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76
강철공의 도시 (3)
바라노프 공작령의 주도(主都) 바스토폴.
차갑게 솟아오른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어딘지 모르게 이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들게 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길은 잘 닦아놨네요. 마차까지 다니게 할 정도니.”
블라드의 말처럼 절벽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경사는 좀 있었으나 분명 잘 닦여진 도로였다.
그것도 어느 곳에서건 쉽게 보기 힘든 잘 정비된 도로.
블라드는 신발 밑창을 통해 전해지는 반질반질한 바닥의 느낌이 나름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절벽 속에 있어서 길이 험할 줄 알았는데요.”
“그래도 공작령이니까. 단순히 규모만 보자면 스투르마보다 훨씬 큰 도시야.”
도시 바스토폴은 사람이 살기 좋은 기후에 자리 잡은 곳은 아니었으나 그만큼 안전한 도시이기도 했다.
가장 완벽한 용의 시대에부터 지금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함락되지 않았다는 북부의 도시는 오래 살아남은 만큼 번영할만한 자격을 갖춘 도시였다.
“그런데 이렇게 도로까지 만들어 놓으면 공격하는 쪽에서도 편할 거 같은데요. 애써 험한 곳에 자리 잡은 이유가 없어진달까.”
“그래?”
이제는 제법 지휘관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보는 블라드였으나 루트거는 그저 가만히 웃을 뿐이었다.
“하긴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 때가 있었지.”
열 번의 설명보다 한 번의 경험이 나을 때가 있다.
직접 경험했기에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루트거는 블라드에게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깃발을 꺼내라. 이제 곧 성문이니.”
구불구불한 절벽 길을 벗어나자 드디어 저 멀리서부터 바스토폴의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쇼아라에서 떠난 지 이제 꼬박 3주일째.
드디어 도착한 강철공의 도시는 멀리서 보았을 때처럼 여전히 태양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고 있었다.
“······응?”
“이제야 알아채는군.”
그러나 멀리서 보았을 때와는 달리 가까이 다가가니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돌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매끈해 보이는 성벽의 표면을 확인한 블라드는 곧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강철공(鋼鐵公)은 왜 강철공이라 불리는가. 그에 대한 대답이 저기에 있지.”
블라드가 여태껏 막연히 돌이라 생각했던 검회색의 돌들은 사실 돌이 아니었다.
그것들 모두가 강철(鋼鐵).
올려보아도 한눈에 담기 힘든 성벽 모두가 강철로 채워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멀리서도 반짝이던 검회색의 성벽.
이제야 그 이유를 알고만 블라드는 자신의 깃발을 꺼낼 생각조차 못 한 채 멍하니 바스토폴의 성벽을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상식의 선을 뛰어넘어 다가온 거대한 강철의 도시는 블라드의 세계에 짙은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
“이제야 모두 도착했군.”
홀로 뒷짐을 진 채 창가에 서서 천천히 술잔을 돌리는 남자가 있었다.
강철공 티무르는 저 멀리에 있는 성문을 넘어 자신의 저택으로 오는 행렬을 확인하고는 들고 있던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다행히 알리시아 남작 덕분에 회의의 구색은 맞출 수 있겠어.”
“그렇습니다. 공작님.”
함께 집무실에 있던 마법사 페르낭은 티무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세월 동안 7개 가문으로 구성됐으나 우트만 남작가의 멸문으로 오랜 기둥 하나를 잃어버리고 만 북부 회의.
그러나 불미스럽게 비워진 그 자리를 때마침 하이날이 채워줬으니 티무르로서는 분명 기꺼운 일이었다.
“······여전히 봉인함은 날뛰고 있나?”
“그렇습니다. 공작님.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티무르가 쉽게 웃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린드부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는 용의 조각들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이 경고와도 같은 신호는 지금 이 도시를 향해 진하디진한 용의 가능성이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다가오는 용의 가능성이라.”
찰랑이는 술잔에 머물러 있던 티무르의 눈길이 어느새 저택 앞에 다다른 행렬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물빛 머리카락의 여인을 향해 손을 내미는 금발의 기사가 있었다.
“하긴 그렇다면 여태까지의 일이 이해될 법도 하지.”
물끄러미 블라드를 지켜보던 티무르는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
검을 잡은 지 고작 몇 년 만에 기사가 되고, 오러를 부르고.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끄집어내 현실에 덧칠할 수 있는 재능은 티무르가 알기로는 여태껏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던 재능이었다.
