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07
별 밝은 밤 (2)
“······분명 닫고 갔었는데.”
늦은 밤, 홀로 집무실에 들어선 요제프는 자그맣게 열려 있는 창문을 보았다.
내가 이런 실수를 했는가 싶어 걸어간 창틀에는 어느새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중이었다.
“불을 지펴야겠군.”
그저 잠시 일을 볼 요량으로 들어온 집무실이었으나 결국 벽난로까지 켜야 하는 수고로움에 요제프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쿨럭, 쿨럭.”
새빨갛게 달아오른 성냥이 떨어지고 장작에 불이 붙자 요제프는 점차 올라오는 그을음에 그만 기침을 내고 말았다.
어깨까지 들썩이는 깊은 기침이었으나 요제프는 익숙한 듯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을 뿐이었다.
“음?”
벽난로에 불을 붙인 요제프는 그제야 어른거리는 불빛에 비치는 낯선 물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바깥의 공기가 가시지 않은 싸늘한 책상 위에 놓인 온통 새까만 편지 한 장.
그 편지는 분명 낮에는 보이지 않았었던 낯선 것이었다.
“······심지어 직인조차 없군.”
마땅한 직인조차 없어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는 편지를 보며 요제프는 혹시나 싶어 장갑을 꼈다.
그러나 염려와는 다르게 주인 모를 편지에는 아무런 위험도 없었고 그저 유려하게 쓰인 글자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습니다. 요제프.
다만 적혀 있는 필체가 고전적이라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겠지만.
몇십 년 전에나 유행했을 법한 오래된 필체를 보며 요제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간이란 누구에게는 영원히 머물 것만 같은 잔잔한 호수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금세 지나가고 마는 폭포와도 같은 것입니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 쓴 편지였다.
오래된 신의 말씀을 인용하는 이름 모를 이의 전언은 조금씩 요제프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요제프.
“쿨럭, 쿨럭. 음······.”
집중하고 싶었으나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기침이 끊임없이 요제프를 괴롭히고 있었다.
여전히 방 안에 머무는 추위는 독이었고 온기를 통해 전해지는 그을음 또한 독이었다.
그 독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요제프는 까맣게 굳어버린 잉크를 애써 더듬어보는 중이었다.
-저는 당신의 시간이 다했음을 느낍니다. 아마 본인 또한 잘 알고 계시겠지요.
“음?”
어느새 편지의 끄트머리까지 다다른 요제프는 곧이어 자신이 들고 있는 편지가 점차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열기에 요제프는 크게 당황했으나 주인 모를 검은 편지는 마치 아교로 붙이기라도 한 듯 요제프의 손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런!”
검게 빛나는 연기 아래로 자그마한 직인이 그려지고 있었다.
점차 모습을 갖춰가는 직인은 오랫동안 요제프가 쫓고 있던 것이었으며 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불경한 것이기도 했다.
-요제프 바예지드. 태어날 때부터 깨어져 있던 가련한 돌멩이.
그리하여 마침내 그려진 신을 모독하는 사특한 자의 문양.
그 문양을 본 요제프는 지금 들고 있는 검은 편지가 누가 보낸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신의 뜻은 가혹하여 어긋남이 없으니 곧 그의 뜻이 당신에게 찾아갈 겁니다.
편지를 다 읽어내린 요제프는 마지막에 쓰인 글귀를 보고는 조심스레 입을 가리고 있던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어머니께서 직접 수놓아 주신 고운 손수건에는 차마 외면하기 힘든 새빨간 토혈이 가득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
본인의 부주의도, 누군가의 저주도 아닌 그저 타고난 수명으로.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을 시간의 흐름이었지만 요제프에게만은 더욱 가혹한 것이었다.
※※※※
[온다!]“······!”
저기 나를 보고 있는 남자가 웃고 있다.
겨울에 어울리는 새하얀 백발을 가진 남자는 밤하늘을 가득 메운 달을 배경 삼아 어느새 블라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프라우센!”
“그동안 잘 지냈느냐.”
다가올수록 느껴지는 거대한 압박감에 블라드는 서둘러 자신의 세계를 개방했다.
그러나 블라드와는 달리 아른슈타인의 저택은 프라우센의 존재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콰아아앙-!
