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15
목줄 죄인 용들 (2)
더럽고도 그늘진 골목이었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발끝에 쓰레기들이 걸리고 마는 그런 골목.
그러나 지금 그 골목을 뛰어가는 이들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다급함이 깃들어 있었다.
“조용히! 놈들이 근처에 있어!”
사내들이 내뱉는 긴밀한 경고에 사람들의 입에서는 다시금 억눌린 신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노인들과 여자들,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이제야 정들법한 골목을 다시 떠나야 하는 그들이었지만 용살기사단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조금의 아쉬움조차도 사치인 법이었다.
“여기 있었군.”
그러나 애써 숨죽인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골목을 가로막는 남자가 있었다.
흉갑에 새겨진 드라굴리아의 문양을 내세운 사내는 눈앞에 있는 루가 족 피난민들을 보며 고개를 까닥이는 중이었다.
“생긴 것은 고양이인데 하는 짓은 쥐새끼로구나.”
비웃음을 머금고 있는 사내의 등 뒤에서는 이제야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연기가 가득했다.
매캐한 담배 향을 머금은 연기들은 조금씩 골목들을 뒤덮고 있었으나 이제 막 튀어나온 기사의 시야까지는 가리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하여튼 수인족 녀석들은 잠시만 눈을 떼도 이렇게나 새끼들을 낳아대는군.”
칼날과도 같이 스산한 기사의 시선에 수인족 아이들이 굳은 듯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 그 차가운 눈빛에 압도된 듯한 그런 모양새였다.
“······음?”
자신을 막아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칼을 빼 든 루가 족 사내들의 행동이 우스웠다.
그러나 용살기사단의 기사는 그들이 보이는 허접한 모습에 웃음 지을 수가 없었다.
“누구냐.”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느낄 수 없었던 기척이었건만 지금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시선은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점점 더 짙어지는 중이었다.
“예의가 없는 녀석이로군.”
“······!”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차오르는 연기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색깔은.
희뿌연 풍경 속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그는 사내도 익히 알고 있는 남자였다.
“남의 이름을 물어보기 전에 본인의 이름부터 말하는 것이 기본 아닌가.”
전혀 낯선 곳에서 보는 익숙한 얼굴에 사내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라두 드라굴리아는 이미 생기를 빼앗겨 다 죽어가는 노인의 모습이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라, 라두 드라굴리아?”
“나를 알아보는 걸 보니 용살기사단은 맞는 모양이군.”
골목을 통해 쏟아져 내리는 연기를 밟으며 라두가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서 어찌할 줄 몰라하는 기사를 향해서.
그렇게 점점 가까워지는 라두의 모습에서는 어째서인지 조금의 쇠약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나를 알아봤으면 진작에 도망을 쳤어야지.”
콰드득-!
“크헉!”
오히려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흉악한 기세였다.
그 기세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기사였지만 가슴을 파고드는 섬뜩함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자신이 알고 있던 라두라면 절대 낼 수 없는 속도였건만 어느새 그의 푸른 눈동자는 바로 앞에 다다라 있었기에.
“끄으으······.”
“나 라두 드라굴리아라니까.”
사냥감을 희롱하듯 실실 웃어대는 라두의 표정이 창백했다.
그러나 비죽 튀어나온 송곳니만큼은 지금 막 피를 삼키기라도 했다는 듯 붉은 기가 머물러 있었다.
“어디 보자.”
“끄으으억!”
라두는 기사를 꿰뚫은 검을 높게 들어올렸다.
숨조차 내쉬지 못한 채 버둥거리는 남자의 몸짓이 애처로웠지만 라두는 그저 미소 지으며 흘러내는 핏물들을 차분히 감상할 뿐이었다.
“······이제 다른 피들은 봐도 별 감흥이 없는데.”
그 어느 때보다 시퍼렇게 빛나는 자신의 눈동자와 함께.
촤악-!
