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71
장미 전쟁 (2)
도시 쇼아라를 대표하는 여관인 장미의 미소.
평소라면 향긋한 음식 냄새와 함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겠지만, 오늘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무거운 공기만이 감돌 뿐이었다.
“맥주 말고 더 시킬 건 없어요?”
“없어.”
“형도 없어?”
“음.”
“하······. 오늘 온 손님들은 다들 왜 이러지?”
검은 피부의 소년, 네드는 달랑 맥주 한 잔씩만을 시킨 하벤과 오타르를 보며 짜증이 난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요즘 잘 나간다면서 왜들 이렇게 적게 쓰는지.
“그럼 팁이라도 좀 줘요. 뭐라도 안 시키면 성과급 안 준단 말이야.”
“팁? 옜다.”
하벤은 네드의 투덜거림에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듯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오늘은 손님들한테 팁 달라고 들이대지 마라. 이게 바로 내가 주는 팁이야.”
“엿 같네. 증말.”
행동은 장난스러웠으나 목소리만큼은 진지한 하벤을 보며 네드는 그저 이맛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블라드만큼은 아니었어도 하벤이라는 존재는 이제는 쉽게 대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블라드 말처럼 저놈 소매치기 계속했으면 오래는 못 살았겠어.”
“으음······.”
오타르는 씩씩대며 떠나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나름대로 행동은 기민했으나 눈치만큼은 그에 따라오지 못했던 소년은 오늘 장미의 미소를 감돌고 있는 기이한 긴장감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거 옛날 생각나는데.”
맥주잔을 들어 올린 하벤은 흘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외팔이 잭과 호르헤가 있었을 때나 이랬을까.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날카로운 긴장감이 장미의 미소를 감싸고 있었다.
“다들 아는 얼굴들이구만.”
이곳의 주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으나 오늘 장미의 미소에 온 손님들은 자연스레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간단히 맥주 한 잔씩만을 시킨 채 서로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
비록 네드는 알아보지 못했겠으나 그들 모두는 북부를 대표하는 상회의 상인들이었다.
“세상 바쁘신 분들이 죄다 모여계시네.”
“음.”
하벤의 말처럼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는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촌각을 세우고 있는 곳은 제미나와 알리시아가 있는 3층의 별실이었다.
쇼아라일 것인가, 데어마르일 것인가.
엘프와 드워프라는 새로운 세계와의 교역이 펼쳐질 장소는.
바예지드일 것인가, 하이날일 것인가.
정교회가 인정하고 강철공이 후원하는 블라드라는 기사가 머무를 곳은.
“나는 제미나한테 걸었어.”
“음. 나도.”
단순한 치정 싸움이 아닌 수많은 사람의 이권과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소리 없는 전쟁.
선장모를 고쳐 쓴 하벤은 저 반대편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선장들을 향해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붉은 장미와 푸른 장미의 편으로 갈라져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하벤이 앉아 있는 곳은 붉은 장미의 편이 있는 곳이었다.
※※※※
“훌륭한 맛이네요. 이 요리를 만든 사람을 제 저택으로 초빙하고 싶을 정도로요.”
뒷골목 출신 여자와 고귀한 귀족 여인과의 싸움이 가능이나 한 것인가.
평소라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겠으나 블라드라는 주제에만 국한한다면 정말 모를 일이었다.
‘바예지드는 이 여자를 이용할 속셈인가 보네.’
고귀한 귀족이었으나 한미한 남작 가문의 여식이기도 했던 알리시아는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먹은 음식의 수준은 단순히 돈과 요리 실력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특히 고기의 질이 훌륭하네요.”
“칸노르 가문이 제공하는 고기에요. 모두가 건강히 초원을 뛰놀았던 녀석들이랍니다.”
고기뿐만이 아니었다.
돈이 있어도 감히 살 수 없는 각종 진미들이 지금도 계속해서 방 안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바예지드 가문의 비호를 받는 여관 장미의 미소.
지금 제미나는 자신의 뒤에 누가 있는지를 화려한 음식들을 통해 보여주는 중이었다.
“······아무리 초원을 뛰놀았다 한들 결국 울타리 안에 갇혀 키워졌겠죠.”
그러나 알리시아는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을 보면서도 차갑게 대꾸할 뿐이었다.
“바예지드라는 땅은 갇혀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넓은 땅이니까요.”
“······그런가요.”
이 여자는 알까.
자신이 바예지드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혹시라도 알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라면 굳이 존중해줄 가치는 없을 것이다.
“계약이 끝나 자유로워진 블라드 경이 이렇게 묶이는 신세가 될까 걱정스럽네요.”
포크에 찍힌 고기를 빙글빙글 돌리며 미소짓고 있는 알리시아.
