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21
계승자 (2)
두드드드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세계수의 뿌리 아래서 격렬한 진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진동은 스스로를 일으키려는 세계수가 내지르는 몸짓이었으며 세계와 세계를 이으려는 용살검이 내지르는 거친 함성이기도 했다.
“오오······.”
늙은 장로들은 다시 한번 만들어진 엘프들의 세계를 올려다보며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어린 세계수의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원뿔의 세계.
수많은 세월을 거쳐 쌓아 올린 결계식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는 그 모습은 극도의 긴장과 더불어 묘한 감성을 자극하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용살검에게 닿은 엘프들의 결계식이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밑면에서부터 녹아내려 빛나는 가루가 되기 시작한 결계식은 그 육중했던 부피와는 상관없이 한 줄기 선이 되어 천천히 검면에 새겨지고 있었다.
“되었다. 되었어!”
그 모습을 확인한 장로들의 입에서 환희의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예전에 보았던 검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기에.
다른 검들과는 다르게 터져나가지도, 뭉개지지도 않고 있는 용살검은 지금도 본연의 은빛을 선명하게 내비치며 서 있을 뿐이었다.
웅-웅웅-!
비록 지금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거친 술식들이 고통스러웠을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용살검은 지금도 의연하게 서서 그 모든 것들을 감내하려 애쓰고 있었다.
왜냐하면, 별빛에서 태어난 용살검에게 있어 지금 위기에 처한 이 땅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으니까.
“······.”
그러나 저 뒤에서 용살검이 내지르는 비명을 듣고 있던 블라드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지는 중이었다.
장로들은 잘 몰랐겠지만 용살검과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블라드는 지금 자신의 검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과연 그 생각이 맞았다는 듯 녹아 내려가던 원뿔의 세계가 천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귀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닌 영혼을 통해 들을 수 있는 무너져내림으로.
마치 넘어지는 나무처럼 중심을 잃어가는 원뿔의 세계를 보며 방금까지만 해도 환희에 젖어있던 장로들의 얼굴에 흙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이 모습을 지켜보던 늙은 제로니모는 감히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듯 탄식 섞인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안 된다······. 안 돼.”
그러나 그의 간절한 외침에도 점점 위태로이 기울어져만 가는 엘프들의 세계.
그 밑을 받치고 있던 용살검이 균형을 세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녀석이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는 무거웠고 펼쳐야 하는 세계는 너무나 넓은것이었다.
두드드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어린 세계수가 울고 있었다.
자신에게로 넘어지려 하는 엘프들의 세계가 안타깝다는 듯.
그러나 아직 연결되지 않은 세계를 향해 가지 하나 뻗을 수 없었던 어린 세계수는 그저 무너지는 엘프들의 세계를 보며 온몸을 떨어댈 뿐이었다.
※※※※
크르르르-!
크아아!
숲에서 울리는 진동이 심상치 않았다.
그것은 땅 밑에서 울리는 진동뿐만 아니라 땅 위에서도 지면을 짓밟아대는 존재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많습니다! 조장님!”
“함정들이 소용이 없습니다!”
푸르른 숲을 새까맣게 물들이며 달려 나가는 시체들이 있었다.
새하얀 흰자를 부릅뜬 채 마구잡이로 달려 나가는 그들은 엘프들이 쏘아대는 화살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직 한 곳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쿠구궁! 콰강!
요란히 무너지는 함정 소리.
깊다란 구덩이에 파묻히고 솟아오른 나무 창에 꿰뚫려 감에도 아우슈린을 향한 검은 파도는 도저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후퇴한다!”
굳이 저 앞을 확인할 것도 없었다.
침입자들을 막기 위한 제 1선이 뚫렸음을 확인한 조장이 이를 악물고서는 옆에 있던 봉화에 불을 붙였다.
“다들 후퇴해라! 2선으로 합류해!”
들려오는 조장의 명령을 따라 요격을 하기 위해 나온 엘프들이 서둘러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숨 쉴 틈 없이 다가오는 시체들의 검은 파도는 엘프들의 기민함조차도 따라잡을 정도로 격렬한 속도를 지니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이런! 언제 여기까지!