심드렁한 눈빛과 함께 기사를 반쪽으로 갈라버린 라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금 희뿌연 연기가 가득한 골목으로 걸어들어갔다.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다스리는 라두의 잔혹한 모습은 그야말로 드라굴리아가 요구하는 용의 모습 그 자체였다.
※※※※
“······.”
미르셰아는 죽어있는 루가 족 사내를 조용히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마지막까지 담벼락에다 그리려 했던 기이한 문양을 보는 중이었다.
“마법이로군.”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쥐고 있던 백묵을 놓지 않았던 루가 족 사내.
그가 담벼락에 문양을 그려 넣자마자 미르셰아가 있던 골목에서는 희뿌연 연기가 몽실몽실 피어오르기 시작했었다.
마치 담배를 태우면 나는 연기처럼 매캐함을 품고 있는 그 연기에 미르셰아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꽤 고매한 마법사.”
고개를 돌린 미르셰아는 어느새 바뀌어버린 풍경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눈을 깜빡이는 이 짧은 순간에도 쉼 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골목길의 모습.
누군가가 방 안에서 담뱃재를 털어댈 때마다, 혹은 폐에 가득 모아두었던 연기를 내뱉을 때마다 앞에 있는 풍경들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끄아아악-!
이 자식! 넌 누구냐!
곳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익숙했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거리를 짐작할 수 없는 그 비명들의 메아리는 미르셰아의 신경을 자극하고는 곧 사라지기 시작했다.
“꽤 많이 컸군. 훌륭해.”
가만히 서서 사태를 파악해보던 미르셰아는 그 비명들을 끊은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루가 족의 신비는 분명 훌륭한 것이었지만 자신의 직속 기사들을 가를 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비루한 골목길에서 루가 족을 위해 대신 검을 휘둘러 줄 검사라면 역시 그 녀석밖에 없을 터였다.
“그래. 역시 너 일줄 알았다.”
과연 미르셰아의 추측이 맞다는 듯 저 멀리 있는 골목에서부터 희뿌연 인영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안개를 뚫고 걸어 나온 남자는 미르셰아와 마찬가지로 금발과 푸른 눈을 지닌 사람이었다.
“몇 명이나 베었나?”
“대충 6명 정도.”
본인의 부하들을 베었다는 말이었지만 미르셰아는 만족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역시 나와 같은 핏줄이라면 제국의 최정예 기사라도 가를 줄 알아야 한다는 듯 그렇게.
“나머지는 어찌하려고.”
“라두가 알아서 할 거야.”
여전히 검에 맺혀있는 핏방울들을 무심히 휘둘러낸 블라드는 미르셰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피 좀 먹였더니 나름 쓸만하더라고.”
“······하.”
미르셰아는 라두에게 자신의 피를 나눠주었다는 블라드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너도 이제는 용이라는 자각이 있을 텐데?”
피를 통해 이어지는 완벽함은 모든 용들이 집착할 수밖에 없는 본능 같은 것이었다.
애초에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기에 자신의 가능성을 나누려 하지 않는 태도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블라드의 대답은 미르셰아가 기대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남의 피까지 빨면서 살고 싶지는 않거든.”
그드드득-
어느새 잔뜩 힘을 준 디딤발 주변으로 주변의 흙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블라드의 감은 왼쪽 눈에서부터 황금색 선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물감처럼 번져 내린 그 선은 지금도 땅에 떨어지지 않은 채 블라드의 곁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너희들처럼은 살지 않으려고.”
안개 가득한 공터 위에서 블라드는 말하고 있었다.
나는 물려받은 내 피가 원하는 대로는 살지는 않겠노라고.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씌워진 목줄을 끊어내겠다는 듯 지금 블라드는 단 한 번의 일격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
콰아아앙-!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거대한 소리가 도시 나마르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애써 만든 결계조차 잡아내지 못한 이 소리는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이런.”
