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02
고요한 밤, 거룩한 말 (1)
모두가 잠들어 있을 깊은 밤이었지만 평원에서 울리는 말발굽 소리만은 요란했다.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 아래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말 한 마리와 그 뒤를 따르는 수십 기의 기병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근사한 한 폭의 그림 같았으나 가까이 다가간다면 사내들의 다급한 고함이 가득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호를 보내라! 진로를 틀어막아야 한다!”
그림 같은 장면 한가운데서 커다란 방패를 등에 진 채 지시를 내리는 기사가 있었다.
굳건해 보이는 사각 턱이 인상적인 남자는 들고 있던 횃불조차 내던진 채 앞서 있는 사내를 맹렬히 쫓는 중이었다.
“지금!”
남자의 지시에 따라 등 뒤에서부터 불화살이 올라왔다.
환한 보름달 아래서도 제 존재를 드러낸 붉은 화살은 지금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기사들을 향해 무언의 신호를 보내는 중이었다.
“지금이다! 돌격!”
불화살이 보낸 신호에 따라 언덕 끄트머리에서부터 숨어 있던 기병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급박한 상황이었음에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정련된 기세는 과연 아른슈타인의 정예병들다운 모습이었다.
-······.
빈틈 하나 없이 달려오는 기병들의 모습은 마치 언덕에서부터 내려오는 파도와도 같아 보였다.
그러나 홀로 앞서 있던 사내는 자신을 향해 새까맣게 달려오는 기병들을 보았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가자.
그저 타고 있는 말의 목을 한번 쓰다듬어주었을 뿐.
기수의 손길이 닿자 말의 눈동자 안에서부터 푸른색 귀화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빠릅니다!”
“빌어먹을! 방향이라도 틀게 해라!”
기습은 훌륭했으나 상대가 너무 빨랐다.
훌륭한 군마들을 대동한 아른슈타인의 기병대였으나 정작 현실은 한 마리의 말조차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
애써 언덕에서 달려온 기병대장은 그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았다.
가지고 있는 상식을 가뿐히 뛰어넘어버리고 마는 가속.
마치 땅을 밟고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그 모습에 경험 많은 기병대장조차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진로라도!”
따라잡지 못한다면 어떻게든 몰아보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쏴라!”
검 끝이 닿지 않을 것임을 파악한 기병대장은 서둘러 화살을 쏘라며 명령했지만, 그조차도 이미 늦은 뒤였다.
삭! 솨솨솩!
구름에 닿을 듯 높게 올라간 화살들이었으나 정작 꿰뚫은 것은 정체 모를 남자가 남기고 간 그림자였을 뿐이었다.
히히히이잉-
기병들의 탄식을 뒤로 한 채 무심히 사라지고 마는 정체 모를 남자.
더는 따라잡을 수 없기에 멈춰서고만 파블로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말 울음소리를 들으며 분하다는 듯 입술을 짓이겨 대었다.
※※※※
“스투르마의 성벽보다 큰 것 같네요.”
“조금은.”
블라드는 옆에서 들려오는 니벨룬의 말에 손바닥을 눈썹에 대고는 발레타의 성문을 올려다보았다.
가까워질수록 점점 높아져만 가는 발레타의 성벽.
북부에서는 처음 보는 회백색 성벽의 모습에 니벨룬과 블라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양이 좀 특이하네.’
발레타의 성벽은 견고해 보일 뿐만 아니라 보이는 모양까지 세련되고 유려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하나하나 쌓아 올린 벽돌들이 기묘한 균형감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벽돌을 올린 다음에 석회로 이음새를 이었네요. 그래서 이런 멋진 모양이 된 것 같습니다.”
블라드는 옆에서 들려오는 니벨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의 말대로 발레타의 성벽은 커다란 돌들을 얹은 스투르마의 성벽과는 다르게 온통 자그마한 벽돌로 쌓아진 것이었다.
그에 대한 내구도가 어떻게 차이 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성벽의 형태만큼은 원하는 모양으로 쉽게 잡았을 것이다.
“정지! 앞에 있는 일행은 신분을 밝히시오!”
그러나 멋진 성벽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 앞에 서 있는 경비병들의 모습에는 새파란 날이 서 있었다.
한참 어수선한 중부의 분위기 때문인지 낯선 이들을 대하는 경비병들의 태도는 들고 있는 창만큼이나 날카로울 뿐이었다.
“나는 제국헌병대의 로드리고다.”
서슬 퍼런 그 모습을 본 로드리고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바예지드라면 모르겠으나 중부에서 제국헌병대가 가지는 위치는 특별한 것.
이미 로드리고의 얼굴을 알고 있던 경비병들이 당황한 듯 서둘러 내리고 있던 창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어서 오십시오. 로드리고 님!”
“수고가 많군. 그나저나 뒤에 있는 사람들까지 우리가 보증하고 싶은데. 정확히······.”
뒤를 돌아본 로드리고는 블라드와 니벨룬까지만 보증할 생각이었으나 그의 의도를 눈치를 챈 블라드가 어느새 요제프의 마차 옆에 바짝 붙어서 있었다.
바예지드라는 이름이 어디까지 통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중부인 이곳에서만큼은 제국헌병대의 이름을 빌리는 것이 나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기 마차까지.”
“알겠습니다. 로드리고 님.”
경비대장은 예상외로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들이닥치자 곤혹스러워했으나 그렇다 할지라도 제국헌병대의 위신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배려도 할 줄 알고 이제 많이 컸군.”“그냥 여기 그늘이 있어서 서 있는 것뿐이에요.”
