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16
최고의 길잡이 (1)
그는 홀로 500년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온 이였다.
세상을 지배하던 용들의 번영과 몰락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지켜봤으며 새로이 열린 인간들의 시대 아래서 치욕을 맛보며 살아남은 존재이기도 했다.
[사르누스! 나에게 했던 맹세를 기억해라!]살아남았다는 것은 곧 증명이다.
먹고 먹히고 마는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남을 위해 소비되지 않았다는 증명.
그렇게 살아남은 사르누스라는 가장 오래된 용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자신만의 격을 쌓아 올린 존재이기도 했다.
“맹세?”
다급히 외친 키하노의 외침에 사르누스의 목덜미에서 기이한 문신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삐죽거리며 튀어나온 새까만 가시들이 주인 된 자의 의지에 따라 서서히 사르누스의 목덜미를 조이는 중이었다.
“······키하노?”
그토록 두려워했던 오래된 맹약이 다시금 자신을 조여 오자 사르누스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맺힌 당황은 지금 자신을 조이고 있는 목줄이 아닌 앞에 있는 금발의 기사를 향해 있는 중이었다.
“아아. 이런.”
흐르는 피 혹은 이어받은 의지로만 움직일 수 있는 그 옛날의 맹약.
그 맹약에 의해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제국에 충성했고 황실을 지켰었던 사르누스였다.
“당신이군. 당신이었어.”
우드드득-!
그러나 사르누스는 더 이상 그와의 맹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위협하는 목줄들을 조용히 잡아 뜯고 있었을 뿐.
“당신이었다면 이 모든게 다 설명이 되지.”
블라드의 안에 있는 키하노를 알아본 사르누스는 그제야 모든 일이 이해가 된다는 듯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용의 영혼 안에 깃들어 있는 가장 고귀한 기사의 흔적.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던 사르누스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희열을 감추지 않은 채 광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태어났군. 가장 완벽한 용이!”
도시 나마르카가 떨리고 있었다.
마치 지진과도 같이 격렬히 진동하는 도시의 울림은 차마 사르누스의 존재감을 감당하지 못한 대지가 내는 신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목에서부터 번져 온몸에서 튀어나오는 맹약의 가시들을 쉼 없이 뜯고 뜯어내고.
그럼에도 여전히 웃으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르누스를 보며 키하노는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도망쳐라!]지금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히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기에.
자신의 자존심조차 접어둔 채 달아나던 키하노는 뒤늦게 따라온 일행들을 향해 힘껏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서 돌아가!]온통 찢겨지고 만 자신은 더 이상 그의 격(隔)을 감당할 수 없노라고 말이다.
“키하노! 키하노 프라우센!”
올려다보면 볼수록 거대해지고 마는 가장 오래된 용의 존재감이 달아나는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지막 맹약의 가시로 인해 잠시 우뚝 멈춰서고 말았지만, 어느새 거대해진 사르누스의 그림자는 지금도 키하노의 뒤를 쫓아가는 중이었다.
“드디어 네가 나를 보며 달아나는구나!”
광활한 대지를 울리고 마는 가장 오래된 용의 광소.
살아남았기에 증명했고 완벽함을 하나 삼켰기에 높아진 그의 격은 이제는 가장 고귀한 기사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드높아져 있었다.
※※※※
블라드와 아니, 키하노와 합류한 일행들이 어딘가를 다급하게 뛰어가고 있었다.
여태껏 기다리고 있던 루가 족 전사의 도움을 받아 성벽 근처까지 다다른 그들은 가쁜 숨을 감추지 못한 채 자그마한 구멍으로 몸을 들이미는 중이었다.
“이게 뭐야? 개구멍이야?”
“그냥 빨리 가자구요!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에요!”
개구멍 앞에서 주저하는 라두를 보며 니벨룬이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평소의 그라면 보이지 않을 모습에 라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이미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젠장!”
고개를 들이민 라두는 성벽 바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피에르를 보며 자그마한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자신을 강철공이 있는 차가운 북쪽으로 데려가려 하는 괴팍한 이단심문관.
