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84
어머니의 미소 (2)
요제프의 집무실은 3층 복도에서도 가장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외진 곳이지만 조용하고 그렇기에 얼마든지 혼자만의 생각을 풀어갈 수 있는 곳.
바예지드의 저택 안에서도 가장 오래 햇빛이 머무는 그곳을 블라드는 좋아했었다.
“요제프 님. 저 왔습니다.”
익숙한 문을 두드린 블라드는 잠시 기다리는 동안 복도에 있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창을 통해 비치는 오후의 햇살은 종자였던 시절, 그때 보았던 색깔과 여전히 같았다.
“들어와라.”
그리고 문이 열리며 보이는 광경 또한 또한 그랬다.
언제나와 같이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는 자야르와 손님용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는 보르단까지.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블라드.”
많은 일이 있었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집무실의 광경을 보며 블라드는 마음속 한 부분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요제프 님.”
건넬 수 있는 많은 인사말이 있었겠으나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다녀왔다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한 발자국 걸어 나갈 때마다 정신없이 바뀌는 주변 풍경이었지만 이곳의 모습만큼은 처음 보았던 그때 그대로였으니까.
“그래. 수고했다.”
다만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은 이곳에서 하나쯤은 변해버린 광경이 있었다.
저 앞에서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햇빛을 등진 채 앉아 있는 남자.
그러나 헤어질 때 보다 훨씬 더 수척해져 버린 요제프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짓고 있는 웃음 끝에 서글픔 하나를 매달 수밖에 없었다.
※※※※
찬장에서 차를 꺼내려던 요제프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옆에 있던 위스키 병을 꺼내 들었다.
아마도 블라드가 이 위스키를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벌써 마법사까지 데리고 다니다니. 나보다 낫군.”
“니벨룬이라고 합니다. 요제프 님.”
술병을 들고 온 요제프는 앞에 앉아 있던 니벨룬에게 호기심을 드러내었다.
애초에 코를 킁킁거리며 앉아 있는 모양새가 시선을 끌 수밖에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남부 출신인가? 마법사인데 파란색 털과 호박색 눈동자라······.”
니벨룬을 바라보던 요제프의 눈동자가 가늘어져 갔다.
비록 수척해지긴 했으나 그만큼 밝아진 요제프의 검은 눈동자였다.
“아마 본(本) 섬에서 온 모양이로군.”
“······그렇습니다. 한 번에 알아보시는군요.”
“아니, 그냥 적당히 찍어봤는데 맞았나 보군.”
신비를 다루지는 않았으나 보이는 정보와 직관으로 추리할 줄 알았던 요제프.
한 계절을 같이 보냈음에도 이제야 겨우 니벨룬이 어디서 왔는지 알았던 블라드는 그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요제프를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동안의 활약은 잘 듣고 있었다. 이번에는 바스토폴에서 한 건 했다지.”
“별로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블라드 또한 요제프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애초에 둘은 서로가 부족했던 부분은 가지고 있었기에 한 조각처럼 꼭 들어맞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드라굴리아의 미르셰아를 쫓아낸 것이 별것 아니라니. 이건 겸손의 영역을 넘었어.”
“그런가요?”
웃고 있는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는 괜스레 자야르와 시선을 마주쳐 보았다.
이것 좀 봐달라는 듯 조금은 우쭐거리는 모양새에서 아직은 소년이었던 시절의 테가 나는것만 같았다.
“뭘 봐?”
“······아니에요.”
예전 같았으면 블라드의 정강이를 한 번 후려갈겼을 자야르였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보다 고귀해졌기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애초에 자신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소년들은 자신들이 다 컸다고 믿고 싶겠지만 어른이 보기에는 여전히 어설픈 것 투성이었다.
“그래. 내가 있는 곳까지 다시 찾아와주어 고맙다.”
블라드에게 술을 따라준 요제프는 그 깊은 눈동자로 자신의 앞에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가 안부 인사였다면 지금부터는 이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할 차례였다.
“헤어질 때 다시 보자 말하기는 했었지만, 굳이 다시 올 필요는 없었겠지. 지금 보이는 모습을 보니 더 그랬을 것 같다.”
클 거라 생각하고 데려왔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요제프는 이제 더는 자신이 다룰 수 없는 금발의 기사를 보며 씁쓸한 듯 술잔을 들어 올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의 계약은 이미 끝났다. 나는 너에게 더는 내어줄 것이 없고 너도 나에게 더는 받아 갈 것이 없을 거다.”
예전의 계약을 이야기하는 요제프의 말에 집무실의 분위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충성의 맹세가 아닌 신의를 통해 이루어졌던 둘의 계약은 요제프가 가주 경쟁에서 탈락함으로써 모두 끝나버리고 말았다.
다만, 이렇게 본인이 먼저 계약이 끝났음을 말해주는 것은 블라드를 위한 요제프의 마지막 배려일 것이다.
