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78
초대받지 않은 손님 (2)
길고도 넓은 복도.
저 멀리서부터 샛노란 황혼을 밟으며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지금 남자가 걷고 있는 복도는 오직 고귀한 귀족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었으며 그 길의 끝에는 북부 최고 권력인 영주들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
강철공 티무르는 회의장을 향해 걸어오는 블라드를 보며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찬란한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귀족적으로 생긴 외모까지.
‘의식해서 보니······. 확실히 닮았군.’
지는 해를 따라 걸어오는 블라드를 보며 강철공 티무르는 머릿속에서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강렬했기에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인상의 소유자. 사르누스 드라굴리아 공작.
왜 이제야 알아봤을까 싶을 정도로 지금 블라드의 모습은 기억하고 있던 용혈공의 인상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공작님.”
블라드를 보며 고민하고 있던 티무르는 페르낭의 나지막한 부름에 살짝 시선을 돌려 보았다.
“흔들리고 있습니다.”
“······음.”
늙은 마법사가 들고 있는 천칭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쪽은 용의 모습을 새겨넣은 화려한 브로치가,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검의 문양을 새겨넣은 낡은 동전이 올려져 있는 자그마한 천칭이었다.
“어느 쪽인가.”
“조금은 더 다가와야 알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과연 잘 모르겠다는 페르낭의 말대로 그가 들고 있는 낡은 천칭은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블라드의 발걸음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요란해지는 중이었다.
“······그 녀석도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군.”
티무르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는 천칭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가올수록 짙어지는 노을의 그림자.
그것이 지금 이곳으로 걸어오는 블라드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저물어가는 노을의 끝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은 용인가, 기사인가.
그러나 티무르는 블라드가 아무리 가까이 다가온다 해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
끼이이익-
천천히 문틈 사이로 사라져 가는 블라드의 뒷모습.
지켜야 하기에 남아있던 7명의 기사는 복도에 남아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블라드 경이 들어가는 걸 보니 회의가 얼추 마무리됐나 보군요.”
“아무래도 그런가 봅니다.”
“계획했던 대로 마무리만큼은 좋게 끝내는 것이 좋겠지요.”
남아있던 기사들은 블라드의 입장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회의는 이제 끝났고 남은 것은 하나를 위한 선언과 결의뿐.
그런 자리에 있어 필요한 것이라 한다면 아마 흥을 돋울 수 있는 축하주 정도일 것이다.
“이제 겨우 20살이라고 했던가?”
“과연 어지러운 시기에는 인재가 탄생한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입니다.”
명분 없는 황제가 즉위하고, 중부의 전쟁은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으며 이제는 사특한 존재까지 북부를 노리고 있었다.
온통 우울한 소식뿐인 지금의 상황에서 블라드라는 존재는 분명 북부가 위안 삼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상징일 것이다.
“음?”
기사들이 모여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루트거는 갑작스레 올라오는 소름을 느끼고는 목덜미를 붙잡고 말았다.
‘뭐지.’
마치 새파란 검날이 목에 닿은 것만 같은 느낌.
본능이 먼저 알아챈 그 서늘한 경고가 목덜미를 타고 오르며 점점 온몸으로 번지고 있었다.
“······.”
“······.”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던 루트거는 순간 자신과 눈을 마주친 볼코프를 볼 수 있었다.
혼자만의 착각이 아닌 볼코프도 알아차린 감각.
둘은 서로를 통해 지금의 서늘함이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뭔가가 옵니다!”
“흡!”
쐐애애엑-!
어두운 복도, 끝이 보이지 않는 먼 거리.
그러나 보이지는 않았어도 느낄 수 있는 그곳을 향해 볼코프는 망설임 없이 투창을 날렸다.
경고를 알리는 루트거의 외침보다도 훨씬 빠른 몸놀림이었다.
“으으!”
“이게 도대체 무슨······.”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파공성에 던칸과 에른스트가 귀를 막아버리고 말았다.
“······!”
복도 끝을 노려보는 볼코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이제는 닿고도 남을 시간.
그러나 기다렸던 투창의 피격음은 들리지 않았고 어두운 복도는 여전히 고요할 뿐이었다.
“······이런!”
파아악-!
새까만 복도를 노려보던 볼코프가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날려 보낸 만큼이나 강맹한 기세로 되돌아오는 투창을 보았기 때문에.
