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94
황금색 등대 (2)
누군가에게는 지켜야 할 대상이었으나 누군가에는 그저 수확의 대상이었을 뿐.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드워프들을 보며 바르보사의 선원들은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그들에게 있어 갈 곳을 잃고 헤매는 드워프들은 그저 반짝이는 금화에 불과한 것이었다.
“저거 다 드워프들 아니야!”
“하하! 이곳이 바로 노다지로구나!”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수확에 들떠 있었던 탓일까.
그들은 천천히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는 배 한 척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설사 알아챘다 할지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배는 위협적으로 보이기에는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녀석이었으니까.
“······뭐야?”
들떠 있는 선원들에게로 순간, 반짝이는 빛 하나가 비치기 시작했다.
한낮이었음에도 밝게 빛나는 그 빛은 작긴 했어도 항구에 서 있는 등대라 착각할 정도의 반짝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반짝이던 그 빛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볼품없었기에 무시했던 자그마한 배를 타고.
바다를 가르며 달려오는 그 배는 똑바로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
“으아아아아!”
“너무! 너무 빨라!”
“오징어, 오징어들이 미쳤나!”
마치 은빛 선반을 타고 있는 것만 같다.
푸르러야 하는 바다였으나 지금 제미나 호가 밟고 있는 수면은 온통 은빛으로 가득했으니까.
발광하는 오징어 떼들이 만들어 내는 빛에 저 멀리 있던 바르보사의 함선들마저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끄으으으!”
경험 많은 선원들조차도 이를 악물어야 할 정도의 속도.
부풀어 오른 돛은 이미 찢어질 듯 펄럭이고 있었고 와닿는 맞바람은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해져 있었다.
“다들 꽉 잡아!”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제미나 호의 전진이었으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선원들이 감내해야 하는 충격은 격렬했다.
균형감각이 뛰어난 엘프들조차 당황할 만큼의 진동에 이미 요제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콰앙! 쾅! 쾅!
“적 함선에서 공격! 포탄입니다!”
뒤늦게 알아챈 바르보사의 함선들에서부터 새까만 점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불길한 폭음에 선장모 아래 가려진 하벤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흐으읍!”
끄득-! 끄드드득!
억지로 돌려내는 조타륜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한 제미나 호가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펑! 펑! 철썩!
온 힘을 다한 조종에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가는 바르보사의 포탄들.
언제나 침착함을 잃지 않던 바라디스 조차도 바로 옆에서 떨어지는 포탄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하! 하하!”
배에 타고 있던 모두가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하벤만큼은 크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내가 두 다리로 뛰어본 적이 도대체 언제였을까.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때의 기억이 찢어질 듯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천천히 깨어나는 것만 같았다.
“전원! 충격에 대비해라!”
끼익! 끼이이익!
제미나 호의 곳곳에서 불길한 삐걱거림이 가득했다.
지쳤고 망가졌으며 가진 바 능력에 비해 너무나 큰 임무를 맡은 제미나가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그러나 하벤은 붉은 장미의 그녀라면 분명히 마지막까지 해줄 것이라 믿었다.
“부딪힌다!”
“으아아아!”
신비가 불어낸 바람과 정령들이 내지른 물결이 마지막으로 제미나 호를 포탄처럼 쏘아 보냈다.
급작스러운 가속에 바르보사의 선원들조차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콰앙! 콰지지지직-!
터질듯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맞부딪힌 두 척의 배가 크게 휘청이기 시작했다.
작았으나 단단한 레이디는 기어이 침략자의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내고 말았다.
“전원 뛰어들어!”
“으아아아!”
“안 죽었다! 나 아직 안 죽었어!”
침몰하는 제미나 호 위에서 선원들이 앞을 향해 뛰어들기 시작했다.
가장 앞에 매달린 충각이 만들어 낸 다리를 타고서.
앞으로 크게 기울어진 각도가 그들의 돌격에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기선제압은 어떻게 하라고 했지?]그리고 무너지는 망루 위에서 그들의 돌격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쓰러져가는 제미나 호의 흔적을 온몸으로 두른 사내가 보내는 시선이었다.
“······화려하게요!”