거침없이 그어지는 검격에 오래된 저택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발레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그로 인해 만들어진 자욱한 돌먼지 속에서 블라드는 필사적으로 나아갈 길을 찾고 있었다.
[너와 같은 검술을 쓰는 상대다. 정면돌파로는 승산이 없어!]가까스로 빗겨낸 일격이었지만 블라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 너머로 마주한 프라우센을 보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을 뿐이었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잘 됐군.”
“무엇 때문에 나를 찾고 있었지?”
능청스레 되묻는 프라우센의 모습에 블라드의 세계가 격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한시도 잊은 적 없던 이름이었지만 눈앞의 프라우센은 이미 그녀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눈치였으니까.
“······잊고 있었으면 똑바로 알려줘야겠지.”
블라드의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본래의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천천히 밀려나는 자신의 검을 보며 프라우센은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유스티아다.”
“누구?”
“그날 네가 죽인 기사의 이름.”
까드드득-
“산 로지노의 유스티아.”
안개 가득한 도시에서 나를 위해 울어주었던 카나리아가 있었다.
그녀의 죽음으로 살아난 나는 못다 한 복수를 대신해 줄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오늘 너에게서 유스티아의 핏값을 받아낼거다.”
다짐하듯 읊조리는 블라드의 눈빛이 어느새 용의 것과 닮아 있었다.
네가 아닌 오직 나만이 갖추고 있는 개성.
울고 있는 검과 함께 깨어난 용의 개성이 블라드의 피와 함께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 한번 해봐라.”
“······!”
콰직-!
믿을 수 없는 완력에 이은 믿을 수 없는 속도.
그저 힘만으로 프라우센을 후려친 블라드는 어느새 저 멀리 나가떨어지는 그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 나가고 있었다.
“······빠르구나!”
방금의 외침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듯 블라드의 검이 프라우센의 시야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들이칠 수 있는 모든 각도를 따라 달려드는 용살검의 잔상들이었다.
콰앙! 쾅! 쾅!
검이 닿는 곳마다 벽이 터져나갔고 발을 딛는 곳마다 바닥들이 깨어져 나갔다.
복도 한가운데서 번쩍이는 황금빛의 번개는 밖에서 보았을 때는 마치 터져나가는 폭발의 잔향과도 같은 것.
그렇게 휘몰아치는 검의 폭풍우 속에서 프라우센의 신형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흐으으아!”
그야말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 속에서도 블라드는 조금씩 도약할 수 있는 거리를 재고 있었다.
일격필살의 묘리를 창시한 검사에게 대적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의외성의 순간이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오늘 유스티아의 핏값을 갚아주마!”
휘청이던 프라우센을 멀리 밀어낸 블라드는 찰나의 순간을 통해 온몸의 근육을 수축시켰다.
당신조차도 예측할 수 없을 필살의 일격을 위해서.
그리하여 치켜뜬 블라드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일직선으로 그어진 황금빛 지평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가각-!
뜨고 있는 해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뻗는 검압을 이기지 못해 갈라지는 복도의 균열들이 모두 프라우센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블라드, 블라드. 볼 때마다 신기한 녀석이로구나.”
흉악한 기세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블라드의 세계였지만 정작 상대하는 프라우센의 표정에는 조금의 당황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런데 유스티아라는 기사는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군.”
콰아아아앙-!
마침내 블라드가 뻗어낸 일격이 프라우센에게까지 닿았다.
빛처럼 빠르고 떠오르는 해보다도 묵직한 블라드의 일격이.
그러나 그 찬란했던 일격조차도 색을 잃어버린 기사 앞에서는 천천히 숨을 죽일 뿐이었다.
웅-웅웅-
다만 블라드의 일격이 아무런 가치 없던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 프라우센의 가슴팍을 꿰뚫어버린 용살검이 뛰고 있는 그의 심장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같은 것에서 비롯되었기에 반응하는 두 개의 조각을 느끼며 블라드는 그만 경악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용의 조각?”
그는 용을 죽이기 위해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품고 있는 것은 용의 조각.
블라드는 온통 모순되어버린 프라우센의 모습에 블라드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
쩌어엉-!
저택을 관통하는 거친 충격이 있었다.