‘그걸 잡아챘단 말인가!’
가장 빠른 용인 린드부름조차도 피하기에 급급했던 투창이건만.
그러나 상대는 피하지도 쳐내지도 않은 채 그저 손으로 잡아낸 모양이었다.
따아앙-!
“크흡!”
다급하게 후려친 창과 창 사이로 요란한 불꽃이 튀어 나갔다.
그 불꽃과 함께 퍼져나가는 날카로운 충격파만으로도 세계를 갖추지 못한 기사들은 크게 비틀거리고 말았다.
“습격인가!”
“······아무래도 뚫린 모양이군.”
튀어 오르는 불꽃을 보며 사태를 파악한 카로이와 기예르모는 재빨리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뚫려서는 안 되는 도시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마련되어 있는 공간.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지금 저 앞에 있는 습격자가 보통 실력이 아님을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냐!”
분한 듯 바드득거리며 갈리는 잇소리와 함께 카로이의 감은 왼쪽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함락당하지 않았다던 바스토폴.
비록 카로이가 바라노프의 기사는 아니었을지라도 도시 바스토폴은 북부 기사들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숨어 있지만 말고 나와 봐라!”
기선을 제압하는 커다란 함성과 함께 기사 카로이는 치켜든 도끼로 방호태세를 굳히기 시작했다.
중부에 아른슈타인의 파블로가 있다면 북부에는 하르키타의 카로이가 있다.
마치 성벽과도 그들의 태세는 그 누구를 상대하라더라도 쉽게 뚫리지 않는 단단한 것이었다.
콰아아앙-!
분명 그랬어야만 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카로이의 방호태세는.
“크흡!”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그림자 하나.
그러나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다가와 버린 습격자는 카로이를 향해 차갑게 웃고 있었다.
‘이건······!’
도끼와 검이 맞부딪히자 마치 태풍과도 같은 출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살결에 와닿는 바람만 느껴보아도 방금의 일격에 얼마만큼의 힘이 터져 나왔는지 알 수 있는 그런 충격이었다.
“컥!”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한 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벽면으로 처박혀 버린 카로이.
단단한 성벽과도 같았던 그의 방호태세는 그저 단 한 번의 일격만으로 뿌리 뽑히고 말았다.
“카로이!”
“예사 놈이 아니군!”
처참하게 나가떨어진 카로이를 보며 기예르모와 랄프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노을이 아닌 달빛이 스며드는 어두운 복도.
그곳에서 오직 홀로 서 있는 금발 하나가 매섭게 달려드는 북부의 기사들을 보며 차갑게 웃고 있었다.
“용살 기사단?”
쏟아지는 달빛을 담으며 세차게 검을 휘두르던 기예르모는 물끄러미 빛나는 문장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용을 죽이는 용들.
드라굴리아의 문장이 새겨진 갑옷 위로 사내의 새파란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두근-!
“뻔히 보이는군.”
“뭐?”
그 어떤 기사라 할지라도 현혹할 수 있다는 로므니에의 검.
그러나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내는 단 한 번의 찌르기만으로도 기예르모의 변화무쌍함을 멈춰 세울 수 있었다.
“의도가 너무 얕다는 말이야.”
“······!”
기예르모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미르셰아를 보며 소름이 돋고 말았다.
그의 웃음과 함께 차갑게 파고드는 검의 감촉을 느꼈기 때문이다.
“크아악!”
“네 이놈!”
고통스러워하는 기예르모의 옆에서부터 세차게 뛰어 들어오는 기사가 있었다.
검을 찌르고 있었기에 빌 수밖에 없는 공간.
경험 많은 기사인 마링겐의 랄프는 기예르모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망설임 없이 검을 내질렀다.
‘여기라면!’
오른손으로 기예르모를 찌르고 있었기에 이 공격만큼은 쉽게 반응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반응한다고 할지라도 그저 약간의 회피 동작······.
파아앙-!
“쿨럭!”
그러나 랄프는 묵직하게 다가오는 복부의 압박을 느끼며 형편없이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랄프가 다가오는 곳으로 발차기가 뻗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랄프를 희미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상대가 이미 자신보다 몇 수는 더 내다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뒤로 물러나시오!”
“크흡!”