충각은 선창에 닿았으나 기울어진 제미나 호의 망루는 적 갑판을 향해 내려앉고 있었다.
천천히 쓰러져가는 그곳에서 반짝이는 황금색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크게 휘둘러지는 검격.
그 검의 길은 정확히 조타륜을 잡고 있던 적 함장을 향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올려다보고 있던 함장의 눈으로 빛무리가 가득해지고 있었다.
마주 보는 시선을 통해 가까워진 두 사람이 기어코 서로를 지나가고 말았다.
그어진 검의 길은 하나였고 그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도 오직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푸슈슈슉!
세로로 쪼개낸 핏물 아래로 선장이 천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스쳐 지나간 순간은 찰나였고 닿은 빛은 화려한 황금색이었다.
“······나는 쇼아라의 블라드다.”
기어코 쓰러진 제미나 호의 돛대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갑판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나 블라드는 무너져 내리는 그녀를 향해 연민의 눈빛을 보내지 않았다.
“북부를 침범한 네놈들에게 변명 따위는 듣지 않겠다.”
가져가야 할 것은 비루한 형태가 아닌 오직 이름이어야 할 것이다.
붉은 장미의 깃발을 두른 블라드에게서부터 스산한 오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적의 배는 총 5척.
기함에 박혀버린 제미나 호를 보며 당황한 나머지 배들이 서둘러 근처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흐읍!”
묵직하게 휘둘러대는 도끼에 또 한 명의 선원이 목을 잃고 말았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검은 피부의 남자는 지켜본다고 할지라도 알아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하벤!”
“······나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들 해!”
왼쪽 다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하벤을 보며 오타르가 소리를 질러대었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다들 자리 잡아!”
비좁은 선창 아래서 혼란하게 뒤섞여 있는 적과 선원들.
엘프들과 자야르가 선전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멀리서 날아오는 포격까지는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준비된 사수! 심지 들어!”
지팡이조차 잃어버린 채 힘없이 뒹굴고 있던 하벤이었으나 쓰고 있는 선장모만큼은 꽉 움켜쥐고 있었다.
배는 잃었으나 선장의 의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하벤은 자신의 승객들을 위해 어떻게든 길을 만들어야 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발사!”
“포탄 발사!”
“선장님께서 발사하시란다!”
혼란한 비명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복창들.
적의 대포들을 탈취한 제미나 호의 선원들이 다가오는 함선들을 향해 힘껏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펑! 퍼펑! 펑!
가까이 다가왔기에 오히려 피할 수 없는 거리.
사방에 튀어 오르는 파편들 위로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이토록 빠른 시간에 선창이 점령됐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적의 함선들 속수무책으로 측면을 내주고 말았다.
“멈추지 마라! 계속 발사해!”
지금부터는 오직 빠른 손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기함이 탈취되었다는 것을 알아챈 함선들에게서 천천히 포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대포의 끝이 양쪽에서 선원들을 노리고 있었다.
“긴급 부상하라!”
순간 조준을 마친 적의 함선 중 하나가 크게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바다 아래서 튀어오른 개복치 같은 것에 의해 사정없이 밀어 올려졌기 때문이다.
펑! 펑펑! 펑!
각도를 잃어버린 적의 포탄들이 허무하게 하늘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울려 퍼지는 하벤의 명령과 함께 선창에서부터 불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날아가는 포탄 하나에 누군가의 비명 하나.
갈가리 찢긴 시체들이 바다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
천천히 가라앉는 시체들 위로 거품이 떠 오르고 있었다.
깊은 바닷속 빛 한 점 들지 않았던 어둠에서부터 나오는 거품이었다.
누군가의 숨결을 담은 그 뿌연 거품은 지금 수면 위로 비치는 황금빛 등대를 향해 자신의 손을 뻗치고 있었다.
비록 가진바 빛깔은 달랐으나 아주 오래된 기억 속에 있는 울림과 같은 것이었으므로.
※※※※
“쇠사슬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회해라.”
“불가능합니다! 곳곳에 암초들이 깔려 있습니다!”
바르보사는 들려오는 보고들에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여대었다.
어쩐지 상대가 되지 않았음에도 필사적으로 대항하던 이유가 아마 지금을 위해서였던 모양이었다.
