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04
머금은 차의 향이 썼다 (1)
푸른 달이 뜬 평원 위로 말 하나가 고꾸라지고 있었다.
힘차게 그어지는 은색의 실선과 함께.
이제야 맞닿은 두 개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서로를 스쳐 지나갔고 뒤처진 자에게 남은 것은 차디찬 지면으로의 추락일 뿐이었다.
쿠우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지면 위에 있던 하얀 눈송이들이 다시금 하늘 위로 높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뒤에서 달리고 있던 아른슈타인의 기사들에게는 새하얀 눈의 분수처럼 보이는 그런 장면이었다.
“난 너희들이 싫어.”
-······!
한 마리의 유령마가 달리고 있던 자리에는 어느새 그 자리를 꿰찬 검은 말이 달리고 있었다.
높게 세워진 뿔에는 시린 겨울의 색이 가득한 그런 말이었다.
“없는 네놈들의 목을 다시 잘라내고 싶을 만큼.”
맞닿은 세계는 선택해야만 한다.
같이 할 것인지 아니면 서로의 세계를 짓밟을지를.
그리고 블라드는 이미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할지 결정해놓은 상태였다.
-이 건방진 놈!
-어린놈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구나!
블라드의 결심을 파악한 목 없는 기사들이 서둘러 검을 뻗어내었으나 이미 블라드는 그곳에 없었다.
-아니······.
그곳에 있었던 것은 그저 검은 말이 남기고 간 그림자였을 뿐.
노련한 기사들조차도 속이고 마는 누아르의 움직임을 타고 어느새 그 자리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히이이잉-!
방금까지만 해도 오른쪽으로 쏠려 있던 무게 중심이었으나 검은 말의 그림자는 어느새 왼쪽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그 현란한 움직임에 뻗어낸 검 끝들이 갈 곳을 잃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디 있나!”
-크악!
은색의 선이 하나씩 그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달리던 말들이 휘청이며 하얀색 눈의 분수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여태껏 밟지 않으려 노력했던 땅이었으나 블라드의 검 끝에는 자비가 없었고 실로 오랜만에 바닥에 누운 목 없는 기사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어디로 데려갔어!”
하나씩 쓰러져 가는 기사들을 짓밟으며 누아르가 점차 가속하기 시작했다.
누아르에게 흐르는 일각수의 피는 그 어떤 존재도 자신의 앞에서 달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피였다.
그 존재가 죽음에서 달아난 것들이라 할지라도.
-네 이놈!
하나를 베고 하나를 짓밟고 또 하나를 부수며 올라왔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따라잡은 목 없는 기사를 향해 누아르가 거칠게 어깨를 들이박기 시작했다.
다른 말들이라면 옆에 붙어있기도 싫어한 불길한 유령마였으나 초원의 아들인 누아르에게는 그런 것들은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쿠웅-!
“······하긴 원래 사람을 찾으려면 아무나 쥐어 패보는 게 정석이었지.”
-뭐?
사내에게 달라붙은 블라드의 손에는 어느새 꽉 잡힌 고삐가 붙들려 있었다.
다만 그 고삐는 누아르의 것이 아니라 목 없는 기사가 붙잡고 있어야 할 낡은 고삐였다.
“그러니까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해 볼까!”
-······!
콰직-!
순간, 갑옷을 부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목 없는 기사가 크게 휘청여대기 시작했다.
다만 그 휘청임은 몸을 꿰뚫은 검 때문이 아닌 잔뜩 무게를 실어버린 블라드의 몸짓에 따라 흔들리는 휘청임이었다.
-크으윽!
거침없이 유령마로 뛰어오른 블라드는 목 없는 사내를 붙잡고는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여전히 용살검을 밀어 넣은 채로.
새까만 갑옷을 꿰뚫은 은색의 검이 오늘따라 더욱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았다.
“으아아아아!”
그 무엇보다 빠른 말 위에서 굴러떨어지고 마는 두 명의 기사.
죽어 있는 자조차도 비명을 내지를 만큼 아찔한 부유감 속이었지만 다만 맥없이 떨어지고 마는 목 없는 기사와는 다르게 블라드에게는 믿고 의지할 만한 단단한 갑옷이 있었다.
쿵! 쿠궁! 쿵!
엘프가 만들어주고 드워프가 제련해 준 갑옷.
비록 요란히 구르고 있었으나 함께 한 세계들과 함께 굴러대는 겨울의 평원은 블라드에게만은 조금은 부드러운 면을 내어주는 것만 같았다.
“······이런 세상에.”
한참 뒤따라오던 로드리고와 아른슈타인의 기사들 또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마치 산사태라도 일어난 듯 요란히 굴러대는 두 명의 기사 사이로 비치는 은색의 빛.
비록 엉망진창인 모습이었으나 여전히 빛나는 그 반짝임을 본 로드리고는 자신이 제대로 된 사람을 찾아왔다 확신할 수 있었다.
※※※※
“수고했네. 블라드 아우레오 경.”
바깥 날씨는 차가웠지만, 등 뒤로 와닿는 벽난로의 열기만큼은 만족할 만큼 따뜻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눈밭을 구르던 블라드에게는 꼭 필요한 온기이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담요를 잔뜩 두르고 있던 블라드는 조용히 피어오르는 찻잔의 김을 보고는 코를 훌쩍였다.
중부의 맹주인 아른슈타인 백작이 직접 내어준 차였으나 정작 그 차를 내려다보는 블라드의 표정에는 조금은 실망의 기색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이들은 구출했습니까?”
“그곳에 있던 아이들은.”
“······그렇군요.”
미지근한 차보다는 뜨거운 술이 필요한 밤일 텐데.