돌가루가 우스스 떨어질 만큼 커다란 진동에 복도를 내달리고 있던 피에르는 그만 사정없이 구르고 말았다.
“······그놈을 만나고 나서부터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 없군.”
조용히 분통을 터트린 피에르는 옆에 널브러져 있던 라두를 업어 들고서는 간신히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런.”
그러나 가고자 하는 옳은 문은 좁았고 내가 뜻하는 바는 너무 멀었다.
어느새 복도 저 끝에서부터 다가오는 목 없는 기사들을 보며 피에르는 품에서 자그마한 법봉을 꺼내 들어야만 했다.
“······내 언젠가는 이렇게 죽을 것 같긴 했지.”
군인이 전장에서 죽는 것처럼, 사제는 신의 뜻 아래서 죽는 법이었다.
수없이 그려봤던 마지막이었기에 오히려 담담해질 수 있었던 피에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해야할 일을 하기 위해 그분의 말씀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내가 홀로 어두운 골짜기를 걸을지라도······.
지금도 누군가가 싸우고 있는지 저택에 울리는 진동이 요란했다.
그러나 바로 앞에 있는 목 없는 기사들은 투구 속에서 스산한 귀화만을 내비칠 뿐, 그저 피에르와 라두를 향해 천천히 걸어올 뿐이었다.
-그런 제가 기댈 것은 오직 당신께서 내려주시는······.
촤르르륵!
순간, 신의 뜻을 읊조리던 피에르의 뒤에서부터 경망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앙증맞기까지 한 그 소리는 분명 긴장된 복도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주교님! 지금입니다!”
“······구슬?”
한참 기도문을 외우던 피에르는 앞에 보이는 광경에 그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복도 한가운데로 알록달록한 구슬들이 쏟아져 나가고 있었으니까.
지금의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에 피에르도 목 없는 기사들도 그만 당황감에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빨리빨리!”
뒤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피에르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보았다.
기둥 사이에 숨어서 빼꼼히 내밀고 있는 꼬리 하나.
신비를 다루는 꼬락서니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
구슬들을 뒤로 한 채 반대쪽으로 뛰어가는 피에르를 보며 목 없는 기사들이 달려들기 시작했으나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은 허무하게 빗겨나가고 말았다.
우당탕탕!
니벨룬이 손가락을 튕기자 복도에 잔뜩 깔린 구슬들이 살아있다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마치 구슬로 만들어진 듯한 작은 파도의 움직임에 갈 곳 잃은 발걸음들이 마구 미끄러지고 있었다.
-마법이다!
-모두 경계해라!
작디작은 구슬이었으나 얼마나 매끄러운지 발에 살짝 닿기만 해도 균형을 잃게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구슬들이 점점 목 없는 기사들을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잘했다!”
“빨리 나가자구요!”
이리저리 나자빠지는 목 없는 기사들을 보며 피에르와 니벨룬은 기뻐했지만, 몸을 돌리자 보이는 광경에 표정이 잔뜩 굳고 말았다.
몸을 돌린 복도의 반대편에도 어느새 목 없는 자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구슬 또 없나?”
“······저래 보여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거거든요. 구슬치기로 애들한테 따와야 하는 거라서.”
“그건 또 뭔 개소리야!”
고양이 주제에 개소리를 지껄이는 니벨룬을 보며 혀를 차고만 피에르는 부축하고 있던 라두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법봉을 들이밀고는 이번에야말로 진지하게 성경을 읊기 시작했다.
“다음 거, 다른 거······.”
“집중 좀 하게. 좀!”
배낭을 뒤적이는 니벨룬을 보며 목 없는 자들의 눈이 스산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신비를 다루는 마법사에게 시간을 주는 것은 검사에게 있어 금기나 다름없는 것.
-쳐라!
복도를 내달리는 목 없는 기사들을 보며 니벨룬의 손길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급해지는 손길에도 찾으려 하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고 뛰어오는 기사들은 점점 가까워질 뿐이었다.
콰드득-!
순간, 요란한 소리와 달려드는 기사들을 가로막는 나무파편들이 있었다.
요제프가 머물던 방문이 터져 나오며 만든 파편들이었다.
“산도르!”
“마커스 경!”
