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01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2)
이른 아침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떠오르는 아침 해에 지평선에 가까운 하늘은 노랗게 물들었으나 그 위에 있는 하늘은 여전히 어둠을 머금고 있는 그런 아침이었다.
드드득-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요제프가 펜을 끄적여대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손바닥만 한 수첩에는 깨알같이 적어놓은 글자들이 가득했고 방금 스쳐 지나간 깃털펜은 그곳에 적혀있던 이름 하나를 그어 내려간 참이었다.
“······몰다비르 남작은 되었고.”
요제프의 펜이 지나간 자리에는 굵고도 검은 세로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가로로 그어버린 그 선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요제프의 수첩 안에는 이리저리 그어진 귀족들의 이름이 한가득이었다.
“조금은 더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어쩔 수 없지 않았습니까.”
아쉽다는 듯 혀를 쯧 하고 차는 요제프를 보며 마주 앉아 있던 자야르가 입을 열었다.
“블라드 녀석이 키시뇨르의 시장을 거의 반파시키다시피 했으니까요. 몰다비르 남작이 학을 떼며 내쫓을 만도 했습니다.”
저기 좀 보라는 듯 으쓱여댄 자야르의 시선 끝에는 조용히 마차 뒤를 따라오고 있는 블라드가 있었다.
성격 사나운 검은 말 위에 타고 있던 블라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요제프의 시선에 그저 어색하게 웃어댈 뿐이었다.
“하긴 내가 남작이었어도 내쫓을 만했지.”
그러나 요제프의 검은 눈동자는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깃발을 든 채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기사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제국헌병대라.”
검게 물든 깃발 안에 새겨진 확연한 하얀색의 번개.
예전보다 위세는 줄었다 하지만 황도의 치안을 책임지는 제국헌병대는 여전히 대륙의 기사들이 선망하는 기사대 중 하나였다.
“이제는 꽤 근사한 깃발을 뒤에 달고 다니는구나. 블라드.”
저 뒤에서부터 터오는 동을 따라 따라오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는 싱긋 웃어 보였다.
온통 우울한 여행길이었지만 블라드가 가져오는 새로운 바람들이 조금은 요제프의 숨통을 트게 해주는 것 같았다.
※※※※
“바예지드 가문은 이미 루트거로 후계자가 정해졌다고 하던데.”
“······.”
“하긴 네가 요제프 바예지드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는 것은 이미 조사해둔 뒤였지.”
묵묵히 걷고 있던 등 뒤에서부터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도시 키시뇨르에서부터 지금껏 블라드를 쫓아온 사내의 것이었다.
“······도대체 왜 계속 따라오는 겁니까?”
저 앞에서 마차의 창이 탁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블라드는 곧장 뒤를 돌아보며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빨리 가서 오귀스트 님을 죽인 진범이나 찾으라니까요.”
다른 기사들이라면 안면을 트는 것만으로 영광스러워 할 제국헌병대였으나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사내들일 뿐이었다.
자신을 범인으로 오해했을 뿐만 아니라 키시뇨르에서 쫓겨나게 한 장본인들이었으니까.
“지금 찾고 있잖나.”
“나 아니라니까.”
“나도 그건 아는데, 수사 절차가 그러하네.”
처음 보았을 때는 분노만이 가득했던 로드리고였으나 지금은 온통 능글맞은 수사관이 되어있었다.
“아무래도 자네가 오귀스트 님과 가장 마지막까지 있던 목격자니까 말이지. 그런 자네에게 사정 청취 정도는 듣고 가야 면목이 서지 않겠나.”
“하.”
로드리고의 대답을 들은 블라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짧은 탄식을 내쉬고 말았다.
로드리고가 하는 말에는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으나 정작 그가 보이는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한 오해 하지 마십시오. 이거 소드마스터의 검이 아니라니까요. 그냥 내 검입니다.”
웅웅-
블라드는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한 기사들에게 슬쩍 검을 보여주며 진실을 토로했으나 정작 밖으로 나온 용살검은 주인의 생각과는 다르게 눈치 없이 울어댈 뿐이었다.
“오오!”
“과연 은색의 기사!”
같은 금속에서 비롯되었기에 서로가 반가워하는 존재들.
헌병대의 기사들은 공명하는 금속들의 울림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동전들을 꺼내 들고는 감격스럽다는 듯 감탄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진짜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 부하들이 그렇게 생각할만하네. 명예로 산 동전은 오직 같은 진은에게만 반응하니까.”
“그러니까 아까부터 계속 말했잖습니까. 그냥 당신들이 들고 있는 동전이 녹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
진은의 동전은 오직 자신을 내려놓은 기사들에게만 주어지는 명예의 값이었다.
은퇴한 뒤 후진 양성을 위해 대륙을 떠돌았던 라문드나, 맹약의 수호자인 강철공, 혹은 제국헌병대에 입단하기 위해 이름 뒤에 있던 성(姓)을 내려놓은 지금의 기사들 정도가 아니면 받을 수 없는 귀하디 귀한 동전이었다.
“아니, 이 동전은 녹을 수가 없는 것이네. 블라드 경.”
그렇게나 희귀한 동전이었기에 블라드도 동전에 대한 내막까지는 잘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인지도.
“진은(眞銀)은 변하지 않는 금속이야. 세월에 의해 녹슬지도 않고 강압에 의해 부러지지도 않는 것이지.”
“······.”
로드리고는 아니라 말하며 분통을 터트려대는 블라드를 향해 웃으며 조곤조곤 대답했다.
“물론 열기에 의해 녹지도 않네. 그 옛날 있었다던 드워프들의 마지막 고로조차도 그저 진은을 설득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지.”
“······그런데 이거 대장장이가 날까지 세운 겁니다만.”