그러나 그 미소 끝에 누군가를 향한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그저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남작님께서도 블라드 경을 본인의 품에 두려 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맞아요.”
“그렇다면 저로서는 작은 울타리보다는 차라리 넓은 땅에 있는 것이 안심될 것 같네요.”
알리시아의 말에 조용히 대꾸하며 고기 위에 소스를 뿌려주는 제미나.
보이는 행동은 나무랄 것 없이 정중했으나 에둘러 말하는 발언만큼은 아찔할 정도로 무례한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너무 좁은 울타리 안에서는 맘껏 뛰놀 수 없을 테니까요.”
“······.”
기묘한 긴장감이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노회한 던칸조차도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을 정도.
그 누구도 버티기 힘든 여인들의 기 싸움은 방 안의 공기를 끝없이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비록 제가 가진 것이 작기는 해도 누군가를 가두려는 울타리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할 뿐이죠.”
대답과 함께 고기를 자르는 나이프의 소리가 스산하다.
“누군가와는 다르게 말이죠.”
제미나를 블라드를 가두려는 울타리에 비유하고 있는 알리시아.
그 어떤 모욕보다도 강렬히 다가오는 그 말에 제미나는 그만 발끈하고 말았다.
“······하지만 남작님도.”
“저는 적어도 가두려 하지는 않을 거랍니다.”
냅킨으로 입술을 닦은 알리시아는 제미나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냉정한 귀족의 푸른 피는 바로 이럴 때 진가를 발휘하는 법이었다.
“오히려 내주면 내주었지.”
알리시아는 그 말과 여기 좀 보라는 듯 잔뜩 내온 음식들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이것들 전부 다 누군가에게 빌린 것들이겠지요. 이 안에 온전한 당신만의 것이 있기는 한가요?”
“······.”
알리시아의 날카로운 일침에 침묵하고 마는 제미나.
과연 그녀의 말대로 제미나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바예지드가 빌려주고 허락한 것들뿐이었다.
“하이날은 당신의 말처럼 작고도 한미한 가문이지만 저는 적어도 블라드 경에게 많은 것을 약속해줄 수 있어요.”
바예지드와 하이날의 격차는 말로 꺼내기 민망할 정도로 커다란 것이지만 블라드 한 명에 대한 지원만이라면 알리시아도 자신이 있었다.
“그가 원한다면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공유해줄 수도 있어요. 무려 제 선조님들이 수백 년 동안 쌓아 올린 것들이죠.”
일개 기사에게 내어주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었으나 알리시아가 처해 있는 특수한 상황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홀로 가문의 이름을 지켜야만 하는 여군주.
후계와 상속 문제에 있어 많은 신경을 써야만 하는 그녀에게 있어 배경 없는 유망한 기사인 블라드는 이제는 놓칠 수 없는 가장 훌륭한 대안이었다.
“바예지드가 블라드 경에게 무엇을 약속한다고 할지라도 아마 저만큼은 내어줄 수는 없을 거예요.”
“······.”
제미나는 자신의 곁을 내어주겠다고까지 말하는 알리시아를 보며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과연 모든 것을 나누겠다는 그녀의 말대로라면 바예지드가 쇼아라라도 내놓지 않는 이상 그만한 조건을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그러니 그만 놓아줘요.”
레이디 제미나는 블라드의 과거를 가졌지만 레이디 알리시아는 블라드의 미래를 확신한다.
서로 같은 남자를 바라보지만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두 여자가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가 가진 가능성이 아깝지도 않나요? 블라드 경이 이곳에 있어 봤자 그저 평생 누군가의 명령을 듣는 기사가 될 뿐이에요.”
기사를 넘어 저 높은 곳의 군주까지.
너는 그저 족쇄가 될 뿐이겠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가 되어 줄 수 있다고 알리시아는 말하고 있었다.
“블라드라는 사람이 고작 이런 여관 따위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아깝지 않나요?”
“······.”
알리시아의 말을 들은 제미나의 눈빛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이날보다야 당연히 바예지드에 있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나온다면 제미나로서도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말······. 묶고 있는 건가?’
언제나 블라드를 위해 모든 것을 내주었던 제미나.
그러나 이제는 앞서가 버린 블라드는 자신과 같이 진창 위에 서서 장식 없는 검을 바라보던 소년이 아니었다.
“······.”
가만히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본 제미나는 생각했다.
진창 옆에 있던 소년에게는 어울렸겠으나 지금의 블라드에게는 과연 어울릴 발자국인지를.
지금의 자신이 블라드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를.
※※※※
쇼아라의 성문 앞.
블라드는 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남자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마커스 님.”
“······지금 이름은 빌모시이긴 한데.”
