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7
우는 여인 (3)
“오늘도 저의 하루를 돌봐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늦은 밤.
주둔지에 있던 사제 안드레아는 신께 드리는 기도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 짓는 중이었다.
항상 데리고 다니는 어린 부제 또한 그와 함께 두 손을 모으고는 기도하고 있었다.
“언제나 제가 바른길을 걸을 수 있도록 빛으로서 저를······.”
안드레아가 하는 말을 따라 하느라 정신없던 어린 부제는 들려오던 기도문이 갑자기 끊기자 살며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사제님?”
어린 부제의 부름에도 안드레아는 기도문을 읊지 않았다.
대신 눈을 부릅뜨며 은빛 잔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신이시여······.”
순결한 은빛 잔에 담겨 있던 정화수.
그것이 자그마한 파문을 일으키며 울고 있었다.
무언가 경고라도 하려는 듯.
해가 져 가는 겨울의 들판.
토벌대의 주둔지로 강변에서나 볼법한 짙은 물안개가 퍼지고 있었다.
애타게 무언가를 찾고 있는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아가, 내 아가.
자욱한 안개와 함께 찾아온 그것은 누군가의 눈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내 아가 어디 있니?
※※※※
크아아아아-!
“흡!”
자야르는 검을 휘두르며 생각했다.
이것은 함정이라고.
강을 건너는 판단을 내리도록 주위 상황을 배치했으며 해가 지는 시기에 맞춰 시작되었다.
이 함정은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모두 나를 봐라! 나를 중심으로 방진을 이뤄라!”
자야르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왼쪽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자야르가 들고 있는 검에서 초록빛 은하수와 같은 오러가 넘실대기 시작했다.
저물어가는 어두운 하늘 아래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모여! 여기로 뭉쳐라!”
“우리에게는 기사가 있다!”
자야르의 지시에 따라 강을 건너온 용병들이 방진을 이루었다.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모든 본능을 따라 자야르의 곁으로 모인 용병들은 그제야 자신들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침착히 살펴볼 수 있었다.
크아아아-
아아아아아-
죽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모두 검은 머리를 가진 자들이었다.
‘당했군.’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검은 머리의 죽은 자들을 보며 자야르는 속으로 침음을 내질렀다.
함정이란 의도를 가진 것.
누군가를 상처입히기 위해 제작된 사악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자야르는 이 함정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누군가를 향해 겨냥된 것인지는 알아챌 수 있었다.
‘요제프 님!’
강의 얼음은 무너졌고 자신은 용병들과 함께 고립되었다.
이것들은 자신과 요제프를 떨어뜨리기 위한 함정이었다.
“블라드! 내 말 들리나!”
누구의 의도인지는 몰라도 함정은 성공했다.
여기서 자신이 기를 쓰고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요제프에게 닿기까지는 반나절은 걸릴 것이다.
크아아아-!
아니 그보다 더 걸릴지도 몰랐다.
“자야르 님-!”
강 건너에서 금발 소년의 외침이 들려왔다.
점점 기울어져 가는 햇빛 사이에서 죽은 자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소년이었다.
흩날리는 소년의 금발이 저물어가는 태양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하나의 검이라도 더 필요할 터!’
만약을 대비하여 안드레아 사제와 함께 기사 셋을 남겨 두었다.
그리고 주둔지에는 용병 50여 명이 대기하고 있었으니 영민한 요제프라면 어떤 위협에서도 버텨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기를 바란다.
“쇼아라의 블라드! 계약을 이행해라!”
자야르는 쉴 새 없이 다가오는 죽음의 손길들 속에서도 요제프를 위한 최선을 생각했다.
“제가 어찌하면-!”
“지금 당장 주둔지로 돌아가라! 신 앞에서 행한 계약에 따라 요제프 님을 지켜라!”
오러와 함께 섞여나온 우렁찬 외침이 강을 가로질렀다.
저 너머에 있는 건방진 소년은 감히 자신의 도련님에게 조건을 걸었다.
그리고 지금은 감히 주제도 모르고 건 계약을 이행해야 할 때다.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자야르의 시선 끝에서 검을 거두고 서둘러 뒤로 돌아가는 블라드와 고트의 모습이 보였다.
