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13
무법자들의 도시 (2)
도시 나마르카.
정당하고도 적법한 주인이 없어 오직 무법만이 판치고 있는 곳.
그러나 아무도 지배하는 이가 없음에도 저절로 만들어져 가는 혼란 속의 질서는 분명 블라드에게 낯익은 것이었다.
“······너 형들이 꽤 많구나?”
그렇기에 잠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이곳 나마르카의 골목 또한 내가 태어났던 곳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비슷하다 할지라도 정작 속까지 똑같은 건 단 하나도 없는 법이었다.
“보통 대부분의 수인족들은 모계 사회를 형성하거든요. 그래서 부족의 아이는 모두의 아이이기도 한 셈이죠.”
굳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니벨룬의 설명이 없었어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새 어린 소매치기의 뒤로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수인족 사내들이 늘어서 있었으니까.
고작 어린 소매치기 하나를 위해 거의 백여 명이 튀어나와 버린 지금의 상황은 쇼아라의 뒷골목에서라면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광경이었다.
“······모두의 아이라는 어감은 좋네.”
그렇지만 미리 알았다면 더 좋았겠지.
점점 사나워지는 분위기를 감지한 블라드는 두 손을 들어 올리고는 멋쩍은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애를 괴롭히려던 건 아니고, 사실 도로테아의 소개로 여기까지 찾아온 건데······.”
절대로 이분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 돼.
그런 마음가짐으로 도로테아의 이름까지 꺼내 본 블라드였지만 그러나 정작 돌아오는 것은 더욱 날카로워지고만 루가 족 사내들의 눈빛뿐이었다.
“······도로테아가 뭘 잘못한 모양이네?”
부족의 아이는 모두의 아이.
그러나 블라드는 홀로 밖에 떨어져 있는 아이가 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는 것까지는 짐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
검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동료들과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창살 안에 갇힌 신세가 반갑다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애초에 북부로 갈 생각이 없었던 거지?”
“······.”
“영악한 놈. 처음부터 혼자 해 볼 요량이었군.”
블라드의 돌발 행동 덕에 루가 족의 감옥 안에 갇히고 만 피에르는 이제야 사태를 파악했다는 듯 마른 침을 내뱉고 말았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순리에 어긋나는 일은 결국 어딘가에서라도 탈이 나는 법이거늘.”
블라드에게 속아 온당한 목적지로 향하지 못했던 피에르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더욱 매몰차게 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블라드가 어째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저는 라두가 필요했으니까.”
블라드는 바로 앞에서 쭈그려 앉아 있는 라두를 보며 입을 열었다.
기력이 쇠했는지 갇혀 있는 와중에도 잠에 빠져들고만 라두.
드라굴리아의 일원이자 용혈공의 심복이었던 그는 분명 중요한 증인이자 정보원이었지만 북부 연합이 정말 그를 사특한 존재들을 잡기 위한 단서로 쓸지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검은 여자를 찾기보다는 용혈공을 상대하기 위한 도구로 쓰겠죠. 이제 전쟁이 다가왔으니까요.”
대의보다는 이익을 위해서.
차가운 푸른 피를 가진 귀족들은 판단의 우선순위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귀족들에게 있어서 자연재해와도 같은 사특한 무리들은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용혈공의 위협에 비한다면 후순위의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라두를 북부 연합으로 보냈다가는 라마슈트와 관련된 조사는 전쟁이 끝난 뒤에나 시작되고 말 거에요.”
직접 습격을 당했었던 아른슈타인 백작조차도 라마슈트의 무리를 쫓기 보다는 바로 옆에 있는 영주들의 움직임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궁정공 파의 거두라 할 수 있는 아른슈타인 백작조차도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모든 신경을 빼앗기고 있었으니 중부와 직접 맞상대를 하려 하는 강철공의 판단이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블라드 아우레오.”
텅!
