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1
바예지드 가문으로 (4)
사각- 사각-
깃털펜이 종이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어느 집무실 안.
그곳에 있는 집기들은 하나같이 가치를 따지기 힘들 정도로 비싼 것들이었으나 화려하게 치장되지는 않은 것들이었다.
“블라드라고?”
“네. 아버지.”
조용하지만 힘이 실린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래. 그동안은 너의 어머니가 내어준 자야르 말고는 신통한 녀석이 없었지.”
“······.”
선 굵은 눈썹, 굳게 닫힌 입술, 그리고 반백이 되어버린 꼿꼿한 검은 머리.
그러나 형형하게 빛나는 백작의 눈빛이 점점 늘어가는 흰머리를 노화의 상징이 아닌 경험의 증거로 만들고 있었다.
“이번에 그 녀석을 바예지드 가문의 기사로 손색없이 키운다면 상을 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너의 장점이 검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곳이 바예지드라는 것을 언제나 잊지 마라.”
“······네.”
상을 준다 말하고 있었으나 그동안 제대로 된 기사를 만들거나 영입하지 못한 요제프를 책망하는 말이기도 했다.
“······몸은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가는 길에 너의 어머니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거라. 네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으니.”
“네.”
요제프는 모든 보고가 끝나고 나서야 자신의 안부를 물어오는 아버지를 보고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요제프는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바예지드 백작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알고 있었기에.
“나가보거라. 내일 아침에 보자꾸나.”
“알겠습니다. 아버지. 편히 쉬십시오.”
요제프가 예를 갖추며 나가는 동안.
“······.”
페테르는 자신의 아들이 살짝 발을 절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약이라도 지어줘야겠군.”
“그렇게 하시면 기뻐할 겁니다. 옥사나 님께서도요.”
“제 아들이라면 끔찍이 챙기는 여자지. 요제프가 용케 자립심을 갖춘 것은 오직 그 녀석의 심지가 굳기 때문일 거야.”
페테르 바예지드.
바예지드 백작 가문의 5대 가주이자 북부를 대표하는 기사 중 한 명.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지고 있기에 아들의 앞에서도 쉽사리 아버지의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요제프의 보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깊이 받아들이셔야 할 것입니다. 심상치 않은 것들의 연속입니다.”
“음.”
페테르는 다시 한번 요제프가 작성한 보고서를 들어 읽어내렸다.
떨리는 촛불 아래 비치는 내용들은 불길한 것이었고 또한 쉽게 넘길 수 없는 것들 뿐이었다.
“감히 나의 땅에서 바예지드 가문의 적자를 건들다니. 배후를 찾아야겠어.”
“교회에 지원을 요청하십시오. 기사의 검은 빛나는 것이지만 깊은 어둠을 비출 때는 교회의 은총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조언에 페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나의 교회에서는 별 보고가 없는가?”
페테르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법구를 통해 일차적인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긴 로브를 뒤집어쓴 하얀 수염의 노인.
그는 바예지드 가문의 유일한 마법사이자 페테르의 조언자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사자소생(死者甦生)과 저주의 술식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주 고매한 흑마법사이거나 아니면 둘 이상의 흑마법사들이 합작한 결과일 거라 합니다.”
“으음.”
페테르는 조언자인 마법사 라그무스의 말을 듣고는 이번에는 조금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둘 이상이라면 조직이나 단체일 수도 있겠군.”
“그렇습니다.“
페테르는 요제프가 가져온 보고서를 곱게 접고서는 책상 밑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변하는 건 없을 테지.”
끼익-
고요하기만 했던 집무실에 의자가 밀려나며 만드는 마찰음이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바예지드 가문은 언제나 이 자리에 굳건히 서 있을 것이고.”
바예지드 가문의 주인이 어둠속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것을 방해하는 자들에게는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으십니다.”
한쪽 벽면에는 책이 가득한 책장이.
다른 쪽 벽면에는 번쩍이는 갑옷과 날카로운 검이.
페테르는 그 중 검이 놓여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감히 내 아들을 위협하고 나의 영지를 어지럽힌 녀석들을 속히 찾아내길 바라오.”
“알겠습니다. 백작님.”