“나는 조만간 도시 나사우로 떠날 예정이다. 이제 기대볼 만한 곳은 니다벨리르의 드워프들밖에 없으니.”
스투르마에서 다시 나사우까지.
이제 더는 바예지드에게 기댈 수 없는 요제프는 자신만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땅이 아닌 바다로 향해야만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는 분명 요제프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조용해진 집무실 안에서 조용히 접시가 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라드에게 조용히 다과를 내미는 보르단.
퉁퉁한 모습의 기사가 무언가 애타는 눈빛으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이제 홀로 서 볼 생각입니다.”
블라드는 단 것이 잔뜩 담겨 있는 접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요제프 님께서 알아봐 주셨고 바예지드가 거둬주었지만 이제 저는 제가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잘 압니다.”
요제프의 기사였으나 그와의 계약은 끝났고, 바예지드의 기사였으나 아우레오의 성을 받은 순간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요제프와 페테르의 동의 하에 이뤄진 정당한 자유였다.
“하지만······. 허락하신다면 이번만큼은 요제프 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블라드의 손이 보르단이 내민 접시를 향해 다가갔다.
블라드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제미나에게 주기 위해 몰래 챙겼던 각설탕들을 보르단이 일부러 모른 척해주었다는 사실을.
“계약이 끝났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아직 갚아야 할 것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나의 이름을 온전히 세우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떳떳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떳떳함을 증명해줄 수 있는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내 안에 있는 양심일 것이다.
“그래.”
요제프는 블라드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누군가의 명령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향하겠다는 블라드.
자신의 인생을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말에 요제프는 이제야말로 확실히 블라드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럼 준비해볼까. 나사우로 향하는 길을.”
이제는 완전히 나에게서 떠나가 버린 블라드를 보며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그럼에도 요제프는 실망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기사는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것일 테니까.
“이번에는 바다로군.”
마지막까지 기다렸던 사람이 올라찬 것을 확인한 요제프는 들고 있던 술잔을 높게 들었다.
태어난 땅에서는 기회를 찾을 수 없었기에 바다로.
마지막까지 불태워보기로 한 요제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의무를 위해 바다를 향해 떠나기로 했다.
※※※※
스투르마에 도착한 지 이제 3일째.
그러나 떠나기로 했음에도 바로 떠나지 못하는 것은 한겨울에 떠나는 만큼 확실한 채비를 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요제프가 떠나는 행렬을 위해 쌓인 짐들이 마당에 한가득이었다.
“니다벨리르라······. 니다벨리르. 니다벨리르.”
“그래. 니다벨리르라고.”
니벨룬은 여태껏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땅으로 간다는 생각에 들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작 블라드는 니벨룬과는 달리 불편한 심정이 가득했다.
“······저 건방진 자식들이.”
“네?”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내다보던 블라드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밖을 향해 나서기 시작했다.
시근거리는 발자국이 잔뜩 화가 난 블라드의 심정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저래서 화가 나셨구만.”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내다본 니벨룬은 저 아래 있는 광경을 보며 블라드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보르단의 호통에도 성의 없는 태도를 보이는 하인들의 모습.
바예지드의 핏줄이자 백작 부인의 아들인 요제프였지만 이젠 그 말도 옛말이라는 듯 하인들의 태도는 무심할 뿐이었다.
“이거 나르면 돼?”
“네?”
“이거 나르면 되냐고.”
한껏 농땡이를 피우고 있던 하인 중 하나가 자신의 앞에서 으르렁 대는 블라드를 보고서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닙니다. 제가, 제가······.”
“아니야. 다들 힘든 모양인데 좀 쉬고 있으라고.”
고귀한 기사이자 귀족.
그러나 차고 있는 검을 뒤로 둘러맨 채 손수 짐을 나르는 블라드를 보며 하인들이 소리 없는 경악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거 끝나고 아주 쉬게 해줄 테니까.”
“죄송합니다. 블라드 님!”
짐을 하나하나 옮길 때마다 스산해지는 블라드의 눈빛은 스투르마의 성벽을 넘어오는 눈보라보다도 더욱 차가운 것이었다.
저 멀리서 짐을 나르고 있는 블라드를 본 보르단은 할 말을 잃었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애써 감춰보려 했던 초라한 모습을 들켜버려 당황한 모습이었다.
“원래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냥 빨리해버리자고요. 요제프 님이 보기 전에.”
지금의 상황을 들켜 민망해하는 보르단이었지만 블라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묵묵히 짐을 옮기고 있었다.
내가 짐을 지는 수고보다도 지금의 광경을 요제프가 볼까 싶어 그저 서두를 뿐이었다.
“그냥 쉬고 있으라니까 새끼들아!”
“성격은 여전하네. 블라드.”
자신의 짐을 옮겨 들려 하는 하인에게 역정을 내던 블라드였으나 정작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주 낯익은 것이었다.