‘신이시여.’
점점 멀어져 가는 두 명을 보며 자야르는 부디 신께서 요제프를 구원해 주길 빌었다.
자신의 뜻을 담은 그들이 무사히 돌아가기를 빌 뿐이다.
“기사님! 숲속에서!”
그리고 이제는 자신을 돌봐야 할 때다.
“크으으으······.”
숲속에서 걸어 나오는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얼어붙지는 않았으나 역시나 차가운 자들이었다.
“하아······.”
자야르는 씁쓸한 심정으로 숲속에서 걸어 나오는 자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서 있는 자를 향해서.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 로드릭.”
우그러진 흉갑과 함께 흉악한 흰자위를 부릅뜬 기사가 그곳에 있었다.
“크으으으.”
추운 겨울날이었음에도 로드릭의 입가에서는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
“히이이익!”
“흡!”
갑작스레 고트의 앞을 가로막으며 뛰쳐나온 것을 블라드의 검이 갈라내었다.
푸확-!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시꺼먼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대장!”
“말 어딨어!”
블라드의 외침에 고트가 서둘러 고개를 돌려가며 위치를 가늠했다.
블라드와 고트의 상황은 어쩌면 자야르가 있는 강 건너보다 안 좋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적어도 열 명 이상은 모여 있었으며 무력의 상징인 기사와 함께 하고 있었으니까.
“저기! 자야르 경이 저쪽에 묶어놨었어!”
“가자!”
그러나 블라드 옆에 붙어 있는 것은 오직 고트 하나뿐이었다.
‘도망가야 해!’
블라드에게는 고민할 선택지 같은 것은 없었다.
남은 방법이라고는 그저 있는 힘을 다해 주둔지를 향해 도망치는 방법뿐이었다.
피해가며 베어가며.
블라드와 고트는 강둑을 따라 자야르가 말을 묶었던 장소를 향해 뛰어 올라갔다.
히이이잉-!
“저기!”
다행히 죽은 자들의 마수가 아직 자야르의 말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줄 풀어!”
블라드는 뒤로 돌아 점점 다가오는 죽은 자들을 베며 고트에게 말의 줄을 풀 시간을 벌었다.
“히익! 헤엑! 임마! 착하지!”
푸르르르-
말이란 겁이 많은 동물이다.
바예지드 가문의 기사가 타고 다닐 만큼 훌륭한 말이겠으나 그렇다 할지라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에 겁을 먹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히이이잉-!
“빨리!”
“됐다! 됐어! 블라드!”
용케 말뚝에 묶어놓은 줄을 풀고는 블라드를 부르는 고트.
“진정해라 제발! 같이 좀 살자!”
그러나 고트로서는 공포에 의해 마구 날뛰는 말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어서 타!”
블라드의 푸른 눈빛이 말에게 닿기 전까지는.
마치 날아오르듯 말 등에 탄 블라드는 서둘러 고트의 손을 붙잡고는 그를 잡아 올렸다.
“······.”
“뭐해 대장! 어서 가!”
“······근데 이거 어떻게 움직이냐.”
“이런 미친!”
블라드의 맥빠진 소리에 고트는 머리를 쥐어뜯고 말았다.
“처음부터 말을 탈 줄 모른다고 말을 하던가!”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을 뒷골목에서 살아온 소년이었다.
말은커녕 짐을 싣고 다니는 당나귀도 못 타는 것이 블라드의 현실이었다.
말을 움직이게 하려면 고삐를 잡아당기면 되는 건가?
“내려 새꺄!”
점점 다가오는 죽은 자들을 보며 고트가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죽으면 다 너 때문이다! 이 개자식아!”
당장 떠나도 모자랄 판에 허둥지둥 자리를 바꿔 타는 자신을 보며 고트는 무엇인지 모를 억울함에 눈물을 흘렸다.
“흡!”
말에게로 다가오는 죽은 자들을 향해 다시 한번 블라드의 검이 휘둘러졌다.
“타! 이 병신아!”
“······.”
악에 받친 고트가 내지르는 소리를 블라드는 그저 못 들은 척 할 수밖에 없었다.
히이이잉-!
