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0
바예지드 가문으로 (3)
겨울의 끝자락에서 봄이 다가오는 시점.
불어오는 훈훈한 바람에 겨울내 얼어있던 눈이 녹고 여태껏 잠들어 있던 것들이 빼꼼히 고개를 드는 시기.
“젠장.”
다시 말해 길은 진창이 되고 마차 바퀴는 툭하면 빠지는 그런 계절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뭐해?”
“······.”
말 위에서 고개를 까닥이는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터덜터덜 마차의 뒷바퀴 부분으로 걸어갔다.
자야르는 블라드의 몸 상태가 정상이 된 것을 확인한 후부터는 틈만 나면 대련이나 잔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것도 거칠게.
마치 지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귀족이 타는 마차라 무겁기도 엄청 무겁네.”
“그래도 이번에는 크게 안 빠졌어. 대장.”
“나를 언제까지 대장이라 부를 셈이야?”
“이름을 못 부르게 하니까 그렇지.”
몇몇 하인들과 함께 온몸에 진흙을 묻혀가며 마차 바퀴를 빼고 있었지만 고트는 그저 싱글벙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좋냐?”
“그럼 당연히 좋지.”
고트는 웃음 지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결국 고트의 판단은 맞았다.
블라드는 될 놈이었고 그런 녀석 옆에 있으면 뭐라도 먹을 것이 떨어지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너도 따라와라.’
바르나에 묵었던 마지막 밤에 블라드는 고트가 기대하고 고대하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지금 당장은 너에게 보상할 돈이 없기 때문이다. 빈털터리거든.’
‘영광입니다. 요제프 님!’
말을 타지 못하는 블라드를 주둔지로 시기적절하게 데려왔으며 사태의 해결을 위해 자야르까지 데려온 고트의 이야기를 들은 요제프는 그 또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해주겠노라 말했다.
그런 이유로 지금 고트는 스투르마로 향하는 행렬에 합류해있는 것이다.
“감히 올려다보기도 힘들 백작가, 그것도 북부의 실세라 말하는 바예지드 백작 가문에 가는 건데 당연히 좋지.”
고트는 요제프가 내주는 보상만을 바라고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기꾼이었으며 그만큼 머리가 돌아가는 인물이었다.
“거기서 내 쓸모를 내보이면 요제프 님이 나를 써주시지 않을까? 언제까지나 용병으로 살면서 불안한 삶을 이어갈 수는 없는 거잖아.”
“그냥 닥치고 밀면 안 되냐.”
“바예지드 백작 가문의 사용인! 이 정도만 해도 평민으로서는 출세했다 할 수 있지.”
“그만 닥치고 마차나 밀라니까. 줘 패버리기 전에 제발.”
블라드만큼이나 기회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고트였기에 힘겹게 마차를 밀고 있었어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만큼 위로 올라갈 기회를 얻기 힘든 것이 세상이었으니까.
아무리 실력이 있고 준비가 되어 있어도 운이라는 끈 한 자락이 모자라 주저앉고 마는 이들이 한 무더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블라드와 고트는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기회를 잡을 대가를 확실하게 치러냈기에 가능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날 밤 블라드는 죽음을 각오하고 하얀색의 세계를 불러냈으며.
고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야르를 데려오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었다.
모두가 지금을 위해서였다.
“굼벵이들아! 오늘 여기서 온종일 뻗댈 셈이냐!”
그렇기에 둘은 지금 자야르의 욕을 들어가며 진창에서 마차를 밀고 있는 것이다.
“크흐흐흐!”
‘미쳐버리겠네. 진짜.’
뒤에서 욕을 하며 재촉하는 자야르와 옆에서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고트를 보며 블라드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라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나도 알긴 하는데!’
목소리의 조언에도 블라드는 들끓는 화를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씨발.”
“너 지금 나한테 말한 거냐.”
“아뇨.”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나지막한 욕설에 자야르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만 블라드는 눈치를 보고서는 곧바로 옆에 있는 고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
“지금 웃음이 나와?”
블라드는 한참 피가 끓는 17살이었으며 평생을 뒷골목에서 난폭하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웃지 말고 밀라고. 난 더 얻어맞기 싫으니까.”
“밀고 있잖아······.”
아직 블라드는 기사가 되기에는 먼 소년일 뿐이었다.
아직은.
※※※※
바예지드 백작령.
3개의 도시와 12개의 마을을 포함하고 있는 바예지드 가문의 영지.
블라드가 태어난 도시인 쇼아라.
이번 몬스터 토벌을 주도한 도시인 바르나.
“이곳이 스투르마인가요?”
“그렇지. 나의 본가가 있는 곳이지.”
그리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곳이 바로 바예지드 백작령의 주도(主都)인 도시 스투르마였다.
“오.”
블라드는 새롭게 보는 도시의 전경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높고도 거대한 성벽이었다.