얼굴 가득히 흉터를 새긴 남자는 자신을 끝까지 마커스라 부르는 블라드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턱 끝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잘됐군. 잠깐 나랑 여기서 누구 좀 기다리다 가지.”
불길한 운세 뒤에 맞이한 기묘한 분위기의 남자.
블라드는 지금의 만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오래 기다려야 하나요? 빨리 찾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마침 저기 오시는군.”
블라드는 마커스의 고갯짓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았다.
저 멀리 언덕에서부터 보이는 깃발들.
스투르마의 성벽을 새겨넣은 그 깃발들은 저 멀리서 서부 관문에서 돌아온 바예지드 군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게 누구신가! 그 소문이 자자한 블라드 아.우.레.오. 님이 아니신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트거 님.”
가장 앞서 다가온 깃발 밑에는 호쾌하게 웃고 있는 루트거와 그의 마법사인 도로테아가 있었다.
“이런 우연이 있나. 안 그래도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요제프와의 관계 덕분에 불편하다면 불편할 수도 있는 둘의 사이였지만 루트거는 스스럼없이 다가와 블라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대었다.
“벌써 그곳까지 소문이 퍼졌습니까?”
“소문은 멀리 나는 새니까 말이지.”
양손을 둥글게만 루트거가 장난스럽게 두 손을 자신의 귓가에 가져다 대었다.
“게다가 나한테는 마법사라는 어디서나 통하는 귀도 있고.”
루트거의 말이 끝나자 서로의 신비를 알아본 니벨룬과 도로테아가 인사하기 시작했다.
정착할 곳 없어 평생을 방랑하는 수인족들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끈끈한 종족 간의 관계라는 것이 있었다.
“이제 막 복귀하신 모양이네요.”
“마링겐 가문에게 순번을 넘기고 왔지. 그 사람들이 조금 늦게 와서 고생했달까.”
서부의 건조한 흙먼지는 이제 지겹다며 너스레를 떠는 루트거.
그런 그를 보며 블라드는 멋쩍게 웃고 말았다.
같은 핏줄에서 태어난 형제였으나 요제프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진 그였다.
-쇼아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문을 통과하는 두 기사들을 향해 쇼아라의 경비병들이 힘차게 외쳤다.
이런 환대를 처음 접해본 니벨룬의 두 눈을 크게 부릅뜰 정도의 함성이었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데 말이지. 이대로 시청에 가서 한 잔 나누는 건 어때?”
손으로 만든 술잔을 까닥이며 웃고 있는 루트거.
당장이라도 장미의 미소로 가고 싶었던 블라드였으나 루트거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차악-!
저기 저 앞에서 거꾸로 선 물병만 아니었다면.
“오······.”
“······!”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는 법.
루트거에게 있어서는 그저 신기한 일이었겠으나 그 물병에 담긴 신비의 무게를 알아본 도로테아는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저녁에는 꼭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응?”
루트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블라드의 말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다해도 바예지드의 유일한 계승자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인가.
“어디, 어디 가는데?”
지금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마커스까지 동원했건만.
그러나 마법사의 경고를 알아본 블라드는 서둘러 누아르의 고삐를 붙잡고는 행렬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감히 가문의 계승자이자 북부를 대표하는 기사의 제안을 뿌리친 블라드.
루트거는 어안이 벙벙한 모습으로 서둘러 달려나가는 블라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라도 같이 가드릴까요?”
“······.”
그리하여 블라드가 떠나간 자리에는 난생처음 보는 고양이 한 마리뿐.
루트거는 주섬주섬 배낭의 입구를 닫는 니벨룬을 보고는 당황한 듯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블라드는 언제나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요.”
알리시아의 지적은 매섭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네가 블라드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냐는 물음에 제미나는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누구라도 흔들릴만한 뒷골목이었지만 블라드가 훌륭한 기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겠죠.”
그러나 제미나는 잘 알고 있었다.
블라드에게 있어 남의 것이라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거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소년과 같이 진창 위에 서 있던 소녀는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블라드는 남작님이 내어주는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거예요.”
소년이 원했던 것은 5골드짜리 검이 아니라 그 검만이 가지고 있던 반짝임이었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블라드는 온전한 자신의 것만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요.”
남의 것이 아닌 오직 나만의 것.
블라드라는 사람이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나만의 세계를 갖기 위해 분투해 왔다는 사실을 제미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드르르륵-!
두 여인이 만든 침묵 너머로 다급히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있었다.
“······헉헉. 혹시 무슨 일 없었죠?”
황급히 문을 열고는 뛰어오듯 들어온 남자.
“······분위기, 분위기가 왜 이러지?”
블라드의 앞에서만큼은 동등해져 버린 두 여자가 동시에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흉험한 그녀들의 눈빛을 보며 블라드는 니벨룬이 말했던 흉악한 점괘가 절로 떠오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