자신의 검을 어루만지는 바예지드 백작의 눈에 서슬퍼런 빛이 감돌고 있었다.
※※※※
“오래 기다렸나? 밤이 늦었군.”
“괜찮습니다.”
응접실에서 하염없이 요제프만을 기다리고 있던 블라드와 고트는 그의 입장에 서둘러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께 한 보고가 길어졌고······그리고 어머니가 나를 쉽게 놔주지 않으셔서 말이야.”
요제프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졸린가?”
“아닙니다.”
옆에 서 있던 자야르는 블라드를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비록 아니라 말하고 있었으나 소년의 푸른 눈동자 안에는 쉽게 숨길 수 없는 피로감이 가득했기에.
“끄응.”
요제프는 의자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대며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고트라고 했나?”
“네. 요제프 님.”
고트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큰 기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방을 마련해두었으니 그곳에 묵도록. 너에 대한 보상은 내일 이야기 하겠다.”
“······네.”
그에게 주어진 것은 건조한 축객령뿐이었다.
요제프의 말에 고트는 뼈다귀를 잃은 개처럼 시무룩한 표정으로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그럼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해볼까.”
요제프는 두 손에 깍지를 낀 채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십시오.”
고트가 나가자 응접실에 있는 사람은 요제프와 자야르, 그리고 블라드 뿐이었다.
“나는 너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왔다.”
블라드는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방금까지도 편히 미소 짓고 있던 요제프였으나 지금은 귀족의 모습 그 자체였다.
“너는 나의 목숨을 구했고 또한 앞으로 나에게 검을 바치기로 한 사람이다. 맞나?”
“그렇습니다.”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한 요제프의 말에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고 나는 그 말을 자유로워야 한다고 이해했다. 맞나?”
“맞습니다.”
“나에게 검을 바치기로 했지만 자유롭고 싶다는 너의 이야기는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블라드가 내건 시건방진 조건들을 다시 듣게 된 자야르가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굳이 나서지는 않았다.
지금 이곳은 요제프와 블라드의 협상장이었으며 금발 애송이는 요제프의 목숨을 구명함으로써 여기에 앉아 있을 만한 정당한 자격을 얻어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싶은 이유가 뭐냐? 정확히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지? 이것을 말해준다면 내가 너에게 줄 것을 명확히 계산할 수 있을 거다.”
“······.”
블라드는 요제프의 말을 듣고는 가만히 생각했다.
다 털어놔도 될까?
요제프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블라드는 촛불 너머에 비치는 요제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기회가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블라드는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
“······.”
요제프의 등 뒤로 달빛이 내려앉았다.
창문 너머 그곳에 달이 있었고.
그날과 같은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고딘이라는 기사를 아십니까? 그는 가이다르 백작의 밑에 있는 자입니다.”
그날 이후로 단 한시도 잊어본 적 없다.
그는 자신의 은인을 죽인 자였고 딛고 있던 세계를 부순 자였으며 또한 동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고딘은 여태까지 보아온 자 중 가장 강하며 또한 빛나는 사람이었으니까.
소년은 여태껏 달을 따라 달려왔다.
“······.”
방금까지만 해도 블라드가 말을 꺼내기를 주저하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요제프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요제프뿐만이 아니었다.
블라드의 입에서 감히 생각지도 못한 거물들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자야르 또한 눈을 크게 뜨며 놀라고 있었다.
“고딘······가이다르······.”
요제프는 실로 감당하기 힘든 당혹감에 헤매는 중이었다.
그저 쓸만한 애송이인 줄로만 알았더니 지금 보니 비범한 배경까지 가지고 있었다.
비록 원한에서 비롯되는 비범함이었지만 말이다.
“······장미의 미소를 부순 정체 모를 자가 기사 고딘이었나.”
요제프는 마른 입술에 혀를 두르고서는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그렇군.”
그리고 결정했다.
“도와줄 수 없다. 그들은 내가 손 쓸 수 있는 영역 밖에 있으니.”
“······그렇습니까.”
블라드는 쓴 침을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귀족의 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요제프는 백작의 아들일 뿐이었고 그보다 높은 곳에 있는 자들은 이 세상에 수두룩할 것이었다.