이제야 제대로 된 기수를 앉힌 자야르의 말이 앞발굽을 높게 쳐들고는 앞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과연 기사가 선택한 말답게 앞을 가로막은 것들을 짓밟으며 길을 만들어내었다.
크아아아-!
카아아아!
사방에서 달려드는 죽은 자들을 향해 블라드의 마지막 휘두름이 번뜩였다.
“달려!”
블라드의 외침과 함께 산 너머에 걸려있던 태양이 마지막 한숨을 내쉬며 꺼져 들어갔다.
크아아아!
블라드와 고트는 자신들의 뒤에서 울려 퍼지는 망자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숲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태양은 졌으나 아직 달이 닿지 않은 밤.
소년의 뒤를 쫓아오는 어스름한 저녁은 죽음을 머금고 있었다.
※※※※
어딘지 무게감이 느껴지는 밤안개가 천막들 사이로 가득했다.
으아아악!
저게 뭐야!
죽은 자들이다!
그리고 사내들의 비명이 밤안개를 뚫고 주둔지에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요제프는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요제프 님!”
“이 무슨 소란이지?”
“그, 그것이!”
헐떡거리며 천막으로 들어온 보르단은 두툼한 볼을 떨며 무언가를 말하려 하였지만, 도저히 내뱉을 말이 없었다.
“상황 파악도 안 하고 나에게 왔는가?”
“일단 요제프 님의 안전이 중요하기에!”
“그런 자가 검도 들지 않고 왔단 말인가?”
요제프의 지적에 보르단은 고개를 내려 자신의 벨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허무한 검집만이 덜렁이고 있을 뿐이었다.
“형님이 부럽군. 그라면 당장 자네의 목을 매달았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요제프는 서둘러 옷을 꿰어 입고는 천막 밖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울림.
비명과 울부짖음.
공기를 타고 울려 퍼지는 소리가 요제프의 귓가에 가득했다.
“요제프 님!”
“안드레아 님.”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막 천막 밖으로 나가려는 요제프의 앞으로 안드레와 그의 어린 부제가 들어왔다.
“혹시 무슨 일인지······.”
“악(惡)한 것입니다.”
안드레아는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요제프에게 자신이 들고 있는 성경을 펼쳐 보여주었다.
“으음.”
안드레아 정도 되는 사제에게는 여러 성물들이 주어지고는 했다.
그중 하나가 성스러운 잉크로 적은 성경이었다.
‘이런 건 처음 보는군.’
촛불이 만드는 빛 아래로 성경에 적혀있는 글자들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비록 글자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마치 무언가 겁에 질린듯한 모습이었다.
“보통 강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제님께서는 믿음이 강하신 분입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요제프는 지금 자신의 주둔지로 의도를 가진 어떤 사악한 것이 침입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나머지 두 명의 기사들이 숨을 헐떡이며 천막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다행히 보르단과는 달리 검과 갑옷을 챙겨온 모습이었다.
사제 안드레아는 짙은 눈그늘의 사내를 향해 대답했다.
“저는 구마사제(驅魔司祭)가 아닙니다.”
신의 뜻은 하나지만 신에게 다가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그것은 타고나는 적성과 발현하는 재능에 달린 것이었다.
“축복과 치유라면 자신 있으나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안드레아는 훌륭한 사제였지만 지금과 같은 악한 존재가 찾아오는 상황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몬스터 토벌을 따라다니며 스스로 신의 뜻을 행하는 자였으며 그런 안드레아 사제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부상자들을 치유하는 능력과 전사들의 힘을 북돋아 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최대한 신성력을 펼쳐보겠으나 이 정도의 악한 존재라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요제프는 안드레아와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과 눈을 맞췄다.
“움직이지.”
각오를 굳힌 일행이 천막 밖으로 나서는 순간 그들에게 보인 것은.
“크아······크아아!”
“아니에요! 난 당신의 아이가 아니에요!”
자욱한 밤안개.
그리고 그 속에서 공포에 질식해 쓰러져 가는 용병들의 모습이었다.
“착란을 일으키는 안개입니까?”
“적어도 자연적인 현상은 아니겠지요.”