순간, 잔뜩 녹슨 창살을 때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블라드는 창살 밖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루가 족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일어나라. 대모(大母)님께서 보자고 하신다.”
행동은 불손하고 목소리는 날카로웠지만 블라드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사내가 말한 대모라는 단어에 집중했을 뿐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한껏 돌아오고 말았지만 결국 만나고자 하는 대상과 마주할 수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너도.”
“저요?”
그러나 루가 족 사내는 블라드만을 끄집어낸 것이 아니었다.
옆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니벨룬까지 함께였다.
“저는 왜요?”
“나오라면 나오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냥 왜냐고 물어본 것뿐인데.”
잔뜩 날이 선 사내들의 재촉에 감옥에서 나온 블라드와 니벨룬은 건물 밖으로 나와 다시금 어지러운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람을 가두는 곳과 대모가 있다는 곳은 서로 떨어져 있던 모양이었다.
‘처음에 있던 곳에서 더 남쪽인 것 같은데.’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빼곡히 들어찬 건물들의 위로 조각나 있는 하늘을 보았다.
힐끔 보이는 해의 위치를 확인한 블라드는 오래된 버릇을 따라 지금 자신이 처음 있던 곳보다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들어가라.”
“······흠.”
그리하여 골목 깊숙한 곳에서 마주한 대모의 집은 블라드가 난생처음 보는 특이한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주변의 건물들처럼 보잘것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굳이 바닥을 띄워 지면 위로 얹어놓은 방식은 북부에서는 전혀 보지 못했던 모양새였다.
“벌레나 뱀 때문에 이렇게 짓는 거예요.”
“벌레?”
“남부 정글에는 독을 가진 벌레들이 많거든요.”
원래 있던 곳이 아니기에 굳이 이렇게까지 지을 필요는 없었겠으나 가진바 뿌리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생소하게 느껴지는 수인족들의 관습에 블라드는 낯설어했으나 그것도 등 뒤를 찔러대는 창끝이 없을 때나 그럴 수 있는 법이었다.
“손님 대접이 거치네.”
“손님이 아니라 암만 봐도 포로 같거든요.”
강요에 의한 재촉에 블라드는 허접한 발판을 밟아 올라갔다.
문대신 달아놓은 넓적한 나뭇잎을 들어 올리자 그 안에는 희뿌연 연기들이 가득했다.
“······.”
“어서 들어와라. 애써 만들어 놓은 연기가 새어나가지 않느냐.”
바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깔린 연기였다.
코끝으로 맴도는 냄새에 희미한 담배 향이 섞여 있었으나 고작 담배 연기만으로는 이렇게까지 만들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 도로테아의 소개를 받아 왔다고?”
그 연기 한 가운데에는 한껏 늙어버린 노파가 앉아 있었다.
머리띠 한가운데 커다란 새의 깃털을 꽂아 넣은 그녀는 세월에 의해 잔뜩 눌어붙은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는 북부에서 온 낯선 손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개까지는 아니고······.”
“고얀 년. 떠날 때도 요란하게 가더니 보내오는 손님 또한 아주 불길한 놈을 보냈구나.”
“그렇게까지 잘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
가래가 잔뜩 섞인 목소리는 여느 늙은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정작 그 안에 깃든 울림만큼은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자신만의 세계를 의지하는 블라드는 몰랐겠으나 같은 신비를 공유하고 있는 니벨룬만큼은 지금 눈앞에 있는 노파가 얼마나 대단한 신비를 품고 있는 존재인지 눈치 챌 수 있었다.
“사실 부탁할 것이 있어서······.”
“너는 말하지 마라.”
이곳에 온 목적을 설명하려던 블라드였으나 어느새 자신의 입술 앞까지 다다른 노파의 담뱃대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딱히 입을 열지 않았음에도 주름이 가득한 노파의 얼굴은 이미 잔뜩 일그러져 확연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흐르는 대로 찾아왔으니 쫓아내지는 않겠지만 네놈이 내뱉는 숨결 하나하나가 아주 독하다.”