서로 다른 이름이었으나 뜻하는 이는 같았다.
산도르이자 마커스인 남자는 한 손에는 레이피어, 다른 한 손에는 망고슈를 든 채 가차 없이 목 없는 기사들을 향해 찔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길을 열도록 하지.”
사내가 들고 있는 얇고도 짧은 검들은 갑옷의 틈새를 찔러대며 목 없는 자들을 봉쇄하고 있었다.
그 신기와도 가까운 검술에 피에르와 니벨룬은 급박한 상황도 잊은 채 입을 크게 벌릴 뿐이었다.
“라두 경도 두고 가시오. 내가 책임질 테니.”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가 아니오.”
목 없는 자들을 온몸으로 틀어막은 마커스는 레이피어를 든 손으로 창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제일 중요한 사람은 바로 블라드니까.”
요제프의 방에서 일련의 행위들을 마치고 나온 마커스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임무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가 행해야 하는 마지막 임무는 라두도 요제프도 아닌 블라드에게 관련된 것이었다.
처음과 같은 끝으로
하늘 위의 달빛이 밝을수록 그 밑에 있는 그림자도 짙어졌다.
지금도 계속해서 담을 타고 넘어오는 목 없는 기사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였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죽은 듯 웅크리고 있던 목 없는 자들은 이제야 부정한 깃발 아래서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음에 기뻐하고 있었다.
“아른슈타인이라면 시작을 알리기에 알맞은 장소겠지요.”
까만 상복을 입은 여인은 달을 등지고 있었다.
푸른 달 위에 떠오른 검은 물방울 같은 그 여인을 아른슈타인에 있는 모든 이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야 다들 저를 바라봐주는군요.”
검은 여인 라마슈트는 오랫동안 지금 같은 순간을 기다려왔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바라봐주는 그 순간을.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타 죽고 자식 잃은 부모들이 아무리 울부짖어도 애써 외면하던 세상의 시선들을 지금처럼 모으고 싶었다.
“다들 진작에 이래 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신을 향한 순종 대신 세상에 대한 거친 저항을 선택한 타락한 성녀 라마슈트.
그녀는 단단히 굳어버린 이 세상에 무언가를 덧칠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색이 필요한 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색을 갖기 위해 그녀는 순결한 자신의 영혼 위에 새까만 어둠을 덧칠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었다.
콰아아앙-!
그리하여 오늘 밤 그려진 그녀의 세계.
저 앞에서 무너지는 아른슈타인의 저택을 보며 라마슈트가 환히 웃기 시작했다.
“왜 그러나. 용의 조각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두근-!
검은 울었지만 남자는 웃고 있었다.
맞지도 않는 용의 조각을 심장에 매단 채로.
온통 색이 바랜 채 웃고 있는 프라우센을 보며 블라드는 기괴하기보다는 오히려 서글픈 마음이 먼저 들고 말았다.
“······아니지. 이건.”
그동안 나는 여태껏 당신의 흔적을 쫓아 왔었건만.
그러나 온통 누더기가 되어버린 남자에게서는 블라드가 기대했던 영광된 소드마스터의 흔적 따위는 남아있지도 않은 것만 같았다.
“당신 소드마스터 아니야?”
오늘 밤은 너무 깊다.
너무 어둡고 짙어서 내가 보는 것들이 전부 이상하게 뒤틀려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내가 믿었던 요제프도, 내가 따라왔던 소드마스터도 전부 제 색을 잃어버린 것 같은 어두운 밤하늘 아래서 블라드는 다시 자신의 검을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어린 가능성, 있어야 할 자리, 그리고 정당한 대가.”
도시 모시암에서 깨지 못한 잠에 빠져가던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숨이 막혀 죽어가던 검은 눈물을 흘리던 여인들도.
“이거 전부 다 당신이 지키라고 말하던 규율들이었잖아.”
단순히 높았기에 동경하던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옳았기에 우러러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있는 자는 여태껏 그가 해왔던 업적과 내가 따라왔던 규율들까지 모욕하고 있었으니 블라드는 여태까지의 자신이 쳐왔던 발버둥이 부정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그런데 당신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가까이서 바라본 동경하던 세계는 온통 썩어 짓물러 있었다.