요제프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자신의 연약한 육체였기에.
그나마 심지가 굳은 몇몇 용병들은 정체 모를 여인이 내뱉는 목소리에 홀리지 않은 채 안개를 피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당했군.’
통제가 되지 않은 채 엉망이 되어가는 주둔지를 보며 요제프는 확신했다.
누군가의 사악한 의도가 자신을 옭아매고 있음을.
-아가야. 나의 아가야.
요제프가 낭패감을 느끼며 입술을 씹는 순간, 용병들의 비명과 어두운 밤안개를 헤치며 서서히 다가오는 존재가 있었다.
“신이시여······.”
희미한 인영이었다.
그러나 존재감만큼은 강렬한 것이었다.
빙글- 빙글-
그것이 한 걸음씩 걸어올 때 마다 일행은 뒷목이 저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 있니?
일행을 향해 창백한 얼굴로 소리 없이 걸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의 눈가에는 쉼 없이 검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드디어 찾았구나. 나의 아가.
정작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곳에는 오직 공허한 어둠만이 자리 잡은 여인이었다.
“······.”
요제프는 느낄 수 있었다.
여인의 눈가에 자리 잡은 어둠이 정확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하얀색의 세계
주둔지가 있는 곳까지는 걸어서는 반나절은 되는 거리였으나 말을 타고서는 몇 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이랴! 이랴!”
비록 깜깜한 어둠 속에서, 고르지 않은 산길을 달리고 있다 할지라도 자야르의 말은 길을 잃지 않았다.
주인의 염원을 알아들었는지 최선을 다해 검을 든 소년과 겁많은 사기꾼을 주둔지로 안내해냈다.
“저게 뭐야.”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주둔지에 가까운 언덕 아래에서.
달빛 아래 비친 그곳의 모습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자욱한 안개에 갇혀있었다.
“저랬다니까! 그날이 꼭 이랬다고!”
“······.”
블라드는 말에서 내려 안개가 자욱한 곳을 내려다보았다.
안개가 너무 짙어 희끗희끗한 형상만 보일 뿐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이라도 도망가자! 설마 저기로 들어갈 생각은 아니지?”
“조용히.”
블라드는 손가락을 들어 고트의 말을 막고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주변을 파악하는 블라드의 예민한 청력은 이미 호르헤가 인정한 것이었다.
‘비명.’
블라드의 귓가로 용병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두서없는 병장기 소리와 의미 없는 고함들과 함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 일이었으나 블라드는 소리를 통해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무턱대고 움직이기 전에 네가 지금 어느 곳에 서 있는지부터 확인해라.’
푸른 달빛을 닮은 기사는 그렇게 말했었다.
[당황하지 마라. 움직이기 전에 나아갈 방향부터 정해라.]자신의 안에 깃든 목소리 또한 그랬다.
블라드는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떤 것을 할 수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트 넌 가라.”
“응?”
인생의 모든 것은 방향성의 문제다.
오직 올바른 방향을 아는 자만이 목표를 쟁취할 수 있다.
“대장은? 내려가려고?”
“······.”
그리고 블라드는 목표를 찾아내었다.
안개 속 어느 곳에서 누군가가 가냘프게 부르는 노랫소리가 있었다.
끊길 듯 끊기지 않았지만, 너무나 연약해 언제든 무너질 것만 같은 소리였다.
“별 의미야 없겠지만 어쨌거나 이번 일은 미안하게 됐다.”
“······응?”
블라드는 약속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충성 대신 신의를 바치겠노라고.
달빛조차 밝히지 못하는 안개 속으로 소년은 발걸음을 옮겼다.
소년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이날 밤 걸은 한 걸음은 여태껏 살아왔던 발걸음 중 가장 빛나는 것이었다.
계약을 지키고 신의를 다한다.
그것은 명예로운 것을 좇는 행위였기에.
그날 밤, 요제프와 한 계약은 블라드의 가슴 속에 빛나는 별로서 남아있는 것이었다.
“갑니다.”
[그래.]블라드는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위태롭게 반짝이는 별을 향해 걸어갔다.
※※※※
“간신히 용병들을 수습한 것도 의미가 없게 되었군.”