“준비해두게. 직접 확인하고 싶으니.”
“알겠습니다.”
티무르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숙인 늙은 마법사가 연기처럼 흩어져 나갔다.
“······그 나무가 색깔만큼은 영롱했었는데 말이지.”
그러나 흉폭한 용의 잔재라 치부하기에는 모시암에서 보았던 그 나무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었다.
단순히 타고난 것만으로 칠해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그 황금빛은 여전히 티무르의 눈가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들고 있던 잔 위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한 모금이 있었다.
찰랑이는 술잔을 들어 괜스레 저 멀리에 있던 블라드를 담아본 티무르는 아쉽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
바스토폴의 성문을 지나 강철공의 저택에 도착한 일행은 이제 각자의 깃발을 따라 갈라져 있었다.
저택 위에서 나부끼고 있던 6개의 깃발 옆으로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하는 7번째의 깃발. 하이날.
그렇게 이제는 루트거의 인솔이 아닌 오직 하이날의 깃발 아래서 움직여야 하는 순간,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달라붙는 수많은 시선을 느끼고는 움찔하고 말았다.
-데어마르의 하이날 남작님! 바스토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렁찬 환영의 인사와 함께 천천히 열리는 저택의 문.
그 너머로 마차 몇 개는 동시에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은 널따란 정원길이 있었다.
[지금은 안 된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생각해라. 블라드.]그리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 양옆으로 도열해 있는 기사들까지.
겉보기에는 알리시아를 환영하는 무리처럼 보였으나 그 사이사이에는 쉽사리 무시하기 힘든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블라드 경?”
저 앞에서 하이날의 깃발을 든 노기사 던칸이 조용히 블라드를 뒤돌아보았다.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듯 순진한 그의 모습.
도열해 있던 몇몇 젊은 기사들은 자신들의 세계조차 느끼지 못하는 늙은 기사를 보며 굳이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검을 들고 있는 자라면 무릇 호승심에 불타기 마련이다. 그러니 저들의 도발에 하나하나 신경 쓰지 마라.]검을 들고 있다면 검사.
그러나 들고 있는 검 위에 의무를 지고 있다면 기사일 것이다.
블라드는 자신이 진 의무를 다하기 위해 도발의 눈빛들을 애써 무시하고는 알리시아가 타고 있는 마차의 문을 조용히 두들겼다.
“도착했습니다. 알리시아 남작님.”
“알겠어요.”
블라드의 신호와 함께 조용히 마차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글거리던 기사들의 눈빛이었으나 마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풀어헤치듯 나오는 물빛 반짝임에 순간 주위의 모두가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여기까지 호위하느라 수고하셨어요. 블라드 경.”
“아닙니다. 남작님.”
아마 지금 숨죽인 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모를 것이다.
지금도 눈을 떼지 못하는 알리시아의 반짝임이 오랜 여행길에 지쳐 충분히 제빛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저를 위해 길을 열어주시겠어요?”
나를 위해 길을 내어달라는 알리시아의 부탁에 블라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레오의 이름이 아닌 하이날의 깃발 아래 서 있던 것은 바로 지금을 위함이었으니까.
“당신을 위해 그렇게 하기 위해 제가 이곳에 있습니다. 남작님.”
초대받기는 아우레오였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
하이날의 깃발이 나부끼는 아래서 블라드가 알리시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지금이라면 해도 된다.]그러나 손색없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알리시아가 바라는 대로 그녀에게 제대로 된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큭!”
“흐음······.”
하이날의 깃발을 들고 있던 던칸은 갑작스레 비틀거리는 기사들을 보고서는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깃발을 드느라 잔뜩 긴장해 있는 그가 잠시라도 뒤를 돌아보았다면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다들 고개를 숙이네요.”
“하이날에 대한 존중의 표시일 겁니다.”
“다행이에요. 혹시 무시라도 당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오래된 옛 전통에 맞추어 고귀한 레이디를 위해 자신의 망토를 펼쳐 든 기사.
나의 망토를 통해 혹시라도 그녀에게 닿을 모든 모욕을 차단해버린 블라드는 이제 조용히 감은 왼쪽 눈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가시죠. 알리시아 님.”
블라드의 인도에 맞춰 알리시아는 천천히 강철공의 저택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머리를 조아리는 북부의 기사들.
