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83
어머니의 미소 (1)
하얗게 얼어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
수많은 행렬과 함께했던 블라드와 니벨룬이었지만 이제는 둘만 남아 스투르마로 향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으으······. 춥습니다. 추워요.”
하루가 다르게 매서워지는 겨울의 바람이 니벨룬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다.
노상이었기에 그 바람을 피할 방법조차 없던 니벨룬은 그저 옷깃을 움켜잡으며 몸을 웅크릴 뿐이었다.
“이게 뭐가 춥다 그래. 북부의 겨울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싫다······. 북부가 싫다.”
“그런데 수인족들은 기본적으로 모피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나?”
“귀랑 꼬리만 빼면 블라드 님과 같은 평범한 가죽입니다만.”
“그래? 내가 뭐 본 적이 있어야지.”
추위에 정신이 나간 듯한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는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만난 것은 북부였으나 북부에 살던 녀석은 확실히 아니라는 것을.
“어디 출신이야? 이렇게 추위를 타는 걸 보면 북부인은 아닌 것 같은데.”
“흐······.”
니벨룬은 블라드가 건네는 술병을 받고는 재빨리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퍼져오는 진한 나무 향기가 아주 조금은 떨리는 몸을 잡아주는 것만 같았다.
잔뜩 얼어붙은 코를 어루만져주는 그런 따스한 향기였다.
“남부, 남부 출신입니다.”
“아하. 그래서 이렇게 추위를 타는구만.”
“정확히는 남부에서도 아래에 있는 군도 출신이거든요. 이곳과는 달리 엄청 따뜻한 곳입니다.”
“군도(群島)? 섬들이 모여있는데 말인가?”
아무도 없이 오직 둘만이 걷는 길 위에서 오고 가는 술병 하나.
추위에 취해버린 마법사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바다 출신이면 수영은 좀 하겠네.”
“크으······.”
니벨룬은 블라드의 질문에 곧장 대답하려 했으나 입술 밖의 공기는 너무 차가웠고 목구멍으로 넘긴 술은 너무 셌다.
식도를 따라 넘어가는 위스키가 내장의 형태를 낱낱이 알려주자 니벨룬은 그저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크흠! 모르셨나 보군요. 대부분의 수인족들은 물을 싫어합니다.”
“······바닷가에 살면서 왜 물을 싫어하는데?”
북부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본래 사람이란 살면서 주위의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바닷가에 살면서도 물을 싫어한다는 수인족들의 특성은 블라드의 의구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그거야······. 본래 저희가 뿌리 내린 땅이 섬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음?”
술을 한 모금 마신 니벨룬은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 귀를 쫑긋 올리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어딘가 가라앉고 만 그의 눈빛은 이제는 너무 멀어진 자신의 고향을 떠올리는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랜 옛날, 저희의 선조들이 남부에 자리 잡았을 때는 섬 같은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 그런데 지금은 왜 군도가 됐대.”
먼 옛날에는 대륙에 속해있었으나 지금은 바다 위에 점들이 되어버린 땅.
옆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질문에 니벨룬은 다시금 술병을 기울였다.
“그거야······. 그 옛날, 가장 완벽한 용이 저희의 터전을 가라앉혔기 때문이죠.”
“······.”
가장 완벽한 용.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블라드는 괜스레 가슴이 덜컥거리는 것만 같았다.
예전에는 그저 전설 속의 존재라 치부하며 멀게만 생각했었으나 이제는 자신의 피 속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용이 내뿜는 숨결에 의해 무성했던 정글은 불태워지고 단단했던 땅은 가라앉아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뭐 아주 오래된 이야기긴 하지만 말이죠.”
다시 건네는 술병을 받아든 블라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니벨룬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세로로 좁혀진 니벨룬의 호박색 눈동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용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저희는 지금도 계속해서 대륙을 떠돌고 있는 겁니다. 그때 용을 피해 도망쳤던 신비들을 찾기 위해서요.”
살던 터전은 잃었고, 믿던 신비는 산산이 흩어지고만 수인족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정처 없는 방랑을 지속하고 있었다.
비록 내가 한 일은 아니었으나 나의 뿌리가 얽혀있는 사연을 들은 블라드는 괜스레 복잡한 심경이 되고 말았다.
“오오. 저기 도시가 보입니다.”
“음?”
그러나 고민 속에서도 계속해서 걸어 나갔던 발걸음은 결국 블라드를 원하는 목적지에 데려다 놓았다.