요제프는 안드레아의 힘겹게 더듬거리는 설명에도 사태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자야르 경이 아닌 이상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로군.”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안드레아의 뒤에서 어린 부제가 눈물을 흘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찬송가였다.
비록 공포에 얼룩진 목소리였으나 신을 부르는 그 찬란한 음률은 안드레아의 신성력과 섞여 자욱한 안개를 밀어내고 있었다.
-아가! 내 아가!
자신을 향해 새까만 손을 애타게 내미는 여인 또한 함께.
요제프는 고개를 내려 거품을 문 채 꺽꺽거리고 있는 자신의 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방법이 없는가.’
도망치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이었겠으나 빌어먹을 안개는 그들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디로 나아가든 여인의 앞으로 당도하게 만드는 안개였다.
그렇기에 기사들은 사제 안드레아가 방도를 마련할 때까지 스스로를 방패 삼아 요제프를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안드레아 사제의 출중한 축복을 받고 덤벼들었으나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스스로의 세계로 저주받을 것을 내려칠 자격이.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공포에 먹힌 용병들은 와해되었고 자신을 지키던 기사들은 저기 누워 거품을 물고는 쓰러져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죽고 말 것이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렇게 될지도 몰랐다.
‘여기까지인가.’
아무리 영민한 요제프라 할지라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저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버티십시오. 요제프 님. 내일의 태양은 반드시 찾아오는 법입니다.”
“······비록 지금은 너무 멀리 있지만 말입니다.”
비록 안드레아의 신성력에 밀려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여인은 요제프를 집요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요제프는 알 수 있었다.
만약 저 여인이 지닌 공허한 어둠과 눈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자신 또한 땅바닥을 뒹굴고 있는 기사들과 같은 모양새가 되리라는 것을.
아니, 어쩌면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역시 나를 노리고 있나.’
검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의 손에는 나무빗이 들려있었다.
너무나 소중하다는 듯 들고 있는 그 나무빗은 예전에 자신이 쓰던 것이었다.
‘누구냐.’
이것은 저주였다.
자신을 목표로 삼은 지독한 저주.
그러나 요제프의 물음에 대답해 줄 자는 이곳에 없었다.
이제 요제프를 지켜줄 기사들은 없으며 가엾은 어린 부제의 목소리는 점점 갈라지고 있었다.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기에는 오늘의 밤이 너무 버거웠다.
다가올 결과를 짐작한 요제프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어린 부제의 찬송가가 끝나는 순간 죽음이 달려들 것이다.
아무리 궁리해도 돌파할 방법을 찾을 수 없자 요제프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
마음속으로 각오를 굳힌 채 침통한 표정과 함께 눈을 뜬 요제프.
“음?”
그 순간 그의 눈에 보이는 한 줄기의 빛이 있었다.
-꺄아아아악!
검은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뒤에서 시작된 빛이었다.
“너는······.”
여인의 몸을 반으로 가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줄기의 검로.
그 검로의 끝에는 달빛 없이도 빛나는 금발 소년이 있었다.
오른쪽 눈을 감고 있는 블라드가 있었다.
[흐아아압!]장식 없는 검 끝에서 시작된 하얀색의 뇌격이 안개를 가르며 밤하늘을 밝혔다.
※※※※
[저건 저주로서 움직이는 것이다. 평범한 검으로는 가를 수 없어.]“그럼 어떻게 해요?”
[혹시 지금 오러를 쓸 수 있겠나?]“장난해요?”
목소리는 안개 속에서 요제프를 노려보는 여인을 보며 대략의 정체를 간파해냈다.
[세상의 규칙을 거스르는 마법사, 신의 뜻을 휘두르는 구마사제, 혹은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기사만이 저주로 만들어진 것을 깰 수 있다.]“안드레아 사제님은요?”
[그는 신실하지만 구마사제는 아니야. 차라리 평범한 이단심문관이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 도움이 될 것이다.]“젠장.”
여인의 눈이 닿지 않는 천막의 뒤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블라드는 방법이 없다는 목소리의 말에 자그맣게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럼 어째요?”
비장한 각오로 요제프를 위해 안개를 헤치고 왔건만 검을 휘두를 수조차 없다니.
