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20
계승자 (1)
아주 오랜 옛날.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제국의 첫 시기.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제국의 동부는 본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어머니 세계수가 있던 비옥한 서부와는 달리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척박한 동부의 황무지는 주변의 영주들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그런 땅이었다.
“······아이들이 많이 굶었나 보군.”
메마르고 황량한 땅.
그곳을 둘러보던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낯선 이방인이었음에도 따라붙는 아이들의 눈빛이 먹을 것에 대한 기대로 반짝여대었기 때문이었다.
“먹을 것이 많지 않으니까요.”
“엘프들조차 살릴 수 없는 땅인가?”
남자가 한 걸음씩 걸어갈 때마다 마을의 아이들이 조금씩 남자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달라붙는 아이들이 순진한 호기심 때문에 달라붙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남자는 조금 서글퍼지고 말았다.
“······저희 엘프가 아니라 누가 오더라도 살릴 수 없는 땅입니다. 폐하.”
젊은 제로니모는 로브를 깊게 눌러 쓴 남자를 보며 폐하라 불렀다.
오직 대륙의 지존인 한 남자에게만 붙일 수 있는 칭호였지만 지금 제로니모가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폐하라는 영광된 칭호를 붙이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일 뿐이었다.
“직접 보시니 어떻습니까? 이제야 속이 후련하십니까?”
깡마른 몸 위로 휘적여대는 소매의 폭이 넓었다.
제 먹을 것도 나눠주었기에 잔뜩 메말라버린 제로니모의 눈에는 이제는 매서운 독밖에 남지 않은 것만 같았다.
“결국, 인간들의 왕은 인간들만을 생각했을 뿐이지요. 과연 전대 장로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맞았습니다.”
“······.”
별과도 같은 반짝이던 뜻을 품었던 기사가 있었다.
그는 가장 완벽한 용이라는 존재를 없애기 위해 세상 모든 종족의 가능성을 자신의 검 하나로 모은 사람이기도 했다.
“······미안하네.”
그러나 지금 로브를 벗어내는 남자는 그때의 청명했던 기사가 아니었다.
얼굴에 가득한 주름위로 오직 후회만을 쌓아온 노인은 자신이 해주겠다고 말한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거짓말쟁이였을 뿐이었다.
“가장 완벽한 존재를 죽이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빌렸었네. 그것들을 갚다 보니 결국 자네들까지는 신경 써주지 못했어.”
“돌아가십시오.”
걸음을 멈춘 제로니모는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나 조용했음에도 명료한 그의 목소리는 프라우센의 가슴속으로 들어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돌아가셔서 저희가 빌어먹을 식량이나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멈춘 그의 발끝에는 아주 자그마한 묘목 하나가 서 있었다.
성인 남성의 허리에도 오지 못할 크기의 묘목은 메마른 땅 위에 서 있어서인지 금방이라도 말라 죽을 듯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부디 당신의 자비로 올해 겨울을 넘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로니모.”
식량을 구걸하는 엘프와 제대로 뿌리조차 내리지 못한 세계수의 묘목.
그들의 처참한 모습을 마주한 프라우센은 자신이 너무 늦게 이곳을 찾았다는 사실에 큰 후회를 하고 말았다.
“······빌어먹지 마시게. 자네들은 당당히 서 있을 자격이 있을 사람이니까.”
가장 완벽한 용을 부수기 위해 어머니 세계수를 희생해야만 했던 엘프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모습은 과거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이 남에게 손을 벌려 구걸하는 삶이었을 뿐.
스르릉-
“폐하?”
이들의 비참함은 결국 나의 잘못일 것이다.
기사로서의 임무는 마쳤지만, 황제로서의 의무는 다하지 못한 나의 잘못.
“너무 늦게 갚게 되어 미안하네.”
콱-!
자신의 검을 뽑은 프라우센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세계수의 묘목 앞에 은색의 기사를 꽂았다.
비록 주인은 늙고 초라해졌으나 여전히 은색의 빛을 간직하고 있던 그 검을.
“······호수의 여인에게 얻어 신의 축복을 받았고 영원히 꺼지지 않을 불꽃으로 다스린 검이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젊은 제로니모는 프라우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고 말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늙은 황제의 얼굴에는 홀가분한 미소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 검은 뽑지 마시게. 이곳의 아이들이 굶주리지 않을 때까지.”