어찌 보면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블라드는 겸허히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해준 요제프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계약을 수정하지.”
블라드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적당한 것을 요구하고는 일어날 생각이었으나 요제프는 블라드를 쉽게 놓아 줄 마음이 없었다.
소년의 빛나는 가능성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본 사람이 바로 요제프였기에.
“7년 계약을 제시한다. 쇼아라의 블라드.”
“네?”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블라드 뿐만 아니라 자야르까지도 놀라고 말았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이 행동이 매우 큰 결심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명심하도록.”
“······.”
귀족의 자존심을 내려놓은 것은 맞았지만 이 또한 치밀한 계획에서 이루어진 판단이었다.
요제프는 지금 자신이 준비한 2안을 내놓는 중이었다.
블라드는 지금 요제프가 하는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가 하고 있는 행동이 매우 이례적임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지금 뒤에 서 있는 자야르의 기세가 흉포해지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 7년 동안 너를 입히고 먹이고 훈련시켜 어디에도 꿇리지 않을 훌륭한 기사로 만들 생각이다. 나를 구원한 너에게 빛나는 미래를 약속하겠다.”
“기사······.”
블라드는 요제프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가지는 울림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그 단어를 따라 하고 말았다.
“그래. 기사. 기사가 되고 싶지 않나?”
요제프는 블라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소년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대신 너는 이 기간 동안 나에게 충성한다. 내가 시키는 일만을 하며 허락한 일만을 한다. 당연히 고딘과 가이다르 백작가에 대한 일은 할 수 없겠지.”
“······하지만.”
훌륭한 제안이었으나 블라드의 마음속에는 고딘 말고 걸리는 것들이 있었다.
소년의 머릿속에서 그리운 곳에 있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쇼아라의 뒷골목에 관련된 일이라면 허가하지.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
“제미나라는 아이는 지금 수녀원에 있다더군.”
“······!”
블라드의 부릅뜬 눈을 보며 요제프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요제프는 그동안 블라드라는 소년을 낱낱이 분석했다.
살아온 과거와 지금 처해 있는 현재, 그리고 되고 싶은 미래까지.
정말이지 탐나는 녀석이었으니까.
“검 한 자루만 달랑 들고 돌아가봤자 네가 뒷골목을 주름잡고 있는 자를 처단할 수 있을까?”
요제프는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대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 날카로운 것은 오직 검만이 아니다. 나도 나만의 무기를 가지고 있지. 도와주마.”
블라드는 눈앞에 있는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어쩔 테냐 블라드.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냐?”
요제프의 눈동자는 무엇이든 빨아들일 듯이 강렬한 것이었다.
※※※※
블라드가 응접실에서 나간 직후.
“목표가 대단한 애송이였군.”
“굳이 이렇게 매달리실 이유가 있습니까? 저 녀석 말고 쓸만한 애송이는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요제프는 위스키 병을 기울여 마지막 남은 한 잔을 따라내었다.
“어린 것들은 모두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개화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야.”
“저 녀석이 요제프 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물론이지.”
요제프는 창밖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곳에는 푸른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7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야. 충분히 목줄을 채울 수 있는 시간이고 어르고 달랠 수 있는 기간이지.”
“하지만······.”
“그리고 저 녀석은 보통 늑대가 아니거든.”
요제프는 떠오르는 달을 보며 마지막 한 잔을 들이켰다.
“달을 쫓는 늑대였어.”
요제프가 바라본 술잔 안에는 푸른 달이 담겨 있었다.
“심지가 굳고 가능성이 있으며 목표 또한 높으니 저 녀석은 무조건 크게 될 것이다.”
잔 안에 담긴 푸른 달을 보며 요제프는 그것을 한 번에 털어 넘겼다.
“그런 녀석을 쉽게 내줄 수는 없지.”
푸른 달빛의 기사를 목표로 삼은 소년.
그 소년이 정말 달을 부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밤하늘에 떠오를 별 하나는 될 것이라 요제프는 확신했다.
소년의 눈은 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저 녀석은 이제 내 것이다.”
7년이라는 시간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늑대가 자유롭다 느낄 만큼 큰 우리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