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14
목줄 죄인 용들 (1)
붉은 단풍잎이 휘날리는 어머니 세계수 아래에서, 키하노는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 앉아있는 블라드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이의 세계까지 도망쳐 와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블라드의 뒷모습이 꼭 자신의 옛 모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프라우센의 심장에 용의 조각이 박혀 있더군.]입을 떼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쉽사리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블라드의 뒷모습을 보며 키하노는 말해주기로 했다.
비록 옳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블라드가 품고 있는 고민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잠시라도 좋으니 그 조각을 멈추게 할 수만 있다면 프라우센 또한 눈을 감게 될 거다.]건국왕이자 소드마스터.
비록 비루하게 되살아난 프라우센이었지만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넘을 수 없는 벽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이제 더 이상 정석적인 방법만을 추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키하노는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요?”
[너의 세계를 쪼개.]되살아난 소드마스터가 아닌 그가 품고 있는 용의 조각을.
이미 완벽함을 훼손해 본 경험이 있던 키하노만이 제시해 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렇게 쪼개진 너의 세계를 통해 조각이 가진 완벽함에 흠집을 내는 거다.]블라드는 평소와는 다른 것 같은 키하노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키하노라는 존재는 블라드에게 있어 언제나 옳고 바른 길만을 알려주던 등대와도 같은 사람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저 사납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의 세계에 상처입히기 위해서는 나 또한 상처를 각오해야 하는 법이지.]그렇게 마주 본 키하노의 눈동자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블라드가 감히 짐작하기 힘든 그 슬픔의 깊이는 아주 오래전의 기억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으며 이제는 냉혹한 현실을 헤매야만 하는 어린 기사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기사 블라드. 너는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상처 입을 각오가 되어 있나?]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상처 깊은 자가 묻고 있었다.
앞으로 자신을 대신해 상처 입을 자를 향해서.
“······.”
‘당신의 눈에는 지금 나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나요.’
블라드가 보이는 긴 침묵 속에서, 키하노는 그 옛날 자신이 마주했었던 가장 완벽한 용을 떠올렸다.
찬란한 가능성이었기에 어떠한 모습이든 될 수 있었던 가장 완벽한 용은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정작 본인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지 못했던 존재였다.
“······너무 그렇게 배려해줄 필요는 없어요. 키하노.”
그러나 침묵 끝에 나온 블라드의 대답은 그때와는 달랐다.
“저는 애초에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한 사람이잖아요.”
같은 존재에서 비롯되었지만, 전혀 다른 대답.
블라드가 말하는 지금의 대답에 키하노는 그때 자신이 택했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키하노에 앞에 있는 블라드는 그때의 가장 완벽한 용과는 달리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
“비켜라!”
“경비병들은 성문을 열어라!”
블라드와 대모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던 그때, 도시 나마르카의 성벽에서는 누군가 만드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대략 열댓 마리는 되어 보이는 말들이 질주하며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그러나 정작 성문을 지켜야 하는 경비병들은 뛰어드는 말들을 막아서기는커녕, 앞서 보이는 깃발을 보며 서둘러 몸을 피할 뿐이었다.
“용살기사단?”
“아니 이 사람들이 왜······.”
마땅한 주인이 없기에 책임질 사람도 없는 도시.
그 도시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오는 깃발들이 있었다.
앞에 있는 그 누구라도 베어 넘길 듯 서슬 퍼런 기세로 치켜세워진 깃발에는 용의 목을 가르는 긴 선이 그려져 있었다.
“어디냐. 블라드.”
이제야 들어선 도시를 바라보며 미르셰아의 눈빛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었기에 확연히 느낄 수 있는 블라드라는 존재가 그의 심장을 뛰게 했기 때문이었다.
“······저기로군.”
아버지인 용혈공만큼은 아니었지만 미르셰아 또한 드라굴리아의 피와 교육을 온전히 이어받은 적장자.
감은 왼쪽 눈을 통해 용의 세계를 탐색하던 미르셰아는 저 멀리 보이는 골목 끝에서부터 황금색 세계가 일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곳에만 머물러 있구나. 블라드.”
지니고 있는 피는 고귀하고 내뿜고 있는 빛은 화려했음에도 자신의 동생은 여전히 추레한 곳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비록 대적해야 할 녀석이긴 했으나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미르셰아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타고 있던 말의 고삐를 잡아 쥐기 시작했다.
“가자.”
“네. 단장님.”
그 오랜 세월 동안 따뜻한 안식 한번 없이 정처 없이 떠돌기만 했던 루가 족의 마지막 안식처.