검을 꽂아 넣은 프라우센은 자신을 보고 있는 아이들의 눈빛을 둘러보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린 세계수가 곧은 뿌리를 내릴 때까지.”
꽂아 넣은 은색의 기사 주위로 새파란 풀들이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하자 황무지에서 태어나 푸른색을 본 적 없던 어린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시작했다.
웅웅웅-
못다한 의무를 짊어지기 위해 스스로 영광된 자리에서 내려온 남자.
조금씩 멀어져 가는 주인의 모습을 보며 은색의 기사가 울어댔지만, 그의 주인은 한 번의 쓰다듬과 함께 다시금 로브를 썼을 뿐이었다.
“그래도 너무 늦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군.”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아이들이 굶주리던 땅.
그리고 언젠가는 꽂혀 있던 검이 뽑히게 될 땅.
먼 훗날 그곳을 부르게 될 이름은 엘프들의 숲, 아우슈린이었다.
※※※※
높게 세워진 목책의 모습은 웅장했지만, 숲 밖에서부터 전해져오는 불길한 공기까지는 막아주지 못했다.
어른들이 분주히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낯설어져 가는 마을의 모습을 보며 아우슈린의 어린 엘프들은 불안한 듯 댕그란 눈을 굴려댈 뿐이었다.
[저기 아이들이 모여있구나.]“······.”
그리고 루가 족의 아이들 또한 그랬다.
생김새는 각기 달랐지만 품고 있는 눈빛은 같은 아이들을 보며 블라드는 말없이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인간들의 군대는 약 천 명 정도일세.”
“할 만하겠네요.”
같이 걷고 있는 바라디스의 말에 의하면 비츠카야 백작이 기를 쓰며 모아댄 병사들은 약 천 명 정도라 했다.
그에 대항하는 아우슈린의 엘프들은 약 700명 정도였으니 목책을 끼고 싸운다면 전혀 불리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문제는 되살아 난 자들이지.”
그러나 비츠카야 백작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라마슈트의 부름에 화답한 흑마법사들이 가득했고 아마 지금도 세를 불려가며 아우슈린을 향한 욕망을 불태우고 있을 것이다.
“3일 전에 확인한 그들의 숫자만 해도 약 2천일세. 인간들의 군대와 합한다면 총 3천에 해당하는 숫자지.”
“······.”
“어쩌면 지금도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순간 갑작스레 불어오는 바람에 옆에 있던 횃불에서부터 기름 냄새가 확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시 타노보에서부터 시작되어 아우슈린으로 향하는 동남풍은 앞으로의 전투가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조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역전할 결계가 필요해.”
아우슈린을 감싸고 있던 결계는 소드마스터의 검이라는 변하지 않을 약속을 통해 지켜지던 것이었다.
그러나 되살아 난 프라우센이 그 검을 가져가고 말았으니 수백 년의 시간을 걸쳐 엘프들이 쌓아 올린 결계식은 마치 열쇠 잃은 금고처럼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꼭 부탁하네.”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안내는 여기까지라는 듯 바라디스가 멈춰 섰다.
멈춰선 그의 앞에는 어린 세계수 앞에서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는 늙은 장로들이 서 있었다.
새로운 은색의 기사를 기다리는 그들의 눈빛은 방금 보았던 아이들의 눈빛만큼이나 간절한 것이었다.
“······저기 바라디스.”
“음?”
그 간절한 눈빛들을 따라 걸어가던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뒤를 돌아 바라디스를 바라보았다.
“그때 고마웠어요.”
뒤돌아선 블라드는 웃고 있었다.
따라 웃을 만큼 밝은 웃음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그의 웃음은 바라디스의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걸로 한번 갚아 볼게요. 바라디스가 그동안 저를 도와줬던 값이요.”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도시 데어마르에서부터 잊혀져 있던 드워프들의 섬 렘노스까지.
블라드는 그동안 자신과 함께 해줬던 엘프를 계속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기사는 정당한 대가만 받는 법이니까.”
가장 필요했던 순간에 묵묵히 옆에 있어 주었던 엘프를 위해.
자신이 받았던 도움을 이번 기회를 통해 갚겠다는 블라드를 보며 바라디스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그 말과 함께 점점 멀어져 가는 블라드의 뒷모습을 보며 바라디스는 오래도록 서 있었다.
