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91
깃발은 붉은 장미 (1)
마치 넘어갈 듯 위태로이 젖혀지며 바다 위 파도를 가르는 작은 배.
말도 안 되는 기울기로 급선회를 시도하는 제미나 호를 보며 몇몇 드워프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배에 대해 잘 아는 그들이었기에 지금의 기동에 오히려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들의 함선! 적 기함에 달려듭니다!”
“······.”
자신보다 배는 더 커 보였음에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적 기함을 향해 돌격을 시도하는 제미나 호.
날아오는 포탄들을 이리저리 피해가며 돌진하는 제미나 호의 모습은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아찔한 것이었다.
“충격!”
크콰가가각-!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어이 적의 방해를 뚫고 적의 함선을 들이 받아버린 제미나 호.
몸집은 작았어도 속도에 의해 느껴지는 그 호쾌함에 드워프들은 들고 있던 도끼를 높게 치켜들었다.
“······내가 분명 유인만 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제 기억에도 그렇습니다. 대족장님.”
올무카르는 적 기함에 올라타는 제미나 호의 선원들을 보고는 버릇처럼 턱을 긁적여대었다.
인간과 엘프들이 한데 섞여 움직이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올무카르에게 기이한 감상을 안겨주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분했던 모양이로군.’
올무카르는 그중에서도 가장 앞장 서 있는 금발의 기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자신의 앞에서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당당히 외쳤던 블라드의 선언은 거짓이 아니었었다.
“어느새 갑판까지 장악했습니다.”
“빠르군.”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조금의 균형도 잃지 않은 채 검을 휘둘러대는 엘프들.
그들이 만들어 주는 길을 따라 번뜩이는 황금빛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번뜩임이었다.
“배를 전진시켜라!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
지휘봉을 휘두르는 올무카르의 눈빛이 서늘했다.
갑작스레 백병전에 돌입한 적 기함을 돕기 위해 주변의 배들이 건널 판자를 얹으려 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함장의 목이 잘렸다!”
“인간들의 기사가 조타석을 점령했어!”
그러나 그들이 손을 쓰기도 전에 블라드의 검이 더 빨랐던 모양이었다.
달려드는 장애물들을 베어가며 똑바로 나아가던 블라드의 검은 기어이 타륜을 붙잡고 있던 톨빈의 목을 잘라내고 말았다.
“······사과 한 번 확실히 해야겠군.”
점점 가까워지는 간격을 따라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아직 멀었기에 확연히 구분되지는 않았으나 올무카르는 분명 저 멀리에 있는 푸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높은 돛대 위로 기어 올라가는 은회색의 기사.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배의 망루까지 기어 올라간 블라드는 올무카르가 있는 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 정도면 증명이 되었냐는 듯 흔들어대는 바르보사의 깃발을 보며 올무카르는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다.
※※※※
적 전함 총 10척.
그와 맞선 니다벨리르의 함선은 총 7척.
황금공에게 있어서는 그저 탐색대였을 뿐인 함대였지만 그에 맞서야 하는 니다벨리르는 총 전력을 끌고 나와야만 했다.
아마 진작에 설치해 놓은 함정들과 제미나 호의 분전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쉽게 끝나지 못했을 전투였을 것이다.
“선장님!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제미나 호에는 승리의 기쁨보다는 어떤 이의 울부짖음만이 가득했다.
바다로 놓인 판자 위에서 위태로이 서 있던 선원 하나가 내지르는 소리였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제가 잠시 눈이 멀었습니다! 거둬주신 선장님의 은혜도 몰라보고······.”
“진부하네.”
주절대는 허튼 변명에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돌아서는 하벤.
차갑게 가라앉은 하벤의 눈빛에 블라드조차도 잠시 침묵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선장이었을 때의 하벤은 자신이 알고 있던 하벤과는 조금은 다른 사람인 모양이었다.
“선장님!”
콰직-!
