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92
깃발은 붉은 장미 (2)
단 한 번도 빛이 닿지 못한 것만 같은 깊은 바닷속.
그곳에서부터 올라온 희뿌연 거품들이 있었다.
수면 위에 닿자마자 터져버린 거품들은 간직하고 있던 숨결들을 흩뿌리며 같은 색의 안개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
깊은 바다 아래서 위를 올려다보면 일렁이는 수면이 곧 밤하늘 같아 보일 것이다.
지금 보는 이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오랜만에 마주하는 황금색 빛무리에 깊은 바닷속에 잠들어 있던 눈동자가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부터 거품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저 위에 보이는 빛을 따라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아마도 평소보다 짙어진 안개는 쉴 새 없이 떠오르는 거품들 때문인 모양이었다.
※※※※
“오오오······.”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니다벨리르의 대장간.
쉴 새 없이 김을 내뿜는 황동관들을 보며 니벨룬은 황홀하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원리로 이것들이 움직이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진정 좀 하지.”
“어떻게 혼자서 움직이는 걸까요. 암만 봐도 신비는 보이지 않거든요.”
블라드와 니벨룬이 황동관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그곳에는 웬만한 배 한 척 크기는 될 것 같은 풀무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움직이는 사람 없이 혼자서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들은 과연 블라드가 보아도 묘한 압박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옆에 있는 고양이는 도대체 왜 데려온 거냐.”
“······저도 뭐 딱히 데려오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옆에서 호들갑을 떨어대는 니벨룬이 조금은 민망했던 모양인지 블라드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사실 아까부터 눈치를 주는 대장장이들이 조금은 불편했던 참이었다.
“새로 주신 갑옷. 너무 좋던데요. 예전보다 부피가 커져서 거슬릴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알았어요.”
“흥. 어린놈이 벌써부터 알랑방귀나 배워왔구나. 싹수가 노래.”
“좋아서 좋다고 한 것 가지고 되게 뭐라고 하시네요.”
루흐타의 작업장에 들어선 블라드는 낡은 고로를 향해 왼쪽 눈을 찡긋거려 보았다.
세계를 통해 바라본 그곳에는 과연 바라디스의 말대로 블라드를 보고 있는 어린 도마뱀이 있었다.
“그나저나 진짜 검은 어떻게 안 되나요? 영감님이 아니고서는 다룰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이놈아. 나한테 뭐 맡겨 놓은 것 있냐? 갑옷으로 만족해라.”
“저는 맡겨 놓은 게 없는데, 호르헤가 맡겨 놓은 건 좀 있지 않나요?”
옛 인연을 들먹이는 것이 좀 치사하기는 했지만 블라드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앞에는 여태껏 보아왔던 대장장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장인이 있었으니까.
아마 지금이 아니고서는 검날을 세울 수 없으리라는 것을 블라드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
늙은 드워프가 손을 말없이 내밀자 블라드는 실실 웃어대며 자신의 검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 광경을 보던 어린 도마뱀이 자신이 타고 왔던 검을 알아봤는지 눈을 반짝여 대기 시작했다.
“목숨값이라는 게 참 질긴 거다. 늙어서 송장 될 이 나이까지 멈출 수가 없으니.”
“죄송해요. 그래도 영감님이 아니면 봐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받아드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블라드의 검을 살펴보던 루흐타는 그만 속으로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래서 그랬구만.’
장인의 눈길로 살펴본 푸른 검은 과연 블라드가 안달을 낼 정도로 검날이 흐트러져 있었다.
여태껏 용케 적들을 베어왔다 생각될 정도로 무뎌진 검날이었다.
“그냥 날만 세워주시면 돼요. 예전에 말했던 재료는 제가 어떻게든 구해볼 테니까요.”
“······재료가 있어도 이건 날 못 세운다.”
평생을 불 옆에 있었음에도 검날 하나 세우지 못한다고 말하는 대장장이.
