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12
무법자들의 도시 (1)
길었던 겨울이 끝나가는 시점이었지만 스투르마에는 여전히 차가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겨울이 쉽게 물러가지 않는 북부의 특징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저택 곳곳에 물든 우울함까지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서류가 많군.”
낮이었지만 볕이 충분하지 않은 어두운 집무실.
그곳에서 펜을 잡고 있던 루트거는 자신의 양옆으로 쌓여 있던 서류 더미들을 돌아보며 다시금 얼굴을 굳혔다.
“끝이 없어. 끝이.”
하룻밤을 새워서 처리했던 일들이었건만 또다시 쌓여버린 오늘의 과업들.
또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서류들을 보며 루트거는 정신을 못 차리겠다는 듯 마른세수를 하는 중이었다.
똑똑똑.
“들어와라.”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작고도 경쾌했다.
이미 발걸음 소리로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파악한 루트거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루트거 님. 여기 계셨군요.”
“요즘에는 항상 여기 있다. 나에 관한 관심이 줄었나 보군. 도로테아.”
농담 삼아 말하고 있었으나 정작 웃고 있는 입술 끝이 씁쓸해 보였다.
급변하는 정세만큼이나 늘어가는 업무들.
루트거를 마주한 도로테아는 우울해 보이는 듯한 그의 태도에 잠시 입을 오물거리고 말았다.
“전해드릴 전보가 있어요.”
“누구한테?”
“블라드······ 경한테 온 전보에요.”
그렇기에 서둘러 내놓은 블라드라는 이름.
말도 제대로 타지 못했던 녀석에게 경이라는 존칭을 붙이려니 영 어색했지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루트거를 보니 조금은 보상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지? 녀석이 나한테 따로 연락할 일이 있었나?”
루트거에게 있어 블라드라는 이름은 분명 반가운 것이었지만 그만큼 걱정되는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 저택을 떠도는 우울감이 시작된 곳이 바로 블라드의 옆에서부터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제프 때문인가?”
“아니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도로테아는 들고 왔던 쪽지들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가 태어난 부족에 대해서 물어보더군요.”
“너의 부족?”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루트거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제프의 일도 아니고 라두와 피에르와 관련한 일도 아닌 뜬금없이 도로테아에 관해서라니.
“그래서 대답해줬나?”
“······뭐. 말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다른 인종들과 달리 본래의 터전을 잃고만 수인족들은 끊임없이 이 도시 저 도시를 배회하고는 했다.
그런 수인족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같은 부족민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올해에는 도시 나마르카에 있다고 하더군요.”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한 곳에 멈춰서 있었다.
도시 나마르카.
중부에서도 남쪽 부근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
그러나 루트거의 시선은 도로테아의 손가락이 아닌 그녀가 내려놓은 블라드의 전보에 쏠려 있었다.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어도 어련히 잘하겠지.”
짧은 문자만을 주고받을 수 있기에 고작 몇 마디만을 적을 뿐일 마법 전보였다.
그렇기에 치밀하게 적어놓을 수밖에 없는 전보였지만 블라드의 말끝에는 분명 누군가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 또한 적혀있었다.
고작 몇 마디뿐일 인사였지만 지금 기력을 잃고 만 옥사나에게는 이만큼 위로가 되는 인사도 없을 것이었다.
※※※※
“나마르카인지 니미르카인지 왜 이렇게 깊숙한 곳에 있는 거야.”
잔뜩 얼어있던 땅이 녹아가는지 걷는 길이 온통 진창이었다.
말을 타고 있었음에도 허벅지까지 튀어 오르는 진흙들에 라두는 인상을 구기며 투덜대고 있었다.
“계속 투덜댈 거면 북쪽으로 가든가.”
“······.”
그러나 옆에서 들려오는 스산한 목소리에 라두는 재빨리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향하는 목적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부로 향하는 것보다는 나았기 때문이었다.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왜 이렇게 극단적이지? 북부인들은 다 이런가?”
“응. 다들 엄청 극단적이야. 그러니까 제발 닥치고 있어.”
극단적일 뿐만 아니라 지랄 맞기까지 하다.
그러나 나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블라드였으니 라두는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북부로 돌아가자니까. 왜 자꾸 용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지 못해 안달인 거냐?”