그러나 망설이던 예전과는 달리 그에게로 향하는 라두의 몸놀림은 그야말로 기민할 뿐이었다.
“온다!”
반푼이 용도, 신비를 좇는 마법사도 그리고 신실한 신의 사제까지도 모두 겁에 질려있었다.
다들 하나같이 굳건한 세계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지만 지금 그들을 뒤쫓는 용의 존재감에서만큼은 도저히 자유로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여기에 군대가?”
겨우 도시 밖으로 겨우 빠져나온 그들이었지만 안도의 한숨 따위를 내 쉴 시간은 없었다.
성벽을 낀 채 달려오는 군사들의 흙먼지가 바로 저 앞에 보이고 있었으니까.
“빨리 타요!”
“이게 뭔데?”
“이놈아! 묻지 말고 그냥 빨리 올라와!”
낡은 양탄자 하나를 바닥에 깐 채 그 위에 오도카니 서 있는 사내들의 모습이 우스웠다.
그러나 피에르에게 목덜미를 잡혀 끌려 들어온 라두는 곧 그 양탄자가 둥실 떠오르는 모습에 그만 기겁을 하고 말았다.
“이게, 이거 왜 떠?”
“탔다! 빨리 가자!”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라두의 물음을 뒤로 한 채 니벨룬의 양탄자가 황무지를 가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아슬아슬하게 떨어지는 수많은 화살들.
방금 자신들이 있던 자리에 빼곡히 꽂히고 만 화살들을 보며 라두는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왜 이런 곳까지 군대가 들이닥친 거죠? 우리를 잡으려고?”
양탄자의 끝자락을 모아쥐며 운전하고 있던 니벨룬은 저 멀리 보이는 군사들을 뒤돌아 보고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고작 우리 때문만은 아니겠지.”
니벨룬의 말처럼 점점 멀어지는 풍경 속에서 보이는 도시의 모습이 있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너저분한 도시였건만 지금 그곳에는 새까맣게 몰려든 중앙의 군사들이 가득했고 그 수는 어렴풋이 짐작해봐도 수만은 되는 병력이었다.
“드디어 준비가 된 거야. 북쪽으로 향할 준비가.”
옆에서 달려오는 기병들을 경계하던 라두는 검을 빼 들고서는 말을 이었다.
까앙-!
이제야 기회를 잡았다는 듯 양탄자로 달려들기 시작하는 기병들.
그런 그들을 거칠게 밀어낸 라두는 아직도 새까맣게 쫓아오는 기병들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북쪽이요?”
“북부 연합을 부수겠다는 의미다. 원래는 그놈들이 깃발을 세우기도 전에 와해시킬 생각이었지만.”
용혈공 사르누스와 함께 나마르카로 몰려든 군사들은 황실에서 직접 파견한 중앙의 군세였다.
황실뿐만 아니라 제국에 충성하는 모든 귀족 세력을 모아 북상하는 병력들은 지금도 시시각각 수도 브리간테스로 모이며 수를 불려 나가는 중이었다.
“······저기서 잘하면 나도 한 자리 차지 할 수 있었을 텐데.”
세차게 지나가는 바람을 향해 마지막 아쉬움을 토로한 라두는 바로 앞에서 다가오는 날카로운 검날에 과거의 영광이 아닌 현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거 더 빨리 못 나는 거냐!”
“사람이 너무 많단 말입니다!”
도시 모시암에 있었을 때는 하늘을 날았던 양탄자였다.
그러나 지금 타고 있는 인원은 라두와 루가 족의 사내까지 합쳐 두 명이 더 초과하였으니 하늘로 날아오르기는커녕 땅을 달리는 것조차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저 산까지만 가봐! 산까지는 말들이 못 쫓아올 테니까!”
나아갈 방향을 잡았다는 듯 라두는 손가락을 들어 저 앞에 보이는 산을 향해 가리키고 있었다.