“그럼 그 대장장이가 검을 잘 설득한 모양이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할 일을.
진정한 은색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자신이 취해야 할 모습을 아는 고귀한 금속이었다.
“어쨌거나 이 검은 건국왕의 검이 아니라 진짜 제 검입니다.”
“그럼 그렇다고 하자고.”
어느새 말을 몰고 옆으로 다가온 로드리고는 지금도 웅웅거리는 용살검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자네가 진은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틀림없으니까 말이야.”
이어져야 하는 것은 형태가 아닌 이름이어야 할 것이다.
어디서부터 이어져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원형에 가까운 황실의 검.
그리고 진은의 가호를 받은 은색의 검까지.
블라드는 한사코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었으나 로드리고는 분명 그분의 의지가 이어졌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혹시 엘프들의 숲에 그분의 검이 있기는 했었나? 그곳에서 검을 뽑은 사람이 있다고 오귀스트 경께서 보고 한 적이 있었거든.”
“······그건 진짜 모르겠는데요.”
블라드는 아까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로드리고의 눈동자가 기이한 열망에 휩싸여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진짜 은색의 기사를 뽑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면 눈동자에 머금은 그 열기가 더해지리라는 것도.
“뭐, 시간도 많으니 천천히 조사해보자고. 이제 다음 도시도 다 와 가니.”
“저기까지 따라올 생각이십니까?”
가장 앞서 있는 요제프의 마차 앞으로 높게 솟아오른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앞서 지나왔던 도시 키시뇨르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도시였다.
“저곳까지는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 좋을 거야. 도시 발레타는 우리에게는 보급기지와도 같은 곳이거든.”
도시 발레타.
중부에서도 가장 단단한 성벽을 가지고 있는 도시.
그리고 아른슈타인 백작령의 주도이기도 한 도시.
“발레타의 주인인 아른슈타인 백작께서는 궁정공과도 막역한 사이시니까 말이야.”
키시뇨르에서 쫓겨난 대가를 발레타에서 치러주겠다고 말하는 로드리고였으나 블라드는 그의 말에 딱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아른슈타인.”
점점 가까워지는 도시 발레타는 북부의 스투르마만큼이나 커다란 성벽으로 빈틈없이 둘러싸여 있었다.
블라드는 파고들 곳 하나 없이 단단해 보이는 발레타의 모습이 마치 예전에 마주했던 어떤 기사와 똑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보름달이 환히 뜬 밤, 홀로 야음을 틈타 움직이는 마차가 있었다.
목 없는 기사들이 호위하는 그 마차는 밤하늘에 비치는 달빛조차 반갑지 않았는지 새까만 그림자만을 밟으며 움직이는 중이었다.
“역시 뛰질 않으시네요.”
시작은 푸르렀으나 끝은 검어진 머리를 지닌 여인은 앞에 앉아 있는 프라우센의 가슴팍을 손을 대고는 빙긋이 웃어대었다.
“용을 마주할 때는 그렇게나 격렬하게 뛰시더니.”
“······.”
여인의 미소는 누구라도 안겨들고 싶을 만큼 자애로운 것이었으나 온통 색이 빠져 버린 프라우센은 그저 시체처럼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는 그 어떤 미소조차도 프라우센의 심장을 뛰게 할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네가 말하던 준비는 잘 되고 있나? 뿌리내릴 땅을 찾겠다던.”
“부덕한 저에게 관심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프라우센은 여인이 붙인 호칭에 잠시 눈썹을 꿈틀대었으나 곧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꽤 쓸만한 인재도 얻었구요.”
타락한 성녀 라마슈트는 프라우센의 관심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대었으나 정작 그녀의 손은 그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갈라대고 있었다.
죽음에서 돌아온 황제가 뜻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조각에 새겨넣은 그녀의 술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있는 녀석이냐?”
“믿을 수 있는지는 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유려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검게 굳어버린 핏자국 위로 붉은색 조각이 뛰기 시작했다.
가장 완벽한 용에게서 비롯되었으나 이제는 프라우센의 심장이 된 가장 완벽한 조각이 만드는 박동이었다.
“아무리 영민한 사람이라 해도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 할 것임을 믿습니다.”
“······.”
조금씩 뛰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에 프라우센의 초점이 점차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가장 먼저 바라본 곳은 검은 여인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보석함이었다.
“계속 이렇게 한 발자국씩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저의 아이들과 함께할 땅을 찾을 수 있겠지요.”
죽음에서 도망친 여인은 미쳐있었고 죽음에서 돌아온 황제는 지쳐있었다.
그러나 둘이 마주하고 있는 마차 안에는 그저 고요함만이 감돌 뿐이었다.
“모시암에서와는 달리 이번에는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완수하기를 빈다.”
프라우센이 보고 있던 여인의 보석함 안에는 이제는 차갑게 식어버린 나무들의 눈물방울이 가득했다.
그것들은 프라우센이 아주 예전, 뛰고 있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을 시절에 본인이 직접 옮겨심었었던 어머니 세계수의 파편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야 내가 하고자 하는 일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테니.”
어른들이 만드는 고통과 번민이 없는, 그리하여 아이들이 웃을 수 있는 세계를 위해서.
가장 완벽한 용에 의해 그 어떤 가능성도 짓밟히지 않는 세계를 위해서.
“······.”
그러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프라우센은 울고 있는 보석함에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젊은 기사 키하노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으나 늙어버린 황제 프라우센은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우고 만 사람이었다.
마차가 달리고 있었다.
신이 만든 세계를 밟지 않는 마차는 지금도 중부의 어느 땅을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갈 뿐이었다.
프라우센은 이제는 울지 않는 은색의 기사를 쓰다듬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