그런 루흐타를 보며 블라드는 당황한 듯 가만히 굳고 말았다.
“날도 못 세워요? 운철이라는 게 그렇게 다루기 어려운 건가요?”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관점에서 어렵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세계수의 신녀가 저승의 문턱 너머에서 늙은 대장장이를 불러와 만들어 낸 검.
재료도, 제작하는 과정도 모두 범상치 않았기에 다루기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지만 루흐타마저도 고개를 저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런 관점이라는 게 뭔데요.”
“기술과 재료의 문제를 떠나 누구라도 날을 세울 수 없을 거라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가만히 블라드의 검을 내려다보던 루흐타는 손가락으로 검면을 튕겨내었다.
웅웅거리며 대장간에 퍼지는 소리.
주변 가득한 소음에도 명확히 들리는 그런 울림이었다.
“이건 검이 아니니까.”
“······네?”
“처음에 길을 들여놓은 자가 그저 검처럼 보이게 만들었을 뿐이란 이야기다.”
천천히 퍼지는 검명(劍鳴)에 어린 도마뱀이 기껍다는 듯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왼쪽 눈을 감고 있던 블라드는 그 울림을 따라 자신의 검에서부터 희미한 빛무리들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데요.”
“아직 제대로 알아듣기에는 네가 좀 어리지.”
어느새 블라드에게서 돌아선 루흐타는 내려놓았던 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새빨간 쇳덩이를 내리치는 드워프 장인.
블라드는 아무 말 없이 망치를 내려치는 루흐타의 뒷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이 무엇이 될지 모르는 어린 가능성에게 무조건 형태부터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다.”
까앙! 깡!
무심히 내려치는 망치질 속에서 시뻘겋기만 하던 쇳덩이가 점차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의미 없는 돌덩이로 태어났지만 불과 망치 앞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철괴.
그러나 점차 변해가는 그 모습이 정말 본인이 원했던 모습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몸조심해라. 어쩌면 오늘이 너와 내가 보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그 말을 끝으로 루흐타는 묵묵히 작업에 몰두할 뿐이었다.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다 해주었기에.
그 조언을 이해할지 말지는 오직 검의 주인인 블라드에게 달린 일이었다.
“······마지막이라니. 재수 없는 소리 하시긴.”
블라드는 더는 아무 말 없는 루흐타의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걸어왔던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나가면서 보는 대장간의 대장장이들은 다들 하나같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아마 다들 다가올 폭풍을 준비하며 쇠에 날을 세우는 모양이었다.
※※※※
“바르보사의 함대가 저희 해역에 진입했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최소 40척은 넘어가는 함대라 합니다.”
옆에서 들려오는 보고에 족장들의 안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40척이라는 배도 배였지만 그 안에 타고 있을 전투병력만 최소 천 명은 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병력들에 대항할 수 있는 니다벨리르의 숫자는 고작 7척의 전함과 수백 명의 드워프들뿐이었으니 회의실의 분위기가 어두워질 법도 했다.
“······올 게 왔군.”
그러나 위기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지금에도 대족장 올무카르의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올무카르 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그날이 오늘이 아니기를 바라왔을 뿐이지.
“바르보사의 함대가 언제쯤 도착하겠나?”
“길을 잃지 않고 똑바로 온다면······. 아마도 3일 이내입니다.”
“3일.”
이렇게나 가까웠었다.
인간들과 드워프들간의 거리는.
아직도 몇몇 족장들은 숨죽이며 태풍이 지나갈 것을 기다리자고 말하고 있었으나 올무카르는 더는 황금공의 위협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바예지드의 요제프. 자네가 말한 제안은 아직도 유효한가?”
“물론입니다. 대족장 님. 저희 북부는 여전히 니다벨리르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위협에 대해서 북부가 조금이라도 지원해 줄 수 있겠는가?”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시간이 문제일 테죠.”
적은 지금 코앞에 있었고 북부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항구는 오직 나사우뿐.
