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99
어둠 속에 길이 있나니 (3)
겨울의 추위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방 안.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홀로 앉아 있는 노인이 있었다.
밟고 있는 카펫은 푹신했고 입고 있는 옷은 두툼했으나 그럼에도 노인은 한기가 돈다는 듯 타오르는 벽난로를 향해 연신 등을 숙여대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궁정공(宮廷公) 아르망.
이름 앞에 있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뒤에 있어야 할 성을 버린 남자.
잔뜩 늙어버린 그의 입에서부터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갈라져 버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죽어서도 자네를 볼 면목이 없겠어.”
아르망의 시선은 타오르는 장작을 향해 있었으나 말라버린 그의 손만큼은 닳아버린 쪽지를 붙들고 있었다.
여태껏 소중히 보관해 왔던 그 쪽지는 전 제국헌병대장인 오귀스트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보냈었던 전보였다.
“······.”
수없이 펴봤음에도 여전히 아쉬운 쪽지를 내려다보며 궁정공 아르망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의 검이자 황실의 검. 그리고 자랑스러운 제국 헌병대의 대장이었던 기사 오귀스트.
궁정공 아르망은 이제는 볼 수 없을 그를 떠올리며 들고 있던 쪽지를 꼭 움켜쥐었다.
“······그렇지만 비록 자네가 없다 하더라도 할 일은 해야 하겠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에 슬픈 노인.
점점 시들어가는 장작의 열기처럼 아르망의 시간 또한 줄어들어 가고 있었지만 늙은 공작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충성스러운 기사가 보낸 마지막 전보에는 아직 불타오를만한 희망이 담겨 있었으니까.
핏줄은 잇지 못했어도 의지는 한 번 이어보리라.
오귀스트가 엘프들의 숲에서 보냈다던 그 쪽지를 쥐어든 아르망의 눈빛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
“과연 듣던 대로 짙은 금발에 푸른 눈이로군.”
“······.”
블라드는 순식간에 주위를 둘러싼 사내들을 보며 들고 있던 술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내들이 시답지 않은 시정잡배들이 아닌 만만치 않은 검사임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누구신데 이렇게들 붙어 다니실까.”
“나는 제국헌병대의 선임 기사 로드리고다.”
사내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어둠을 꿰뚫는 것만 같은 한 줄기 하얀 번개가 그려져 있었다.
황실 호위대와 쌍벽을 이룬다던 황도 브리간테스의 자랑, 제국 헌병대를 뜻하는 깃발이었다.
“······헌병대면 황도에 있어야 하실 분들 아닙니까?”
“죄인을 체포하러 왔다.”
탕-!
빈틈없이 둘러쌌음에도 여전히 여유로운 블라드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내는 요란한 소리와 한 장의 종이를 내려놓았다.
여기 좀 보라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 종이는 궁정공 아르망의 이름으로 블라드를 체포한다는 명령서였다.
“전 제국헌병대장이신 오귀스트 경을 살해한 죄로 너를 체포하겠다. 블라드.”
“뭐?”
짙은 금발에 푸른 눈동자.
용의 핏줄을 이은 것이 확실한 북부의 기사를 향해 제국 헌병대가 이빨을 들이대고 있었다.
왜냐하면, 처참히 죽어버린 그들의 대장이 마지막으로 함께 한 이가 지금 눈앞에 있는 어린 용이라는 것을 알아낸 참이었으니까.
“······”
낯선 사내에게서 들리는 낯익은 이름을 떠올린 블라드는 조금은 떨리는 손길로 내려놓은 체포명령서를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짧고도 단호한 필체로 적혀 내려간 그 명령서에는 과연 자신의 이름과 함께 오귀스트라는 이름도 함께 적혀져 있었다.
“돌아가셨습니까. 오귀스트 님이?”
“발뺌하지 마라. 용의 핏줄아.”
잔뜩 굳어버린 얼굴로 오귀스트의 생사를 물어보는 블라드였으나 헌병 대원들은 그저 검을 뽑아낼 뿐이었다.
이 또한 범인들이 보이는 허튼수작이라고 생각한 그들의 검에는 차마 숨기지 않은 분노가 가득 깃들어 있었다.
“너의 죄는 이미 타고난 금발과 푸른 눈이 증명하고 있으니까.”
“······.”
어찌할 수 없는 날카로운 오해 속에서 블라드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언젠가 황도에 오면 한번 찾아오라고 말했었던 늙은 기사.
