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88
어린 고로(高爐) (2)
“나사우에서 떠난 배가 지금 안개 지역에 다다랐다고 합니다.”
“그래?”
어두운 집무실 안. 빨간색 과일을 들고 있던 남자가 들려오는 보고에 미소 지었다.
“드디어 북쪽 놈들이 드워프들을 만나러 가는 모양이구만.”
남자는 잘라낸 과일을 하나하나 조각내어 어깨에 있던 앵무새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주인이 전해주는 새콤한 맛이 좋았는지 알록달록한 앵무새의 눈이 가늘어졌다.
“선원 놈은 제대로 매수했지?”
“그렇습니다. 이미 수정구도 배 안에 집어넣은 상태입니다.”
“좋아.”
보고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탁상 위 방만하게 올려놓은 발을 치운 남자는 앵무새를 손가락에 올리고는 창가로 다가갔다.
“이제야 한 번 보겠구만. 드워프의 섬이라는 곳을.”
활짝 열어젖힌 창문으로 햇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보이는 푸른 바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다의 짠 바람을 느끼며 남자는 웃기 시작했다.
“나도 슬슬 준비해야겠어.”
그러나 바다는 푸르렀어도 맞닿은 항구는 죽 늘어선 배들로 온통 새까맸다.
그리고 배들의 돛 위에는 모두 하나같이 똑같은 문양의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온통 황금색으로 치장된 바르보사 가문의 문장들이었다.
※※※※
잔잔한 파도를 따라 제미나 호가 움직이고 있었다.
안개 속이었기에 어디를 보아도 똑같았고 주변은 암초들 때문인지 부서진 배의 잔해들이 가득했지만, 방향타를 잡은 하벤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드디어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저거 꼭 개복치같이 생겼어.”
“개복치가 뭔데.”
“저렇게 생긴 물고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아냐.”
블라드는 의미 없는 하벤의 말을 무시하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지금 제미나 호는 딱히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기이한 몸체의 배 한 척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길이는 짧은 것이 높이는 높았으니 문외한인 블라드가 보아도 균형이 매우 불안해 보이는 배였다.
“그나저나 바닷속을 헤엄치는 배라니. 말해봤자 아무도 안 믿을걸?”
“그러게.”
블라드는 하벤의 말에 대답하며 시선을 내려 제미나 호의 선수 부분을 바라보았다.
신비한 것을 찾아다니는 니벨룬은 물론이거니와 요제프와 자야르, 그리고 아우슈린의 엘프들까지.
그들은 여태까지의 어색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다들 저런 괴상한 것은 처음 본다며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바람 없이도 다니는 배도 있고, 바닷속을 헤엄치는 배도 있고.”
블라드는 손을 눈썹에 가져다 대고는 시선을 멀리했다.
머릿결을 스치는 바람이 방금과는 달리 신선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뭐가 있으려나.”
두 눈 위에 얹은 블라드의 손등 위로 맑은 태양 빛이 와닿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거짓말처럼 새하얀 안개들이 걷혀나가기 시작했다.
시야를 차단하던 짙은 안개가 사라지기 시작하자 일행들의 입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기가 드워프들의 섬인가 봐.”
“응.”
블라드는 하벤이 손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댔다.
푸른 바다 위로 떠도는 갈매기 무리 아래 홀로 떠 있는 섬 하나.
수면 위에 부서질 듯 반사되는 태양 빛 너머로 일행이 그토록 찾고 있던 섬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었다.
드워프들의 섬. 렘노스.
엘프들의 아우슈린이 그러하듯, 드워프들에게 있어 최후의 보루인 곳이 일행들을 반겨주고 있었다.
※※※※
“그럼 저희는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반쯤 가라앉은 배 위에서 드워프 사내가 올라와 블라드에게 손을 흔들어대었다.
“그때 구해주신 은혜.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태껏 일행들을 인도했던 기이한 배의 함장은 니다벨리르의 전사인 불카누였다.
나사우의 술집에서 어린 드워프들과 함께 갇혀있던 그는 이번의 임무를 위해 특별히 자원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딱히 구해주러 들어간 건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해주셨죠.”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불카누는 갇혀있던 어린아이들을 보며 순수하게 분노할 줄 알았던 기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보이는 곳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니다벨리르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마지막 인사와 함께 불카누가 굴뚝 안으로 들어가자 개복치를 닮았다는 기이한 배는 다시금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거품만을 남긴 채 사라진 배를 보며 선원 중 몇몇은 놀랐는지 그만 억눌린 신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저것도 꼭 한번 타보고 싶네.”
