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8
바예지드 가문으로 (1)
어두운 밤.
강 너머에서.
충직한 기사는 최선을 다했다.
미약한 가능성이나마 보태기 위해 블라드를 보냈고 자신을 옭아매려는 옛 동료를 가차 없이 베어낸 후.
“끄으으윽! 커억!”
그 뒤에서 죽음을 조종하는 자를 찾아 심장을 끄집어냈다.
“······.”
너무나 쉽게 무너진 죽음을 조종하는 자를 보며 그 또한 누군가의 꼭두각시일 뿐이라는 것을 느꼈지만 자야르는 고민하는 대신 주군을 위해 뛰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얼음이 부서진 강을 헤엄치고 왔던 길을 다시 달리며.
낮게 깔린 나뭇가지들이 자신의 얼굴을 세차게 때려도 자야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달려 나갔다.
“기사님!”
도중에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돌아온 고트를 발견하고는 서둘러 말을 집어 타고 달려오길 몇 시간.
마침내 주둔지에 도착한 자야르의 눈에 비친 광경은 예상했다시피 습격으로 인해 엉망이 된 주둔지와.
“왔는가?”
바위 위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요제프의 모습이었다.
요제프의 멀쩡한 모습을 확인한 자야르는 그제야 비로소 안심하고는 이제껏 쌓아왔던 가쁜 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십니까?”
험한 일을 겪어서인지 안 그래도 짙게 드리워진 요제프의 눈그늘은 얼굴의 반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죽는 것보다는 나았지.”
요제프는 자야르를 향해 기운 없는 표정으로 웃어 보이고는 다시 먼 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번 토벌은 완전히 망했네.”
“······면목이 없습니다.”
자야르는 고개를 숙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바닥에 떨궜다.
낯선 사내의 머리통과 그가 들고 있던 검은색의 나무함이었다.
“그놈인가?”
“아마도 그렇습니다.”
많은 것이 생략된 물음과 대답이었으나,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요제프와 자야르에게는 충분한 대화였다.
“망하긴 했는데······.”
요제프는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겠군.”
“그 녀석은 쓸만했습니까?”
“쓸만했냐고?”
요제프는 자야르의 물음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면 찾은 것 같네.”
“무엇을 말입니까?”
자야르는 웃고 있는 요제프의 얼굴을 보았다.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미소 짓는 그 웃음은 마치 어렸을 적 요제프를 떠올리게 했다.
“나 대신 검이 되어줄 사람을.”
어느새 짙은 눈그늘을 지닌 청년이 된 요제프는 자야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애송이는 어떤 검보다 빛나는 검일세.”
그 말과 함께 요제프는 아무런 근심하나 없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 위로 오늘의 태양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버거웠던 어젯밤, 그토록 바랐던 내일의 태양이었다.
“춥군. 이만 돌아가지.”
“네.”
쟈아르는 한쪽 발을 절뚝거리는 요제프를 부축하며 천막으로 안내했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등지며 두 명의 남자가 걸어갔다.
토벌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요제프는 미소 짓고 있었다.
비록 오늘은 실패했지만, 내일은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기에.
※※※※
“끄응.”
블라드는 꼬박 3일을 누워있었다.
“아직도 삭신이 쑤시는구만.”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다. 이 정도로 반동이 클 줄은 나도 몰랐다.]자격 없는 소년은 남의 세계를 억지로 빌려와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어쩔 수 없죠. 뭐.”
그로 인한 대가로 이 정도의 반동은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땅바닥에 누워 차갑게 굳어가고 있을 테니까.
“마차에 실려서 데굴데굴 굴러갈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요제프란 자가 너를 꽤나 신경 쓰는 것 같다.]요제프는 앓고 있던 블라드를 위해 떠나려는 용병들을 붙잡고는 주둔지를 유지시켰다.
감당하기 힘든 습격이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떠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으나 요제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우리를 노리고 있다면 바르나로 복귀하는 도중에라도 다시 들이닥칠 터.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서 전열을 가다듬고 만반의 준비를 한 뒤 움직이는 것이 낫다.”
그렇게 벌어낸 3일의 시간 동안 요제프는 최선을 다해 주둔지를 수습하고 현장 조사를 마쳤다.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었다.
그 결과 요제프는 자신의 아버지인 페테르 바예지드에게 보고할 만한 여러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쩌면 기존에 맡은 몬스터 토벌 임무보다 지금 요제프가 들고 가려는 보고서가 더 가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춥다.”
코를 훌쩍거리며 밖으로 나선 블라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쩍 적어진 천막의 수와 휑해진 주둔지. 그리고 묘한 침묵이 감도는 용병들의 모습은 마치 패잔병들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했다.