“······포틀리?”
“흐흐. 그동안 잘 지냈어?”
스투르마에서 얻은 유일한 친구이자 물주.
칸노르 가문의 막내인 포틀리가 더욱 통통해진 볼을 떨며 짐을 옮겨 들고 있었다.
“여기는 무슨 일이야.”
“네가 왔다고 해서 와 봤는데······. 끄응!”
그러나 정작 옮겨 들었어도 힘에는 부쳤는지 금세 상자를 내려놓고만 포틀리였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네.”
“나도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지.”
오랜만에 만난 포틀리를 보며 굳은 표정을 핀 블라드였지만 눈빛에 새겨둔 스산함 만큼은 놓지 않았다.
짐을 옮기기 위해 우물쭈물 다가오는 하인들이었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만큼은 여전했다.
“······언제부터 이랬어?”
“좀 됐지 뭐. 사실 요제프 님이 여기에 도착하시자마자 한 번 크게 앓으셨거든.”
가주 경쟁에서의 탈락 때문에 기반을 잃어버린 것도 모자라 오자마자 크게 앓고만 요제프였다.
아마 바예지드의 가신들 중 몇몇은 차라리 이렇게 죽는 것을 바라던 사람도 몇몇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제님들도 오시고 나름 큰일이었었나 봐. 지금이야 기력을 찾으신 것 같긴 한데.”
“그래?”
힘이 들 텐데도 용케 짐을 나르며 대답하는 포틀리였지만 그 말을 듣는 블라드의 심정은 그저 착잡할 뿐이었다.
내 앞을 가려주던 나무와도 같던 사람이 점점 몰락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누구라도 보기 힘든 광경임은 틀림없었다.
“나도 이번 여정에 따라갈 거야. 아마 그때까지는 같이 요제프 님을 모시게 될 것 같아.”
“왜?”
“이번에 나사우에 새롭게 지점이 생겼거든. 이제 거기서 일하게 될 것 같아.”
그 말과 함께 포틀리는 품 안에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내고는 블라드 앞에서 흔들어대었다.
“그거 뭐야. 소시지야?”
“비슷한 거야.”
종이로 된 포장을 풀자 드러나는 것은 새빨간 소시지가 아니라 노란색으로 뭉쳐진 색다른 모양의 고기덩어리였다.
“어육으로 만든 소시지 같은 거야. 이제 바예지드는 바다를 접하고 있잖아? 분명 수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오.”
한번 먹어보라며 건네는 포틀리의 손짓에 블라드는 주저 없이 한 입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퍼지는 짭짤한 맛은 과연 여태껏 먹어본 소시지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서부 해안에는 오징어라는 게 있다는 거야. 그걸 이용해보면 잘 될 것도 같아.”
“오징어? 나도 그거 한 번 본 적이 있지.”
새로운 소시지를 우겨넣던 블라드는 포틀리의 말을 들으며 나사우를 탈출할 때, 밤바다를 따라 배를 쫓아오던 기이한 생물들을 기억해냈다.
생긴 모양새는 기이했지만, 맛은 좋다고 말했던 하벤의 말이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이거 더 있어? 있으면 이따 내 방에 가서 조금 더 먹자.”
이제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하인들을 보며 블라드는 근처 상자에서 낯익은 술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게 여기 있었네.”
“그게 뭔데?”
칙칙한 갈색빛이 가득한 술병 하나가 블라드의 손 위에서 반짝였다.
어딘지 모르게 끈적이는 것 같은 술병의 모습에 포틀리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오늘같이 기분 더러운 날에는 이런 술이 어울리지.”
아마 요제프는 캡틴Q를 마음에 들어했던 드워프들을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들의 땅으로 떠나기 위해 특별히 챙겨온 술병을 보며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 빨리 끝내고 가자.”
“계속하게? 하인들이 있잖아.”
“이것들이 나 떠난 다음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홀로 남을 보르단을 염려한 블라드는 하던 일은 마저 마치고 가기로 했다.
이미 짐을 옮기던 사이사이에 손 봐줄 몇 명을 봐두었던 모양이었다.
“······.”
블라드가 만드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재개된 작업.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한 채 짐을 옮기는 하인들은 아까와는 다르게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요제프의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려놓는 짐 하나하나마다 정성을 쏟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보르단이 이제야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대었다.
“······너무 고맙구나.”
그렇게 짐을 옮기는 블라드를 저 위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눈길이 있었다.
녹색 머리를 가진 귀부인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직접 짐을 옮기는 기사를 보며 그저 하염없이 시선을 맞출 뿐이었다.
모두가 떠나가는 와중에도 아들에게 돌아와 준 기사.
내어준 것은 그저 몇 벌의 옷과 갑옷뿐이었을지라도 그때의 관심이 블라드에게는 그렇게나 따뜻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