강제로 블라드의 입을 닫게 한 노파는 이번에는 고개를 잔뜩 수그리고는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니벨룬을 바라보았다.
“네가 말해 봐라.”
“제가요?”
“그래. 네가 해 봐.”
다시금 담뱃대를 가져온 노파가 그곳에 잎을 꾹꾹 밀어 넣고는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용이 입을 열면 용이 듣는다. 그러니 저놈 대신 네가 말해봐라.”
후욱-
“저 멀리에 있는 용이 너희들의 목적지를 알기 전에.”
앙상한 담뱃대에서부터 커다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고작 한 번의 내쉼이었으나 어느새 크게 피어오른 담배 연기가 블라드의 곁을 머물며 주위를 빈틈없이 감싸기 시작했다.
“······!”
마치 희뿌연 안개처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만 짙고도 고요한 안개 속에서 블라드는 그제야 자신에게 따라붙은 희미한 시선을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도 노파가 경계하는 그 시선은 두 눈을 통해서가 아닌 블라드가 품고 있던 용의 세계를 통해 달라붙은 것이었다.
※※※※
“신비로군.”
수도 브리간테스에 있는 드라굴리아의 저택.
왼쪽 눈을 감고 있던 용혈공 사르누스는 아쉽다는 듯 웃으며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잔망스러운 고양이 놈들. 그때 다 불태워버렸어야 하는 거였는데.”
수백 년도 더 지난 먼 옛날을 기억하던 사르누스는 그때처럼 또다시 자신을 가로막은 신비를 보며 혀를 끌끌 차고 말았다.
역시 녀석들의 땅만 가라앉힐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다 끄집어내어 목을 잘라버렸어야 하는 거였다.
“거기 누구 있느냐.”
“네 공작님.”
“가서 마법사를 불러와라. 미르셰아에게 연락을 취해야겠다.”
도망친 라두를 잡기 위해 보냈던 미르셰아는 지금 북쪽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고 했었다.
그러나 정작 찾고 있던 녀석들은 북쪽이 아닌 바로 코앞으로 기어들어 와 있었으니 그 깜찍한 선택에 사르누스는 절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제야 네가 보이는구나. 아들아.”
다른 세계들과는 다르게 본래 용의 세계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왜냐하면, 용으로 태어난 모든 존재들은 결국 완벽함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게 되어 있으므로.
그리고 가장 오래된 용인 사르누스는 그 시선들을 이용할 줄 아는 유일한 용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신도.”
취한 듯 손을 휘적여대던 사르누스는 내려 놓았던 와인잔을 든 채 창가로 다가섰다.
저 멀리 지는 해와 함께 물들기 시작하는 수도의 어둠.
한 손으로 뒷짐을 진 채 다가오는 어둠을 바라보던 사르누스는 지금 보이는 풍경만큼이나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는 누군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애써 봤자 소용없을 거요. 이제 당신은 영광스러운 소드마스터가 아니니까.”
용의 세계를 통해 바라본 다섯 개의 조각들.
그중에서도 유난히 빛을 잃고 있는 조각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죽음에서 돌아온 자가 품고 있던 조각이었으며 이제 다시는 자신에게 금제를 가할 수 없는 자격 없는 자가 들고 있는 조각이기도 했다.
“와인 맛이 좋군.”
이제 더는 나를 막을 자도 없고, 나를 강제할 자도 없다.
흡수한 용의 조각을 통해 상대를 확신한 사르누스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는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용의 조각이 있기에 이제는 마시지 않아도 되는 와인이었지만 새로 뜯은 와인통에서 나오는 풍미만큼은 여전히 참기 힘든 것이었다.
검은 벼락을 타고 온 남자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느껴진다.
앉아있는 바닥에서도 어쩐지 새파란 풀 내음이 올라오는 것만 같다.