그들의 환대를 보며 알리시아가 조용히 속삭이기 시작했다.
“당신께 부탁하기를 잘했네요.”
지금 이 자리에 하이날의 나무는 없었지만 알리시아는 여전히 나무 아래 서 있었다.
그 나무의 빛깔은 황금색.
커다랗지는 않았으나 분명 높은 곳을 향해 뻗어있는 나무였다.
※※※※
“야장(冶匠)님! 야장님! 나 좀 봅시다!”
한가로이 갈매기들만 떠다니는 섬 위로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 안에 있으면 있다고 말 좀 해주지!”
“······말했다 이놈아. 화통 삶아 먹은 네 목소리가 다 잡아먹어서 그렇지.”
야장이라 불린 늙은 드워프는 자신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는 시구르손과 그의 선원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바깥바람 좀 맞고는 성질 좀 죽여올 줄 알았더니 여전하구나.”
“평생을 이러고 살았는데 고작 몇 달 따위로 되겠어요? 그나저나 이것 좀 봐봐요.”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시구르손은 먼저 부족장에게 보고해야만 했지만 정작 그가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은 야장이라 부르는 늙은 드워프였다.
“고로? 이게 왜?”
“나이가 드시니까 이제는 눈까지 침침해지셨나 보네.”
더는 투덕거리기도 싫다는 듯 손사래를 친 시구르손은 서둘러 자신의 품에 있던 안경을 꺼내고서는 늙은 드워프에게 씌워주었다.
“이제 봐요. 보여요?”
“낡은 고로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무엇이 그렇게 급한지 평소보다 훨씬 안달이 난 시구르손을 본 늙은 드워프는 테 옆에 붙어있는 나사를 돌리며 안경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
“응?”
그러자 보이는 자그마한 꼬리.
낡은 고로 속에 숨어 있던 작은 도마뱀과 눈이 마주친 늙은 드워프는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거······뭐야.”
“얘 맞아요? 아니 우리는 책으로만 봤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이게 뭐야!”
갑작스러운 늙은 드워프의 외침에 어린 도마뱀이 재빨리 고로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마치 머리만 숨기면 된다는 듯 여전히 꼬리는 살랑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거 어디서 가져왔어!”
시구르손은 점점 평정심을 잃어가는 늙은 드워프를 보며 자신이 제대로 된 것을 가져왔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맞나 보네. 살라맨더.”
부들부들 손을 떨어대는 늙은 야장을 보며 시구르손이 씨익 웃기 시작했다.
그 옛날, 어떠한 것이라도 녹일 수 있다던 드워프들의 용광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용광로의 열기는 무언가를 태워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뜨거움을 간직한 채 태어났기에 무엇이든지 녹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야장님. 내가 부족장님한테 보고하러 가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확인은 마쳤으니 이제는 보고해야 할 차례.
그러나 어느새 낡은 고로를 감싸 안은 늙은 드워프는 그 안에 있는 어린 도마뱀에 온통 정신이 팔려 버린 참이었다.
“그래. 그래. 어이구 착하지.”
“······혹시 인간들한테 단검 같은 거 만들어 준 적 있는가? 예전에 영감님 서부에서 노예 하던 시절에.”
“그렇지. 그렇지. 해치지 않아요.”
마치 어린 손자라도 보는 듯 우쭈쭈 거리고 있는 야장을 보며 시구르손은 뒤통수를 벅벅 긁어대었다.
“수리할 때 보니까 희미하긴 했어도 야장님의 인장 같아서 물어본 건데······. 그냥 나중에 와서 다시 물어볼게요.”
부족장한테 가기 위해 시구르손이 번쩍 고로를 뺏어 들자 늙은 드워프의 눈이 아련해지기 시작했다.
“단검······?”
귓가에는 머물고 있었으나 그제야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시구르손의 질문에 늙은 드워프는 아주 오래된 옛 기억을 들춰내기 시작했다.
“······예전에 한 번 만들어준 적이 있긴 한데.”
어느새 저 멀리 걸어가고 있어 대답해주지는 못했지만 시구르손의 물음대로 늙은 드워프는 인간 기사를 위해 단검 몇 개를 만들어 준 적이 있긴 했었다.
비록 도망치는 와중이었기에 제대로 된 것을 만들어주지는 못했지만 분명 고마움과 감사함을 담아 자신의 인장을 새겨넣은 단검이었다.
언제라도 찾아오면 다시 제대로 된 것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