어깨가 꿰뚫려 있던 기예르모는 볼코프의 지원이 있고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급하게 뒤로 물러나는 몸놀림과 함께 새빨간 핏줄기가 복도에 흩뿌려졌다.
“북부가 자랑한다는 기사들이 고작 이 정도였다니. 이것 참 실망이로군.”
“······.”
기예르모를 끄집어낸 볼코프는 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투창을 치켜들었다.
어설피 떠 있던 달이 완연히 무르익자 보이는 풍경.
처참하게 나가떨어진 세 명의 기사들이 지금 볼코프의 뒤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절대로 가볍지 않은 그런 기사들이었다.
“미르셰아······ 드라굴리아.”
“오랜만입니다. 볼코프 경.”
그리고 그런 기사들을 고작 차 한잔 마실 시간 만에 해치워 버린 남자가 있었다.
제국에 있는 수많은 기사단 중에서도 최고를 다툰다는 용살 기사단.
“강철공을 뵈러 왔습니다. 비켜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기사단의 단장인 미르셰아 드라굴리아.
“제 동생 라두를 아껴주신 은혜도 갚을 겸 해서 말입니다.”
그가 지금 한 번도 함락되지 않은 도시 위에서 웃고 있었다.
※※※※
“······!”
몇 발자국만 걸으면 회의장으로 들어설 수 있는 거리.
저 앞에 있는 페테르와 알리시아의 얼굴까지도 알아볼 수 있는 거리에서 블라드는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두근-!
도시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꼈던 기이한 심장 박동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더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이거 뭐야.”
앞으로 나아갈수록, 그리고 티무르에게 가까워질수록 쿵쾅거렸던 심장은 이제 블라드의 의지를 넘어 제멋대로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의지가 아닌 본능에 의해 질주하기 시작하는 심장.
이와 같은 때를 느껴본 적 있던 블라드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고는 멈춰서기 시작했다.
“······공작님.”
“말해라.”
앉아 있던 영주들도 블라드의 이상함을 느꼈는지 티무르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티무르는 영주들이 시선 속에서도 그저 블라드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자연스레 늘어뜨린 티무르의 오른손은 옆에 있는 칙서도, 혹은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을 집을 수도 있는 위치에 가 있었다.
“무엇이냐.”
저물어가는 태양을 뚫고 드디어 나의 앞에 당도한 남자.
티무르의 물음에 흔들리던 천칭이 마침내 크게 기울어지고 말았다.
“······용입니다.”
진실을 알려주는 낡은 천칭이 가리키고 있는 추.
그것은 화려하게 장식된 용 모양의 브로치가 있는 곳이었다.
채앵-!
“······!”
티무르는 갑작스레 들리는 소리에 서둘러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왼쪽 눈을 감은 채 검을 빼 들고 있는 블라드가 있었다.
‘블라드······!’
영주들을 향해 검을 빼든 블라드.
너무나도 불경한 태도에 페테르는 흠칫거렸고 알리시아는 평소보다 훨씬 새파래진 블라드의 눈동자를 보고는 속으로 새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지금 이게 무슨 행동이지. 블라드 아우레오?”
“······.”
블라드의 돌발 행동에 검을 다룰 줄 아는 영주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북부의 영주는 오직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만 될 수 있는 법.
지금 일어서고 있는 영주들은 모두가 페테르나 티무르와 마찬가지로 전(前) 시대를 대표했던 기사들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 너의 검을 뽑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블라드 아우레오.”
고작 한 발자국의 차이로 회의장과 복도가 나뉘는 거리.
그 경계에 서 있던 블라드는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를 숙인 채 가만히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뚫고 올라오는 키하노의 목소리가 블라드의 세계 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밑을 바라보지 마라. 그곳에 있는 것은 너의 것이 아니야.]타고난 피가 가리키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도시 바스토폴의 가장 밑에 자리 잡은 곳이었으며 노련한 마법사의 신비로도 완벽히 가릴 수 없는 강렬함이 있는 곳이었다.
[네가 항상 바라보던 곳은 어디였지? 고딘이라는 푸른 달은 어디에 매달려 있었나?]그러나 이제는 블라드도 알 수 있었다.
이 도시 아래에서 나를 부르는 완벽한 조각이 있다는 것을.