“······거참 대담도 하시지.”
바르보사는 바로 앞에 보이는 함선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기이한 물레방아를 단 채 끊임없이 자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한 배.
비록 지금의 모습은 포탄들로 인해 초라해졌으나 니다벨리르의 기함은 결국 자신들의 임무를 완수하는 데 성공했다.
“배 밑에는 철갑이 없다고 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이마 위로 파편에 찔려 흐르는 피가 가득했다.
그러나 올무카르는 들리는 보고가 기껍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었다.
“잠수함들에게 전해라. 저놈들 배 밑에 구멍을 뚫으라고.”
“알겠습니다.”
전투용이 아닌 작업용으로 만들어 놓은 잠수함들이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배 밑에 구멍을 뚫기는 수월할 것이다.
애초에 바다 밑에 광석들을 채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잠수함들이었으니까.
쿠웅! 쿵!
“공작님! 지금 배 밑에서!”
“아이구. 이제는 뭐가 튀어나와도 안 놀라련다.”
배 밑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에 선원들이 불안에 떨어댔지만 황금공 바르보사는 그저 어깨를 으쓱여 댈 뿐이었다.
바람 없이 알아서 움직이는 배에 바다 밑을 나다니는 이상한 개복치.
게다가 암초 사이사이에 집요하게 묶어 놓은 쇠사슬들까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던 드워프들의 준비에 바르보사는 그만 질려버리고 말았다.
“드워프 수염만큼 질긴 게 없다고 하더니만······. 암만 봐도 저놈들 미친놈들이야.”
그러나 황금을 향한 바르보사의 집착은 차라리 광기에 가까운 것.
몸속에 붉은색 피 대신 차가운 금화가 흐르는 그는 드워프들의 선전 하나하나가 빛나는 금화로 보일 뿐이었다.
“아이고. 백작님.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어쩌겠소. 나도 참 안타깝구려.”
마땅히 수가 없음을 인정한 바르보사는 들고 왔던 대비책 하나를 쓰기로 했다.
본래는 용혈공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것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네 놈과 바르보사 가문에게 저주가 있기를 빈다.”
“그게 마지막 살바라즈가 남기는 유언이오?”
밧줄에 의해 꽁꽁 묶인 중년인이 살기 넘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나 황금공 바르보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빼든 단검을 바라볼 뿐이었다.
패배한 개는 누구라도 지금의 남자처럼 짖기 마련이었고 바르보사는 그런 헛된 협박 따위는 숱하게 들어본 사람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런 말도 별로 감흥이 없어. 감흥이.”
“컥!”
익숙한 손짓으로 가볍게 사내의 목을 그어버린 바르보사.
그가 들고 있는 단검의 끝으로 마지막 살바라즈가 품고 있던 핏방울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드드드드득-!
살바라즈 백작의 눈이 빛을 잃어갈 때마다 옆에 있던 함에서부터 격렬한 진동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여태껏 은색의 쇠사슬들로 인해 꽁꽁 봉인되어 있던 함이었다.
“······듣던 대로 날뛰기 시작하는군.”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던 쇠사슬들은 지금 급속하게 녹이 슬어가고 있었다.
피를 통해 이어질 맹약을 잃었기에 더는 고귀한 맹세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맹약을 지키고 있던 남부의 핏줄은 결국 무뢰한 해적에 의해 끊어지고 말았다.
상자의 불길한 울림을 따라 바다 밑 그림자가 짙어져 가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여태껏 남부에서부터 용의 파편을 따라온 존재가 품고 있던 것이었다.
※※※※
렘노스 섬의 절벽 끝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노인이 있었다.
싸울 수 없는 자들은 피신했고 싸울 수 있는 전사들은 모두 전장으로 떠나 텅 비어버린 섬이었지만 루흐타만큼은 이 대장간을 지키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보잘것없는 늙은이라 할지라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의무는 있는 것이니까.
“저게 도대체······.”
그렇게 굳은 결심으로 남아 있던 루흐타였지만 지금 보고 있는 광경만큼은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바다가 울고 있었다.
자신의 밑에서 감당하기 힘든 존재가 떠오르고 있음에.
