게 니벨룬의 허락을 통해 들어선 남자는 어딘가 낯이 익은 기사였다.
“아아. 우리 그때······.”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하이날 가문의 기사 바스트로입니다. 블라드님과는 가이다르 군과 함께 싸운 적이 있지요.”
정중한 자세로 문가에 서 있는 그는 하이날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몇 안 되는 기사 중 하나였다.
“하이날도 여기에 와 있었나 보군요.”
“저희도 이제는 북부의 가문이니까요. 소집에 응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바스트로라고 소개한 기사는 이제는 귀족이 되어 있는 블라드를 보며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교황님께 성을 하사받은 것을 축하드립니다. 알리시아 님께서도 이 사실을 아시면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그분께는 갚아야 할 게 아직도 많지요. 한 번 찾아봬야 하는데.”
서 있는 위치가 달라졌음에도 여전히 하이날과의 관계가 돈독함을 말하는 블라드를 보며 바스트로는 조심스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 가능하시다면······. 이번에 열릴 북부 회의 때 저희 남작님을 앞에서 이끌어 주실 수(escort) 있으시겠습니까?”
“음?”
블라드는 갑작스레 고개를 숙이는 바스트로를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당당한 귀족이신 알리시아 님을 제가 왜······.”
“북부의 세계는 거친 기사들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블라드 님도 아시다시피······.”
난처하게 웃고 마는 바스트로.
스스로 속해 있는 가문과 자신의 부족함을 말하는 기사는 민망한 듯 웃으며 크게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블라드 님.”
“······.”
북부 회의에 들어설 일곱 개의 가문 중에는 하이날의 무게감이 제일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야 막 엘프들과의 교류를 시작하는 참이었지만 내세울 만한 사업도, 기사도 없는 곳이 바로 하이날이었으니까.
“알리시아님은 아마 지금쯤이면 쇼아라쯤에는 당도해 계실 겁니다.”
[알리시아 남작이 쇼아라라······. 이거 왠지 불안한데.]키하노의 말처럼 괜스레 불안감을 느낀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품속 깊이 넣어놓은 두 장의 손수건.
여전히 맞붙어 있는 손수건들의 감촉을 확인한 블라드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
“여기인가 보네요.”
아직 저녁도 아니었건만 쇼아라 뒷골목에 서 있는 여인이 있었다.
뒷골목의 너저분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품있는 모습.
늙은 기사의 호위 속에 서 있는 여인은 바로 앞에 서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이런 후미진 곳에 있어도 무려 4층이나 쌓아 올렸네요.”
“쇼아라는 북부 물류의 중심지나 다름없는 도시이니까요. 뭐든지 큼직큼직하겠지요.”
한적한 데어마르와는 달리 모든 것이 활발한 쇼아라를 보며 알리시아의 표정이 미묘해지기 시작했다.
한 영지의 주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존심이 조금씩 그녀를 자극하는 중이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런 곳은 고귀한 레이디가 들어서기에는 알맞은 곳이 아닙니다.”
“그래요?”
노기사 던칸은 어딘지 모르게 긴장된 눈빛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알리시아를 당장이라도 돌리고 싶은 그런 눈빛이었다.
그러나 던칸의 말과는 다르게 알리시아의 앞에 있는 건물은 주위에 어떤 곳보다도 고풍스러웠고 훌륭한 곳이었다.
“그래도 한번 보고 싶네요. 블라드 경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라는데.”
“······그렇습니까.”
어차피 스쳐 지나가야 하는 쇼아라라면 꼭 한번 보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기사 블라드가 가장 아끼는 곳이라는 장미의 미소.
블라드의 옛 추억을 엿보려는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그러나 지금 이곳의 주인은 블라드가 아닌 또 다른 레이디.
문 앞에 서 있는 고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장미의 여관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저희 여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알리시아 남작님.”
현관에 서 있는 알리시아를 향해 계단을 통해 천천히 내려오는 한 명의 여자.
이곳의 주인인 그녀는 알리시아와는 다르게 타오르는 것만 같은 붉은 머리를 지닌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