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11
그가 갈라진 이유 (2)
붉은 단풍잎이 휘날리는 키하노의 언덕에서 블라드는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잘못한 것 하나 없었으나 죄인 된 심정으로 앉아 있던 블라드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들끓던 패배감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내가 이길 수 있겠어요?”
[지금은 아니겠지. 먼 훗날이면 모르겠지만.]“그래도 안 된다는 말은 안 하네요.”
소년이었을 때는 꿈만 꾸어도 좋지만 어른이 되었을 때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상대는 높디높은 곳에 있는 소드마스터였고 블라드는 이제 프라우센과 자신의 사이에 놓인 간극을 인정해야만 했다.
“키하노는 어떻게 했었어요?”
[무엇을?]“가장 완벽한 용이요.”
이제야 무릎에서 고개를 뗀 블라드는 옆에 앉아 있는 키하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죽였어요? 분명 감당하기 힘든 적이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로 옆에 키하노가 있다는 것.
뒷골목의 소년이었을 적과는 달리 이제는 물어볼 대상이 있는 블라드는 나보다 앞서 있는 키하노를 향해 어떻게 그 길을 걸었는지 묻고 있었다.
“지금의 나보다 더 힘들었을 것 아니에요?”
[······그랬었지.]블라드의 물음에 키하노는 입맛을 쓴 듯 입술을 훑고 있었다.
바로 나오지 않는 그의 대답에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어머니 세계수 아래서 맴도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이길 수 없었지.]“하지만 죽였잖아요.”
[그래. 죽이긴 했지. 이기진 못했어도.]먼 옛날을 기억하는 키하노의 눈빛이 멀어지고 있었다.
열릴 듯 떨어지지 않는 키하노의 입술이 지금 그가 얼마나 많은 고민에 휩싸여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키하노가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금 고개 숙인 블라드를 바라보는 키하노의 눈빛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알려줘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지금 고민하는 이 젊은 녀석에게 이 세상에는 옳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전에 보니 프라우센의 심장에 용의 조각이 박혀있더군.]어린아이들에게는 그저 바르고 옳은 것만 가르치면 된다.
그러나 옳은 방법으로만 살아갈 수 없기에 언젠가는 이런 방법도 알려줘야 하는 때가 오는 것이다.
험난한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하는 갓 어른이 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살다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어쩌면 정도(正道)가 아닌 사도(邪道).
오랜 고민 끝에 입을 연 키하노의 이야기 속에는 고귀한 소드마스터의 위명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 날의 기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우리 아침에 보지 않았던가. 블라드 경.”
어느새 떠오른 정오의 태양이 창을 넘어 백작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의 끝에는 아침까지만 해도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던 블라드가 앉아 있었다.
“아침에 보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졌군.”
“죄송합니다. 백작님.”
아른슈타인 백작은 아직도 숨이 차는지 어깨를 들썩여대는 블라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노인까지도.
잔뜩 흐트러져 있는 블라드의 모습도 모습이었지만 정작 백작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잔뜩 엉망이 되고만 라두의 몰골이었다.
“······그에게는 포로의 권리가 있었을 텐데?”
라두를 살피는 백작의 얼굴에 조금씩 실망한 기색이 떠오르고 있었다.
블라드의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던 백작으로서는 지금 보이는 우격다짐이 영 반갑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형을 형이라고 못 부르게 해서.”
“음?”
북부에서 자란 탓일까.
북부인들에게서 보이는 흉폭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블라드를 보며 조금은 실망한 백작이었으나 블라드의 입에서 나오는 변명은 꽤 의외의 것이었다.
“이제야 찾은 혈육이 저를 경원시하기에 그만 서러움이 터져 나왔나 봅니다. 부디 제 실수를 용서하십시오.”
“······오. 그래.”
들려오는 블라드의 말에 과연 그 수가 있었냐는 듯 백작의 눈빛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지금의 변명이라면 그 누구라도 블라드의 행동을 질타하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을 터였다.
“이 미친 새끼가! 왜 자꾸 나보고······.”