“진짜 크네.”
쇼아라도 성벽이 있긴 했지만, 이곳만큼 크고 높지는 않았다.
“음.”
블라드는 뒷골목 출신답게 자연스레 저 도시의 어느 곳을 뚫어야 기가 막힌 개구멍을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성벽이 저렇게 클만한 이유가 있지.”
블라드가 생각에 빠진 눈으로 스투르마의 성벽을 바라보고 있자 요제프는 옆에서 그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오해에서 시작된 이야기였지만 식견이 부족한 블라드에게는 모든 이야기가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저 성벽은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바예지드 가문의 굳건함을 보이기 위한 용도이기도 하지.”
바예지드 가문의 역사는 투쟁의 연속이라 할 만큼 치열한 것이었다.
때가 되면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과 야만인들.
그리고 거친 북부의 풍토답게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다른 영지와의 전쟁까지.
그 모든 것을 감내한 성벽의 모습이 저기에 있었다.
“바르나랑은 또 다른 모습이네요”
“그곳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도시지. 아버지가 의도한 것이기는 하지만.”
블라드도 나름 도시 출신이기는 했지만 여태껏 보아온 도시마다 가지고 있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온 어린 새는 무엇을 봐도 신기할 수밖에는 없었다.
“입 좀 다물지. 애송이.”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불러주십시오.”
“어림도 없지.”
“······.”
입을 헤 벌리고 스투르마를 바라보는 블라드를 보며 자야르는 비웃음을 날렸다.
“앞으로도 넌 그냥 애송이다.”
“안드레아 사제님이 들으면 슬퍼하실 겁니다.”
“너는 내 종자지 사제님의 부제가 아니잖아. 뭐라 부르든 내 맘이다.”
“······.”
자신이 가진 첫 번째 종자인 블라드에게 자야르가 쏟는 관심은 남다른 것이었다.
“바예지드 가문에 가서 애먼 짓이라도 하면 얻어맞을 줄 알아라.”
“어차피 매일 얻어맞는데요. 새삼스럽지도 않네요.”
자신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당돌한 종자를 보며 자야르는 미소를 지으며 안대를 어루만졌다.
‘기세 하나만큼은 쓸만한 녀석인 것은 확실하지.’
자신의 주군인 요제프는 언제나 쓸만한 기사가 모자란 것에 고통받고 있었고 눈앞의 애송이는 분명 그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조각 중 하나였다.
‘게다가 오러까지.’
비록 일인전승의 비밀이라 하며 상세한 것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요제프의 말에 의하면 분명 블라드는 일순간 오러를 내뿜었었다.
그 결과 앓아눕기는 했지만, 일단은 해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가서 혹독하게 굴려봐야겠군.’
오러를 쓸 수 있는가.
혹은 그 오러를 완벽하게 체득하여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가.
이것은 기사가 가지고 있는 재능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눈앞의 소년은 자신의 재능을 그리고 가능성을 훌륭하게 증명한 녀석이었다.
“가지.”
요제프의 말과 함께 일행은 스투르마의 성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련님이 오셨다!”
“길 열어!”
높고 견고한 성벽이었지만 요제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긴 행렬이 있었지만, 요제프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파도가 갈라지듯 길이 생겨나고 있었다.
“오오.”
고트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지르고 말았다.
평생을 기다리고 밀려나는 인생을 살았던 그에게 있어 지금과 같은 경험은 난생처음이었기에.
블라드 또한 눈앞의 광경을 보며 자신이 여태껏 살아왔던 곳과는 다른 곳에 발을 디디고 있음을 확인했다.
“스투마르에 무사히 귀환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요제프 님!”
“이렇게 든든히 성문을 지키는 바예지드의 병사들을 보니 안심이 되는군.”
“감사합니다!”
요제프의 관례적인 칭찬에도 성문 대장은 큰소리로 답하며 길을 열어주었다.
“전원 경례!”
요제프의 마차가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경비병들은 경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결한 바예지드 가문의 핏줄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었으며 이 도시를 지배하는 자에 대한 당연한 예식이었다.
그리고 그사이를 블라드 또한 지나가는 중이었다.
“멍청한 녀석! 당장 그거 안 집어넣을 테냐? 애초에 요제프 님의 존재 자체가 통행증이란 말이다.”
“······.”
말 위에서 자야르가 으르렁거리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꼭 해보고 싶은 일이었기에.
“넌 들어가서 보자.”
자야르가 뭐라 하건 말건 블라드는 당당히 걷고 있었다.
요제프를 향해 경례하는 경비병들 앞에 자그마한 나뭇조각을 들이대면서.
그 나뭇조각은 사제 안드레아가 만들어 주었으며 블라드의 존재를 상징하는 신분패였다.
“검문 안 해요?”
이제는 개구멍을 드나들지 않아도 되는.