누군가가 내지르는 비명 위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있었다.
아우슈린에서도 보이는 그 연기는 바라디스의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피어오른 것이었다.
“연기가 보입니다. 바라디스 님.”
“······.”
목책 앞에서 상황을 살피던 바라디스는 옆에서 들리는 보고에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제 2선에서 적들과 조우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대장. 1선에서 후퇴한 인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단 한 명의 인원도 합류하지 못했다는 보고에 바라디스의 안색이 다시 한번 흔들리고 말았다.
가장 위험한 1선에다 놓았을 만큼 엄격히 선별한 인원들이었건만 적들의 진격 속도는 바라디스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군.’
화살로 교란하고 함정으로 틀어막고.
적들이 아우슈린에 닿기 전에 최대한 시간을 벌어보려 했던 바라디스였지만 그의 시도는 처음부터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많아.’
천혜의 성벽과도 같은 숲이었지만 이 빽빽한 숲조차도 사특한 자들이 풀어놓은 수천의 시체들을 모두 막아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어찌 된 것인지 지금 달려오고 있는 시체들은 복잡한 숲길에도 조금의 헤맴도 없이 엘프들이 있는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중이기까지 했다.
“흑마법일세.”
순간 바라디스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소리가 있었다.
담뱃대를 물고 있던 루가 족의 대모가 내는 목소리였다.
“어두운 곳을 걷고 있기에 굳이 옳은 길을 찾을 필요가 없는 거야.”
사특한 존재이긴 하지만 흑마법 또한 신비에서 비롯된 것.
오직 동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들의 수법에 루가 족의 대모가 언짢다는 듯 담뱃재를 털어내고 있었다.
“앞으로 들어올 적들이 얼마나 더 되겠습니까?”
“······한 번 봐 드리도록 하지.”
아직은 동료도 전우도 아니었지만, 대모는 바라디스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지금 그들이 등지고 있는 아우슈린의 목책 뒤에는 엘프들뿐만 아니라 루가 족의 소중한 아이들도 있었으니까.
후우-
크게 뿜어낸 대모의 숨 사이로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바람을 타고 오른 그녀의 숨결은 어느새 숲을 넘어 밖에 있는 인간들의 군세를 향하고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여있었다니.’
신비를 통해 바라본 숲 너머에는 수십은 되어 보이는 흑마법사들이 나란히 서 있는 중이었다.
각자가 쌓아 올린 세계에 맞춰 기이한 주문을 읊고 있는 그들.
그러나 루가 족의 대모는 그들 중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여자인가.’
한눈에 보아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검은 상복의 여인이었다.
짙은 베일에 가려져 자세히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새빨간 입술만 보더라도 가진바 미모를 짐작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
그 여인을 눈여겨 보고 있던 루가 족의 대모는 순간 등 뒤를 타고 오르는 소름에 잠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마치 대모의 시선을 알아차렸다는 듯 여인이 웃고 있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시체처럼 창백한 미소로 자신과 눈을 마주친 그녀의 미소에 루가 족의 대모는 서둘러 손을 휘저으며 뭉쳐 있던 연기를 흩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에······.”
“무슨 일입니까?”
갑작스레 경기를 일으킨 루가 족의 대모를 보며 바라디스가 물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을 뿐이었다.
“아주 고매한 마법사야. 저런 존재는 그야말로 처음 보는군.”
“······.”
“자네나 나나 쉽지 않겠어.”
대모의 말과 함께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육중한 소리를 들은 바라디스는 자신이 마련해 놓은 제 2선 조차 얼마 안 가 무너질 것임을 확신하고 말았다.
※※※※
“······자네 지금.”
무너져 가던 자신들의 세계를 보며 탄식을 내지르고만 늙은 제로니모.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그 순간, 제로니모는 방금 자신의 어깨 옆을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끄으으으!”
누가 막을 새도 없이 제단 위로 달려온 남자가 만들어 낸 바람이었다.
그 바람과 함께 제단 위로 올라간 블라드는 어느새 익숙한 손길로 자신의 검을 붙들고 있었다.
“······이거 왜 이렇게 아파!”