그곳을 향해 움직이는 용의 깃발이 불길하게 까닥거리고 있었다.
지금 용살기사단을 이끌며 앞으로 나아가는 미르셰아의 눈빛처럼.
※※※※
“대모님!”
온통 굳어버린 방 안의 공기를 깨뜨리는 다급한 목소리가 있었다.
열어젖힌 방 안의 분위기는 그 누구라도 쉽사리 방해할 만큼 녹록한 것이 아니었지만 지금 들어선 수인족 사내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용살기사단입니다! 용살기사단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
블라드 안에 있는 키하노를.
그리하여 키하노를 품고 있던 블라드가 어떠한 존재인지까지도 간파하고 있던 루가 족의 대모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불길한 소식에 들고 있던 담뱃대를 내려놓았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군.”
블라드를 바라보는 대모의 눈빛이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방금, 눈앞에 있는 블라드가 얼마나 신비로운 존재인지를 깨달았다고 하지만 결국 용들은 자신들에게 있어 그저 불길한 존재들일 뿐이었다.
“너희들은 언제나 우리들의 터전을 짓밟고 마는구나. 아주 오래된 옛날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
용들에 의해 짓밟힌 가능성들이 수없이 많다고는 하지만 터전을 잃다 못해 바닷속에 가라앉히고만 수인족들만큼이나 처절하게 당한 자들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원한 때문에 저주와도 같은 신비를 소드마스터에게 전해준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는 밖에 있는 자들과는 다릅니다. 어디까지나······.”
“네가 아무리 입으로 설명해 봤자 나는 너를 모른다.”
밖에서 들리는 고함 소리들이 커지고 있었다.
항거할 수 없는 존재들의 갑작스러운 난입에 루가 족의 수인들이 내지르는 혼란한 비명이었다.
“그러니 너의 단검을 다오.”
“단검······은 갑자기 왜?
아무리 다르다고 말해도 루가 족의 대모에게 있어 눈앞에 있는 블라드의 면(面)은 그저 용이었을 뿐.
그것도 보통 용이 아닌 타고난 핏줄을 통해 다시금 이어지고만 가장 완벽한 용의 잔재가 바로 대모가 파악해 낸 블라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마주친 사태는 급박하고 마땅히 도움을 요청할 곳은 없었으니 루가 족의 대모는 결정해야만 했다.
“나를 이해시키고 싶고, 용을 죽일 각인 또한 받아 가고 싶다면 어서 줘야 할 것이다.”
그 말과 함께 루가 족의 대모는 머리띠에 꽂아 넣은 커다란 깃털을 뽑아내고는 옆에 놓여 있던 새까만 염료 통에 담그기 시작했다.
고작 살짝 집어넣었을 뿐인데도 화려했던 깃털이 새까매지는 것이 아무래도 신비를 통한 술법인 듯싶었다.
“손에 쥔 것은 절대 놓지 않는 탐욕스러운 존재들이 바로 용이지. 왜냐하면, 그들은 모은 것들을 통해 완벽함에 다가가려 하거든.”
루가 족의 대모는 그렇게 물든 깃털을 들고는 블라드의 단검에 무언가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그저 잉크를 통해 그려 넣는 그림일 뿐이었으나 어째서인지 호르헤의 단검에는 확고한 무늬로 자리 잡고 마는 그런 그림이었다.
“그렇지만 너는 다르다고 했으니 이것으로 한번 증명해봐라.”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긴박한 외침 속에서 드디어 그려지고 만 호르헤의 단검에는 어느새 새까만 각인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고작 겉에 대고 그렸을 뿐이었으나 망치로 박아넣은 것만 같이 확고히 자리 잡아 버린 그 각인은 마치 삐죽삐죽 튀어나온 올가미와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과연 네가 다른 용들과 다른 녀석인지.”
“······.”
단검을 받아든 블라드는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루가 족의 대모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누지 않기에 오직 소유할 뿐인 용이라는 존재들.
그러나 루가 족의 대모는 너의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용의 본능조차 잠재워야 한다고 말하는 중이었다.
※※※※
“끄으으으······.”
감옥 안에 앉아 있던 라두는 갑작스레 느껴지는 오한에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얼굴마저 새하얗게 질려가는 것이 누가 보더라도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모양새였다.
“왜 그러는 거냐? 감기라도 걸린게야?”
“흐으으······. 왔소, 왔어.”
옆에 있던 피에르가 벌벌 떨어대는 라두에게 다가갔지만 정작 그가 떨고 있는 오한의 근원은 병이 아닌 공포에 의한 것이었다.