모두가 떠난 방 안에서 신비를 지피고 있던 루가 족의 대모는 잔뜩 구부러지고 만 담뱃대를 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루가 족의 대모들이 대를 이어가며 평생 부려왔던 도구였건만 지금 들려오는 단 한 번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가장 완벽한 용이로구나.”
그리고 가장 고귀한 기사.
둘 중의 하나만이어도 세상이 놀랄만한 일이었지만 블라드는 그 모두를 품고 있었으니 루가 족의 대모는 그가 가진 잠재력에 그만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까아아앙-!
“이번에는 무엇이 될까. 무엇이.”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가장 완벽한 용이었다.
그러나 저번 시대의 가장 완벽한 용은 오직 홀로 날기 위해 이 세상 모든 가능성들을 깔고 앉았으니 수인족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족들은 아직도 그때의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부디 당신의 결정이 맞길 바랍니다. 고귀한 기사시여.”
그 말과 함께 잠시 망설이던 루가 족의 대모는 떨리는 손길로 담뱃대에 담겨 있는 재들을 털어내었다.
가리려 해도 가릴 수 없는 블라드의 꿈틀거림은 이미 저 멀리에 있을 가장 오래된 용조차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
콰가가가각-!
건물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질서가 없기에 온통 난립하고만 나마르카의 뒷골목이 내는 비명이었다.
“많이 컸군!”
비록 상대를 칭찬하고 있었으나 지금 보이는 미르셰아의 표정에는 평소에 부리던 여유는 온데간데없어 보였다.
피하기에는 너무 빨랐고 흘려내기에도 너무 무거운 블라드의 일격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루트거가 없어도 되겠어!”
강철공의 도시인 바스토폴에서 블라드는 미르셰아의 밑이었다.
루트거와 함께해야만 겨우 자신과 대적해볼 만한 수준의 녀석이었건만 지금의 블라드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수준에 다다른 것만 같았다.
콰아아앙-!
블라드가 휘두르는 우악스러운 검세에 미르셰아는 다시금 건물들을 부수며 주욱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무너지는 건물들이 만드는 자욱한 돌먼지 속에서도 블라드가 만드는 황금빛 실선은 선명했으니, 그것은 마치 지평선에 걸려있는 빛무리처럼 미르셰아의 시선을 잡아끄는 중이었다.
“싸우는 중에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대견해서 그렇지.”
“대견하기는 염병하고 있네.”
그러나 블라드의 세계를 통해 떠오르려는 빛은 어쩐지 오늘만큼은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먹먹해 보였다.
“어차피 나도 잡아먹으려고 만든 거 아니야?”
내비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블라드의 목소리에는 용혈공을 향한 어쩔 수 없는 원망이 깃들어 있었다.
“남의 입으로 내 출생의 비밀을 들으니까 그렇게 엿 같을 수가 없더라고.”
블라드가 간직한 분노만큼이나 맞닿은 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힘의 균형에 미르셰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우리 엄마만 불쌍했던 거였지. 돼도 않는 나를 낳느라고.”
창녀의 자식으로 태어났기에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딱히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라도 나중에 한 번 아버지라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술이라도 한잔 건네주지는 않겠는가 생각했을 뿐.
그러나 라두를 통해 마주하고 만 진실은 블라드가 여태껏 품고 있던 기대의 한 가닥조차도 처참히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나는 너희들이 싫다. 드라굴리아.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북부에 뿌려진 용의 씨앗. 블라드.
그런 나라는 사람이 태어난 이유가 고작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서였다니.
웅웅웅-
검이 울고 있었다.
주인의 분노와 슬픔을 이해하고 있던 용살검이.
나는 그렇게 살려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금발과 푸른 눈에게 외치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용
골목길에 가득했던 연기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저 멀리서 으르렁거리는 용들의 존재감이 대모가 만들어놓은 결계를 찢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됐나.”
그러나 지금 라두의 발밑에는 대모가 만들어 낸 새하얀 연기 대신 시뻘건 핏물들이 가득했다.