마치 이빨을 헤집는 것 같은 날카로운 감각이 곧장 양손을 파고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블라드는 꽉 붙잡은 두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점점 쓰러져 가는 용살검을 밀어내는 블라드의 모습에 크게 놀란 장로들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입을 크게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당장 떨어져라! 인간의 육체로는 감당할 수 없는 독한 술식이야!]블라드의 돌발 행동에 경악한 키하노조차도 어서 붙든 손을 놓으라 말하고 있었지만 블라드는 여전히 쓰러져 가는 용살검을 세우려 애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어떡하라고요! 이게 마지막이라는데!”
지금 블라드의 말처럼 세계수 안에서 빛나고 있는 원뿔은 엘프들의 희망을 담은 그야말로 마지막 기회였다.
이 결계식이 실패할 경우 아우슈린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바라디스가 세워놓은 급조한 목책뿐일 것이며 그조차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임을 블라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보이는 것은 용살검이었겠지만 그 검이 품으려 하는 본질은 어린 세계수의 세계였다.
엘프들의 술식은 그것을 이으려 하는 시도였으니 지금 블라드가 일으키려 하는 것은 그저 한 자루의 검이 아닌 아우슈린만큼이나 넓고도 깊은 세계였던 것이다.
“인간들의 기사! 당장 떨어지시오!”
“계속 그곳에 있다가는 존재감에 깔려 죽고 맙니다!”
드드드드득-!
장로들의 외침과 함께 땅 밑에서 울리는 진동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세계를 감당하지 못한 지면이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끄아아아!”
그러나 블라드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검을 붙잡은 채 계속 밀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본능적으로 감고만 블라드의 황금빛 세계가 터질 듯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딛고 있는 블라드의 발끝은 점점 밀려나고 있을 뿐이었다.
[감아라!]“감았잖아요!”
[오른쪽 눈도 감아!]육체가 아닌 지니고 있는 세계를 통해 세워야 한다.
그러나 블라드는 이미 자신의 세계를 힘껏 개방하고 있었으니 이제 검을 세우려 하는 블라드의 세계를 도울 수 있는 자는 오직 안에 깃들어 있는 키하노 뿐이었다.
“이익!”
감고 있는 왼쪽 눈으로는 나의 세계를 보고 뜨고 있는 오른쪽 눈으로는 이 세상을 봐야 한다.
그것이 정도를 위한 균형이며 나라는 세계에 매몰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블라드는 배웠었지만,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블라드가 오른쪽 눈을 감으며 현실을 외면하자 보이는 것은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현실에 서 있던 장로들은 블라드의 오른쪽 눈을 통해 빠져나오는 누군가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희미한 그 형상은 잔뜩 힘을 주고 있는 블라드의 옆에서 같이 무너지는 검을 들어올리려 하고 있었다.
[잡고 있는 너의 검을 통해 봐라.]잡고 있는 검을 통해서 이 세상에 들어오려 하는 어린 세계수의 모습.
세상을 향한 통로라고는 오직 어린 신녀 밖에 없었던 세계수는 뿌리내린 땅의 위기를 막기 위해 용살검이라고 하는 또 다른 통로를 만들어 내려 하는 중이었다.
[이제 보이지?]제어할 수 없어 깊이 빠져들어 가고 마는 나의 세계였지만 굳건히 자리 잡은 키하노의 목소리는 여전히 위에 있었다.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린 블라드는 자신의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자그마한 뿌리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그 녀석을 데려와.]점점 멀어지고 있는 키하노의 목소리였지만 블라드는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의 세계는 세상을 칠하는 붓과 같은 것이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하얀 도화지가 되어줄 수도 있는 것.
나를 통해서 무언가를 그리고 싶어하는 초록색의 세계를 보며 블라드는 있는 힘껏 들고 있던 손을 뻗쳐 올렸다.
※※※※
쿠곽! 콱! 콰앙!
목책을 뒤흔들어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살아있는 자라면 할 수 없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몸통 박치기에 그 커다랗던 목책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크아아아!
키익! 키이익!
“대장!”