이제야 속속들이 마주하고만 프라우센의 악취에 블라드는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느끼고 말았다.
“이건 소드마스터가 아니야.”
이를 악문 블라드가 프라우센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검이라는 붓으로 세계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을 소드마스터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의 블라드는 자신의 앞에 있는 추악한 세계를 현실에서 지워내기 위해 자신의 붓을 집어 들었다.
“오늘 여기서 너를 지워주마.”
블라드의 눈동자에서부터 황금빛 지평선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의지를 따라 흐르는 그 선은 검을 타고 흘러와 정확히 프라우센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으나 분노로 인해 붉어진 눈동자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소드마스터의 규율. 오랜만에 듣는군.”
“그 입 닥쳐라!”
콰아아아앙-!
내가 따라온 길을 비웃는 프라우센을 향해 블라드의 세계가 그어지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묵직한 일격에 벽까지 밀려나고만 프라우센은 실로 곤란하다는 듯한 신음을 내지르고 말았다.
여태껏 맞붙었던 이 시대의 용과 기사 중에서도 이만큼 프라우센을 몰아붙였던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지키고자 노력했던 시절도 있었지.”
“그런데 왜 변했어!”
맞닿은 두 개의 검들이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보이는 색깔은 같은 은색이었으나 품고 있는 의지는 서로 달랐기에 밀어낼 수밖에 없는 검들이었다.
“······본래 사람은 모두가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거다. 이 어리고 어설픈 기사야.”
팽팽하던 검의 균형이 조금씩 블라드에게로 밀리기 시작했다.
꿈을 좇았으나 현실을 이해하고만 프라우센이 지닌 무게감 때문이었다.
키하노는 어린 가능성을 위해 검을 들라고 했다.
“아무리 어린 가능성이라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희생시킬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지.”
키하노는 있어야 자리에 있다면 해야 할 일을 하라고 말했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더라도 눈을 감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고.”
그리고 언제나 정당한 대가만을 받으라고도.
블라드는 고딘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뜨렸던 정당한 대가의 무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정당한 대가보다도 더욱 욕심부려야 할 때도 있는 거다.”
“지랄하지 마! 이 개자식아!”
그러나 소드마스터의 입에서부터 점점 지워지기 시작하는 그의 명예로운 규율들.
현실에 굴복하고만 늙은 황제가 내뱉는 말에 그의 길을 따라왔던 어린 기사는 조금씩 상처 입고 있었다.
“너 같은 가짜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어!”
한낱 시체 따위가 내뱉는 말을 더는 참을 수가 없다는 듯 프라우센을 내려다보는 블라드의 눈빛이 더욱 붉어지고 있었다.
마치 상대가 누군지 가벼이 규정해버리는 용의 눈빛처럼.
어설픈 용의 완력을 가지고 노는 소드마스터의 현란한 기교에 안 그래도 분노로 타오르던 블라드의 심장은 더욱 요동치고 있었다.
[안된다! 블라드! 용의 세계로 넘어가지 마라!]나의 안에 소중히 품고 있던 키하노가 안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점점 새파래지는 블라드의 눈빛은 지금 나를 흔들려 하는 모든 세계를 거부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의 내가 믿고 따랐던 신념을 온통 무시해버리는 프라우센의 말에 블라드는 그동안 참아두고 있던 시뻘건 분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블라드!]“흐아아아아!”
더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런 감정들과 함께.
꽉 쥐고 있던 블라드의 주먹이 어느새 울고 있는 검을 잡고 있었다.
주인이 내뿜는 빛과 함께 불길해지고만 용살검은 어느새 별로 만들어진 자신의 근본조차 잊을 정도로 시퍼렇게 달아올라 있었다.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짓밟아주마!”
길어진 송곳니는 날카롭고 푸르렀던 눈동자는 온통 새파래지고 만 기사의 이름은 블라드 드라굴리아.
분노로 인해 기울어진 블라드의 세계는 어느새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용이로군.”
분노로 인해 어느새 돌아가 버린 블라드의 또 다른 면(面)은 타고난 용의 세계.
수많은 면을 가지고 있던 블라드의 세계에서 기어코 용의 흔적을 발견해버리고만 프라우센은 너 또한 변하고 말았냐며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용살자고.”