그 조각은 그저 손에 넣는 것만으로도 진창에서 태어난 나를 존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그런 조각이었다.
[네가 갖고 싶어 했던 장식 없는 검은 어디에 매달려 있었는지 기억해봐라.]마치 키하노의 목소리를 지우려는 듯 블라드의 심장 박동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귓가를 가득 메우는 조각의 부름에 블라드는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키하노. 나 용이었어요?’
어머니는 뒷골목의 창녀였고 아버지는 누군지 모르는 게 흔하디흔한 고아.
그러나 저 밑에 있는 조각이 속삭여주는 나의 핏줄에 블라드는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어서 나에게로 와라. 어린 용아.
여기 가둬져 있는 나를 찾아라.
나는 쥐기만 해도 너를 존귀하게 만들어 줄 존재이니.
나와 함께 하면 너는 영원할 완벽함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오직 용으로 태어난 존재만이 들을 수 있는 속삭임이 지금도 계속해서 블라드의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도저히 지나치기 힘든 매혹적인 울림이었다.
새로이 품은 별의 이름
용이란 본래 완벽한 것이다.
거대하고, 빠르며, 날카롭고, 단단하며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가장 하늘에 가까운 존재.
모두가 우러러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미로운 일이란 말인가.
두근-! 두근-!
지금 저 깊숙한 밑에서 블라드를 유혹하는 조각들이 있었다.
완벽해지고자 하는 용의 조각들.
가장 빛나는 가능성을 알아보는 존재는 오직 키하노 뿐만이 아니었다.
“으······ 아아아아!”
쾅! 쾅!
애써 진정시키려 했지만 지금도 쿵쾅거리는 심장은 도무지 멈추질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쿵쾅거림과 함께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분노와 광기.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용의 본능에 블라드는 바닥을 내려치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밑을 보지 마라! 위를 봐라! 블라드!]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키하노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가리고 있었다.
순례자들을 공격하던 데스웜.
야만인들을 잡아먹던 린드부름.
그리고 세계수의 어린 정령들을 삼키려던 니드호그까지.
나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을 가져가려 했던 용들. 나에게도 그것들과 같은 피가 내 몸속에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블라드는 분노하고 말았다.
“그럼 내가 지금껏 한 건 뭔데!”
시간이 갈수록 눈동자는 새파래지고 이빨은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점점 피의 본능에 굴복해가는 블라드를 보며 북부의 영주들이 검을 뽑기 치켜들기 시작했다.
“블라드! 블라드 경!”
그 모습을 보며 애타게 외치는 알리시아의 목소리마저도 희미해지는 가운데 블라드의 의식은 천천히 용의 조각이 있는 곳으로 빠져들어 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있던 린드부름조차도 응답하고 말았던 조각들의 유혹은 지금 막 용의 피를 자각한 블라드로써는 감히 거부하기 힘든 부름이었다.
“······.”
하얀색에서 초록색으로.
초록색에서 푸른색, 황금색을 거쳐 이제는 불길한 핏빛 색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블라드의 세계를 보며 티무르는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용으로 태어났지만, 그렇다고 용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는 거다!]거친 심장 박동 소리에 점점 가려져 가는 키하노의 목소리.
그러나 키하노가 전해주고자 하는 마지막 말 만큼은 블라드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박혀 내려올 수 있었다.
태어난 대로 살아가지 마라.
부디 원하는 대로 살아가라.
용으로 태어났지만, 별을 바라보았던 그때처럼.
조각들이 부르는 대로 천천히 가라앉아 가던 블라드는 키하노의 마지막 외침에 고개를 들었다.
깊게 침잠했기에 볼 수 있는 그곳에는 언제나 나를 지켜보던 별 하나가 떠 있었다.
※※※※
“크흑!”
볼코프는 저릿저릿한 손아귀를 움켜쥐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무기의 상성이 있다고 해도 투창의 볼코프는 북부를 상징하는 기사 중 하나.
그러나 지금의 그는 진땀을 흘리며 미르셰아의 공격을 받아내기 급급할 뿐이었다.
‘······이렇게나 강했었나!’
빠르고, 날카롭고, 단단하다.
도저히 파고들 틈이 없는 자세는 그야말로 완벽(完璧).
심지어 세우고 있는 오러는 앞으로 걸어올수록 점점 더 깊어지는 것만 같았다.