짙은 연기로 인해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방 안이었지만 블라드는 어쩐지 자신이 숲속 한가운데 앉아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해봐라. 부르군드 족의 아이야. 지금 저 용이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왔는지.”
신비로 만들어 낸 연기를 통해 사르누스의 시선을 차단한 대모였지만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블라드의 발언을 제한했다.
오래 산 만큼 많은 일을 경험했던 그녀는 완벽함을 향한 용들의 집착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블라드 님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말해도 되겠냐는 듯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는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두와 피에르와는 공유하지 않았지만 니벨룬만큼은 블라드의 대략적인 목표에 대해서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참이었다.
“아주 오래된 신비를 구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루가 족이 오랫동안 품고 있는 신비요.”
“무슨 신비?”
블라드의 사정이었지만 니벨룬의 목적이기도 했다.
잊혀진 신비들을 찾아 방랑하던 마법사는 어느새 반짝반짝해진 눈으로 노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 강렬하기에 가장 완벽한 존재마저 해치고 만 신비.”
이제는 전설이라 말해도 될 정도로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전해져 오던 이야기가 있었다.
누구는 어린아이들이나 들을 법한 이야기로 치부할 일이었으나 이제 니벨룬은 그 이야기가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옛날, 가장 완벽한 용을 죽였던 신비 말입니다.”
가장 완벽한 용을 죽였던 신비.
마치 독처럼 발려 소드마스터의 검을 타고 들어가 가장 완벽한 용의 심장을 멈추고만 수인족들의 마법.
오래된 그 신비를 물어보는 낯선 손님들을 보며 루가 족의 대모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인제 보니 고작 허무맹랑한 옛이야기를 따라온 아이들이었군. 가장 오래된 용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이기 때문에 그랬을까.
니벨룬의 눈빛은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정작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던 대모는 그저 어이가 없다는 듯 홀홀 웃어댈 뿐이었다.
인자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웃음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던지 대신 말을 전한 니벨룬 조차 자신의 행동이 머쓱해지고 마는 그런 웃음이었다.
“가장 완벽한 용을 죽인 신비라니. 그런 것은 없어. 그런 건 그저 아이들을 위한 동화일 뿐이야.”
그러나 니벨룬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담배 연기를 내뿜어대는 노파의 숨소리가 더욱 부지런해졌다는 것을.
잔뜩 쪼그라든 폐로 애써 신비를 내뱉는 대모의 모습을 보며 뒤에 앉아있던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알고 계시네요.”
“······입 열지 말라고 했잖느냐.”
“그거 동화 아니라는 거.”
“너는 말하지 말라니까!”
촤악-!
블라드가 계속 입을 열자 잔뜩 놀라고만 대모가 타고 있던 장작 위로 물을 흩뿌렸다.
무언가가 두렵다는 듯 서두르는 몸짓으로.
치이익-
요란히 들려오는 물 끓는 소리와 함께 방 안 가득히 수증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예 먹먹해지기까지 한 방 안의 공기에 언제나 태평했던 니벨룬조차 당황하기 시작했다.
“고얀 놈. 고작 허튼소리나 찾아와 폐를 끼치는구나.”
“허튼소리 아닙니다. 루가 족의 마법사가 소드마스터의 검에 각인을 새겨준 거 맞잖습니까.”
“감히 네까짓 게 무언데 나의 말이 틀리다 확신하는 게냐. 지금 땅 위를 거닐고 있는 자들 중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자는 오직 용혈공 사르누스 뿐일 텐데!”
루가 족의 대모가 애써 예전의 진실을 부정하려 하는 것은 지금도 밖에서 뛰놀고 있는 어린아이들 때문일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 오래된 용인 사르누스는 자신이 그 옛날의 가장 완벽한 용이 되기를 꿈꾸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가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신비를 루가 족이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지금도 위태로운 부족의 미래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먼 옛날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오직 용혈공 뿐만은 아닐 겁니다.”