복도를 따라 달려오는 용이 있었다.
그러나 그 용의 뒤에 비치는 세계는 아까 보였던 찬란한 황금빛이 아닌 불길한 붉은 핏빛이었을 뿐.
더는 존중할 가치가 없는 불길한 세계를 향해 프라우센이 검을 치켜들었다.
푸욱-!
불길한 용의 세계를 부수고 찢어발기고 마는 가장 완벽한 용을 가른 용살자의 검.
그리하여 기어코 밀어 넣고 만 검 끝으로 바들거리는 어린 용 한 마리가 붙들려 있었다.
“끄으으······.”
한때는 내가 잡을 수도 있던 검이었건만 이제는 나를 꿰뚫고 만 은색의 기사.
블라드의 등 뒤로 삐죽 솟아 나온 은색의 기사는 세계수에서 보았던 어린 기사를 기억하며 오늘따라 밝게 떠오른 달을 향해 가늘게 떨고 있었다.
“방금까지는 좋았다. 블라드 아우레오.”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피가 프라우센의 얼굴로 튀어 올랐다.
그러나 용의 피가 바로 앞에 있었음에도 프라우센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린 것은 어째서일까.
“하지만 용의 모습으로는 안 돼. 그걸로는 나를 멈출 수 없어.”
“······끄으으.”
드드드득-
들어갈 때보다 오히려 나올 때의 느낌이 더욱 섬뜩했다.
블라드는 온몸으로 느껴지는 검의 차가움에 그만 자신도 모르게 경련하고 말았다.
“유스티아라는 이름은 기억하도록 하마. 적어도 그만한 가치는 있었으니.”
빠져나가는 검을 따라 세상이 반전하고 있었다.
딛고 있던 땅은 가까워졌고 등지고 있던 하늘은 멀어진 채로.
풀썩.
온통 부서진 2층의 벽을 넘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만 블라드의 눈동자에는 아까까지는 보지 못했던 밝고도 맑은 달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달을 가리며 나에게로 다가오는 남자의 모습 또한.
“······요제프 님.”
여전히 해보겠다는 듯 꽉 쥔 손에는 검이 들려있었으나 정작 마주한 요제프의 눈빛은 너무나 차가웠다.
그 눈빛을 본 블라드의 손에서부터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아니죠?”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언제나 밝은 창을 등진 채 나를 바라봐주던 눈동자가 지금 그곳에 있었다.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만 같던 검은 눈동자였으나 오늘만큼은 너무나 낯설어보여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해요······. 제발!”
누워 있는 땅은 차가웠지만, 눈으로 와닿은 광경은 더 차가웠다.
블라드는 자신을 내려보는 요제프를 향해 간절한 염원을 담아 말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그저 겨울이 불어대는 찬 바람뿐.
온통 반전된 세상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요제프를 향해 블라드는 그만 자그마한 울음을 내뱉고 말았다.
“이로써 나에게 더는 갚을 것은 없는 거다. 블라드.”
블라드의 간절한 부탁에도 요제프의 모습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검은 여인을 따라서, 그리고 그녀가 가지고 온 검은 마차를 향해서.
마치 관처럼 생긴 새까만 마차에 요제프가 올라설 때마다 블라드가 세워놓았던 세계 하나가 처참히 깨어지고 있었다.
그 세계는 장식 없는 검만을 든 채 헤매고 있던 겨울날,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던 요제프가 만들어주었던 세계였다.
“흐으으······.”
빠져나가는 피 때문인지 아니면 나를 내려다보는 요제프의 시선 때문인지는 몰라도 블라드는 사무치는 차가움에 점점 몸을 웅크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야 속으로 요제프가 사라지고 있었다.
블라드는 그곳이 아닌 여기를 보라고 크게 외치고 있었으나 돌아선 요제프의 뒷모습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굳건했다.
“아니야, 흐으으······. 쿨럭. 아니잖아요.”
오늘의 밤은 차가웠고 내려앉는 달빛이 무거웠다.
처음 만났었던 그때의 겨울과 마찬가지로.
핏물과 함께 섞여 내리는 블라드의 눈물에 요제프의 뒷모습이 점점 희뿌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