그는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황실의 검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름을 대어도 좋다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언제? 누구한테?”
“······네 이놈.”
블라드의 이름 안에는 수많은 면면이 내재되어 있다.
키하노가 보았을 때는 하늘을 바라보는 별이며 오귀스트가 보았을 때는 어린 세계수를 지켰던 기사.
“과연 용의 핏줄답게 비겁한 변모만 보이는구나!”
그러나 로드리고가 바라보았을 때는 자신들의 대장을 죽인 한 마리의 용일 뿐.
의뭉을 떨어대는 용의 핏줄을 향해 기사들의 왼쪽 눈에 감춰진 세계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블라드 드라굴리아! 너를 체포하겠다!”
내가 얻어낸 이름이 아닌 그저 태어난 이름으로 부르는 자들.
자신을 기사가 아닌 용으로 보는 사내들을 향해 블라드는 그만 입술을 짓이기고 말았다.
“······나는 아니야.”
블라드는 알 수 있었다.
오해는 이미 엉킨 실타래처럼 얽혀버렸고 나는 함정처럼 빠져들고 말았다는 것을.
“나는 오귀스트 경을 죽이지 않았어.”
그러니 나는 여기 있는 기사들에게 증명해야 한다.
내가 용이 아니며 그들의 대장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검을 뽑아내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려 하는 블라드의 세계는 당당히 빛나는 황금빛이었다.
※※※※
콰아아아앙-!
도시 한 가운데서 퍼지는 요란한 소리에 몰다비르 남작과 요제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들고 있던 찻잔이 떨릴 만큼 강렬한 소음이었다.
“뭐지! 무슨 일이냐!”
갑작스레 들린 소음에 몰다비르 남작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뛰쳐나갔다.
요즘 따라 급변하는 중부의 정세 탓에 혹시 영지전이라도 발발한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그러나 눈여겨보던 성벽은 그저 조용할 뿐이었다.
그저 저 멀리 보이는 시장 한복판에서 자욱이 솟아오르는 먼지구름이 있었을 뿐.
그 희뿌연 먼지 속에서 낯익은 황금색의 섬광을 알아본 요제프는 조용히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
“이런 젠장!”
“쥐새끼 같은 놈! 이미 알고 있었군!”
요란히 터져나가는 벽면 사이로 기사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그들은 건물 밖에서 퇴로를 틀어막고 있던 또 다른 헌병 대원들이었다.
‘총 6명!’
술집 안에서 블라드를 둘러쌌던 기사는 4명이었으나 사실 건물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까지 합하면 전부 6명이었다.
예민한 청각을 통해 숨죽이고 있던 그들의 위치까지 파악해낸 블라드는 일부러 로드리고를 몰아붙이고는 그들이 서 있던 벽면을 부수며 혼란을 유도해냈다.
“블라드 님!”
“너는 가만히 있어!”
니벨룬이 다급한 몸짓으로 배낭을 주섬거리고 있었으나 이번만큼은 그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됐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비록 난잡한 시장 바닥일 뿐이었지만 지금 블라드가 서 있는 이곳은 하나의 재판장이나 다름없었다.
저기 앞에 있는 기사들을 통해 나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재판장.
온전한 결백을 위해서는 오직 나만의 검으로 저들을 설득시켜야 할 것이다.
까앙-!
“고작 이런 패악질 따위로 너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겠나? 블라드 드라굴리아.”
“······.”
그러나 나를 증명하고자 하는 과정은 언제나 그랬듯이 쉬운 길은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로드리고의 왼쪽 눈에서부터 아까 보았던 분노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으나 적어도 그가 지닌 분노만큼은 타당할 것이다.
“아까 오귀스트 님이 어떻게 죽었냐 물었었나?”
로드리고의 세계는 단단히 얽힌 쇠사슬의 세계.
차가운 철의 색깔을 담은 로드리고의 세계를 따라 그의 검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
더는 간격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난 그의 검은 마치 죄인을 감을 밧줄이라도 된다는 양 블라드를 향해 휘어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건 오히려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콰앙-!
보이는 모습은 낭창했으나 닿았을 때는 바닥이 터져나갈 정도의 위력이었다.
처참히 터져나가는 시장 바닥에 주위에 있던 상인들이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옭아매!”
마치 채찍처럼 휘어져 들어온 로드리고의 공격에 놀란 블라드였으나 곧이어 달려드는 다른 기사들의 공격에 숨을 내뱉을 여유조차 없었다.