망설임 없이 돌아선 하벤의 등 뒤로 오타르의 도끼가 번쩍였다.
마치 나무가 쪼개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바다 위로 새빨간 핏물이 튀어 나갔다.
조직을 배신한 자에게는 오직 죽음뿐.
반쯤은 터져나간 선원의 몸이 힘없이 바다 위로 떨어져 내렸다.
“미안하다. 선장인 내가 좀 더 확실히 확인했어야 했는데.”
“수습했으니 됐어.”
블라드의 위로에도 하벤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축 늘어뜨릴 뿐이었다.
고의였던 실수였던 간에 결국 제미나 호에 붙어 있던 수정구 때문에 렘노스 섬의 위치는 발각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방금의 전투로 명예는 회복했다 할지라도 이미 벌어진 과오만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미나 호의 용골이 휜 것 같아. 대대적인 보수 없이는 지금 같은 격렬한 전투는 무리야.”
“그래?”
하벤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제미나 호의 선수 부분을 바라보았다.
과연 삐뚤어진 듯 묘하게 균형이 맞지 않는 모습이 하벤의 말처럼 큰 보수가 필요해 보였다.
“용골이 나간 거면······. 배를 바꿔야 하려나?”
“그래야 할지도 모르지.”
적 기함에서부터 승리를 거둔 제미나 호였지만 그 승리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도 만만치는 않았다.
어쩌면 배 자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하벤의 말에 블라드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블라드, 잠시만.”
하벤의 꿈이었고 자신이 선물해 준 첫 배였다.
감출 수 없는 실망감에 묘하게 가라앉은 블라드를 보며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바라디스가 손짓을 해대었다.
“무슨 일이죠?”
“아무래도 찾은 것 같다.”
나름의 위로였을까.
바라디스는 자신이 찾은 정령들의 기척을 블라드에게 알려주었다.
“섬에서는 보이지 않던 정령들의 흔적이 바다에 있더군.”
“바다에요?”
“그래. 바다에. 나중에라도 찬찬히 한번 찾아보고 싶다.”
모자랐던 바람을 대신해 제미나 호를 밀어주던 오징어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투에 집중하고 있던 바라디스로서는 정확한 실체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으니 지금은 그저 자그마한 성과가 있었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세계수가 만든 검에 이끌려 따라온 것 같다. 분명 반응하는 감각이 있었거든.”
“······그렇군요.”
블라드는 들고 있던 검을 세우고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다를 풍경 삼아 바라본 미완(未完)의 검,
그 검 안에는 비록 색깔은 옅었으나 바다와 같은 푸르름이 있었다.
“꽤 신기한 검을 들고 다니는군.”
그리고 제미나 호 옆에서 나란히 배를 몰고 있던 올무카르 또한 블라드가 빼 든 검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망가진 배 위에서 흐트러진 검을 들고 있는 기사.
그러나 온통 망가져 있음에도 묘하게 균형이 맞는 그 모습을 보며 올무카르는 도통 감을 못 잡겠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철컹-!
냉기 가득한 바닥 위에 앉아 있던 요제프는 갑작스레 열린 창살 소리에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요제프 님.”
“······그래. 수고했다.”
조금은 창백해졌으나 블라드를 바라보는 미소만큼은 여전히 푸근했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조금의 긴장도 보이지 않는 그런 모습이었다.
“해치우고 왔나.”
“10척 정도였습니다. 비록 탐색대였지만요.”
“역시 황금공 씩이나 되니 그 정도 함대도 탐색대 정도밖에 안 되나 보군.”
포로로 잡은 바르보사의 선원들은 자신들을 그저 탐색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렘노스 섬을 노리는 황금공의 시도는 아직 본격적인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칭호 앞에 황금이 붙는 자다. 소문은 들었지만 역시 가진바 재력이 대단한가 보군.”
제국에 넷밖에 없는 공작 중 하나인 황금공(黃金公).
