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72
아우레오의 가치 (1)
블라드가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어찌할 줄 모른 채 앉아 있던 노기사 던칸이었다.
“오, 오오······.”
그동안 감당하기 힘든 긴장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던칸은 문을 열고 들어온 블라드를 보고는 그제야 겨우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혹시 여기에 무슨 일 없었죠?”
새하얗게 질려 있던 던칸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의 눈빛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경험 많은 노회한 기사까지 잔뜩 움츠리게 만든 것이 방금까지 이 방 안에 있었음을 눈치챘으니까.
‘이상하게 공기가 무거워.’
검을 다루는 검사이기에 느낄 수 있는 긴장감의 잔향.
그러나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확연한 적의 흔적이 아닌,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두 명의 여자뿐이었다.
둘 다 평소보다 훨씬 짙은 미소를 짓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뛰어왔나 보네. 숨까지 헐떡이는 걸 보면.”
“이거 마시고 숨 좀 돌리세요. 블라드 경.”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동시에 내미는 두 잔의 물잔을 보았다.
둘이 어째서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침 목이 말랐던 블라드는 무심코 두 잔 중 한 잔을 향해 손을 내뻗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가깝다 믿었기에 경계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블라드는 차갑게 번뜩이는 두 여자의 시선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울려 퍼지는 키하노의 경고.
블라드는 머릿속에서 뇌성처럼 울려 퍼지는 키하노의 목소리에 그만 크게 움찔하고 말았다.
[그거 중에 하나라도 잡는 순간 너는 진짜 큰일 날 거다.]‘왜요?’
[주위를 둘러봐라.]경험해보아야만 알 수 있는 그런 공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키하노만큼이나 지금의 상황을 빨리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영웅에게 있어 여난(女難)이라는 존재는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재난과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아무래도 고양이가 말한 불길한 점괘는 지금의 상황을 말하는 것 같다.]‘······.’
직접 그 순간에 와닿아야만 알 수 있는 예언과 계시.
버릇처럼 방 안을 둘러본 블라드는 그제야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제미나와 알리시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정말 다행이네요.”
뒷골목을 헤치며 살아온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이성보다는 본능이 외치는 판단을 따라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하시던 말씀마저 나누시죠.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무것도 잡지 않겠다는 듯 아예 두 손을 들어버린 블라드.
앞에 놓인 두 잔의 물잔에서 서둘러 떨어지려 하는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기민했다.
“이거 안 마실 거야?”
“내려가서 마실게.”
“여기 제가 따라놨는데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요.”
소매치기는 눈치가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이 손을 뻗어도 되는 순간인지 혹은 아닌지를.
그리고 블라드는 지금까지 훌륭히 살아남은 소매치기 중 한 명이었다.
“제가 나중에 찾아뵙겠습니다.”
조용히 닫히는 문과 함께 정중히 고개 숙인 금발의 기사.
누가 봐도 나무랄 수 없는 그의 깔끔한 퇴장에 두 명의 여인들이 아쉽다는 듯 혀로 입술을 축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경고를 무시하지 않은 블라드는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
[그 고양이한테 잘해줘야겠다. 진짜 쓸만한 녀석이네.]‘그러게요.’
지옥에서 빠져나왔다는 듯 계단을 내려가는 블라드의 움직임이 재빨랐다.
계단을 내려가는 와중에도 다시 한번 아까의 상황을 상기해 본 블라드는 자신이 느낀 긴장감의 종류가 어떠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빠져나가는 모습이 꽤 익숙하던데?]‘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요.’
키하노의 물음에 블라드는 옛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제미나가 그동안 휘어잡은 여자애들 머리채만 수십일걸요.’
[어쩐지 그 아가씨가 딱히 밀린 느낌이 안 들긴 했지.]비록 귀족의 앞이었지만 제미나가 나름대로 받아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만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를 향해 발버둥 치던 소년만큼이나 그 옆을 지키려던 소녀의 투쟁 또한 만만치는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왜 알리시아 님이랑······.’
그러나 어째서 고귀한 귀족인 알리시아와 제미나 사이에서 그런 긴장감이 만들어졌는지는 블라드로서도 여전히 의문이었다.