“늦었잖아요. 갈 수가 없다는데 어떡해요.”
아른슈타인의 영지에서 떠나온 일행은 지금 북쪽이 아닌 오히려 남쪽에 있는 도시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피에르도 꿍얼대기 시작했지만 블라드가 이곳으로 향하는 데는 분명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마커스가 말해주기를 이미 북쪽으로 가는 길에 용혈공 파가 쫙 깔려있다고 했단 말이에요. 고작 우리 가지고 그거 다 뚫고 갈 수 있겠어요?”
“빌어먹을. 하여튼 용놈 새끼들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니까!”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말 아니죠?”
아른슈타인 백작령은 중부에서도 중앙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
그 말은 블라드가 안전한 북부로 향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중부의 영지들을 거쳐 가야 한다는 소리였고 결국은 용살기사단의 포위망을 뚫기 힘들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블라드는 처음부터 북쪽으로 향할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른슈타인 백작님께서 직접 적어주신 영지들이 있어요. 앞으로 우리는 그분께서 알려주신 대로 궁정공 파가 있는 영지들을 따라서 북부로 가게 될 겁니다.”
최대한 믿을 수 있는 길을 따라서 안전한 곳만을 택하겠다는 블라드의 말에 피에르조차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보입니다! 저기 나마르카예요.”
“아아. 오늘은 여관에서 잠들 수 있겠군.”
라두가 내쉬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앞장선 니벨룬의 손끝으로 어지러이 펼쳐진 도시가 보였다.
허접하기 그지없는 목책으로 둘러쳐진 도시는 위태로워 보였지만 정작 그 안에서 바글대는 사람들의 모습은 온통 분주한 곳이었다.
“······나마르카라.”
누아르와 함께 언덕 위에서 나마르카의 정경을 보고 있던 블라드는 어딘지 모르게 진하게 느껴지는 고향의 냄새에 사납게 웃기 시작했다.
“저기를 보니까 오랜만에 마음이 차분해지네.”
도시 나마르카.
주변에 있는 세 명의 영주들이 모두 자신들의 도시라 우겨대는 곳.
그렇기에 오히려 아무도 지배하지 못하고 있는 나마르타를 주변의 사람들은 무법자들의 도시라 부르고는 했다.
※※※※
“어디 가는데?”
“알게나 뭐야.”
“······나 경비병인데?”
“아 그래?”
성문 같지도 않은 목책을 지나가던 블라드는 자신을 붙잡는 사내를 보았다.
이곳저곳 빠진 이빨이 인상적인 경비병은 자신을 무시하는 블라드의 태도가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옆에 있는 놈들이랑 구별이 안 되잖아.”
아무리 정신 나간 영주라 할지라도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만큼은 제대로 된 장비를 채워서 내보내는 법이었다.
그러나 도시 나마르카는 영주는커녕 범죄조직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었으니 경비병들의 차림새가 불한당들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였다.
“신분증.”
“없어.”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블라드였지만 경비병은 그럴 줄 알았다는 자연스럽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전직 뒷골목 출신이 생생하게 재현한 일행의 모습은 지금 성문 앞에 늘어선 사람들과 비교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기에 경비병 또한 딱히 경계심을 보일만 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요즘 통행료 시세가 어떻게 되는데?”
“선제시.”
“아 진짜 이러지 말지.”
과연 불한당들의 도시.
북부에서는 불문율이나 다름없는 선제시를 외치는 그 모습에 블라드는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넘기며 이마를 긁어댔다.
들어 올린 머리 덕에 보이는 훤칠한 얼굴이 인상적이긴 했으나 잔뜩 어두운 때가 묻어있는 미소만큼은 출신을 물어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날 것의 느낌이 가득해 보였다.
“늙은이 둘에 고양이 하나, 그리고 애송이라······.”
거리낌 없는 블라드의 태도에 경계심을 푼 경비병은 뒤에 늘어서 있는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요란하게 기침해대는 늙은이들과 사시처럼 동공이 흐트러져 있는 수인족 사내를 보니 딱히 뜯어먹을 것도 없어 보이는 한심한 일행이었다.
“은화 세 개. 늙은이들은 그냥 하나로 쳐줬다.”
“장사 잘하시네. 받으셔.”