고작 3일이라는 시간 안에 그곳에 있는 함선들을 이곳까지 출항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정도는 나도 아네. 아이와 노인들만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싶을 뿐이야. 그 정도는 가능하겠는가?”
도망칠 수 없는 배수진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전사들에게나 유효한 개념이었다.
니다벨리르의 지도자로서 언제나 다음을 생각해야 하는 올무카르는 최소한 노약자들만이라도 이 섬에서 떠나보낼 생각이었다.
“대족장님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그 정도라면 바예지드의 재량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고맙네.”
드워프들의 옛말에 위기의 순간에 손을 내밀어주는 자만이 진정한 친우라 했다.
비록 북부와 바예지드가 자신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긴 했으나 이 정도의 호의라면 서부와는 완전히 다른 인간들이라 판단해도 될 것이다.
“지금부터 전함을 제외한 모든 배들을 수배해라. 그저 판자를 얹은 고깃배라도 좋다.”
“알겠습니다. 대족장 님.”
가장 완벽한 용의 시대에서부터 지금 제국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세계 아래 짓밟히는 존재들은 언제나, 어느 시절에나 있어왔다.
그저 짓밟는 자들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전혀 변하지 않은 현실에 힘없는 자들은 또다시 고향과도 같았던 섬을 떠나야만 했다.
“분위기가 왜 이러나! 해야 할 일이 명확하니 오히려 더 좋지 않소!”
쾅-!
먼 옛날의 일처럼 다시 한번 동족들에게 먼 피난길을 준비하라 이른 대족장은 분노로 떨리는 입술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다가오면 치워내면 되고 위협하면 박살 내면 되는 것이지! 오직 그 방법뿐이니 고민할 것도 없소!”
마지막 항전을 준비하는 올무카르의 입에서 뜨거운 쇳물과도 같은 열변이 토해져 나왔다.
“이 섬이 우리의 마지막이오! 이곳마저 잃어버린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돌아갈 고향조차 잃은 수인족들처럼 평생을 떠돌며 살겠지!”
예전과 같은 과오를 또다시 반복할 수는 없다.
마지막 항전을 준비하자는 올무카르의 말에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
드워프 해방전선 니다벨리르는 그렇게 하겠노라 다짐한 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
어제와는 달리 렘노스 섬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다가올 폭풍을 피해 섬을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난 행렬은 난생처음 봐.”
“나는 본 적 있어.”
“어디서?”
“등나무 마을이라고 있어.”
그때와 같은 광경이었다.
노인들은 힘겹게 등짐을 지고, 여인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은 채 바삐 움직이는 지금의 광경은.
모두가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는 항구에는 그저 무거운 분위기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우리는 몇 명이야.”
“한 50명? 의외로 별로 없어. 제미나 호가 수리가 필요하다는 걸 여기 사람들도 다 알고 있으니까.”
하벤은 기대했던 보수는커녕 생각지도 못한 피난민들을 실어 가는 현실이 영 맥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내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아이들을 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들 전부 딴 배로 실어.”
“응?”
“피난민 한 명도 받지 말라고.”
한참 피난민들을 보던 블라드는 저 멀리서 낯익은 고로를 든 채 배를 올라타는 대장장이들의 무리를 보았다.
왼쪽 눈을 감아 바라본 낡은 고로에는 풀이 죽은 듯 시무룩해져 있는 어린 도마뱀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왜? 안 그래도 태울 배가 모자라는데.”
블라드는 배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바라디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마주쳤을 때에야 알아볼 수 있다는 신녀의 계시.
이미 한 번 계시를 경험해 본 적 있던 블라드는 직감이 말해주는 경고를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거든.”
노을이 지는 항구 뒤로 섬을 떠나가는 쪽배들이 가득했다.
그들의 뒤를 따라 제미나 호도 천천히 접어놓고 있던 돛을 풀기 시작했다.
부풀어오는 돛 위로 너풀거리는 장미 깃발만이 렘노스 섬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