일행을 기다리기라도 한다는 듯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 산은 거친 북쪽에서부터 시작된 산맥이기에 그 험세가 남다른 곳이기도 했다.
“빨리!”
일행의 말을 엿듣기라도 했는지 뒤쫓아 오던 기병들의 기세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앞에 보이는 산에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 양탄자를 멈춰 세우고 말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확연해 보였다.
구르르르릉-!
쫓고 쫓기는 긴박한 상황.
멈추게 된다면 꼼짝없이 붙들리게 될 그 상황에서 갑작스레 도시에서부터 천둥과도 같은 우렁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학!”
“으아악!”
그 소리와 함께 일행이 타고 있던 양탄자가 힘없이 너풀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뒤따르고 있던 중앙군의 기병들까지도.
이제야 맹약의 족쇄를 풀어낸 사르누스의 거친 포효에 살아있는 말들뿐만 아니라 양탄자에 새겨진 신비까지도 힘을 잃은 채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쿠당탕-! 쿵!
여기저기서 얽히며 쓰러지는 기마들 사이로 기어이 니벨룬의 양탄자도 땅을 향해 가라앉고 말았다.
양탄자와 함께 달리던 기세 그대로 땅을 뒹굴고 만 일행은 누구랄 것도 없이 거친 황무지를 구르며 처참하게 나자빠지기 시작했다.
“끄으으으······.”
“흐아아.”
잔뜩 일어난 뿌연 흙먼지 사이로 일행이 내지르는 신음 소리가 가득했다.
“크헉! 컥!”
그러나 늙은 피에르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워 하는 이는 바로 라두였으니 용의 세계에서 퍼져나온 거대한 포효는 이곳에 있는 그 어떤 이들보다도 라두에게 더욱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잘못했어요.”
보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는 사르누스의 존재감.
차마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용서를 비는 라두를 보며 키하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검을 빼 들었다.
[너희들의 신비와 신성을 빌려다오. 이제 남은 방법은 그것 뿐이다.]일행과 마찬가지로 용이 외치는 포효에 놀랐는지 따라왔던 기병들은 저 앞에 쓰러져 있었지만, 저 멀리서 보이는 깃발들은 여전히 일행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수만의 군세와 함께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용.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절망적인 그림에 키하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던 그때, 등 뒤에 있는 산에서부터 자그마한 고랑이 이어지고 시작했다.
“내가 나 홀로 심연의 골짜기를 걷고 있을 때······.”
“이, 이럴 때는 뭐를 꺼내야.”
일행을 향한 사르누스의 압박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이제는 용이 아닌 니벨룬과 피에르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무형의 기세에서 시작한 그의 존재감은 이제 형체를 갖추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으니 주변의 흙들이 뭉개지고 있는 것은 그저 키하노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툭!
이단심문관이 외우는 경전을 따라 당황하고 있는 마법사를 넘어 산에서부터 시작된 고랑이 드디어 키하노의 발끝에 다다랐다.
생각이 복잡했기에 그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던 키하노는 발 끝을 툭 치고 마는 작은 기척을 느끼고서야 밑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음?]작디작은 녀석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바로 앞에서부터 다가오는 사나운 용의 기세에도 오히려 들고 있던 손가락을 더욱 치켜세웠을 뿐이었다.
뀨-!
콰지지지직-!
요란한 소리와 땅이 무너지고 있었다.
두더지가 치켜든 손가락이 신호라도 되었다는 듯 그렇게.
“으아아아아!”
“이건 또 뭐야!”
마치 끝이 없는 동굴과도 같은 깊은 구덩이.
전조도 없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지면을 보며 키하노조차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뀨뀨-!
자신과 같이 떨어져 내리는 일행들을 보며 이제야 되었다는 듯 두더지가 웃고 있었다.
북부에서부터 이어진 긴 산맥의 줄기를 타고 마침내 이곳까지 내려온 땅의 정령.
여전히 손가락을 치켜들고 있는 두더지는 도브레치티에서와도 같이 제 색을 지닌 채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