스르릉-
벼락과도 같은 대모의 호통에 이어지고 마는 깊고도 짙은 침묵.
그러나 블라드는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대모를 보면서도 그저 조용히 자신의 검을 내밀뿐이었다.
날카로움을 통한 위협이 아닌 그저 여기를 봐달라는 듯한 그런 손짓과 함께.
“내 안에 깃든 존재 또한 그 순간을 지켜봤던 사람이니까요.”
자작거리며 타오르는 장작의 빛을 따라 은은하게 비치는 용살검의 은빛.
방 안 가득한 안개조차도 감추지 못한 그 빛의 끝에는 블라드가 품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있었다.
“그가 말하길 저의 검에 다시 한번 그때의 각인을 새겨달라고 하십니다.”
세워진 은빛의 길을 따라 블라드가 품고 있는 푸른 눈동자 안으로.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고 있기에 전혀 흔들림 없는 블라드의 세계는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맑아 루가 족의 대모가 들여다보기에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세상에.”
그리고 대모는 그 호수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를 마주할 수 있었다.
훤칠한 키에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
너무나 깊은 곳에 있기에 목소리까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가 들어 올린 은색의 기억에는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오래된 루가 족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완벽함을 더럽히기 위해 만들어진 신비.
차라리 저주라 불러야 할 그 마법은 분명 루가 족 역사상 단 한 번만 이루어졌던 술식이기었고 단 한 명에게 그려진 각인이기도 했다.
들고 있는 것은 은색의 검.
품고 있는 자는 소드마스터.
그러나 타고난 피는 용의 피.
푸른 호수 속에서 빠져나와 이제야 현실 속에서 마주한 블라드를 보며 루가 족의 대모는 지금 자신이 어떠한 존재를 마주하고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아······.”
이제야 알아봤다는 듯 블라드를 바라본 대모의 입에서 그녀가 두려워하던 이름 하나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그 이름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소드마스터처럼 너무나 오래되어 더이상 아무도 말하지 않는 그런 이름이었다.
“가장 완벽한 용.”
오롯이 서 있는 완벽함을 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 완벽함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세계를 더럽히는 방법뿐이다.
그 순수함을 더럽히기 위해 먼 옛날의 소드마스터는 가장 완벽한 용의 세계에 쉽게 지워지지 않을 불순물을 하나 집어넣기로 했다.
깊게 꽂혀진 은색의 기사를 따라 루가 족이 새겨넣은 각인을 타고.
그렇게 완벽한 용의 세계로 집어 넣어진 불순물의 이름은 바로 명예로운 기사 키하노였다.
※※※※
그날은 태양이 가려지는 날이었다.
떠오르는 달에 의해 이제는 희미한 금색의 고리만을 남긴 태양은 시들어가는 꽃처럼 자신의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키하노. 결국 이곳까지 왔군요.”
심장에 꽂아 넣은 검을 따라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다.
그러나 흐르는 그 피가 아무리 붉다 한들 지금 이곳에 흐르는 수많은 핏물들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모두를 희생시킨 건가요.”
“······희생한 게 아니야.”
지금도 언덕 위를 힘없이 쓰러져 있는 시체들이 있었다.
키하노의 등 뒤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시체들은 방금까지만 해도 거친 함성을 부르짖던 그의 부하이자 동료들이었다.
“그들이 선택한 거지.”
인간, 엘프, 드워프, 그리고 수인족들까지.
이제는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그들의 희생으로 키하노는 드디어 이 순간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들이 열어준 길이 있었기에 세상의 명운을 짊어진 결투사는 드디어 가장 완벽한 용의 심장에 자신의 검을 꽂아 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완벽하기에 불멸한 존재예요. 당신들의 희생은 나에게 있어서는 그저 하룻밤의 꿈일 뿐이에요.”