가라앉는 배를 아쉽다는 듯 쳐다본 하벤은 여태껏 반개(半開)하고 있던 돛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뒤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받아 앞으로 힘껏 나아가기 시작하는 제미나 호.
안개 속에 갇혀있던 여태까지와 다르게 명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배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함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
렘노스 섬의 항구에는 소식을 듣고 몰려든 드워프들이 가득했다.
북부인들에게 있어 드워프들이 신기했듯이 이곳 렘노스 섬의 주민들에게 있어서도 인간과 엘프라는 존재는 영 낯선 손님들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까는 분명 환영해줄 거라고 하지 않았었나요?”
“······원래 타지에 가면 그곳의 관례를 따라줘야 하는 법이다.”
항복이라도 한 듯 요제프와 블라드는 양손을 든 채 시선만을 맞추고 있었다.
이 둘 뿐만 아니라 배에서 내린 일행 모두는 지금 드워프 전사들에 의해 꼼꼼한 검열을 받는 중이었다.
두툼한 사내의 손이 몸을 건들 때마다 블라드의 표정이 찡그려졌지만, 이 섬은 보안이 곧 생명인 곳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조금만 참아주시게. 내가 나중에 손님 대접은 확실히 해 드릴 테니.”
점점 날카로워지는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안면이 있던 시구르손은 애써 일행을 달래려 애쓰고 있었다.
니다벨리르를 구성하는 12명의 부족장 중 한 명인 그라고 할지라도 지금 같은 엄중한 절차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검 좀 봐도 되겠소?”
“뭐?”
그러나 그의 달램에도 기어이 블라드의 눈동자에는 푸른 횃대가 돋고 말았다.
“이상한 게 달려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검을······.”
“기사한테 검을 내어달라고. 지금 나한테 그렇게 말한 거냐.”
들리는 것은 사람의 말이었으나 울리는 것은 짐승의 으르렁거림이었다.
점점 새파래지는 블라드의 눈빛에 드워프 전사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그럼 차고 있는 단검이라도 내어주시오.”
“단검은 검 아니야?”
기사에게 있어 검이라는 것은 곧 정체성.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으라는 드워프의 말에 블라드 안에 잠자고 있던 흉폭함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한테서 뭐라도 건드려봐라. 바로 네놈의 짤퉁한 목부터 뽑아줄 테니까.”
“······.”
속삭이듯 조용히 말하고 있었으나 뒷골목의 거침과 용의 흉포함이 뒤섞인 목소리이기도 했다.
검문을 맡은 드워프 전사 또한 경험 많은 자이기는 했으나 블라드가 내뱉는 시퍼런 위협 앞에서는 잠시 주춤거리고 말았다.
“이놈아. 애꿎은 사람 괴롭히지 말고 방금 말처럼 단검이나 뽑아봐라.”
“······.”
“눈알만 부라리지 말고 어서 뽑아보래도.”
그 순간, 인파를 뚫고 나온 드워프 노인 하나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블라드를 불러세웠다.
세월에 의해 잔뜩 굽혀진 허리를 지팡이로 애써 세우는 노인이었다.
“영감님은 누굽니까?”
“그건 알아서 뭐에다 써먹게.”
블라드의 새된 물음에도 늙은 드워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가까이 다가올 뿐이었다.
철철 끓어오르는 쇳물 앞에서 평생을 바쳐온 노인에게 있어 어린 용의 위협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나저나 멀쩡한 갑옷은 왜 다 깨트리고 왔누. 곱상한 얼굴과는 달리 하는 짓은 거친 놈이로구나.”
“······.”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으나 늙은 드워프의 말대로 블라드의 갑옷은 여기저기 깨져 있는 상태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시근거리던 블라드는 그저 눈짓 한 번으로 갑옷의 상태를 알아본 노인을 보며 조금은 놀라고 말았다.
“영감님이 그래봤자 검은 안 내어줄 겁니다.”
“나도 필요 없다. 그딴 허접한 검은.”
허접한 검이라는 말에 바라디스의 이마에 한줄기 혈관이 올라왔지만, 노인의 태도는 거침이 없었다.
정확히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노인을 막아 세우지 못하는 참이었다.