마지막 용살기사단원이 흘린 그 핏물은 라두가 블라드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증거임과 동시에 루가 족의 안전을 확보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거 영 꺼림칙한데. 나중에는 이게 막 내 목을 조르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바닥에 누워 있는 기사를 보던 라두는 자신의 목에 새겨진 문신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찌푸려댔다.
라두는 몰랐겠지만 마치 가시넝쿨로 칭칭 감겨진 듯한 그 불길한 문신은 가장 오래된 용을 묶고 있던 맹약과도 흡사하게 생긴 것이었다.
“음?”
콰아아앙-!
이제는 완전히 찢겨버린 결계 너머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오색창연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미르셰아의 세계는 흠 하나 없는 보석과도 같은 세계.
그 빛이 누구에서부터 새어 나왔는지를 알아챈 라두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랑 다르게 난 놈은 난 놈이었네.”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으나 나는 그저 반푼이였고 그는 완벽한 용이었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미르셰아의 진심 어린 세계를 끌어내지 못했던 라두는 저 멀리서 비치는 화려한 보석빛에 복잡미묘한 심경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쯤 해줬으니 됐겠지.”
블라드와의 약속을 지켰다 생각한 라두는 일행들이 움직이는 방향에서 슬쩍 빠져나와 반대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서슬 퍼런 북부도, 신비를 통해 목줄을 묶어 놓은 블라드도 전부 라두에게 있어서는 택하고 싶지 않은 선택지였기에.
“······!”
그러나 홀로 어두운 골목을 걷고 있던 라두는 잠시 멈춰서고 말았다.
어느새 서늘해진 뒷덜미가 그에게 강렬한 경고를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본능을 통해 알아본 경고의 주체.
라두는 목덜미를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는 소름과 함께 자신이 피를 빨리던 축축한 지하실의 공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
라두가 바라보는 다급한 시선의 끝에는 도시 나마르카에 있는 유일한 성문이 있었다.
성벽 밖에서부터 그곳을 향해 다가오는 깃발의 모습은 라두에게 있어 경외의 대상이자 또한 공포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었다.
※※※※
쾅! 콰앙! 쾅!
“크윽!”
두 개의 검이 맞닿을 때마다 새빨간 불꽃이 튀고 있었다.
그 불꽃이 튀어 나갈 때마다 미르셰아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 같은 신음을 질러대는 중이었다.
‘······조각의 힘이!’
오색창연한 자신의 세계를 개방한 뒤였지만 블라드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불타오르는 블라드의 검 끝에는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용의 기운이 맺혀있을 뿐이었다.
콰앙!
살벌한 쇳소리와 함께 미르셰아의 신형이 다시 한번 크게 휘청이기 시작했다.
더는 감당할 수 없는 블라드의 완력 때문이었고 맞닿을수록 점점 버거워지는 조각의 존재감 때문이기도 했다.
“······조각을 어찌한 거냐. 본래 이런 존재가 아니었을 텐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용의 조각을 휘두르는 본인이었지만 블라드는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만 미르셰아가 블라드의 검을 감싸고 있는 진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면 지금의 질문은 물어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불리하다.’
바르고 진실되었기에 옳은 길을 알려주는 명예로운 금속.
블라드의 검을 감싸고 있는 금속 때문에 조각의 영향을 받지 못하게 된 미르셰아는 시간이 갈수록 강인해지는 블라드의 기세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많이 준비해왔군.”
그리하여 깊게 감은 왼쪽 눈에서 다시금 떠오르는 세계.
쉬운 상대로는 절대 내비치지 않는 미르셰아의 보석빛 세계가 블라드가 그려놓은 황금빛 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빨리 끝내도록 하지.”
흠 하나 없이 드러난 미르셰아의 세계를 본 블라드는 잠시 입을 벌리고 말았다.