능숙한 손길로 경비병의 품에 은화를 쑤셔 넣은 블라드는 서둘러 일행들을 관문 안으로 집어넣었다.
분노로 인해 부들대는 피에르가 잠시 뻗대고 서 있었으나 경비병의 눈에는 그저 깡말라 있는 키 큰 노인이었을 뿐이었다.
“저, 저 무도한······.”
“참으셔야지 어쩌겠어요. 여기를 지나가야 다음 영지인데.”
애써 피에르를 어르며 들어간 나마르카의 광경은 과연 기대한 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온통 타락한 도시로다. 신께서는 오늘도 나를 시험에 들게 하시니.”
조금의 틈만 보여도 달라붙는 거지들과 벌써부터 웃통을 벗은 채 골목 곳곳에 서 있는 창녀들의 모습.
게다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취객들의 모습은 시체인지 아닌지 구분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라두. 이리 와 봐.”
“······나보고 형이라며?”
피를 이은 형을 강아지 부르듯 부르는 블라드였지만 라두는 딱히 불만을 내비치지 못했다.
미르셰아를 따라가면 죽고 북부로 올라가면 평생을 갇히게 될지도 모르니 붙어있을 사람이라고는 오직 블라드뿐이니까.
“이거 주머니에 넣고 잠깐 길거리에 서 있어봐.”
“음?”
도시의 지리는 잘 몰랐지만 뒷골목 때의 경험을 통해 나름의 흐름을 찾아낸 블라드는 이제 인간들보다는 수인족들이 많아 보이는 대로 앞에 서 있었다.
길을 따라 미묘하게 구분 지어진 분위기는 분명 여기서부터가 수인족들의 영역임을 나타내는 중이었다.
“이건 왜?”
“아직 잘 모르나 본데 북부인들은 성격도 급하거든.”
“······그래?”
“빨리 가봐.”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돈주머니를 쥐게 된 라두는 영문도 모른 채 대로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모든 것이 어색하다는 듯 길가에 서 있는 라두의 모습은 길을 잃어버린 노인의 모습 바로 그 자체였다.
“······그냥 육체만 늙어버린 게 아닌 모양이네.”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에 서서 라두를 지켜보던 블라드는 혀를 쯧하고 차고 말았다.
나름 용살기사단을 이끌기도 한 인물이었으나 지금의 라두는 방금 자신을 스쳐 지나간 소매치기 하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가나 보자.”
인파에 섞여 물 흐르듯 걸어가고 있었으나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는 확실히 보고 있었다.
긴장한 듯이 쫑긋 솟은 귀와 함께 잔뜩 흔들려대는 어린 수인족 녀석의 꼬리를 말이다.
쫓아오는 이가 없는지 두리번거리던 어린 소매치기는 방금 자신이 라두에게 들려주었던 주머니를 확인하고는 어두운 골목 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있었다.
※※※※
새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어지러운 골목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잔뜩 차오른 숨이 녀석이 얼마나 달렸는지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어린 고양이의 속도는 전혀 줄어듦이 없었다.
“이런 젠장!”
익숙한 골목을 따라 담을 넘고 몸을 숨긴 어린 소매치기였지만 이윽고 들려오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여기야?”
“······!”
어두운 골목 속에서도 환히 보이는 금발과 푸른 눈동자.
여태껏 달려온 것이 헛수고였다는 듯 소매치기를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빛에는 오히려 장난기까지 깃들어 있었다.
“멍청하긴! 여기까지 따라 들어오네!”
그런 블라드를 보며 어린 소매치기는 실실 웃기 시작했다.
아까 보인 놀란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어느새 짙은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의 뒤로 대기하고 있던 다른 수인족 청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놈들이 있다니까.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돈만 쫓아다니는······.”
“그래. 다 알아. 나 일부러 유인한 거.”
그러나 블라드는 꼬마의 비웃음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더 부를 형들은 없냐? 가능하면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는데.”
호르헤는 말했었다.
자기가 미끼인 줄 모르는 미끼야말로 최고의 미끼라고.
블라드는 자신을 루가족이 머무는 골목 깊숙한 곳까지 인도해 준 어린 소매치기를 보며 히죽 웃어줄 뿐이었다.
블라드가 웃고 있는 이 골목은 수인족들의 영역.
그중에서도 도로테아의 부족인 루가 족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