남녀 간의 신호에 무지하지 않았던 블라드였기에 오히려 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너도 이제는 본인의 가치를 깨달을 때가 되었다는 것이지.]고귀한 귀족인 알리시아가 굳이 뒷골목의 여자인 제미나와 기 싸움을 할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그에 대한 물음은 지금 블라드가 내려다보는 광경이 답하고 있었다.
“······.”
블라드의 등장과 함께 동시에 일어서기 시작하는 상인들.
마치 파도치듯 일어서는 그들을 보며 블라드는 잠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금부터 너의 가치는 단순히 검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기사 블라드이자 귀족인 아우레오를 보며 상인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 선장모를 벗어든 하벤까지도.
블라드는 지금 보이는 이 모든 광경을 자신이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언제나 무심히 지나쳐왔던 1층의 계단이 오늘처럼 높아 보였던 적은 없었으니까.
※※※※
블라드의 고갯짓을 따라 일어서는 하벤과 오타르.
그런 그들을 보며 주위의 상인들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소식 빠른 몇몇 상인들은 이미 네드의 주머니에 팁이 아닌 뇌물을 찔러 넣어주는 참이었다.
“이 사람들 왜 여기 있는 거야?”
“그거야 고귀하신 귀족이신 블라드 아우레오······.”
“장난하지 말고. 지팡이 뺏어버리기 전에.”
블라드의 방에 올라온 남자들.
하벤은 하는 말은 사나웠지만, 무심히 의자를 끌어주는 블라드를 보며 멋쩍게 웃고 말았다.
서 있는 위치는 달라졌을지라도 둘의 관계만큼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엘프들이 데어마르에 자리 잡았다는 소문이 이미 북부에 쫙 퍼졌어. 거기에 더해 비츠카야 백작가와 관계를 끊었다는 사실도.”
하벤의 말 대로 요즘 북부를 떠들썩하게 만든 소문 중 하나는 바로 엘프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동안 거래를 트던 비츠카야 백작가와 인연을 끊고 스스로 밖을 향해 뛰쳐나온 엘프들.
그런 그들을 주시하는 상인들의 눈은 이미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황이었다.
“마약까지 팔아치웠으니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
“뭐 어쨌거나 지금 상인들은 데어마르에 있는 엘프들한테 엄청나게 관심이 많은 참이거든. 그런데 그 엘프들을 네가 데려왔다면서?”
“데려온 건 아닌데······.”
데려온 것은 아니지만 따라온 것은 맞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블라드가 엘프들에 대해 나름의 영향력을 가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거기다 드워프들 있지? 그쪽도 심상치가 않더라고.”
“거기는 또 왜?”
블라드의 질문에 이번에는 하벤이 아닌 오타르가 대답했다.
“이거.”
“도끼가 왜?”
블라드의 옆으로 슥하고 디밀어지는 거무튀튀한 손도끼 하나.
무심코 도끼를 쥐어 든 블라드는 손바닥에 묵직하게 감겨오는 감촉을 느끼고는 잠깐 놀라고 말았다.
“좋지 이거? 기사들도 탐을 내더라.”
장식 하나 없이 오직 실용적인 용도로만 만들어진 수수해 보이는 도끼.
그러나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손안에 착 감겨드는 이 느낌은 오직 써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명품의 감촉이었다.
“드워프들이 배를 그냥 끌고 온 게 아니었더라고. 시험 삼아 교역품이라고 몇몇 물품을 풀었는데 그것들의 품질이 하나같이 장난이 아니야.”
블라드는 하벤이라는 사람이 과장이나 거짓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손짓까지 동원해가며 설명하고 있었으니 교역품이 풀렸을 때 받았을 충격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몇몇 상인들은 서부가 꽁꽁 싸매던 무기들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는 품질이라고 그러더라고. 하긴 노예들이 억지로 만드는 것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
서부의 기병대가 뛰어났던 것은 가진바 실력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지니고 있던 뛰어난 무기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니다벨리르의 드워프들이 가져온 무기들은 드워프 노예가 아닌 장인들이 만든 것이었고 둘의 차이는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드워프들도 틈만 나면 술에 취해서 너랑 요제프 님의 이름을 불러 재꼈었지. 솔직히 이 정도면.”
하벤은 오타르가 가져온 지팡이를 슬쩍 받아들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 같아도 여기로 찾아오지. 안 그렇겠어?”