날카로운 칼 대신 반짝이는 금화를 휘두르고 다닌다는 그는 요제프에게도 그리고 블라드에게 있어서도 여태껏 맞이한 적 중에서 가장 거물이라 할 수 있는 자였다.
“추우신가 보네요.”
“담요가 너무 얇았어.”
아직 감옥 안의 냉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요제프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자야르조차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는 그 떨림을 보며 블라드는 준비해왔던 천을 넓게 펼쳤다.
“올무카르 대족장 님이 오해에 대한 사과도 할 겸 요제프 님과 대화를 하고 싶으시답니다.”
“그래.”
어깨에 둘러멘 천 위로 짠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그러나 그 거친 냄새에도 요제프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요제프 바예지드 님과 블라드 경이 도착하셨습니다!
잠시간 오해가 있었으나 이제는 진정한 손님의 모습으로.
자신의 기사로 하여금 다시금 명예를 찾아오게 한 요제프를 보며 11명의 족장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황금공 바르보사의 깃발을 전리품 삼아 망토처럼 둘러맨 요제프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저번에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나눠볼까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 같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요제프를 보며 니다벨리르의 족장들이 느낀 감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요제프는 그저 희미한 미소와 함께 다음의 일을 준비할 뿐이었다.
※※※※
“아이고. 이 사람아. 내가 조심하라니까.”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위태로운 판자 소리가 삐걱거렸다.
그러나 바르보사는 그쯤은 익숙하다는 듯한 걸음에 조타석으로 뛰어 올라갈 뿐이었다.
“그냥 먼발치에서만 보고 오래도 그걸 못해서 이리되었나. 쯧쯧.”
톨빈과 눈을 마주친 바르보사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차보았으나 아무리 물어보아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머리와 몸이 분리된 톨빈은 영원히 멈춰서 있을 뿐이었다.
“보낸 배는 열 척인데 돌아온 배는 고작 한 척이니. 이것 참 손해 보는 장사일세.”
조심스레 톨빈의 목을 내려놓은 바르보사는 저 앞에 보이는 안개를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여대었다.
저 짙은 안개 속에는 분명 노다지 같은 드워프들과 그들의 기술이 있을 테지만 굳건히 걸어 잠근 그들의 세계는 침탈자에게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 깃발은 뭐야? 아는 놈들 있나?”
“······저희도 처음 보는 형태의 깃발입니다.”
“남부나 서부 놈들은 아니라는 말이구만.”
온통 부서지고 갈라져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함선에서 홀로 제 모습을 간직한 것이 하나 있었다.
예전에는 자신의 깃발이 나부끼던 곳을 올려다보던 바르보사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생소한 깃발을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럼 북부인가?”
바람을 따라 펄럭이는 깃발 하나.
붉은 장미를 그려놓은 그 깃발을 보며 바르보사는 실로 오랜만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마주한 도전자의 깃발에 바르보사는 오랫동안 굳어있던 혈관들이 말랑해지는 것만 같았다.
“손님맞이 한번 확실하구만! 아무래도 우리가 길은 맞았나 보다!”
한 명이 내질렀다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목소리.
널따란 바다 위로 그가 외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호탕한 외침 속에 숨어 있는 진득한 분노를 뒤에 있던 모든 함선이 들을 수 있었다.
“전원 안개 속으로! 저 안에 반짝이는 것들이 있으리라!”
바르보사의 외침에 까맣게 늘어서 있던 수십 척의 함선들이 안개 속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북부와 서부에 있는 모든 배를 합쳐도 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숫자의 배들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바다의 방식을 아는구만. 선전포고가 꽤 고전적이야.”
새로운 땅, 낯선 안개, 그리고 정체 모를 도전자.
렘노스 섬으로 향하는 바르보사의 얼굴에는 어느새 진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리고 웃고 있는 그의 옆에는 은색의 쇠사슬로 묶여있는 함이 하나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