이것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뭔데요?”
블라드의 물음에 목소리는 자신 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내가 잠깐 너의 몸을 빌리는 거다.]“······되겠어요?”
언제나 수련의 일환으로 블라드의 몸을 빌리고는 했던 목소리였다.
그러나 감각을 알려주기 위해 잠시 몸을 빌리는 것과 오러를 담은 검을 휘두르기 위해 몸을 쓰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내 몸을 빌려서 오러를 사용할 수 있겠어요? 설사 성공한다 해도 잠깐은 움직이지도 못 할텐데.”
[네 몸이니 네가 결정해라. 솔직히 추천은 안 한다.]목소리는 자신이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지만 블라드의 몸으로 구현 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다만 방법이 있다면 오직 이것뿐이라 말해줄 뿐이었다.
“죽이지 못하면 죽는 거네요.”
[그것이 검의 길이기도 하지.]블라드는 잠시동안 고민하기 시작했다.
오직 단 한 번의 기회뿐이다.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그것을 각오할 이유가 있는가?
“하죠.”
[괜찮겠나?]블라드는 가죽 갑옷의 끈을 단단히 동여매며 말했다.
“요제프가 내주는 기회는 다시는 내 인생에서 찾아오지 않을 기회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블라드는 각오했다.
이제 더는 물러서지 않기로.
“여기서 도망치면 또다시 뒷골목의 블라드가 되고 말 테니까.”
[······.]눈앞의 정체 모를 여인보다도.
실패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보다도.
블라드는 그것들보다 무서운 것이 있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제일 무서워요.”
무엇을 위해 태어났고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소년은 그중 어떤 것에도 대답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 인생의 끝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죠.”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이를 악문 블라드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개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곳에는 달이 떠 있을 터였다.
언젠가는 부숴야 할 푸른 달이.
[바로 앞에서.]“알았어요.”
소녀의 눈물로 산 검을 치켜든 블라드는 가만히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의외성에서 나온다.
의외성이란 예측을 뛰어넘고 예상을 깨부수는 움직임에서 나온다.
‘나를 못 봤어.’
검은 눈물을 흘리는 여인은 블라드를 눈치채지 못했으며.
‘흐읍!’
눈치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내지르는 일격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블라드는 안개 속을 헤치며 뛰쳐나갔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돌파해나가는 블라드의 움직임은 마치 활에서 쏘아진 화살과도 같았다.
-아가?
순간, 블라드의 발걸음 소리를 들은 여인의 목이 기묘하게 꺾여 돌아갔다.
살아있는 자라면 돌릴 수 없는 그런 각도였다.
[지금!]“큭!”
순간적으로 맞닥뜨린 여인의 눈동자는 너무나 깊고 어두워서 마치 물에 잠겨버린 듯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렇지만.
“흐으으!”
신의를 맡긴 대상에게 자신이 한 계약을 지키기 위해서 소년은 최선을 다해 오른쪽 눈을 감았다.
[으아압!]그리고 지금부터는 이름 모를 자의 세계였다.
그의 세계는 폭풍과 번개.
그리고 세상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뇌우(雷雨)로 가득한 세계였다.
그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한 줄기의 뇌격이 여인이 흘리는 검은 눈물을 갈랐다.
하얀색의 세계가 검은색의 세계를 갈라내었다.
※※※※
단 한 순간의 번쩍임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밝혔다.
요제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블라드!”
휘몰아치는 번개와 함께 눈물을 흘리는 여인을 가르며.
“크흡!”
블라드는 무너지듯 땅바닥을 굴렀다.
각오한 것이지만 찾아오는 고통은 블라드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끄아······끄아아.”
블라드는 뒤늦게 찾아오는 격통에 온몸을 뒤틀어대고 있었다.
빌린 몸으로 오러를 사용한다는 것.
그것은 육체의 주인인 블라드에게 엄청난 고통과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젠장!”
요제프는 지금 블라드가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방금 번쩍인 것은 분명 오러의 흔적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해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큰 대가를 치른 것이 분명했다.
“요제프 님!”
“찬송가를 멈추지 마십시오!”
-아가, 아가!