“대장!”
조용한 주둔지 사이에서 블라드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긴 턱의 남자.
“도망가자는 놈이 제일 오래 붙어 있네.”
“당연하지. 바르나로 복귀할 때까지 남아있으면 보수를 올려주겠다는데.”
겁이 많은 사기꾼은 그날 밤 도망치지 않았다.
혼자 위험을 등지고 달아나는 대신 말을 돌려 자야르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었다.
“내가 대장 살리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기사 나리가 있는 곳까지 찾아간 거 알지? 나중에 진짜 말 잘해줘야 해.”
“······알았어.”
고트는 사기꾼답게 영리한 자였다.
자야르가 서둘러 블라드라도 주둔지로 보낸 것은 자신이 갈 때까지 시간을 벌라는 의도였다.
이것을 눈치채고 있던 고트는 결국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야르의 빠른 복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그를 데려오기 위해 다시 말을 타고 달려간 것이다.
비록 죽은 자들이 가득했던 강가까지는 가지 않고 중간 길에서 서성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나의 호의를 무시하고 짓밟지는 않겠지? 아무리 밑바닥에는 끝이 없다지만 그 정도로 인성 파탄이 난 것은 아니겠지?”
“알았다니까.”
이미 지은 죄도 있고 고트가 자신을 위해 힘써준 것도 사실이었기에 아무리 뻔뻔한 블라드라 할지라도 지금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말이라도 해볼게. 뭐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고트는 블라드가 명망 높은 바예지드 가문의 자제에게 자신의 공을 말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가서 볼일 보라고.”
“하. 여전히 매정하시네.”
고트는 자신을 떠나가는 블라드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돈 냄새가 난다.’
고트가 봤을 때 블라드는 가능성의 덩어리 같은 사람이었다.
젊고 능력 있으며 권력자의 관심을 받는 사람.
다시 말해 난 놈이었다.
‘이건 먼저 선점하는 사람이 임자다.’
돈을 벌기 위해 가장 중요한 능력은 바로 가치를 알아보는 것.
고트는 블라드라는 소년이 여기서 멈출 사람이 아님을 직감하고 있었다.
“빚도 지워뒀으니까.”
그 말과 함께 고트는 몸을 돌렸다.
지난밤 만들어진 용병들의 시체를 묻기에는 아직 파야 할 구덩이들이 더 필요했기에.
“음?”
고트와 헤어져 주둔지를 걷던 블라드는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누군가를 보았다.
“사제님.”
안드레아 사제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제님?”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말일세.”
안드레아 사제는 곤란한 듯 웃으며 자신의 뒤에 있는 관을 가리켰다.
“아무도 관을 옮겨주려 하질 않네.”
“······.”
지난 밤에 있었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기사 로드릭을 비롯해 적지 않은 수의 사망자들이 있었다.
그나마 시신을 수습해 줄 자가 있는 사람은 마차 위에 실려 묘지에 묻힐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이곳에 묻혀 쓸쓸히 잊혀질 것이다.
그리고 여기, 아무도 찾지 않는 관이 또 하나 있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오오. 역시 자네라면 해줄 줄 알았지.”
안드레아 사제가 가리킨 관은 그날 밤 끔찍한 악몽과도 같았던 여인이 누워있는 관이었다.
“심상치 않은 저주였네. 그래서 바르나로 데려가 조사도 해봐야 하고.”
꺼림칙한 일을 부탁해 미안해서인지 안드레아 사제의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네도 알다시피 너무 딱하지 않은가?”
“압니다.”
블라드는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어린 부제에게 손사래를 쳤다.
“이런 일은 힘쓰는 사람이 하는 게 맞죠.”
“그래도······.”
아직 목이 낫지 않았는지 갈라지는 목소리를 내던 어린 부제는 블라드의 만류에 뒤로 물러났다.
“그날 밤 부른 노래로 부제님은 이미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블라드의 말에 어린 부제는 겸연쩍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끄응!”
블라드는 성치 않은 몸이었지만 혼자 힘으로 관을 이리저리 밀어 수레 위로 올렸다.
가엾은 여인이었다.
누군지도 몰랐고 어찌하여 그런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블라드는 진심으로 그녀를 동정했다.
“이리 오게. 혹시 모르니 내가 축복해줌세.”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를 저주의 잔재를 걱정하며 안드레아가 손을 잡으려 하자 블라드가 말했다.
“잠시만요. 사제님.”
어차피 더럽혀진 손.
한 번 정도는 더 써먹어도 상관없겠지.