정작 자신의 심장에 검이 꽂혀 있었음에도 가장 완벽한 용은 오히려 온통 엉망이 되고만 키하노가 안쓰럽다는 듯 그를 쓰다듬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지워지는 얼굴의 핏물에 여태껏 감추고 있던 키하노의 표정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서 준비한 거야. 지금의 검을.”
웅웅-
꽂아 넣은 은색의 기사가 울고 있었다.
핏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만큼이나 점점 찢겨 가는 자신의 주인을 느끼면서.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세계의 균열은 맞닿아 있는 은색의 기사도 고통스러워할 정도로 거대하고도 처절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너는 이제 더는 완벽해질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먼 훗날까지 따라간 내가 다시 너를 찢어버리고 말 테니까.”
키하노의 말과 함께 검에 새겨진 각인이 빛나고 있었다.
검이 가진 은색의 빛과는 어울리지 않는 음울한 빛과 함께.
각인에 새겨진 검은 번개의 문양이 천천히 빛을 발하며 가장 완벽한 용의 심장에 치명적인 독을 주입하고 있었다.
“너에게 보내는 나의 이름은 키하노다. 결투사 키하노.”
완벽한 너의 세계에 나를 보낸다.
네가 다시는 떨쳐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을 향해서.
가장 완벽한 용은 자신의 세계를 파고드는 키하노의 세계를 느끼며 그만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칼끝이 차가워요.”
“······.”
“자꾸 눈꺼풀이 무거워져요.”
“······그만 자 둬.”
힘이 빠져가는지 키하노의 고개가 점점 허물어지고 있었다.
“다시 깨어날 때 너는 네가 아니게 될 테니까.”
“내가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해주세요.”
점점 내려가는 키하노의 고개를 붙잡은 가장 완벽한 용이 물었다.
“당신이 본 나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완벽하기에 이 세상 모든 모습을 품을 수 있는 용.
어떤 이에게는 욕망이며 어떤 이에게는 분노, 그리고 또 어떤 이에게는 공포였던 가장 완벽한 용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키하노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보였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영원히 알려주지 않을 거다.”
그드득-!
그러나 키하노는 가장 완벽한 용이 원하는 마지막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잡고 있던 검을 용의 심장을 향해 힘껏 밀어 넣었을 뿐.
그와 함께 떨어져 나간 키하노라는 세계가 은색의 검 끝을 통해 가장 완벽한 용의 세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키하노-! 안 돼!”
가장 완벽한 용의 마지막 떨림을 보며 저 언덕 아래서 목줄 잡힌 사르누스가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이루지 못한 꿈처럼 산산이 부서져 아무도 없는 언덕 위를 맴돌았을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양이 사그라들어가는 이 언덕을 기어 올라왔음에도 결국 남아있는 자는 단 두 명뿐.
아니, 한 명하고도 반쪽뿐.
이제는 깊이 잠들어버린 가장 완벽한 용을 내려다보며 텅 빈 표정의 프라우센이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
진창 위에 쓰러져 있는 소년이 있었다.
차가운 길바닥이었으나 아무도 다가가 주지 않는 그 아이의 이름은 블라드였다.
“저놈이 갑자기 왜 쓰러졌대?”
“아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쳤더라고.”
몰려든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기이한 현상에 감히 다가가지도 못한 채 몸을 움츠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방금 벼락의 색깔이 까맣지 않았어?”
“그러니까. 혹시 저주라도 받은 것 아니야.”
그 날, 소년은 벼락을 맞고 쓰러졌다고 했다.
보기에도 불길해 보이는 검은 벼락이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놀랐는지 아직도 반쯤은 떠져 있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
그 눈동자가 쓰러진 그 순간까지도 담고 있던 것은 뒷골목에서도 유일하게 빛나고 있던 장식 없는 검의 모습이었다.
높디높은 곳에 매달려 있지 않았어도 빛나고 있던 장식 없는 검의 모습.
영원히 완벽해지지 않은 소년이 검은 벼락을 맞았던 그 날은 그가 자신의 가슴 속에 자그마한 별을 품었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