저주받은 여인은 갈라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땅을 기며 공허한 눈빛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이 기어가고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블라드가 있는 방향이었다.
“끄으으으!”
“눈을 감아라! 저 여인을 보지 마!”
요제프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음하고 있는 블라드를 향해 뛰어갔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블라드가 방금 보여준 번쩍임은 지금 내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가능성이었으니까.
찬란한 그것을 차가운 죽음 앞에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나를 잡아라!”
바로 뒤에서 여인이 내뿜는 한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으나 요제프는 멈추지 않았다.
“크으!”
“젠장!”
힘이 약해 블라드를 온전히 들 수는 없었으나 어떻게든 잡아끌어 신성력이 미치는 범위까지 가야만 했다.
“끄으으!”
순간, 여인의 새까만 손이 발목을 스쳐 지나갔지만, 요제프는 타오르는 격통에도 블라드를 잡은 손을 놓치지 않았다.
“요제프 님!”
갑작스레 튀어 나간 요제프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보르단이 재빨리 둘을 잡아당기며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크아! 젠장!”
“컥, 커억!”
두 명의 젊은이가 땀에 흠뻑 젖은 채 바닥을 굴러댔다.
-아아아아!
둘을 놓친 여인은 마치 아이를 잃은 어미처럼 양손을 크게 펼치며 격렬히 울어대기 시작했다.
-어디 있니! 어디 있어!
몸이 반으로 갈라진 여인이었으나 죽은 자에서 비롯된 존재여서 그런지 쉽사리 자신의 존재를 놓지 않고 있었다.
-아가. 제발, 제발, 제발.
어쩌면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있는지도 몰랐다.
-아파요. 내 아이. 찾아주세요. 제발.
“흐윽. 흐으으윽.”
옆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에 놀란 요제프는 자신의 옆에서 뒹굴고 있는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블라드는 여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럽게 울고 있었다.
마치 대여섯 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려댔다.
‘오염되었나!’
평소와는 다른 행동에 요제프는 블라드의 상태를 눈치챌 수 있었다.
“사, 사제님.”
“블라드! 정신 차려라!”
착란 상태에 빠진 것인지 블라드는 요제프의 부축을 뿌리친 채 떨리는 몸으로 안드레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에게 힘겹게 무릎 꿇었다.
“제, 제 검에 축복을 주세요. 저 여인을 보내야 해요. 보내줘야 합니다.”
“······알겠네.”
안드레아 사제 또한 블라드의 상태를 눈치챘지만 그렇게 하겠노라 말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점점 창백해지는 안색이었지만 소년의 눈빛만은 흔들리지 않았기에.
“검을 주게.”
안드레아 사제는 기도를 멈추고는 블라드의 검을 바라보았다.
장식 없는 검.
그 검의 날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대었다.
“확실한 축복일세.”
“······감사합니다.”
신실한 사제의 피가 장식 없는 검을 타고 내려갔다.
고요한 밤.
어린 부제의 찬송곡도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안타까움 외침도 잦아든 밤.
오직 소년이 만드는 힘겨운 발걸음만이 이곳에 울려 퍼지는 전부였다.
“미안합니다.”
-찾······아주세요.
달려드는 도중 아주 잠깐이었지만 블라드는 여인의 공허한 눈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서는 끔찍한 기억이 깃들어 있었다.
어두운 감옥 아래 갇혀있는 여인들.
하나씩 죽어가는 그녀들의 어리고 여린 아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아이의 어머니는 울면서 외쳐대었다.
-아가, 내 아가.
창살 밖 차가운 바닥 아래서 천천히 죽어가는 자신의 아이를 보면서.
“하아······흐으······.”
흐르는 눈물과 함께 여인의 앞에 무릎 꿇은 소년.
아이를 찾는 어머니를 향해 소년은 검을 치켜들었다.
비록 격통에 벌벌 떨리고 꼬인 근육에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육체였지만 해야만 했다.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기에.
“이제 그만 쉬어요.”
푸욱-
여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을 보며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
-어디 있니.
소년의 검이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녀의 흐르는 눈물이 차가운 땅을 적시고 고여갔다.
끝내 아이를 찾지 못한 어머니는 그렇게 멈추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