“얌전히 오라를 받아라. 드라굴리아의 사생아야!”
평생을 믿고 따랐던 대장의 처참한 죽음.
그렇게 물러나서도 죽어서도 안 되었던 고귀한 기사는 결국 차가운 주검이 되어 돌아오고 말았고 자신들의 대장을 잃은 기사들은 갈 곳 없는 분노를 블라드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어서 움직여라! 저들이 진형을 갖추기 전에!]“칫!”
곧게 뻗어내는 검날보다 기사들이 밟고 들어오는 방향이 더 날카로웠다.
나아갈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점하며 들어오는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하늘 위에서 내려앉는 쇠그물같이 블라드를 압박하고 있었다.
까앙! 깡!
‘더 이상 몰리면 안 되는데!’
의도는 알았으나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하나의 검을 막으면 또 하나의 검이 들어오고 그것을 밀쳐낼 빈틈이 보였다 싶으며 어느새 비어 있는 틈 사이로 또 다른 기사가 들어와 있었다.
‘뭔 놈의!’
그 와중에 쉴 새 없이 날아오는 로드리고의 검까지.
어떻게든 살려서 체포하겠다는 헌병 대원들의 질척이는 악의가 블라드의 발끝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다음 수를 예측해라! 그래야만 빠져나갈 수 있어!]“······!”
보이는 틈으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만들어질 틈을 예측해 빠져나갈 수밖에.
키하노의 조언을 이해한 블라드는 서둘러 발을 굴러 뒤로 빠져나갔다.
콰아앙-!
로드리고의 검날에 또다시 터져나가는 어딘가의 건물.
무너지는 건물이 만드는 자욱한 먼지에 블라드는 숨을 내쉬기조차 힘들었으나 그저 차분한 모습으로 검을 치켜들려 노력했다.
“······저건.”
지친 듯 격하게 어깨를 들썩여대고 있었으나 노려보는 눈빛만은 매섭다.
로드리고는 저 앞에서 검을 치켜든 채 자신들을 노려보는 블라드의 모습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말았다.
마치 쏘아져 나가는 화살처럼 어깨 위로 검을 치켜든 모습.
단 한 번의 일격을 위해 숨을 가다듬는 블라드의 자세는 제국 헌병대의 기사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익숙한 자세임이 틀림없었다.
[이제 보이나.]“네.”
놀라고 말았는지 잠시 흐트러진 기사들 사이로 보이는 틈이 있었다.
아직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나 검이 닿을 순간에 비게 될 그 틈을 오귀스트의 눈이 간파하고 있었다.
“보여요.”
꿈틀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이 들린다.
내뿜어지려는 입김의 잔재가 보인다.
그리하여 앞으로 만들어질 저들의 틈까지도.
[그럼 가라!]황실의 검 위에 얹힌 전 제국헌병대장의 기술.
아주 잠시였지만 마치 자신들의 대장이 앞에 있는 것만 같은 그 모습에 헌병대의 기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흐으으으아!”
오귀스트의 길이 보여주는 약점들을 따라 블라드의 검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점에서 선으로, 마치 붓처럼 이어지는 유려한 일검.
제국헌병대의 기사들은 자신들을 스쳐 지나가는 은빛의 검을 보며 가슴 안에서부터 울리는 기묘한 울림을 느끼고 말았다.
웅-웅웅-웅-
블라드가 들고 있는 은빛의 검이 울고 있었다.
기사들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진은(眞銀)의 동전들과 함께.
오직 명예로만 살 수 있는 그 동전은 자신을 내려놓은 자들만이 지닐 수 있는 고귀한 금속이었으며 또한 하나의 검에서 비롯된 것들이기도 했다.
“설마!”
로드리고는 기사들을 지나쳐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검을 보며 크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스스로 울어대는 은빛의 검을 보며 오귀스트가 마지막으로 전한 쪽지의 내용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아우슈린. 소드마스터의 검.
뽑히다.
“이 검으로 나의 결백을 증명하겠다!”
오해가 만들어 낸 어둠을 소드마스터의 검술이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검과 함께 천천히 가슴에서 울리는 동전의 울림을 느끼며 로드리고는 깨달을 수 있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대장과 있던 드라굴리아의 어린 용은 살인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제야 다른 면에서 보이는 블라드의 모습은 용이 아닌 누군가의 의지를 이어받은 기사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