그렇지만 백작의 호의를 거절할 생각이 없었던 블라드는 얌전히 찻물을 넘기며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수상한 일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나 큰 거물이 뒤에 있을 줄은 몰랐군.”
찻잔을 들이켜는 백작의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꾸라뜨린 목 없는 기사들은 많았으나 정작 남아있던 자는 블라드의 검에 꿰뚫려 있던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의 사내들은 예전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처럼 이미 검은 원 속으로 빠져들어 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참으로 신기한 검이로군. 내 마법사도 자네의 검이 이런 현상을 일으켰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네.”
“그렇습니까.”
아른슈타인 백작은 블라드가 들고 있는 은색의 검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로드리고가 말해주지는 않았으나 만약 블라드의 검이 은색의 기사라 추정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그의 태도 또한 지금같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도시 모시암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백작님.”
머나먼 북부의 도시에서 일어난 비극은 중부에서는 그저 하나의 풍문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른슈타인 백작은 이제는 흘러가는 그 풍문조차도 다급히 구걸해봐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뭔지는 몰라도 대단한 무언가가 내려왔나 보군.”
골치 아프다는 듯 턱을 쓰다듬는 백작의 뒤로 파블로가 조용히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사태가 사태이기에 차마 반갑다는 티는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파블로는 들고 있던 방패를 삽으로 삼아 눈밭에 파묻혀 있던 블라드를 직접 끄집어낸 사람이기도 했다.
“도시 하나를 잡아먹은 사특한 존재라······.”
제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일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언제 어느 때나 사특한 존재들은 어둠 속에 숨어 암약하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사태를 해결해야 했던 사람들은 땅의 주인인 황제와 영주들이었다.
“······골치 아픈 시기에 찾아들어 왔군. 하필이면 지금 같은 시기에 말이야.”
그러나 지금은 예전과는 달리 그 어느 때보다도 권력의 근간이 흔들리는 시기.
영지를 접하고 있는 다른 영주들의 동향뿐만 아니라 이제는 정체 모를 사특한 존재까지 신경 써야 하는 아른슈타인 백작으로서는 또 다른 부담이 가중되고 만 셈이었다.
“교황청의 사제들이라도 불러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들이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건 또 곤란한 일일세.”
블라드는 자신과는 껄끄러운 교황청이라 할지라도 사태의 해결을 위해서는 힘을 빌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윽고 들려오는 백작의 답변은 블라드가 모르고 있던 또다른 복잡한 사정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입니까?”
“그거야 내가 궁정공을 따르는 파벌이기 때문이지.”
궁정공이냐 용혈공이냐.
지금 중부를 들썩이고 있는 수많은 영지전들은 결국 궁정공과 용혈공이 치르는 대리전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블라드가 마주하고 있는 아른슈타인 백작은 궁정공을 따르는 파벌에 속해있는 자이기도 했으니 용혈공에게 협조하고 있는 교황청은 아마 제대로 된 지원을 내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북부정교회에게라도.”
“그건 더더욱 안 될 말이지.”
찻잔을 내려놓은 백작의 눈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귀족의 푸른 피가 비치는 백작의 본모습이었다.
“독립을 선언한 북부 연합에게 손을 벌리는 것은 다른 영주들에게 명분을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네. 승냥이 떼들에게 내 몸을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격이지.”
“······.”
블라드는 들려오는 백작의 말에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침묵할 뿐이었다.
뒤에서는 벽난로의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앞에서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의 김이 가득했으나 블라드는 어째서인지 이 방이 더욱 차가워지는 것만 같았다.
“이해합니다. 백작님.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분이시니 행동 또한 진중하셔야겠죠.”
“알아주니 고맙군.”
사특한 존재가 날뛰고 있었으나 권력의 흐름상 손을 내어주지 않는 교황청.
그와 마찬가지로 북부 정교회에 손을 내밀지도 않을 생각인 아른슈타인 백작.
따로 떼어보면 각자의 말은 맞겠으나 결국 그 사이에서 고통받는 것은 힘없는 누군가들일 뿐일 것이다.
“차가 쓰네요.”
온통 쓴맛이었다.
블라드는 애써 기어 올라온 저 위의 세계도 결국은 어딘가의 뒷골목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저 쓴 침만을 삼킬 뿐이었다.
※※※※
떠오르는 동 위로 두 명의 노인이 고개를 숙인 채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이 엉망이라 마치 거지 같아 보이는 노인들이었으나 그중에서도 껑충한 키를 가진 노인의 눈에는 여전히 총명한 빛이 담겨 있었다.
“여기가······.”
“발레타요. 당신이 원하던.”
밝아지는 지평선을 따라 천천히 열리는 성문 앞으로 여태껏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과연 중부에서도 잘 알려진 대도시답게 오가는 여행자들과 행상인들이 가득해 보였다.
“여기까지 이끌어줘서 고맙군. 자네 이름이 산도르라고 했던가.”
“······.”
여태껏 노인들을 인솔하던 상처 가득한 사내는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노인을 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 같아 보였다.
흑빵보다도 더 딱딱한 사내의 무미건조함에 말을 건넸던 노인조차도 어색한 듯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북부 연합에 귀의한 것을 환영합니다. 피에르 주교.”
천천히 돌아서는 사내의 뒤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고 있었다.
“여태껏 쌓아온 그 명성에 맞는 행동을 할 거라 믿겠습니다.”
도시 발레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노인과 사내가 멀어지고 있었다.
상처 가득한 사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주교 피에르는 가느다란 기침을 내뱉는 노인을 부축하고는 발레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역시 북부 놈들은 영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여태껏 걸어온 길에는 후회 없으나 앞으로 나아갈 길에는 확신 없던 신실한 신의 종.
주교 피에르는 교황청도 북부 정교회도 아닌 그저 신에게 가는 길을 좇기 위해 지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