“듣던 대로 북부는 손님 대접이 형편없군.”
앞으로 다가올수록 미르셰아의 기세는 거세져만 갔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던 볼코프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준비할 뿐이었다.
“먼 곳을 날아왔는데 고작 이것뿐이라니.”
미르셰아의 기만에 쓰러져 있던 기사들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마 일어설 수 없는 것은 그가 새겨넣은 일격이 너무나 뼈아팠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뿐이라면 정말 실망인데.”
북부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는 미르셰아를 보며 볼코프의 눈썹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볼코프의 투창에 오러가 가득 맺히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 정도는 내어주셔야지.”
보이는 기세는 분명 매서웠으나 정작 그것을 보고 있는 미르셰아는 기꺼운 듯 웃고 있을 뿐.
미르셰아는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이한 고양감을 느끼며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완벽해지는 나라는 존재에 취하면서 말이다.
“······대접이 섭해서야 쓰나.”
그러나 거침없이 나아가려는 그의 발걸음을 붙잡는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여태껏 미르셰아를 붙잡고 있던 볼코프의 뒤에서부터 흐르고 있었다.
티이이잉-
쇠가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손가락으로 검면을 튕긴 루트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감고 있는 그의 왼쪽 눈에서부터 짙고 끈적한 붉은 오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내가 상대해드리지.”
용암과도 같은 끈적하고도 뜨거운 오러가 루트거의 검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그의 세계는 화산과도 같은 세계.
호탕하게 웃고 있는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아직도 뜨겁게 타오르는 상처와 분노가 가득했다.
“나 대신 쓰러져 준 기사들의 몫까지 말이야.”
기사들이 벌어준 시간을 틈타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 꺼내온 루트거의 세계.
“······!”
그동안 참고 있던 루트거의 분노가 마치 활화산처럼 터져나와 미르셰아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콰아아앙-!
마침내 휘두른 일검 하나에 복도의 창들이 깨어지고 바닥이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깨어져 나가는 파편들 속에서 뛰쳐나가는 붉게 물든 선 하나가 있었다.
“드디어 그 잘난 면상에 한 방 먹일 수 있겠군!”
“루트거······. 바예지드!”
검과 검 사이에서 바짝 마주한 푸른 눈동자와 붉은 세계.
더는 거칠 것 없는 두 사내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만 같은 회의장.
그 입구에 서 있던 블라드가 비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가슴팍을 부여잡은 모양새가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진짜, 진짜 그래도 돼요?”
“뭐?”
블라드를 보고 있던 티무르는 갑작스레 묻는 블라드의 질문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혼잣말인 줄은 알겠지만, 그저 정신 나간 질문처럼 들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진짜······. 원하는 대로······.”
새파래진 블라드의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어딘가에 홀린 듯한 눈이었으나 형형한 안광만은 여전히 터질 듯 빛나.
“공작님.”
티무르는 옆에서 자신을 다급히 부르는 페르낭의 목소리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
“······!”
바뀌지 않기에 진실.
그러나 진실을 알려준다는 천칭은 지금 부르르 떨리며 천천히 반대쪽으로 기우는 중이었다.
판단한 진실을 번복하는 지금의 상황은 페르낭에게도 티무르에게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어린 용아. 그곳이 아니다! 나를 봐라!
-갖기 어려운 것을 동경하지 마라. 지금 네 주위만 해도 쓸어 담을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나 가득한데!
조각들이 외치는 소리가 귓가에 가득했지만 지금 블라드는 들었으되 보지는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고개를 든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티무르를 바라보았고.
이제는 그를 넘어 저 천장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진짜 해도 돼요?”
장식 없는 검을 넘어, 푸른 달을 지나, 마침내 마주할 수 있는 하늘 저 너머에 별 하나.
여태껏 마주한 그 어떤 존재보다 찬란히 빛나는 그 별을 보며 블라드는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우르르르르-
“공작님!”
“이게 무슨!”
“꺄아악!”
갑작스레 땅 아래서부터 퍼지는 거친 울림에 북부 영주들이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도시를 뒤흔들고 있는 그 울림은 이대로 어린 용을 놓지 못하겠다는 조각들의 고함과도 같은 것이었다.
‘······용은 맞나 보군!’
