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08
다시 일어설 때에는 (1)
스투르마에 있는 집무실에서 페테르 바예지드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내려놓은 펜의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시간에 찾아온 손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나와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미리 약속을 했어야 한다. 아게.”
“일이 급했소. 시급하게 알릴 소식이기도 했고.”
제대로 다듬지 않은 동물의 가죽을 입고 머리 곳곳에 땋아놓은 색색의 띠들이 화려한 남자.
부다아트 족의 아게는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털지도 않은 채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다. 말해봐라.”
족장의 아들인 아게는 바예지드의 가주인 페테르와 대화하기에는 분명 손색이 있는 자였다.
그러나 페테르는 아게가 짓고 있는 표정의 심각함을 알아챘기에 사소한 부분은 넘어가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번 겨울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소. 우리 부족뿐만 아니라 다른 부족도.”
“어째서?”
먹을 것이 부족한 겨울에 야만인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었다.
본래 약탈을 하던 그들의 습성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아게는 단순히 먹을 것이 떨어져 버티기 힘들다는 말을 전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몬스터들이 날뛰고 있소.”
“겨울에는 원래 그렇지 않았나.”
“그리고 용들도. 당신들이 린드부름이라 부르는 용 말이오.”
북부의 설원 너머 인간들이 닿지 못하는 땅에서부터 몬스터들과 함께 용이 넘어오고 있었다.
페테르의 말처럼 해마다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그 수가 훨씬 많았고 용살기사단에 의해 세력이 약해진 야만인들로서는 감히 감당하기 힘든 숫자이기도 했다.
“용들이? 예전처럼?”
“더 심하오.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한 마리가 아니니까.”
용이 한 마리가 아니라는 아게의 말에 페테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라브노마의 조각이 움직였을 때야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용들이 동시에 날뛸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한 소식인가?”
“이미 부족 두 곳의 연락이 끊긴 상태요. 가장 최북단에서 자리 잡은 이들이었고.”
아게의 말에 따르면 지금 야만인들은 난폭해진 용들과 몬스터들의 압력에 이기지 못해 남하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는 바예지드에게도 그리 반가운 소식은 아닐 것이다.
“지금 너희를 돕기 위해 군사를 파견하는 것은 불가하다. 우리는 전쟁을 준비해야 해.”
“그러면 피난민들이라도 받아주시오. 그들이 당신들의 성벽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라오.”
“내가 그렇게까지 해줄 이유가 없다.”
내뱉는 거절은 차가웠고 또한 단호했다.
북부의 영주들과 야만인들이 맺은 협정은 견고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진 영역에 대한 존중의 의미였고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나서 무언가를 돕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가 되어 있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벽 안의 땅은 좁고 내 영지민들을 먹여 살릴 식량도 부족하다. 네가 원하는 도움은 이미 협정의 내용을 뛰어넘고 있어.”
“······.”
“그만 가 봐라. 너의 무례를 받아준 나의 배려를 잊지 말고.”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다시금 펜을 드는 페테르를 보며 아게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그의 말에 틀린 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울분만큼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많은 것을 양보했지만 결국은 똑같아졌군. 예전과 다를 바가 없어졌어.”
“······.”
“헐거워진 우리의 협정은 결국 깨지고 말 거요. 다음 세대의 아이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또다시 서로를 겨누게 되겠지.”
나에게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말자고 말한 남자가 있었다.
켜켜이 쌓아왔던 증오들을 잠시 미뤄놓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손을 맞잡자고 한 남자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우리가 마시기 힘든 독을 삼켜야 한다고 말했던 남자였다.
“요제프 바예지드라면 들어오라고 말했을 거요. 쇼아라의 뒷골목에서도 그는 그렇게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만.”
“이제 북부에서 다른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군. 또다시 겨울이오!”
“그만하라고 했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집무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아게를 바라보는 페테르의 핏발 선 눈 만큼은 여전히 부릅떠 있는 중이었다.
“······그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결국은 착각이었지만.”
흐트러진 페테르를 바라본 아게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더는 그와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을 직감했기에.
예전과는 달리 우리를 같은 인간으로 봐주는 바예지드를 찾아왔으나 결국 그가 들고 가는 것은 세계 사이에 그어진 차가운 경계선뿐이었다.
“······.”
아게가 나간 뒤에도 페테르는 오랫동안 주먹을 불끈 쉰 채 서 있는 중이었다.
평생을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한 인생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쉽게 감정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으므로.
자신의 불쌍한 아들이 못다 이루고 간 흔적을 보고만 페테르는 오늘만큼은 독한 술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
지난밤의 악몽을 지우고 싶다는 듯 돌무더기를 치우는 인부들의 움직임 분주했다.
그러나 그들의 손길에도 곳곳에 뿌려진 핏자국만큼은 여전했고 반쯤 무너져 내린 저택의 모습은 처참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앞에 두고 있던 파블로는 잔뜩 우그러진 방패를 등에 멘 채 아직 무너지지 않은 저택의 창가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일어나지를 않으시네요.”
“애초에 숨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용한 거지. 아예 가슴팍이 꿰뚫려 버렸는데.”
푹신해 보이는 침대와는 달리 벽면 곳곳에 금이 가 있는 방이었다.
그 초라한 모습은 지금 침대 위에 누워있는 블라드의 모습과도 닮아서 괜스레 처량함을 더하는 것만 같았다.
“악운도 운이라더니. 정말 살아날 줄은 몰랐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치고는 꽤 열심히 치료하시던데요.”
“······그거야 병자 앞에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신 앞에서 맹세했으니까 그러지!”
치솟는 분을 참지 못한 채 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피에르였으나 다급했던 그때 블라드에게 보인 손길만큼은 진실했었다.