“근, 근처에 미르셰아, 미르셰아가 왔소.”
“······!”
용혈공 다음으로 가장 용의 피를 진하게 이었다는 드라굴리아의 아들.
아무리 잔뜩 약해지고 말았다지만 라두 또한 같은 용이었기에 미르셰아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시시각각 다가오는 그의 존재감은 라두에게 있어서는 그저 사형선고와도 같은 것일 뿐이었다.
“지금 당장 나가야 해, 나가야······.”
“경비병!”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피에르가 감옥 밖에 있을 간수들을 불러대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저 텅 빈 침묵뿐이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뛰쳐나간 간수들 탓에 지금 감옥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는 오직 피에르와 벌벌 떨어대고 있는 라두 뿐이었다.
“블라드! 여기다!”
그러나 피에르의 외침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횃불 너머 어둠에서부터 다급히 달려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익숙한 그 그림자들을 보며 피에르는 여기라는 듯 마구 손을 흔들어댔다.
“열쇠 없어요?”
“애초에 열쇠가 있었으면 갇혀 있었겠느냐!”
“그럼 비켜봐요.”
콰지직-!
멍청한 블라드의 물음에 버럭 화를 내고만 피에르였으나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창살들을 보고서는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녹슨 창살이라지만 휘두르는 블라드의 검 앞에서는 마치 수수깡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어나 봐.”
“크윽!”
감옥 안에 들어선 블라드는 미르셰아가 왔다며 여전히 벌벌 떨고 있는 라두를 강하게 잡아 세웠다.
안 그래도 잔뜩 늙어버린 라두는 그런 블라드의 우악스러운 손짓에 대롱대롱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너 피 뺏겨서 이렇게 됐다고 했지?”
“그, 그렇지.”
라두를 노려보는 블라드의 눈빛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같은 용이기에 느낄 수 있는 그 눈빛이 라두의 영혼 속에 자리 잡고 있던 공포의 편린들을 천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럼 다시 젊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뭐?”
녀석들을 골목 안으로 유인해!
일단 대모님부터 챙겨라!
감옥 밖에서부터 들려오는 고함들이 커지고 있었다.
이제는 그저 들려오는 소리만으로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용살기사단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고 블라드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시 피 먹으면 돼? 그러면 젊어져?”
“······.”
“그러면 미르셰아는 몰라도 다른 기사들은 막을 수 있겠어?”
라두 드라굴리아.
푸른 눈은 이어받았으나 찬란한 금발까지는 이어받지 못한 반쪽짜리 서자.
비록 지금은 자신의 아비에게 온통 가능성을 빼앗기고 말았다지만 그에게도 찬란히 빛나던 기사로서의 시간이 있었다.
“당연하지. 용살기사단 내에서 나 라두 드라굴리아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아버지와 미르셰아뿐이었다!”
오만하기는 했어도 어느새 제 모습을 되찾은듯한 라두의 호언장담에 블라드의 표정에 아주 잠시 웃음이 감돌았다.
그러나 웃고 있는 표정과는 달리 어느새 블라드의 손에는 깊게 베인 상처가 자리 잡았을 뿐이었다.
“내가 너에게 이 피를 주는 이유를 잊지 마라.”
“······!”
기괴한 각인이 새겨진 단검을 따라 감옥의 바닥으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
그 안에서 찬란히 빛나는 용의 가능성을 알아본 라두의 눈이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의 용을 잡아도 얻을 수 없을 진득한 용의 피.
그 피가 지금 처연하게 떨어지며 라두를 유혹하고 있었다.
“나를 도와 용살기사단을 막는 거다. 라두 드라굴리아.”
“큽! 흡!”
숨 쉴 새도 없다는 듯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들을 향해 입을 벌리는 라두.
작디작은 방울이었지만 그것을 한 방울씩 넘길 때마다 충만해지는 나의 가능성에 라두는 다시금 자신이 용이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크으으아!”
울대가 꿈틀거릴 때마다 점점 길어지는 송곳니와 점차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온몸의 근육들.
그리고 블라드의 피를 넘길 때마다 목 주위에 자리 잡아가는 기묘한 모양의 문신들까지.
“이런.”
자신의 가능성을 나눠주는 블라드와 그것을 게걸스럽게 받아먹는 라두를 보며 피에르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야로 라두의 목 주위에서 점점 퍼져나가는 기묘한 각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각인들은 마치 가시덩쿨로 만들어진 올가미처럼 천천히 라두의 목 주위로 새까맣게 퍼져나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