“하긴 형제 싸움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백작님! 어째서 북부의 야만인 따위에게 저희 드라굴리아의 핏줄을 붙이시는 겁니까!”
“······.”
씩씩대는 라두를 보며 백작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둘 다 같은 푸른 눈동자였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백작의 온도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뭐 집안 사정이야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닐 테고, 나는 그저 드라굴리아 공작의 여성 편력이 화려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지.”
“······.”
백작의 말에 씩씩대던 라두의 입이 닫히고 말았다.
방금 나왔던 말대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이 바로 용혈공의 화려한 연애사일 것이다.
그리고 라두 본인 또한 그런 복잡한 사정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으니 백작의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을 찾을 길이 없었다.
“사실 명분이라는 것이 그렇네. 같은 명분이라도 지금처럼 우선시 되는 것이 있고, 때로는 아예 맞물려 버리는 것들이 있지. 모든 상황에서 딱딱 끊어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야.”
잘했다는 듯 블라드를 향해 눈길을 한 번 준 백작은 이번에는 라두를 향해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자네는 정말 옆에 있는 블라드 경이 동생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당연하신 말씀을!”
“그렇다면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군.”
라두의 단호한 대답에 어깨를 으쓱인 백작은 서랍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어 라두를 향해 들어 보였다.
“방금 말했다시피 핏줄만큼이나 우선시 되는 명분이 딱히 없어서 말이지.”
여기 좀 보라는 듯 백작이 흔들어대는 편지에는 라두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문양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불을 뿜어대는 용의 목 위로 살벌하게 그어진 선 하나.
드라굴리아 가문을 뜻하는 문장을 알아본 라두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드라굴리아가 피에르 주교의 행적을 알아챈 모양일세. 나보고 이곳에 있는 자네를 내어달라더군.”
“저, 저······.”
“참고로 용살기사단은 이미 반나절 거리에 와닿아 있네.”
드라굴리아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라두의 안색이 새파래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이끄는 선봉자가 아마 미르셰아라지?”
“동생아.”
이 땅의 주인조차 보호해주기 힘든 혈육이라는 명분.
게다가 그 명분을 들고 오는 자가 아버지와 가장 닮았다 알려진 미르셰아라니.
재빨리 사태를 파악한 라두가 비장한 눈빛으로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이 형은 어서 빨리 북부로 가고 싶구나. 사실 평소부터 북쪽의 하얀 설원을 동경하고 있었단다.”
“······염병하네. 진짜.”
또다시 와인통에 저며질 것인가 아니면 블라드를 동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너무나 쉬운 판단이었기에 라두의 행동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 라두를 보며 블라드는 그저 질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
수도 브리간테스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제국 가도(街道)를 관통하는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제국에 사는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깃발을 들고 달려나가는 그들의 이름은 용살 기사단.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앞서 달리는 미르셰아의 푸른 눈동자에는 차갑게 서린 분노가 가득해 보였다.
“멈춰라! 여기서부터는 아른슈타인의 영지다!”
성문도 아니었건만 용살 기사단을 막아서는 무리가 있었다.
가도를 틀어막은 관문소의 모습이 엉성한 것으로 보아 누가 보아도 기사단을 막으려 하는 의도가 엿보이는 자들이었다.
“내 이름은 미르셰아다. 미르셰아 드라굴리아.”
그리고 미르셰아 또한 그런 의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내리자마자 흩뿌려대는 용의 기세에 아른슈타인의 기사들이 움찔댈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지금 미르셰아가 보이는 기세는 심상치 않은 것이었으며 과연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다운 모습이기도 했다.
“백작께는 이미 기별을 드렸다.”
“무슨 기별을?”
그러나 아른슈타인의 기사들은 그 흉폭한 기세에 잠시 움찔은 했을지라도 절대 길은 비키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미르셰아의 명성에 비견될 만한 기사가 앞장서 있었기 때문에.
“영지를 방문한 목적을 상세히 설명해라. 미르셰아 드라굴리아.”
등에 메고 있는 커다란 방패가 인상적인 기사.