비록 이단심문관 출신이었기에 치유의 술법은 사용하지 못했지만 능숙한 그의 처치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블라드는 관속에 누워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빨리 일어났으면 좋겠네요. 요즘 하인들이 저희를 보는 시선이 심상치가 않거든요.”
“흠. 그거야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거의 반파되다시피 한 아른슈타인의 저택은 도시 발레타에 남은 깊은 흉터와도 같은 것이었다.
꺾여진 깃발과 무너진 담벼락, 그리고 그때의 습격으로 죽어 나간 기사와 병사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치유될 피해이자 값비싼 손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요제프의 배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저택을 떠나지 못한 일행을 점차 불편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런 낌새도 눈치 못 챘나? 그동안 같이 다녔다면서.”
“전혀요. 적어도 신비에 대한 부분만큼은 감히 없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저 평범한 수인족이 하는 말이었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니벨룬과 함께해 봤던 피에르는 그가 빠져있는 정신머리만큼이나 거짓을 말할 깜냥도 안되는 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긴 워낙 머리가 좋은 놈이기는 했지. 북부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피에르는 자신과 대적했었던 요제프를 떠올리며 슬며시 턱을 긁어대었다.
오랜 시간 동안 쇼아라에서 자리 잡고 있던 자신을 밀어낼 만큼 수완 또한 좋았던 바예지드의 차남.
그런 그였으니 멍청한 고양이와 애송이 용 정도야 얼마든지 속일 수 있었으리라.
“······하긴 난 놈은 난 놈이었지. 그놈도.”
그러나 그렇게 뛰어난 인재라 할지라도 결국은 어두운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으니 역시 세상사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디 가세요?”
“왜? 내가 어디를 갈 때마다 네놈한테 보고라도 해야 하는 거냐.”
“그런 건 아니지만······.”
혼자 있기가 눈치 보여 같이 있자고 말한 것이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늙은이 특유의 괴팍한 독설일 뿐.
삐걱대는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는 홀로 복도로 나선 피에르는 그제야 한숨을 푹 쉬며 혼잣말을 내뱉고 말았다.
“내가 다 늙어서 용놈들 수발이나 들게 될 줄이야.”
정신을 잃은 블라드에게서 이제는 다 늙어버린 라두에게로.
방 밖을 나서 복도를 걷던 피에르는 자신의 인생이 어찌 이리되었는가를 한탄하며 바삐 걷기 시작했다.
온통 불편한 시선들이 가득한 이 저택에서 챙겨줄 사람 하나 없는 드라굴리아의 아들들을 위해 움직여주는 이는 오직 피에르뿐이었다.
※※※※
가을의 풍경이었다.
저 밑에 보이는 밀밭에는 풍요로운 황금빛이 가득하고 지금 앉아 있는 언덕에는 흩날리는 단풍이 가득한 그런 풍경.
키하노의 세계 안에서 보이는 어머니 세계수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미소를 짓게 할 그런 풍경이었지만 블라드만큼은 그저 울적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왜 그렇게 떠나갔을까요.”
[그건 본인만이 알겠지.]바람 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한 언덕이었지만 그곳에는 블라드 혼자만 앉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가 블라드 옆에서 함께 앉아 있었으니까.
[본래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세계와 세계의 만남이란 그런 거야.]“······.”
들려오는 키하노의 말에 블라드는 고개를 무릎에 묻었다.
나를 위로하려 하는 말인 것은 알았지만 그 말에 위로받기에는 지난밤의 이별이 너무 끔찍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기 싫다는 듯 깊숙이 고개를 파묻은 블라드는 그저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을 책망했고, 그동안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던 요제프를 원망할 뿐이었다.
“이제는 지쳤어요. 해도 해도 끝이 없어요. 쉴 수가 없어.”
[······이해한다.]위로 보며 별을 꿈꾸었던 소망은 푸르렀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었다.
계단을 하나 밟아 올라갈 때마다 블라드는 지쳐갔고 누군가를 한 명씩 쓰러트릴 때마다 블라드의 영혼 어딘가는 깎여나가고는 했다.
그리고 이제는 믿었던 사람마저 잃었으니 블라드의 고개가 숙여질 만도 할 일이었다.
[쉬고 싶으면 쉬어라. 도망치고 싶다면 도망쳐도 되고. 아무도 너에게 무엇을 하라 강요할 수는 없어.]그런 블라드에게 키하노는 독촉하지 않았다.
그저 네가 쉬고 싶은 대로 쉬다 가라고 말해주었을 뿐.
본인의 세계도 바라보기 버거워 자신의 세계로 도망쳐온 블라드를 키하노는 그렇게 보듬어 주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해도 돼요?”
[그럼.]블라드의 등을 툭툭 두들겨 준 키하노는 저 멀리 보이는 황혼을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든지 그래도 되지.]가을의 풍경 한가운데서 흩날리는 붉은 단풍잎들.
이제는 없는 어머니 세계수 아래서 보는 오늘의 황혼은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언제라도 다시 일어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젊고도 젊은 너의 시간은 여전히 알맞게 흐르고 있다.
돌이킬 수도 없고 넘길 수도 없는 나의 시간과는 다르게.
흐르고 있기에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너의 시간은 고민하는 이 순간에도 그저 헛되이 지나가는 것만은 아닐 테니까.
“······바람 소리 좋네요.”
[주위가 조용해져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지.]새빨간 단풍나무 아래서 그렇게 키하노와 블라드는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만이 가득한 이곳에서는 나를 배신한 요제프도, 나를 찔러버린 프라우센도 없이 오직 가만히 기다려주는 키하노만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