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06
별 밝은 밤 (1)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아 떠 있는 별빛들이 밝은 밤이었다.
강철공 티무르는 쌓여있는 하얀 눈들을 카펫으로 삼은 채 앞에서 피어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철로 된 성벽 안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맞이하는 밤은 오랜만이었고 지금 자신의 앞에서 실실 웃고 있는 사내를 마주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랜만의 일이었다.
“앞니는 언제 빠졌나? 누구한테 맞기라도 했어?”
“한 대 맞긴 했지요. 세월이라는 놈한테요.”
빠져 있는 앞니 덕분인지 웃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으나 지금 강철공 앞에서 같이 모닥불을 쬐고 있는 노인은 한때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남기고 다녔던 바라노프의 기사였다.
흘러간 세월을 따라 이제는 검을 내려놓고는 은퇴한 그였으나 그럼에도 반가울 수밖에 없는 것은 노인과 오랫동안 함께했던 추억 덕분일 것이다.
“그러니까 술 좀 작작 마시래도.”
“옛날이 좋았지요. 젊었을 적에는 이런 술을 통으로 마셔도 다음날 멀쩡했었는데 말이죠.”
지나간 세월을 추억하던 노인은 고개를 돌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집을 바라보았다.
주위에 있는 집들은 대부분 통나무로 만들었으나 지금 노인이 바라보고 있는 집은 굉장히 공을 들인 크고도 넓은 벽돌집이었다.
“그래도 그 세월을 지나 저만의 장원을 얻었으니 아주 의미 없는 인생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티무르는 세월을 한탄하는 옛 부하를 보며 들고 있던 술병을 입에 물었다.
지금 노인이 말하는 장원은 티무르가 직접 하사한 것으로, 그가 평생 바쳐왔던 충성에 보답하기 위한 명예로운 선물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중부 놈들이랑도 한 판 붙으실 생각이라면서요?”
“해야지. 그놈들이 기어들어 오겠다는데 어쩌겠는가.”
“크으. 오랜만에 전쟁 이야기를 들으니 심장이 뛰는 것 같군요.”
노인은 티무르가 직접 건네준 값비싼 술병을 들며 즐겁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점점 흥취에 젖어가는 노인을 보는 티무르의 입가에는 그저 씁쓸한 미소만이 걸쳐 있을 뿐이었다.
“한창 바쁘시겠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저를 잊지 않고 찾아와 주시니······.”
“잊을 리가 있나.”
티무르는 머금고 있던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지치고 말았는지 고개는 힘없이 숙이고 있었지만 티무르의 눈만큼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빛나고 있었다.
“당연히 잊지 않을 걸세. 나의 충성스러운 자네를.”
“네?”
스르릉-
모닥불이 만드는 불길이 검면에 비쳐 일렁였다.
갑작스레 검을 뽑아 드는 티무르를 보며 당황한 노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해독제까지 가지고 왔는데 전혀 쓸모가 없었어.”
“티무르 님.”
“사실 자네가 마신 건 술이 아니라 독약이었거든.”
평생을 나와 함께 해주었던 충성스러운 기사.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는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비겁한 도망자일 뿐.
커다란 말조차 죽일 수 있는 독약이었으나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킨 노인을 보며 티무르는 조용히 검을 치켜들었다.
“······부디 그곳으로 가지 말고 마지막까지 나의 기사로 있어 주게.”
아마 이것이 내가 자네를 위한 마지막 은퇴 선물이겠지.
신념을 버리고 만 자신의 부하를 위해 티무르는 아무 말 없이 그가 흘린 명예를 다시 돌려주었다.
촤악-!
슬프게 뻗은 검로 위로 둥글게 떠 오르는 얼굴 하나가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 위로 떠올랐던 노인의 얼굴은 저 위에 있는 달을 한껏 담았다가 천천히 자신의 주군에게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무덤은 깊게 파도록 해라. 아무도 확인하지 못하도록.”
“네 공작님.”
큰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딛고 있는 땅부터 다져야 하는 법.
티무르는 그 준비가 너무 늦지 않았음에 안도했고, 또한 슬퍼하고 있었다.
“······.”
들고 있는 종이에서 이름 하나를 지워낸 티무르는 조금씩 잦아드는 모닥불을 보았다.