맹약의 수호자인 강철공 티무르는 지금의 진동이 용의 조각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블라드는 분명 용이 맞을 터인데.
“······하지만 기울었어.”
그러나 부들거리던 낡은 천칭은 어느새 완전히 반대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기울어져 있는 쪽에 올려져 있는 낡은 동전은 그 옛날 소드마스터가 자신의 검에서 떼어내었다던 명예로운 금속으로 만든 동전이었다.
“너는 누구냐.”
용의 조각도 진실의 천칭도 모두 자신이 맞다고 하는 상황.
베어야 하는 맹약의 의무와 지켜야 하는 기사의 의무 사이에서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 없던 티무르는 조용히 왼쪽 눈을 감고는 앞에 있는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
눈을 감자 보이는 세계.
땅의 울림도 영주들의 비명도 들리지 않는 그 고요한 세계에서 티무르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블라드를 가린 채 서 있는 그 남자는 지금도 두 손을 들어 어린 용의 귀를 막아주고 있었다.
※※※※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은 다들 별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었다.
그리고 아무리 쥐어보아도 닿지 않음을 깨달았기에 어른이 되었다.
“애송아. 이런 곳에서 괜히 꿈을 가지면 너만 고달파져.”
늙은 대장장이도 말했었다.
헤어나올 수 없는 곳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다 보면 괴로워지는 것은 너뿐이라고.
결국,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것이 모든 아이들의 운명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너는 용으로 태어났지.]그래도 나는 믿었다.
이렇게 진창 위에서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대단한 것은 아닐지라도 나는 나만의 빛을 가지기를 원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꼭 용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는 거다.]저 하늘에 닿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스스로가 빛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별일 것이다.
그리고 올려다본 하늘에는 언젠가, 분명히 나를 알아봐 주는 빛이 있다.
“······맙소사.”
맹약의 수호자이기에 알아볼 수 있는 남자의 뒷모습.
감은 왼쪽 눈을 통해 세계에 닿은 티무르는 지금 자신이 어떠한 광경을 보고 있는지 깨닫고는 경악할 뿐이었다.
별을 보고 있던 블라드의 등 뒤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나무의 빛깔은 황금색이었으며 곧고 바르게 자라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별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무를 이루는 한쪽 면은 쇼아라의 블라드.
다른 한쪽 면은 블라드 아우레오.
그리고 남은 한쪽 면은 가지고 태어났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드라굴리아.
부정적인 면조차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 블라드는 이제 진정한 자신을 찾을 때가 되었다.
[앞으로도 어린아이들의 가능성을 위해 검을 들테냐.]“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면 어느 곳에 있더라도 너의 의무를 외면하지 않을 테냐.]“네.”
맹약의 수호자를 증인 삼아 소년과 기사가 치르는 서임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저 밑에서 울려 퍼지는 용의 울음소리 따위는 닿을 수 없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키하노는 블라드의 귀를 막고 있던 두 손을 떼고는 기억 속에서 검 하나를 꺼내 블라드의 어깨에 가져다 대었다.
찬란히 빛나는 은색의 기사는 어린 세계수에서 보았을 때보다도 훨씬 커다랬으며 또한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 명예로워야 하는 너를 위해 정당한 대가만을 받을 수 있겠느냐.]남의 것을 탐하지 말고 빼앗지 말고 오직 정당한 나의 대가만.
언젠가 푸른 달이 알려준 적 있던 기사의 규율을 들으며 블라드는 그제야 앞에 있는 키하노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네.”
용으로 태어났으나 별처럼 살아가겠다 맹세하는 블라드를 보며 소드마스터는 천천히 물러났다.
[모든 의무를 지키겠다 맹세한 너는 오늘부터 너 자신의 주인이다.]키하노의 선언과 함께 두근거리는 심장 사이로 용의 피가 아닌 별빛 하나가 머물기 시작했다.
태어난 대로가 아닌 원하는 나의 모습.
그렇게 블라드는 자신의 심장 안에 깃든 별 하나를 바라보았다.
장식 없는 검은 깨어졌고, 푸른 달에는 결국 닿지 못했지만 그래도 블라드는 새로이 꿈꿀 수 있는 별 하나를 가슴 안에 담을 수 있었다.
그 별은 여태껏 가장 가까이서 소년을 비춰주고 있던 빛이었으며.
소리 내어 부를 때는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