그 거대한 울부짖음에 니다벨리르의 함선들이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언제라도 뒤집힐 것 같은 가련한 나뭇잎처럼.
“······이런 세상에.”
루흐타의 입에서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거대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오랫동안 살아왔던 그로서도 감히 감당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아아아아아아-!
바다를 찢으며 고개를 들어 올린 용이 있었다.
뻗어낸 고개가 하늘에 닿을 만큼 거대한 존재였다.
그것이 울부짖는 소리에 하늘마저도 구름으로 자신을 가릴 정도였다.
“가장 거대한······. 용.”
가장 거대한 용. 레비아탄.
완벽한 용의 흔적 중 제일 거대한 존재가 지금 렘노스 섬의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검이 울고 있었다
울부짖는 바다 위에서 하늘을 찢어발길 기세로.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게 솟은 레비아탄의 모습은 감히 우러러보지 않고서는 눈에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용의 모습은 전장에 있는 모두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게 만들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맙소사.”
그 옛날, 가장 완벽한 용이 이러했을까.
오래된 만큼 거대했고, 거대한 만큼 경이롭다.
올무카르는 짙은 구름 사이로 비치는 레비아탄의 눈동자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그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퍼엉-!
그러나 파도마저 숨을 죽인 이 순간, 홀로 침묵을 깨는 날카로운 소음이 있었다.
단 한 발의 포탄이 만들어내는 소음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존재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그런 소리였다.
“적, 적 기함에서 포탄 발사!”
“······!”
불길한 붉은 빛이 감도는 포탄이었다.
어두워진 하늘을 배경 삼아 날아가는 포탄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우와도 같았으나 바르보사가 쏘아 올린 그 유성우는 오직 한 사람의 소원만을 들어주는 거짓된 별이었다.
“······미끼는 보냈고.”
천천히 렘노스 섬으로 기울어지는 붉은 궤적을 보며 황금공 바르보사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거친 사냥감을 붙잡기 위해서는 그만큼 힘을 빼놔야 하는 법.
조각을 날린 것은 아쉽지만 저기 보이는 용이라면 드워프들의 방어선을 처참히 부숴줄 수 있을 것이다.
그아아아아아아아-!
과연 그의 뜻대로 렘노스 섬을 향해 날아가는 용의 조각을 보며 레비아탄의 눈가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욕망과 염원 따위가 아닌 본능에서 갈구하는 완벽함이 방금 자신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이제 나머지는 용 씨한테 맡겨보자고.”
저 거대한 몸체에 섬 자체가 갈기갈기 찢길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괜찮다.
황금색 금화들은 비록 부서진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빛나는 것들이었으니까.
자신은 저 용이 부수고 난 조각들을 그저 줍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뱌르보-사!”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 울분에 찬 올무카르의 포효가 들려왔다.
붉게 달아오르는 레비아탄의 시선을 보며 지금 바르보사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쏴아아아아-!
그러나 그의 분노에도 상관없이, 레비아탄의 몸짓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뱀 같은 몸체가 꿀렁일 때마다 차마 그 거대함을 담을 수 없는 바다가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전 함선! 포격 준비! 섬으로부터의 시선을 돌려라!”
그리고 그 비명은 오롯이 드워프들의 둥지인 렘노스 섬을 향하고 있었다.
가장 거대한 존재 앞에 위태로이 놓인 자신들의 섬을 보며 니다벨리르의 드워프들은 그만 이를 악물고 말았다.
※※※※
바닷속이 갈라지고 그 안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그 갈 곳 없는 열기들이 만드는 거친 조류 속에서 위태로이 흔들리는 개복치 한 마리가 있었다.
“이거 왜 이렇게 흔들려!”
“으아! 으아아!”
드워프 피난민들을 무사히 떠나보내고 다시 렘노스 섬으로 향하는 불카누의 잠수함.
그 안에 앉아있던 블라드와 일행들은 사정없이 흔들리는 잠수함의 흔들림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불카누!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화산들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쉴 새 없이 삐걱대는 페달 소리 속에서 불카누의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이 번져 나오는 불안이 가득했다.
“화산? 여기 산이 어디 있는데요?”
“바다 밑에도 산들은 있습니다. 땅 위에 있는 것들보다 훨씬 더 사나운 녀석들이죠.”