아른슈타인의 파블로는 가지고 있는 장대한 체구만큼이나 쉽게 빈틈을 보여주지 않은 채 미르셰아를 상대하고 있었다.
“가문의 일이다.”
“드라굴리아의 일을 어째서 아른슈타인에서 찾지?”
으르렁대는 용 앞에서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성벽 하나.
천천히 방패를 빼 드는 파블로의 모습에서는 미르셰아에 대한 압박감 따위는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행방불명 된 내 동생에 관한 일이다.”
“그러니까 그 동생을 왜 우리 영지에서 찾느냔 말이다.”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마주 보는 둘 사이에서 숨도 쉬기 힘든 만큼의 긴장감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대단한 긴장감이었는지 대장들의 명령이 없었음에도 주위의 기사들이 절로 검을 빼 들 정도였다.
“······나는 피에르의 행적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왔다. 그러니 더이상 나를 자극하지 마라. 아른슈타인의 파블로.”
“증거?”
상속권에 민감한 제국의 관습상 도망친 혈육을 쫓는 추적자에게는 길을 내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
그러나 아른슈타인 백작은 그 길을 내어주지 않기로 했다.
“증거가 어찌 되었건 백작님께서는 이 땅 위에 용의 발톱이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했다.”
그것은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지고만 용혈공과의 관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기대를 거는 블라드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백작의 확실한 결정만큼 파블로의 태도 또한 단호했고 마주한 미르셰아 또한 그들의 결심을 눈치챌 수 있었다.
“백작께서는 제국의 관습을 무시하시는군.”
“무장한 인원을 무턱대고 남의 땅에 들이대려는 네놈들만큼이나 할까.”
딱히 입 밖으로 내뱉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전쟁은 시작된 뒤였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미르셰아와 파블로는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이곳이 전장이라는 듯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미르셰아! 미르셰아 드라굴리아!”
중부의 모든 영지들이 이어져 있다는 제국 가도.
그 오래된 길 위에서 위험한 불씨 하나가 떨어지려 하는 순간, 아른슈타인의 영지 쪽에서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찾는 라두 드라굴리아는 내가 데리고 있다!”
검은 말 위에 타고 있는 누군가가 흔들어대는 자그마한 깃발.
수많은 문양들이 박혀있는 깃발들의 모습은 분명 미르셰아에게 있어서는 낯익은 것이었다.
“······블라드?”
오직 북부의 기사 블라드 아우레오만이 들 수 있는 자신만의 깃발.
그 깃발 아래로 보이는 블라드를 알아본 미르셰아는 그만 낭패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동안의 경험상 저 녀석이 보이는 순간부터 일이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두 드라굴리아는 나와 함께 북부로 간다! 그 누구의 명령도 아닌 나 블라드 아우레오의 판단으로!”
아른슈타인도 북부정교회도 아닌 오직 나 아우레오의 이름으로.
“라두를 찾고 싶다면 나를 따라 북부로 와라!”
“······이런.”
굳이 명분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블라드를 보며 미르셰아는 당했다는 듯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아무리 제국의 관습이 보장하는 미르셰아의 권리라 할지라도 같은 핏줄인 블라드의 앞에서만큼은 무력한 명분이 되고 말테니까.
“이 정도면 되겠어요?”
[훌륭하지. 이 정도면.]손님으로 환영받았으나 정작 잔뜩 피해만 입히고 말았다.
그러니 가는 자리만큼은 말끔히 치워주고 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일 것이다.
“마지막까지 감사합니다. 파블로.”
멀리 떨어져 있어 들리지는 않았겠지만. 블라드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위해 나서주는 파블로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히이이잉-
고삐를 잡아당기자 기다렸다는 듯 누아르가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을 향해서.
“됐냐? 됐어?”
“친한 척하지 말지?”
다만 말을 타고 달려나가는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방금 블라드가 말했던 북쪽을 향해 있지 않았다.
마법사와 이단 심문관, 그리고 젊고 늙은 용 두 마리.
그들이 향하는 곳은 북쪽이 아닌 그곳의 정반대인 남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