여전히 타오르는 그 불 위에 오래된 추억 하나를 던져 넣은 티무르는 마지막 남은 술 한 모금을 들이키고 말았다.
※※※※
‘요제프 바예지드를 너무 믿지 말게.’
‘교황청이 그를 노렸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야.’
“······.”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등진 채 홀로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다.
푸른 달빛에 비치는 금발이 이제는 제법 그럴싸해 보였지만 정작 본인은 그 모습을 만끽할 만한 여유가 없어 보였다.
“나를 흔들어서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지?”
로드리고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을 곱씹던 블라드는 그의 진짜 전하려던 저의를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었다.
“이것도 뭐, 북부에 대한 견제 그런 건가?”
제국헌병대의 선임 기사는 블라드의 가슴 속에 의심의 씨앗 하나를 남겨두려 했지만 이미 그 씨앗은 흔적도 없이 말라비틀어진 뒤였다.
그만큼 블라드가 요제프에게 가지고 있는 신뢰는 굳건한 것이었으니까.
주군이자 은인이었으며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요제프를 의심하느니 차라리 로드리고를 의심하는 것이 더 이치에 맞는 판단일 것이다.
똑똑똑.
“······!”
그러나 너무 깊은 고민에 빠져 있어서일까.
블라드는 창문을 두들기는 검은 그림자를 너무 늦게 눈치채고 말았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다가온 그 그림자는 블라드의 예민한 청각도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것이었으며 퍼트려 놓은 기감 조차 속일 정도로 능숙한 것이었다.
“밤바람이 춥군. 문 좀 열어주게.”
“마커스?”
창이 넓었기에 발을 디딜만한 공간이 있던 모양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한 그를 보며 블라드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여기는 어떻게······.”
“긴히 전해 줄 말이 있어서 말이지.”
바예지드의 까마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창을 타고 넘어와 앞에 있던 손님용 테이블에 앉았다.
데워놓은 찻주전자를 들어 따르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편안해 보여 오히려 블라드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여전히 나를 마커스라고 부르는군.”
“또 이름이 바뀌었나요.”
“요즘에는 산도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
이제는 침입자에서 손님으로.
본래 모습은 알아볼 수도 없게 얼굴 곳곳에 상처 가득한 남자는 따라놓은 찻물을 마시며 조용히 블라드에게 편지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건 뭔가요?”
“북부정교회에서 자네에게 보낸 편지일세. 정확히는 북부정교회 제 2기사단장인 귄터 경이 보낸 것이지.”
안개 가득했던 모시암에서 함께 검은 여인을 대적했던 성기사.
귄터의 모습을 떠올린 블라드는 서둘러 마커스가 전한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서류인데요?”
“면죄부일세.”
봉투 안에 들어있던 종이는 여러 장이었다.
그중 하나는 귄터가 직접 써서 보낸 편지였으나 그 뒤에 붙어있는 종이들은 딱딱한 서식만이 가득한 서류들이었을 뿐이었다.
“역시 한 번 찢어본 적이 있어 한 번에 알아보는군.”
“이걸 저한테 왜 주시는 거죠?”
남들은 갖지 못해 안달인 면죄부였지만 정작 블라드에게는 불쾌한 기억만이 가득한 것이었다.
게다가 세속에 물든 교황청과는 다르게 북부정교회에서는 쉽게 면죄부를 내주지 않았으나 그것을 받아든 블라드가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서명은 되어 있네. 그것도 교황께서 직접 하신 것이지.”
“그러니까 이걸 왜······.”
“북부정교회는 자네가 사람을 한 명 죽여주길 바라고 있네.”
북부정교회의 기사단장이 작성했으며 고귀한 교황이 서명했고, 바예지드의 숨겨진 칼날이 전달해 준 면죄부.
블라드는 그 면죄부를 통해 대신할 죄가 가볍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는 그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누구를 죽여달란 말입니까?”
불길한 예감이 든 블라드는 마커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으나 온통 엉망이 된 사내의 얼굴에는 조금의 표정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요제프 바예지드.”
마커스가 내려놓는 찻잔에서 딸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덜컹 내려앉는 블라드의 심장 소리와 함께.
“부디 자네의 손으로 사특한 존재와 결탁한 북부의 오점을 죽여주길 바라네.”
들려오는 익숙한 울림에 블라드의 손이 떨려왔다.
요제프 바예지드.