“시구르손! 이놈 맞냐!”
노인의 외침에 저 앞에 있던 시구르손이 맞다며 고개를 흔들어대었다.
블라드는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노인의 태도에 기가 막혔지만, 바로 옆에 있는 요제프의 다급한 눈빛에 꾹 참을 뿐이었다.
“······그럼 어디 한번 보자.”
스릉-
남의 손에 의해 내 것이 뽑혀 나가는 아찔한 감각.
그 참을 수 없는 불쾌감에 블라드의 기세가 다시금 들끓기 시작했다.
“그거 내려놔. 영감. 좋은 말로 할 때.”
갑작스레 달라지는 분위기에 항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블라드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내려놓으라니까.”
“······.”
두 눈을 새파랗게 밝힌 채 단검을 달라 말하는 블라드였지만 야장은 그저 반갑게 웃을 뿐.
뽑아낸 단검에서 자신이 새겨놓았던 옛 흔적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맞네. 맞아.”
떨리는 손이었으나 공손한 자세로.
다시금 단검 집에 검을 꽂아 넣은 늙은 드워프는 고개를 들어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거 나머지는 다 어디 갔나? 내가 한 열 자루는 만들어줬던 거 같은데.”
“뭐?”
“그나저나 호르헤 경은 잘 지내시는가? 못 본 지도 십 년은 족히 넘었군.”
으르렁거리던 블라드는 자신의 옛 보스를 말하는 늙은 드워프를 보며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호르헤?”
그러나 낯선 장소에 익숙한 이름을 들은 당황감보다도 블라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에 더 당황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지금 노인의 눈빛은 오래된 기억 어딘가를 찾아 헤매는 그런 눈빛이었으니까.
※※※※
잔잔한 바다 위, 달빛만이 가득한 텅 빈 백사장이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누군가가 내뱉는 억눌린 신음과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한 그런 곳이었다.
“영감. 노망이라도 들었어? 그거 죽 끓이는 솥이야.”
“나도 아네.”
듣기 싫어도 절로 귓가로 와닿는 그 슬픈 소리들을 들으며 늙은 드워프는 신중한 눈빛으로 솥을 달구고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헤어져야 할 기사를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었기 때문이다.
“······.”
모닥불에 달궈낸 솥 안으로 잔뜩 녹슨 철 덩어리들을.
그곳에 비전을 담은 가루들을 뿌려 한 덩어리로 녹여낸 노인은 곧 시뻘건 쇳물을 나무 쪼가리로 만든 거푸집에 옮겨 담았다.
“고맙네. 우리들을 지켜줘서.”
“······그렇게 보지 마. 하고 싶어서 한 거 아니니까.”
신중히 쇳물을 옮겨 낸 노인은 고개를 들어 달빛 아래 홀로 서 있는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이제야 자세히 살펴본 남자는 여기저기 깨어진 갑옷 위로 시뻘건 상처들이 가득했다.
“그냥 애새끼들이 자꾸 우니까 한 거지.”
있어야 하는 장소에 있었던 남자.
그렇기에 명령 대신 규율을 따른 호르헤는 지평선에서부터 다가오는 배들을 보며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었다.
“왔네. 인제 그만 헤어집시다.”
“잠깐만.”
아무런 대가 없이 훌쩍 일어서려는 호르헤를 보며 늙은 드워프는 서둘러 그의 바지춤을 잡았다.
“이거, 이거라도 가져가게.”
“이게 뭔데.”
“단검.”
호르헤는 노인이 애써 들이대는 단검들을 바라보았다.
바로 앞에서 만드는 과정을 보았기에 딱히 기대되는 것들은 아니었지만 달빛 아래 비치는 반짝임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확연한 단검들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주지만, 우리가 나중에라도 다시 보게 되면······.”
“보긴 무슨.”
뭐라도 보답하고 싶어 하는 노인의 심정을 이해한 호르헤는 붕대 묶인 손으로 그것들을 잡아들었다.
열기가 아닌 온기로 만들어져서인지 막 만들었음에도 그저 따끈할 뿐인 단검들이었다.
“영감이나 나나 다시는 안 보는 게 서로가 좋은 거요.”
무심한 마지막 말과 함께 그저 손 한번 슬쩍 흔들고는 홀로 백사장을 떠나는 가이다르의 기사.
달빛만이 마중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늙은 드워프는 오랫동안 백사장에 서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