기어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시체 하나가 사납게 이빨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반쯤은 뭉개져 버린 머리였지만 기어이 틈을 만들어내고 말았고 자신의 몸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격렬한 고갯짓에 그 틈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물러서지 마라! 이곳이 우리가 버틸 수 있는 마지막이다!”
애써 만들어놓은 2선도 무너지고 이제는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목책만이 남은 지금, 바라디스가 엘프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물러서지 말라는 말뿐이었다.
후욱-!
힘겹게 내뱉는 대모의 숨을 따라 매캐한 연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죽어있는 자들조차 괴롭게 만드는 그녀의 연기가 시체들조차 물러나게 했지만, 그 공백 또한 아주 잠시였을 뿐이었다.
쿵! 쿵! 쿵!
순간 시체들이 빠져나간 틈을 통해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연기로 가려져 있어 어렴풋이 보이는 시야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거대한 몸체.
시체란 시체는 모조리 때려 박아 만들었다는 듯 보기만 해도 토악질이 나오는 모양새였지만 그 육중한 몸이 일으킬 충격만큼은 진짜일 것이다.
“저 미친놈이 뛰어온다!”
“다들 목책 받쳐! 무너지면 안 돼!”
조금의 구멍이라도 생기면 안 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구멍을 통해 쏟아질 썩은 물들이 지금 밖에 한가득이었으니까.
“화살 날려!”
“드루이드들은 도대체 뭐 하는 거냐!”
누군가의 외침이 신호가 되었다는 듯 흉측하기 그지없는 거대한 누더기 시체를 향해 숲에서부터 멧돼지 떼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멧돼지 떼에 목책을 위협하던 진형이 크게 흔들려대었지만, 체급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강력하던 멧돼지들의 돌격조차도 거대한 누더기 시체의 움직임을 막을 순 없었다.
콰지지직!
차마 감당하지 못할 녀석의 거친 돌격에 엘프들이 애써 세워놓은 목책이 뒤로 크게 물러나고 말았다.
그아아아-!
아니, 뚫리고 말았다.
지금의 상황을 대비해 깊게 박아넣은 목책이었지만 그 어떤 공성병기보다도 흉악한 누더기 시체의 돌진에는 버틸 수 없다는 듯 한 쪽 면이 크게 무너지고 만 것이었다.
당장 막아!
뚫려서는 안 된다!
기어코 만들어지려는 그 틈을 막기 위해 모두가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엘프들이고 루가 족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뛰쳐나간 전사들은 들고 있는 무기들을 휘두르며 거칠게 저항했지만 한번 뚫려버린 댐의 구멍은 더 이상 밀려들어 오는 물결을 막지 못했다.
크아아아아!
그동안 목책에 가로막혀 있던 거대한 파도의 물결이 자그맣게 벌어진 구멍을 통해 아우슈린을 향해 기어들어 오기 시작했다.
더는 몸으로도 막을 수 없는 그 거센 물결에 애써 자리를 지키려던 전사들마저도 휩쓸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을!”
퍼어엉!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라디스의 왼쪽 눈이 터질 듯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왼쪽 눈에 새겨진 그의 오망성만으로는 밀려 들어오는 시체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안 돼!”
바라디스가 내지르는 외마디 비명을 따라 엘프들의 세계를 침범하기 시작하는 검은 물결들.
스쳐 지나간 곳에는 어떠한 가능성도 남기지 않는 사특한 자들의 세계가 아우슈린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내려.”
아우슈린을 향한 사특한 자들의 독니가 크게 펼쳐진 그 절체절명의 순간, 조용히 퍼져나가는 녹색의 물결이 있었다.
스아아아악-
마치 밀밭을 스쳐 지나가는 가을의 바람처럼 잔잔히 퍼지기 시작하는 물결.
누군가가 그어낸 검로에서부터 시작한 녹색의 물결은 흐르는 바람을 따라 조용히 시체들을 갈라내며 쓰러져 있던 목책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블라드?”
조용한 물결 끝으로 찾아오는 것은 오직 숲이 간직한 청명한 고요함 뿐.
그 물결을 만들어 낸 사람을 알아본 바라디스는 놀란듯 눈을 치켜떴지만 두 눈을 감고 있던 블라드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채 홀로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 그렇게.”