불길한 까마귀가 말하는 그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나를 알아봐 준 이름이었으며 블라드의 세계를 이루고 있던 것 중 제일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도대체 왜······.”
콰아아앙-!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연유라도 물어보고 싶었던 블라드였지만 이윽고 들려오는 굉음에 온몸이 휘청이고 말았다.
“······조금 늦었나 보군.”
-습격이다! 적이 쳐들어왔다!
-지하 감옥이 털렸어!
저 밖에서부터 보이는 자욱한 연기.
그리고 그 연기를 타고 오르는 병사들의 거친 외침까지.
갑작스러운 굉음에 시야가 흔들리고 있었으나 블라드는 재빨리 깨어진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오러를 세워라. 블라드. 그가 지금 너를 보고 있다.]그러나 바라본 밖에는 키하노의 말처럼 블라드를 보고 있는 시선이 있었다.
저 멀리 종탑 위에 서 있는 사내는 온통 색이 바래 있었으나 지니고 있는 압박감만큼은 그 어떤 기사들의 것보다도 무거운 것이었다.
“······프라우센.”
두근-!
블라드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요란한 진동과 함께 그동안 나를 지탱해 준 세계가 온통 흔들리고 있었으나 울고 있는 검만큼은 앞에 있는 자를 상대해야 한다며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
-막아!
-네 이놈들!
“요란하게도 들어오셨군.”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감옥이었으나 이제는 하늘마저 보일 정도로 뻥 뚫린 공간이 되었다.
반쯤은 무너진 계단을 타고 내려가던 자야르는 앞을 가로막는 경비병들을 베고는 뒤에 있는 요제프를 향해 손짓했다.
“가시죠. 요제프 님.”
“······자네까지 이럴 건 없어.”
요제프의 말에 안대 위에 머문 돌가루들을 털어낸 자야르는 곧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했다.
“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옥사나 님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목숨이었습니다.”
나를 알아준 사람을 위해 검을 바친다.
레이디 옥사나를 위해 오스카르 가문에서 바예지드까지 따라온 외눈의 기사는 이제 그녀의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명예까지 바칠 차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디 하고 싶은 일을, 그리고 해야할 일을 하십시오. 저는 요제프 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
처음 보았을 때부터 고집불통인 기사였다.
요제프는 자신의 헛된 설득으로는 자야르가 움직이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그저 목표했던 일을 하기 위해 서둘러 계단으로 내려갔다.
“숨이 차지 않아 좋군.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들 살았단 말이지?”
날씨는 추웠고 내려가는 길은 험했으며 지금도 곳곳에는 시퍼런 칼날들이 날아오고 있었지만, 요제프의 육체에는 조금의 움츠러듦도 없었다.
어찌 보면 해방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감정을 느끼며 요제프는 지하 감옥 가장 깊은 곳까지 서둘러 뛰어 내려갔다.
뛰는 심장은 요제프에게 있어 언제나 벅찬 것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충분히 기꺼운 것이었다.
-너는······.
“라마슈트 님이 보내서 왔다.”
아른슈타인의 지하 감옥 가장 깊은 곳에는 쇠사슬에 매달려 둥둥 떠 있는 목 없는 기사가 있었다.
감싸인 곳마다 신성한 구절이 적혀 있는 종이가 매어져 있는 그런 쇠사슬이었다.
까앙-!
순간, 자야르가 내지르는 일격에 두꺼운 자물쇠가 잘려 나갔다.
어느 때보다 선명해진 자야르의 세계가 그가 얼마만큼 단호한 결심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지금 꺼내주마.”
죽은 자들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독과 같았지만 살아있는 자에게는 그저 종이 뭉치일 뿐인 부적들.
사특한 자를 위해 손을 뻗는 요제프의 머리 위로 별 하나가 비치고 있었다.
“······오늘은 하늘이 맑군.”
껍질 벗은 나의 본모습은 조악하며 형편없을지라도 그래도 나는 빛나고 싶다.
태어날 때부터 깨어져 있던 돌멩이라 할지라도 빛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요제프는 이렇게 하기로 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쓰러져 있었을지라도 지금부터 타오르는 나의 불꽃은 저 위에 있을 별들만큼이나 찬란할 테니까.
찌이익-!
인생의 모든 것은 나의 선택에 따라서.
태어날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죽음만큼은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가져가기로 요제프는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