비록 커다란 의무를 지러 걸어가는 중이었지만 어린 세계수를 향해가는 블라드의 걸음에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
“들어라! 나의 병사들아!”
짙푸른 숲의 경계선을 따라 군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크게 두 개의 진형으로 나뉘어 있던 군사들은 각자의 역할을 따라 서 있는 자리만큼이나 보이는 모습도 다른 자들이었다.
“너희들도 기억할 것이다! 우리를 갑작스레 배신했었던 엘프 녀석들을!”
죽은 자들은 조용했고 산 자들 또한 그들에게 맞춰 숨죽이고 있었다.
전투를 앞두고 있다기에는 기이한 침묵만이 감도는 진형이었지만 오직 비츠카야 백작만큼은 커다란 목소리로 모두에게 외치는 중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가 받았던 고통 또한 기억할 것이다! 아마 지금도 너희들의 집에서는 식솔들이 굶주리고 있겠지!”
백작의 말대로 지금 그의 영지민들은 한없이 굶주리는 중이었다.
엘프들과의 교역이 끊긴 비츠카야 백작령은 물길이 끊긴 밭과도 같았으니까.
용혈공의 지원마저 끊긴 이때, 타들어 가는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영지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남의 것을 빼앗는 방법뿐이었다.
“저 앞을 봐라! 저 푸르른 숲을! 너희들의 가족이 굶주리고 있을 때도 그 간악한 엘프 녀석들은 저곳에서 놀고 먹으며 꿀과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갈 곳 없는 분노는 불태울 대상을 원하고 쌓여있던 불만들은 터져나갈 구멍을 원한다.
옮고 그름을 떠나 그저 쏟아낼 대상만이 필요한 지금, 비츠카야의 영지민들에게 있어 엘프들이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훌륭한 장작이었을 뿐이었다.
“옳소! 그놈들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 꼴이 나지도 않았지!”
“이 모든 것은 엘프들이 먼저 자초한 것이다! 그놈들이 먼저 시작한 거야!”
살아남는 데 필요한 것은 무언가를 외면할 수 있는 용기와 언제라도 다른 이를 물어뜯을 수 있는 아주 작은 명분 하나면 족할 것이다.
단 한 번의 연설로 그 모든 조건들을 충족한 비츠카야 군에서부터 엘프들을 향한 성난 함성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저들도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들을 죽이려 하는군요.”
“······.”
그리고 또 다른 진영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자들이 있었다.
온갖 죽은 자와 불길한 존재들로 가득한 군세 속에 서 있는 자들이었다.
“당신은 어떠해 보이나요. 요제프.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는 행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마치 죽음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검은 상복은 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신이 만든 세계를 거부한 채 발끝 하나 땅에 내딛지 않는 여인은 실로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요제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께서는 참 잔인하시죠.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고리를 만드신 분이니까요.”
“······.”
가까이서 본 그녀는 무척이나 자애로운 여인이었다.
죽어버린 아이들까지 하나하나 품에 안아주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신이 내린 성모와도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그러나 요제프는 그녀의 포근한 미소 뒤에 숨어있는 섬뜩한 광기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 부숴야 해요. 다시는 아무도 죽지 못하게요.”
누군가는 저열한 욕망, 이루지 못한 꿈, 혹은 처절한 사고로.
지금 어둠에 이끌려 이곳까지 따라온 흑마법사들 모두가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요제프는 앞에 보이는 라마슈트만큼이나 미친 사람은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만들어보죠.”
왜냐하면, 그녀는 그 누구보다 순수한 열정으로 신께서 만드신 이 세상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으니까.
요제프는 자신을 바라보는 라마슈트의 광기 어린 미소에 그저 가만히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드드드득-
순간,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땅의 진동에 비츠카야 군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강렬한 진동에 살아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되살아 난 자들까지도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지진?”
“아니에요.”
살짝 베일을 걷어 올린 라마슈트는 창백한 손가락을 들고는 엘프들의 숲 한가운데를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는 하늘 높이 솟아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걸려 있었다.
“역시 엘프들도 그냥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나 봐요.”
저 멀리에 보이는 어린 세계수가 빛나고 있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푸르름을 넘어 온갖 빛나는 색깔들로.
“결계식이에요.”
숲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알아볼 수 있는 그 선명한 빛의 색깔들은 지금도 쉴 새 없이 깜빡이며 마치 등대처럼 엘프들의 숲을 밝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