여태껏 진창을 굴러왔던 자신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그런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그걸 왜 네 마음대로 결정하는데.”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지고 싶지 않다.
나를 마음대로 내려다보려는 미르셰아의 세계 따위에게.
이를 악물어낸 블라드는 자신을 애써 밀쳐내려는 미르셰아의 반발력에 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잡은 기세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하는 그 탐욕스러운 자세는 타고난 본능과 더불어 여태껏 블라드의 스승들이 새겨놓은 가르침이기도 했다.
“아까는 용의 피가 싫다고 하지 않았나?”
“싫다고 안 쓰면 그게 병신이지.”
타고난 용의 피는 싫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여태껏 블라드는 있는 힘껏 팔을 뻗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에서 커온 사람이었으니까.
“난 여유 부리다 뒤지는 그런 놈이 되고 싶지는 않거든.”
끄드드득-
점점 밀려가는 검 끝을 보며 다시금 미르셰아가 이를 악물기 시작했다.
손에 쥔 것은 뭐라도 휘두르겠다는 블라드의 악다구니가 이제야 새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려받은 이 피라도 마음껏 써야 내 분이 풀릴 것 아냐!”
까가가각-!
나와 닮은 미르셰아의 푸른 눈을 보며 블라드는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가슴 속에 들끓는 이 분노를 세상 밖으로 내뱉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
“······!”
쾅! 쾅! 콰앙!
그리하여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연격의 연속.
숨 쉴 틈도 없이 치열하게 맞붙는 둘의 맞부딪힘에 나마르카의 뒷골목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쉴새 없이 만들어지는 강렬한 풍압에 주위의 건물들이 베어지고 내려앉으며 커다란 먼지의 구름을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틈을 노려야 한다!’
그 자욱한 먼지의 틈 속에서 미르셰아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지금도 나를 파고들려는 기세는 강맹했으나 블라드의 자세에는 그만큼 틈이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방이면 돼. 한 방이면.”
어떻게든 우격다짐으로 들이밀어 버리는 검회색 견갑에는 이미 칼자국이 가득했지만 한 발자국이라도 더 들어가고자 하는 블라드의 전진은 끊기질 않고 있었다.
견고한 미르셰아의 방어를 뚫기 위해서는 이제는 이 방법밖에 없다는 듯 블라드의 두 눈에는 이제 시꺼먼 광기마저 엿보이는 것 같았다.
“흐으으읍!”
그렇기에 지금 끊어내야 한다.
상대에게 더 기세를 내어주었다가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테니까.
블라드가 보인 틈 사이로 끼워 넣은 미르셰아의 검이 예리하게 그어지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블라드가 타고 있는 기세의 흐름은 끊어졌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번들거리던 블라드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 빛깔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게 할 줄 알았어.”
“뭐?”
검과 검의 싸움은 간격이 결정한다.
그러나 물러서는 미르셰아와는 다르게 무식한 전진으로 지금의 그림을 설계했던 블라드는 다음의 일격을 위해 재빠르게 몸을 움츠릴 뿐이었다.
펄럭이는 망토와 함께 잔뜩 자세를 낮춰버린 블라드의 자세.
마치 예측하기라도 했다는 듯 물 흐르듯 이어진 그 자세를 보며 미르셰아는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골목 가운데 깔린 연기들이 블라드의 검 끝에 몰려들며 기어이 응축된 원 하나를 만들어내었다.
점과도 같이 작은 원이었지만 미르셰아는 곧 그 끝에서부터 커다란 세계 하나가 솟아오를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는 모자랐지만 나는 오늘 너를 넘을 거다.”
미르셰아를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빛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치 세상이 멈춘 것만 같은 이 순간은 온전히 블라드가 벌어낸 것이었으니 미르셰아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드라굴리아까지도.”
모아낸 원을 통해 찔러낸 일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미르셰아는 지금 느끼는 고요함이 폭풍전야와도 같은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콰가가각-!