저 멀리 보이는 눈으로 덮인 새하얀 도시.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스투르마가 블라드와 니벨룬을 반겨주고 있었다.
누아르의 뒤에 매달려 있던 자그마한 깃발이 자신이 태어난 도시를 알아봤는지 힘차게 나부끼기 시작했다.
※※※※
바예지드의 주도(主都) 스투르마.
그곳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블라드를 알아보고는 정연한 자세로 경례하고 있었다.
“말도 안 꺼냈는데 다들 알아보네요.”
“여기서는 좀 오래 지냈었으니까.”
블라드는 여전히 환대에 익숙하지 않은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대는 니벨룬을 보며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며 자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녀석! 당장 그거 안 집어넣어?’
말 위에서 으르렁대는 자야르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그때의 자신은 들떠있었다.
사제 안드레아가 내어주었던 신분패를 드디어 써먹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요제프를 앞장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경비병들에게 굳이 신분패를 들이밀었던 그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스투르마로 돌아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블라드 님!
그러나 지금, 블라드의 앞에는 요제프가 없었고, 손에는 신분패를 쥐고 있지 않았지만 스투르마는 알아봐 주고 있었다.
이제는 남이 준 무언가를 내밀지 않아도 통과할 수 있는 성문을 보며 블라드는 볼을 긁적여대었다.
“오오······. 이곳이 스투르마.”
바스토폴 만큼은 아니었지만 오래된 도시인 스투르마를 보며 니벨룬이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블라드의 세계로는 볼 수 없었지만 니벨룬의 세계에서는 도시 곳곳에 떠다니는 신비들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한눈팔지 마. 여기는 너 뒤치다꺼리 해 줄 사람 없어.”
“상당히 인상적인 도시군요. 그나저나 이제 저희는 어디로 갑니까?”
얌전히 있으라고 말은 했지만, 니벨룬은 딱히 들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호기심이 강한 것은 수인족 특유의 성정이 아닌가 싶어 블라드는 그저 혀를 찰 뿐이었다.
“바예지드의 저택으로.”
니벨룬의 물음에 대답하는 블라드의 시선이 도시에서도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바예지드의 저택. 종자가 되어 기사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딘 곳.
아직도 블라드의 머릿속에는 환한 빛이 가득하던 요제프의 집무실이 선명했다.
※※※※
“아니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요. 그레고리 님.”
저택에 들어선 블라드를 가장 먼저 맞이해 준 사람은 기사 그레고리였다.
“온다면 온다고 기별을 해줬어야지!”
“마땅히 기별할 여유가 없었어요.”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블라드를 이끌어주었던 선임 기사 그레고리는 예전보다 조금은 더 큰 것만 같은 블라드의 키를 가늠하여 사람 좋게 웃어대었다.
“포틀리 녀석은 날이 갈수록 옆으로 퍼져가던데 너는 그래도 위로 올라가는구나.”
“포틀리는 잘 지내나요?”
“여기까지 온 김에 한 번 보고 가지 그래.”
쇼아라에서만큼은 아니었지만, 이곳 스투르마에서도 나름 반가운 인연들이 있었다.
1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블라드 인생에서 가장 큰 완성을 이룬 도시가 바로 이곳 스투르마였으니까.
“그나저나 그 일은 어찌 된 거야. 바스토폴이 중앙 놈들한테 침공당했다던데.”
“그것은······.”
그레고리의 질문에 답하려던 블라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기사들의 기척을 알아보았다.
멀리서, 가까이서.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들 평소처럼 보이려 애쓰고 있었지만 블라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블라드 님. 혹시 피곤하지 않으시다면 백작 부인을 먼저 뵙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러나 페테르와 루트거에 대한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저택의 주인인 옥사나 바예지드일 것이다.
끝없이 나돌아야만 하는 가주와 아들들을 대신해 저택과 스투르마를 지켰던 사람.
기사들 사이에서 난처해하는 집사를 보며 블라드는 옥사나가 얼마나 지금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안내해주시죠. 집사님.”
“감사합니다. 블라드 님.”
등 뒤에 니벨룬이란 꼬리를 단 블라드는 집사의 안내를 따라 익숙한 복도를 걸어갔다.
짧게 비치는 겨울의 햇빛이었으나 노란색이 물씬 담겨있는 복도는 분명 예전의 기억과 같은 것이었다.