블라드는 마차 안에서 실실 웃고 있는 자야르를 보며 턱을 긁어대었다.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는 그 행동은 멋쩍음을 가리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요제프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헌병 대원분들은 괜찮겠으나 손님들께서는 부디 밤에는 나다니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일행의 진입은 예상보다 껄끄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앞서가는 제국헌병대가 성문을 빠져나가자 경비대장이 은근슬쩍 일행의 앞을 막아 세웠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혹시 이 또한 북부인에 대한 차별인가?
이미 한번 그에 대한 경험을 겪어본 적 있던 블라드가 험악한 표정을 지어대자 경비대장은 그것이 아니라는 듯 서둘러 입을 열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영지 곳곳에서 실종 사건이 빈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로 오해 사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실종 사건?”
이 단단해 보이는 도시에 어울리지 않게 실종 사건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블라드는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자세한 사정은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북부에서는 존경받는 바예지드였으나 이곳 중부에서는 그저 이방인이었을 뿐.
게다가 북부 연합으로 인해 구도가 더욱 복잡해진 지금에는 아무래도 영지의 내밀한 사정까지 듣기에는 곤란한 감이 있을 터였다.
“들어가시죠. 발레타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멀리서 본 모습은 커다랗고 가까이서 본 모습은 유려한 도시 발레타.
그러나 성문을 넘어서 다가간 그곳에는 어째서인지 꺼림칙한 침묵만이 가득해 보였다.
※※※※
“발레타에 온 것을 환영하네. 바예지드의 요제프.”
오래된 책들의 냄새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집무실이라기에는 차라리 서재라 해야 할 공간에서 일행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그리고 쇼아라의 블라드.”
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라기보다는 차라리 학자 같아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유약해 보이지 않는 것은 내려쓴 안경 뒤로 보이는 형형한 눈빛 때문일 것이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군. 제대로 블라드 아우레오 경이라 불러줬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백작님. 부디 편한 대로 부르십시오.”
“자네도 알다시피 아무래도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해진 모양이야.”
블라드를 바라본 아른슈타인 백작이 반갑다는 듯 씩 웃어대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으나 아른슈타인 백작과 블라드는 이미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이름은 기사 파블로가 피워낸 가능성이었으니 그를 보고 있는 백작의 눈빛이 충분히 기꺼울 만도 한 것이었다.
“내 기사의 명예는 곧 나의 명예일세. 그 명예의 증거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반갑군.”
백작의 관심은 오히려 앞에 있는 요제프보다도 블라드에게 더욱 쏠려 있었다.
북부접경지대에 있을 영주들이면 몰라도 중부의 맹주 아른슈타인 백작 정도라면 바예지드의 눈치 따위는 전혀 볼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기에.
“자네들의 어깨 위로 북부의 찬 바람이 느껴지는 것만 같군. 그래 이 먼 곳까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늙었음에도 반짝이는 그의 눈에는 이미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의 눈을 본 블라드는 아무래도 백작과 니벨룬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작님. 제가 백작님을 찾아뵙게 된 이유는······.”
가주 경쟁에서 탈락했기에 지금껏 비빌 언덕을 찾고 있던 요제프.
외가인 오스카르 가문의 이름까지 내세우며 이목을 집중시키려 했던 요제프였으나 이미 그를 바라보는 백작의 시선은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불쾌한 시선이라기보다는 흥미가 식었다는 그런 눈빛이었다.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여지를 남기는 말같아 보였으나 귀족의 화법으로 보자면 거부의 의사 표현과도 같은 것이었다.
“자네도 같은 뜻으로 나를 찾아왔는가?”
요제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백작의 시선에 딱히 실망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는 블라드를 보며 어서 이야기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저는 용들의 죽음을 따라왔습니다. 백작님.”
블라드에게 있어서 귀족을 대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도 아른슈타인 백작이나 되는 거물 앞에서라면 더더욱.
그러나 블라드는 바로 옆에 있는 요제프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전처럼 큰 부담이 느껴지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죽음과 함께 하는 사특한 존재들까지도요.”
“······오호.”
블라드는 백작이 원하는 대로,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흥미가 동할만한 단어들만을 선택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맞았다는 듯 식어 있던 백작의 눈동자가 다시금 반짝이기 시작했다.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었는데 꽤 재미있는 소식을 들고 왔구만.”
멀리서 온 손님이 반가운 것은 지금처럼 쉽게 접할 수 없는 신선한 소식을 들고 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사특한 존재를 따라왔다라······.”
그리고 손님이 들고 온 그 소식이 여태껏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일과 연결까지 되어 있다면 주인으로서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래. 이따 저녁이나 들면서 같이 이야기해보지.”
블라드는 잘 몰랐겠으나 귀족들의 세계에서 함께 저녁을 먹자고 권유하는 것은 주인이 손님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인사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말일세.”
“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하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
그리고 손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말에 숨겨진 의미는 주인이 그에게 따로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북부의 말들은 다들 훌륭하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혹시 자네가 가져온 말들도 그러한가?”
블라드는 뜬금없는 백작의 물음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말하는 백작에게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겠으나 듣는 블라드에게는 상당히 맥락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말 말씀이십니까.”
“그래. 말 말일세.”
블라드를 바라보는 백작의 안경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지금 자네들이 가져온 말들이 어디에 내세워도 될 만큼 빠르냐고 묻고 있는 걸세.”
자신의 기사인 파블로가 피워낸 명예로운 이름 쇼아라의 블라드.
백작은 반가운 만큼이나 유익한 소식을 들고 온 북부의 기사가 이번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까지 되기를 바라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