바다 밑에 산이라는 말에 니벨룬의 귓가가 쫑긋거렸지만, 차마 고개까지 들지는 못했다.
지금 불카누의 잠수함은 거친 조류에 휘말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제미나 호에서 적응됐다고 생각했던 멀미가 다시 올라올 정도로 격렬한 흔들림이었다.
“저도 화산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두근-!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불카누의 말에 블라드는 가만히 벽에 뒷머리를 기대었다.
이제는 뛰는 심장 박동만으로도 구분할 수 있는 완벽함의 잔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용이군.’
불카누는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블라드는 이 사태가 누구로부터 비롯됐는지 알 수 있었다.
완벽함에 굶주려 있는 몰락한 용의 잔재들은 언제나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등장하고는 했었으니까.
“함장님. 여기 좀.”
“무슨 일인가.”
불카누는 다급히 자신을 불러대는 부하의 부름에 서둘러 잠망경에 눈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보이는 바다 위는 처참한 모습 그 자체였다.
“······오징어들이 다 죽었군.”
바다 위 수면에서는 끓어오르는 바다의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허옇게 죽어간 오징어들이 가득했다.
여태껏 제미나 호를 밀어주었으며 지금은 잠수함을 따라오던 오징어들의 사체였다.
두근-!
거대한 존재가 쳐대는 몸부림에 갈 곳을 잃은 오징어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당황하고 있었다.
차가운 바다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오징어들은 계속해서 터져나가는 화산들을 피하려 애썼지만 이미 그들의 세계는 처참히 무너지는 와중이었다.
-······.
또다시 거대한 세계 아래 짓밟히고 마는 바다의 정령들.
그 가녀린 몸짓들을 보며 바다 깊은 곳에서부터 은빛의 물결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오오오오오-
여태껏 정령들을 위해 자신의 몸으로 뜨거운 열기를 가로막고 있던 존재.
죽어가는 정령들을 보며 오래된 옛것 하나가 소리 없는 분노를 내질러대기 시작했다.
드드득! 드드드득!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진동하기 시작하는 블라드의 검.
오래된 옛것의 내지르는 분노에 동조한 블라드의 검이 거칠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몰랐던 검이었으나 지금만큼은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 검이었다.
※※※※
“······안 돼! 안돼!”
사납게 세워진 비늘 하나하나가 섬을 감싸고 있다.
거칠게 조여오는 몸통 사이로 사로잡힌 렘노스 섬이 내뱉는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안 돼!”
처참히 무너지는 섬을 보며 늙은 드워프가 울부짖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드워프들의 세계가 자신의 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보며 루흐타는 굵은 눈물방울을 흘려대었다.
퍼엉! 펑!
저 멀리 바다에서부터 다급한 포탄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니다벨리르의 함선들은 자신들의 섬을 올라타려는 용을 향해 쉴 새 없이 대포를 쏘아댔지만, 용의 조각을 앞에 둔 레비아탄에게는 한낱 모깃소리보다 못한 것이었다.
그르르르르-!
어서 내놓으라 사납게 외치는 용의 포효에 기어이 터져나가고 마는 렘노스의 섬의 산꼭대기.
그곳에서부터 흐르는 뜨거운 용암은 섬이 흘리는 피였고, 드워프들이 흘리는 비통한 눈물이었다.
“내버려 둬라, 이놈들아! 우리를 그만 좀 내버려 둬!”
쉴 새 없이 불어오는 풍랑을 마주하며 이제는 지치고 만 노인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무리 일어서려 해도 끊임없이 자신들을 꿇어 앉히려는 존재들을 보며 루흐타는 더 이상 대항할 만한 기력조차 잃고 말았다.
그아아아아아-!
그래. 내가 여기 있다.
어서 나를 가져라.
나를 가진 너는 더욱더 완벽에 가까워지리니.
그런 노인을 내려다보며 가장 거대한 용이 웃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옆에 있는 절벽에 박혀 붉게 약동하는 용의 조각을 보면서.
가장 거대한 용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나의 가능성보다는 남의 가능성을 취하기가 더 쉽고 달콤하며 또한 감미롭다는 것을.