“······나 단정해 보이냐?”
“네?”
“어디 뭐 찢어지거나 너덜대는 곳 없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옷차림을 물어보는 블라드를 보며 니벨룬은 조금은 당황하고 말았다.
북부의 공작인 강철공을 만날 때보다 더 긴장되어 보이는 블라드의 모습이 영 낯설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단정하지요. 충분히요.”
니벨룬의 말이 위안이 되었다는 듯 블라드의 표정이 펴지기 시작했다.
“준비되셨습니까? 기별을 드려도 될까요.”
“네.”
응접실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한 블라드는 준비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똑.
집사가 두들기는 문을 보며 블라드는 가만히 심호흡을 해보았다.
그러나 블라드는 아무리 단단해지려 노력해봐도 저 문 뒤에 있을 여인에게는 지금의 노력이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블라드.”
집사가 문을 열자 풍겨오는 향기가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맡지 못했던 향기였지만 기억 깊숙한 곳에는 언제나 있던 향기였다.
“아니, 이제는 블라드 경이라고 불러야 하려나.”
그 향기와 함께 웃고 있는 귀부인을 보며 블라드는 준비했던 답을 놓친 채 그만 입술을 오물거리고 말았다.
저 밖 세상으로 나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왔음에도 지금 앞에 있는 여인만큼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차 한 잔 줄까?”
“괜찮습니다.”
“라문드 경의 장원에서 이번에 새로이 차 농사를 시도했다고 하는구나.”
“······.”
괜찮다고 말했으나 어차피 내어질 차였던 모양이다.
오늘따라 추워진 날씨를 지나온 블라드를 위해 옥사나가 직접 찻물을 우려내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분은 누구시니?”
“니벨룬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새로 얻은 제 자문 마법사입니다.”
옥사나의 눈짓에 고개를 꾸벅 숙인 니벨룬은 평소와는 달리 딱히 입을 열지 않은 채 방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창가에 고이 놓여있던 여러 찻잎이 그의 관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지금 막 바스토폴에서 왔다고 들었다. 그곳에 있는 가주님과 루트거는 어떠하니?”
용살 기사단에게 침공당했다던 바스토폴의 소식은 옥사나로서도 신경 써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블라드는 옥사나의 조용한 물음에 최대한 자신이 아는 바를 상세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다만 대답하는 와중에도 위험했던 장면을 최대한 자제한 것은 오롯이 옥사나를 위한 배려였다.
“······그랬구나. 고생이 많았겠어.”
그러나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몰라본다면 바예지드의 안 주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옥사나는 블라드가 겪었던 일을 알아서 짐작하며 애써 웃어주었다.
“그나저나 먹히고 입힌 보람이 있구나. 처음 봤을 때보다도 살이 더 올랐어.”
“그렇습니까?”
거칠기만 한 바람을 타고 왔던 블라드는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옥사나를 보며 괜히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제미나도, 알리시아도 자신을 보며 웃고는 했지만, 옥사나는 그녀들과는 전혀 다른 미소로 블라드를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 때는 뼈에 가죽만 붙어 있던 것만 같더니. 이제야 제 모습을 찾은 것 같아 보기 좋구나.”
들고 있는 찻잔을 내려놓은 옥사나는 블라드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숨결이 와닿는 자리가 간지러웠지만 그래도 블라드는 살짝 옥사나와 눈을 마주쳐보았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아들이 둘이나 있지만 이런 말은 또 처음 듣는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블라드를 보며 옥사나의 두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온통 가시만 세울 줄 알았던 소년이 이제는 둥글어질 줄도 알았다는 사실이 옥사나는 기꺼웠던 모양이다.
“······.”
그러나 블라드는 입으로는 웃고 있었어도 눈으로는 웃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옥사나의 얼굴에 이제는 지우기 힘든 걱정들이 깊게 새겨져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요제프도 네가 왔다는 사실에 기뻐할 거야.”
“그렇습니까.”
차가운 겨울을 녹여주었던 그녀의 미소가 조금은 희미해진 것만 같아 블라드는 그만 울적해지고 말았다.
아들을 걱정하는 만큼, 어머니는 그보다 더 빨리 늙고 말았다.
그렇기에 이제는 나도 알아볼 수 있는 옥사나의 주름들.
그럼에도 애써 그 걱정들을 감춘 채 웃어주는 옥사나를 보며 블라드도 그저 미소만을 보이려 노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