블라드는 안드레아가 하얀천으로 곱게 둘러놓았던 검은색의 나무함을 들었다.
모두가 시선조차 마주치기 싫어하는 불길해 보이는 나무함.
그 나무함은 끔찍한 저주의 주체였으며 지난 밤 여인이 간절히 찾던 것이었다.
“블라드······.”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끼이익-
제대로 봉인되지 않은 관 뚜껑이 힘없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이렇게라도 위안이 될 수 있다면.”
반으로 갈라진 여인의 시체.
그리고 검은색 눈물 자국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사제님?”
“하시게. 자네는 그럴 자격이 있어.”
블라드는 딱딱히 굳은 여인의 손등 위로 검은색의 나무함을 올려놓았다.
죽음을 조종하던 자가 들고 있던 나무함 안에는 자그마한 시체가 들어있었다.
“여기 있어요. 당신의 아기.”
저주를 위한 영매로서 살해당한 여인과 아이.
비록 죽어서였지만 여인은 그토록 애타게 찾던 자신의 아이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굳어있던 여인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못까지 박아드릴까요?”
“그래 주면야 고맙지. 내 확실하게 축복해주겠네.”
안드레아는 아직 불편한 몸임에도 가련한 여인의 마지막을 배웅하려는 블라드를 보며 속으로 그를 위한 기도문을 읊었다.
모두가 외면하는 여인을 위해 신실한 사제와 신의를 지킨 소년이 마지막을 배웅해주고 있었다.
따악- 따악-
마치 죽은 자를 위한 종소리처럼.
주둔지 한가운데서 블라드가 내려치는 망치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
“저 왔습니다.”
주둔지를 떠나는 마지막 밤에 요제프는 조용히 블라드를 불렀다.
“앉지.”
블라드는 자신의 앞에서 희미한 미소를 짓는 자야르를 마주 보며 의자에 앉았다.
“술 마실 줄 아나?”
“제가 예전에 일하던 곳이 창관 겸 술집이었거든요.”
“마실 줄 안다는 말이군.”
요제프는 블라드의 앞에 놓인 잔에 맑은 갈색빛이 나는 술을 따라주었다.
“위스키인가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지.”
블라드는 술에서 퍼져나오는 달콤한 바닐라 향을 맡으며 보통 비싼 술이 아닌 것을 확신했다.
“먼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
요제프는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계약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충성 대신 신의를 바치기로 나와 계약을 했었지.”
요제프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비록 말뿐인 계약이었지만 말이야.”
요제프는 블라드의 실력뿐만 아니라 소년이 가지고 있는 곧은 심지에도 놀라고 있었다.
‘놓쳐서는 안 되는 인재다.’
쓸만한 인재라 평가했지만 지난 밤 보인 블라드의 행동은 그 평가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어이없게도 검을 잡은 지 얼마 안 되는 녀석이 오러를 뿜어내었고.
자신을 위해 그것을 휘둘렀다.
죽음과도 같았던 저주 어린 여인을 향해서.
블라드라는 소년은 쓸만한 녀석이 아닌 반드시 가져야 하는 인재였다.
“······.”
블라드는 귀한 술을 앞에 두고도 입에 대지도 못한 채 긴장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그런 블라드의 모습을 보며 자야르는 약 올리듯 비싸 보이는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그 계약을 이행할 차례겠군.”
왕과 귀족 간의 봉신 관계도.
주군과 기사와의 충성 관계도 결국은 무언가 주고받음의 관계였다.
그리고 요제프는 블라드에게 목숨을 구명 받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고 교육받았네. 그것이 무엇이 됐든 간에 말이지.”
요제프는 들고 있던 술잔을 블라드 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자네를 바예지드 가문으로 초대하고 싶군. 그곳에서 이번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싶네.”
“······.”
블라드는 요제프가 건네는 술잔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조금의 각오가 필요했다.
“영광입니다. 요제프님.”
“마시지.”
그리고 소년은 언제나 지금의 각오를 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뒷골목이 아닌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보리라.
요제프의 허락이 떨어지자 블라드는 양손으로 잔을 들고는 위스키를 들이켰다.
뒷골목에서 파는 싸구려 럼주로 나의 일생을 마치지는 않겠다.
그렇게 다짐했던 지난날이 있었고 그 다짐은 오늘 이루어졌다.
“맛있네요.”
“귀족의 술이지.”
제대로 숙성시켜 향이 나는 위스키는 블라드가 여태껏 먹어 본 술 중 가장 달콤한 것이었다.
처음 맛보는 위스키의 맛만큼 소년의 세계 또한 넓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