-······!
그러나 순간, 레비아탄은 바다 밑에서부터 자신을 감싸는 차가운 감촉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어느새 밝게 달아오른 은빛의 바다.
그 위로 떠오른 거대한 촉수들이 레비아탄을 향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저건, 저건 또 뭐야.”
레비아탄의 선전에 한껏 웃음 짓고 있던 바르보사는 갑작스레 등장한 거대한 오징어를 보며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저것도 용인가?”
“아닙니다!”
하늘 높이 치솟은 촉수들이 가장 거대한 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은빛의 향연들이 떨어져 내리는 바닷물과 함께 촉수에 붙어 있는 빨판들을 빛내고 있었다.
“저건 크라켄입니다!”
누군가가 외치는 비명 같은 외침에 따라 높이 솟은 촉수들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가장 거대한 용을 향해서, 남의 가능성을 취하려는 존재를 향해서.
-그아아아아아!
-······!
쩌어어어엉!
인간들의 귀로는 감히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소리.
공기가 갈라지는 듯한 거대한 소리에 바다 위에 있던 모두가 귀를 움켜잡고 말았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바다마저도 커다란 파도를 내뱉으며 떠 있는 배들을 마구 뒤흔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가장 거대한 용에 이어 가장 거대한 바다의 정령까지.
마치 신화에서나 나올법한 광경에 인간도, 드워프도 모두가 무력하게 난간을 붙들 뿐이었다.
-그오오오오오!
그리고 지금, 인간들의 바라보는 시선 끝에 있는 레비아탄은 자신을 얽매여 드는 크라켄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존재가 있었다.
붉게 뛰는 조각을 향해 달려드는 어린 용을 향해서였다.
[가장 완벽한 용의 조각이다! 저것을 넘겨줘서는 안 돼!]“크흐······!”
뛰는 심장을 억지로 붙잡아가며 용의 조각을 향해 달려드는 황금빛 하나.
진동하는 검에서부터 어린 세계수의 흔적을 휘날리는 블라드였다.
“젠장! 너무 멀어요!”
절벽 한가운데에 아슬아슬하게 박혀 있는 용의 조각을 확인한 블라드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시선들을 마주했다.
레비아탄과 크라켄.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무어라 외치는지 알 것만 같은 그들의 눈동자를 보며 블라드는 절벽 밑으로 향하는 바위에 몸을 실었다.
-그아아아아아!
-······!
하지 말라고 외치는 용과 어서 하라고 외치는 크라켄.
그들이 내지르는 소리의 울림만으로도 손으로 붙잡고 있던 돌들이 부스러져 나갔으나 블라드는 조각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푸아아아아악-!
거대한 존재들이 만들어 낸 파도에 힘없이 휩쓸려 나가고 마는 렘노스 섬의 백사장.
붉게 피어오르는 화산재 아래서 힘겹게 절벽을 내려간 블라드는 기어이 붉게 빛나는 용의 조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근-!
어서 나를 잡아라. 어린 용아.
나를 가지면 너는 완벽해질 수 있으니.
나는 가장 완벽한 용의 조각이다.
“······나는 기사죠. 키하노?”
[그래.]자신을 유혹하는 붉은 빛에 잠시 망설이던 블라드였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 한번 자신이 누구인지를 되새길 수 있었다.
[너는 누가 뭐라 해도 너 자신의 주인이다.]남의 가능성이 아닌 나의 가능성으로.
옳은 길은 좁고 깊으나 그 길을 선택한 기사의 정신은 언제나 숭고할지니.
무너져내리는 바다 위에서 나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한 블라드는 손을 뻗어 뛰고 있는 조각을 붙잡았다.
두근-! 두근-! 두근-!
퍼지는 심장 박동을 따라 불길한 붉은 색이 블라드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기이한 감각에 블라드는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만큼은 블라드를 꽉 붙들어주고 있었다.
[블라드 아우레오. 내가 만난 기사 중 가장 빛나는 기사지.]가능성이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
가장 완벽한 용의 조각이라 할지라도 바라는 이의 손 위에서는 용이 아닌 검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검이 울고 있었다.
별빛을 담았으나 용이 쥔 검이 울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 알고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