그리고 어디서나 당당해도 되는 소년의 작은 반항이었다.
※※※※
자야르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으며 블라드와 고트는 바예지드 가문의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허······.”
“대단하긴 대단하네.”
스투르마의 가장 높은 곳.
도시의 모든 곳을 내려다보는 곳에 세워져 있던 회색빛의 거대한 저택.
두 명의 평민은 상상 속에서도 보지 못한 진짜 귀족의 저택을 걸어가며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지금부터 너희는 요제프 님의 손님이다. 멍청한 짓이라도 했다가는 요제프 님의 명예에 누가 된다.”
“네.”
“그냥 눈도 내리깔고 걸어라. 촌놈처럼 두리번대지 말고.”
요제프만 걸린 일이라면 진심이 되는 자야르의 경고를 들으며 블라드는 벌어져 있던 입도 닫고 고개도 숙인 채 얌전히 걸어갔다.
‘융단인가? 비단이야?’
물론 바닥만 걷고 있다 할지라도 볼거리는 충분했다.
하얀색 대리석 위에 깔린 푹신한 융단을 밟는 것은 감히 뒷골목의 소년이 꿈도 꾸지 못한 호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블라드는 감히 자신이 이런 비싸 보이는 것들을 밟고 다녀도 되는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자야르는 두 명의 촌놈들에게 응접실을 내주며 으르렁거렸다.
지금부터 요제프는 이 저택의 주인이자 아버지인 페테르 바예지드에게 자신의 무사 귀환과 함께 주둔지에서 있었던 저주에 대해 보고를 해야만 했다.
“시녀들이 다과를 내줄 거다. 그거······아니 그냥 아무것도 먹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괜히 추잡하게 먹다가는 안 좋은 소문 퍼질라.”
“그래도 조금은······.”
“닥쳐.”
그리고 그 보고의 순간에 블라드와 고트가 있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감히 바예지드 백작을 마주할 자격 따위는 없었으며 오직 요제프의 보증하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
“······.”
으름장을 놓은 자야르가 사라졌지만 블라드와 고트는 쉽게 긴장을 풀지 못했다.
모든 것이 너무 깨끗했고 커다랬으며 무엇보다 조용했다.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이자 풍경이었다.
그렇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의 옆에 있는 하얀색의 커튼이 펄럭이고 있다는 것을.
“처음 보는 녀석들이군. 너희는 누구냐?”
“······!”
그리고 이 응접실 안에 자신들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살짝 열려 있는 창문 아래, 하얗게 널려 있는 커튼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사내가 있었다.
“여기서 몰래 농땡이 좀 치려고 했더니만.”
어깨를 으쓱거리며 두 명에게 다가오는 남자.
강인한 기세.
당당한 자세.
그리고 숨길 수 없는 무거운 존재감을 가진 남자였다.
마치 동부 정글에서 산다는 흑표범이 사람이 된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저, 저는 고트라는 놈인데 이번에 요제, 요제프 님이 저한테······.”
“······.”
그리고 블라드는 눈앞의 남자를 본 순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신이 보아왔던 또 다른 검은 머리의 사내와 매우 닮은 모습이었기에.
“그래. 너는 고트고.”
검은 머리의 사내가 블라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가 가진 날카로운 눈빛은 기세만으로도 사람을 벨 수 있을 것만 같았으나 블라드는 이를 악물고는 남자의 기세에 대항했다.
뒷골목에서 살면서 터득한 것 중 하나는 눈빛을 피하면 얕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얕보인 자는 사정 없이 뜯어먹히는 곳이 바로 쇼아라의 뒷골목이었다.
누군가의 기세에 대항하는 것은 블라드에게 있어 생존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저는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합니다.”
“······그래? 처음 듣는 이름이군.”
검은 머리의 사내는 감히 자신의 앞에서도 당당히 대답하는 금발 소년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눈빛이 살아있고 자신의 기세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는다.
‘요제프가 어디서 쓸만한 녀석을 구해왔나 보군.’
천성이 호쾌한 루트거는 이런 당당한 자세를 지닌 사내를 좋아했다.
“땅콩 줄까?”
그리고 루트거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자에게는 무엇이든지 넉넉한 사람이었다.
루트거는 주머니에서 땅콩 한 주먹을 꺼내어 블라드에게 건넸다.
그러나.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응?”
블라드는 처음 보는 낯선 환경에 긴장하고 있었고 최선을 다해 루트거의 기세에 대항하는 중이었다.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으며 머리는 원활히 돌아가지 않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자신도 모르게 기계적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
감히 자신의 호의를 거절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루트거도 블라드의 반응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이거 맛있는 건데······.”
“······.”
고개를 숙이고 있던 고트는 지금의 사태가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았지만 감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그가 바예지드 가문에 와서 처음으로 한 일은.
바로 백작의 첫째 아들인 루트거의 호의 어린 땅콩을 거절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