“······.”
하벤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어렴풋이나마 자신이 지금 어떠한 위치에 서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결정권자는 아니지만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
크게 퍼질 동심원의 물결 속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을 사람이 바로 블라드라는 남자였다.
“······네가 예전에 나한테 배 넘겨줬을 때 말했었잖아. 이번이 기회일 거라고.”
200골드짜리 배와 함께 칸노르 가문과의 거래를 터 준 블라드는 하벤에게 말했었다.
바로 지금이 너의 인생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일 거라고.
“그런데 내가 봤을 때는 지금 너한테도 그 순간이 온 거 같아.”
이제는 반질반질해진 선장모를 집어든 하벤은 블라드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웃었다.
“이거 기회야. 그렇지?”
여태껏 남들이 만든 바람과 파도에 의지해 왔던 블라드.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직접 그것들을 만들 기회가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하벤을 보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그래도 늦지 않게 찾아왔군.”
장미의 미소에서의 일을 대충이나마 끝낸 블라드는 낮에 말했던 것처럼 루트거가 있는 쇼아라의 시장실을 찾아왔다.
“가구들이 많이 변했네요.”
“여기 시장이 부임하자마자 한 일이 바로 그거라더군.”
가지런히 술병이 들어있던 장식장에는 의미 모를 그림들과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이제는 요제프의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시장실을 보며 블라드는 이곳이 괜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제 마법사는 어디 있죠? 같이 따라가지 않았었나요.”
“그 자식 뻗었어.”
루트거는 책상 옆에 놓인 빈 술병을 흔들고는 장난스럽게 웃어대었다.
“주량이 고작 럼주 반병이더군. 도로테아만도 못한 걸 보니 아무래도 북부 출신은 아닌 모양이야.”
“으음. 그렇군요.”
주량을 통해 북부인임을 확인하는 방법은 아주 예전부터 내려온 오래된 관습이자 신뢰성 높은 방법이기도 했다.
차가운 기후에 버티기 위해서라도 북부의 사람들은 술이라는 존재에 익숙해져야만 했고 버티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예전에 다 죽고 말았을 테니까.
“한잔할까.”
“감사합니다.”
오직 둘만이 있는 방 안, 오늘따라 크고 밝은 달이 창문을 통해 내려오고 있었다.
주위에 많은 것은 바뀌었어도 지금의 풍경만큼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아 블라드는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땅콩 때부터였나. 우리가 처음 만난 게.”
“······으음. 네 그랬지요.”
혀끝에 와닿는 술맛만큼이나 쓰게 다가오는 기억이 있었다.
바예지드 가문의 장남이 내어주는 호의를 단번에 거절해버린 꾀죄죄한 소년.
귀족을 향한 블라드의 실수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생각했었지. 너를 애써 데려왔다는 요제프가 걱정되기도 했었고.”
그러나 인상을 찌푸리는 블라드와는 달리 말을 꺼낸 루트거는 그때의 기억이 즐겁다는 듯 크게 웃고 있었다.
요제프와 닮았으나 그와는 다르게 호쾌하게 지어지는 웃음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용몰이 때도 그랬고 너는 하여튼 재밌는 놈이었어.”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넘어가는 술잔만큼이나 둘의 목소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방금의 말대로 블라드는 루트거와 함께 많은 일을 겪어온 전우와도 같은 사이.
만약 요제프만 아니었다면 둘은 지금보다도 더 긴밀한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내가 이렇게도 너를 좋게 생각해주니 너도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라.”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한참 웃고 있던 블라드는 이해할 수 없는 루트거의 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지만 정작 마주 본 그의 얼굴은 온통 새까만 그림자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었다.
“이제는 미뤄야 할 일을 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는 뜻이지.”
평소의 성정과는 다르게 무언가를 돌려 말하기 시작하는 루트거.
블라드는 그의 표정을 들여다보려 노력했지만 달빛이 만든 그림자는 철저히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니 그때만큼은 내가 내어주는 땅콩을 거절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블라드 아우레오.”
그러나 두 눈으로 보지 않았어도 블라드는 루트거의 표정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당한 계승자이기에 해야만 하는 일.
조만간 다가올 파멸을 이야기하는 루트거는 지금 아무도 보지 못하는 그림자 속에서 슬프게 웃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