순간, 블라드가 그려낸 황금빛 지평선을 타고 루가 족의 신비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소리보다 빠르게 다가온 날카로운 선풍에 미르셰아는 감히 대처하지 못한 채 온몸에 붉은 핏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블라드!”
자신을 찢어발길 듯 불어오는 선풍에 미르셰아가 기어이 자신의 깊은 세계를 개방해 냈다.
그러나 누군가가 잘 깎아놓은 그 세계의 면면은 분명 화려하고도 완벽한 것이었을지라도 마주한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깨뜨려야 할 벽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흐으아!”
본능이라는 목줄을 풀어낸 용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타고난 욕망에 휘둘리지 않기에 어디에라도 닿을 수 있는 그 용은 밟고 있는 바람과 함께 지금 밑에서 반짝이는 보석 하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까아아앙-!
도시를 들썩이게 만드는 날카로운 검과 검의 소리.
그 소리와 함께 시작된 블라드의 폭풍이 미르셰아의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내가 증명해야 할 벽이었기에 자비 없는 블라드의 검 끝은 사정없이 미르셰아를 향해 파고들고 있었다.
※※※※
“······.”
마치 폭풍이라도 휘몰아친 것 같았다.
서 있는 블라드의 옆으로 원래 있던 건물들이 전부 눕혀져 있었으므로.
“누구냐.”
그러나 팽팽히 당겨진 블라드의 검 끝은 아직 미르셰아에게 닿지 못하고 있었다.
그 끝을 가로막는 반짝이는 검이 있었기에.
아무리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그 묵직한 무게감에 블라드의 등허리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누구야 넌.”
분명 나의 모든 세계를 힘껏 끌어올린 일격이었다.
그러나 그를 마주하고 있는 또 하나의 검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잔잔해 보였다.
그것은 곧 블라드와 이 검의 주인이 가진 격차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드디어 보게 되는구나. 아들아.”
그 말과 함께 마치 검술을 지도하는 듯 가볍게 들어 올려버린 검과 검.
강제로 올려진 검을 따라 치켜세워진 블라드의 고개가 어느덧 앞에 있는 남자의 눈동자를 향하고 있었다.
“그동안 꼭 한번 보고 싶었단다.”
금발에 푸른 눈.
그러나 나보다도 훨씬 짙은 그 색깔들.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본 블라드는 그가 품고 있는 색의 깊이에 그만 자신이 까마득한 절벽 밑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당장 도망쳐라! 블라드!]키하노의 날카로운 경고와 함께 들고 있는 검이 울고 있었다.
저 앞에 있는 남자가 품고 있는 조각을 알아봤기에.
그러나 그가 품고 있는 조각은 블라드의 것과는 달리 이미 형태를 잃어버린 채 흐르고 있는 혈관에 섞여 완전히 녹아있는 중이었다.
“용······ 혈공.”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나의 아버지.
“······사르누스.”
뛰고 있는 심장이 가리키는 그의 이름은 분명 용혈공 사르누스 드라굴리아였다.
자신의 이름을 읊조리는 아들을 보며 사르누스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집어넣었다.
“맞다. 내가 바로 사르누스 드라굴리아다.”
검을 집어넣었지만, 그가 가진 존재감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지금도 나의 안에 있는 키하노가 도망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까마득해 보이는 사르누스를 보며 감히 뒤돌아설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 지난 이야기들은 집에 가서 나눠보는 것은 어떠할까?”
블라드를 향해 웃고 있는 인자한 웃음 뒤로 따라 들어오는 드라굴리아의 깃발이 즐비했다.
고작 너저분한 도시를 점령하기에는 너무 많은 군사들을 보며 블라드의 두 발은 굳은 듯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블라드-!]올려다보면 올려다볼수록 거대해지고 마는 사르누스라는 세계.
그의 피에서 비롯되었기에 압도되고 만 자신의 기사를 대신해 블라드의 오른쪽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