이제는 나의 세계를 통해 들을 수 있는 세계수의 목소리와 대화하면서.
다시금 세워진 블라드의 검면에는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복잡한 술식들이 가득히 그려져 있었다.
“한 번 뿌리 내려 봐.”
쿠구구구구-
블라드의 말과 함께 이 세상을 향한 녹색의 물감이 자신의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어린 신녀가 아닌 블라드의 검을 통해 그려내려는 세계수의 세상은 온통 녹색 빛이었고또한, 온통 푸르른 것이었다.
블라드의 검 끝에서부터 시작된 그 색을 보며 바라디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저 앞에서부터 그려지는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게 도대체······.”
목책이 일어서고 있었다.
어느새 잔뜩 뿌리내린 자신들의 몸을 일으키면서.
온통 부서지고 상처투성이가 되고만 목책이었지만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녹색의 새싹들이 어느새 나무들의 상처를 메우고 있었다.
그 거대한 몸체를 일으키는 목책들을 보며 되살아난 자들조차 가만히 멈춘 채 고개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광경을 보지 못하는 블라드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아아. 이런 색이었구나.”
두 눈을 감고 있기에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세계.
지금 현실이 아닌 누군가의 세계 속에 서 있는 블라드는 자그마한 뿌리를 붙잡은 채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한 세상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내가 꽂은 검을 뽑지 마라.
아이들이 굶주리지 않을 때까지, 내 앞에 있는 어린나무가 온전히 뿌리내릴 수 있을 때까지.
그러나 지금 블라드는 검을 뽑았고 세계수가 내린 뿌리를 잡았다.
그러니 이제는 아이들을 보며 굶주리고 있는 저 시체들을 베어내야 할 때였다.
“그럼 이번에는 무엇을 그려줄까?”
그렇게 하기 위해 뜬 블라드의 오른쪽 눈은 온통 초록색의 세계로 가득했다.
세계수의 기사
쿠구구궁-!
묵직한 소리와 함께 다시금 육중한 몸체를 일으키기 시작하는 아우슈린의 목책들.
하늘에 닿을 듯 점점 높아져만 가는 나무들의 그림자를 보며 비츠카야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다시 뿌리가 생겼다고?”
쓰러졌을 때는 그저 잘린 나무들뿐이었지만 다시금 일어섰을 때는 당당히 뿌리 내린 한 그루의 나무로.
이제는 아예 자그마한 숲이 되어버린 아우슈린의 목책을 보며 비츠카야 백작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던 흑마법사들까지도 모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저 나쁜 놈들.]그리고 그런 그들을 노려보는 녹색의 눈동자가 있었다.
날카롭게 세운 검과 함께 매섭게 불타오르는 블라드의 오른쪽 눈은 찢겨버린 엘프들의 시체를 보며 세차게 타오르는 중이었다.
[저놈들이 죽였어.]날카롭게 세운 검 위로 녹색의 기운이 맺혀가고 있었다.
그리고 치켜뜬 오른쪽 눈에서 또한 마찬가지.
블라드의 검과 육체를 통해 드디어 이 세상에 발을 내디딘 어린 세계수는 자신을 지키려 했던 엘프들의 시체를 보며 울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이를 악물고 말았다.
[전부 다 착한 사람들이었는데!]쿠르르르릉-!
잠시 빌린 용의 포효와 함께 터져나가기 시작하는 어린 세계수의 분노.
그 분노를 알아들었다는 듯 아우슈린을 둘러싸고 있던 녹색의 바다가 격렬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그 격렬한 움직임을 보며 비츠카야의 군사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움직인다!”
왜냐하면, 주위에 있던 나무들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숲의 주인이 허락했기에 움직일 수 있었던 나무들은 어린 세계수의 분노와 동조하여 땅 밑에 박아두었던 뿌리들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느렸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그런 육중함으로.
하늘을 가득 메운 채 내리꽂힌 나무들의 채찍에 비츠카야의 군의 진형이 단번에 와해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터져나가는 육신들과 울려 퍼지는 병사들의 비명이 순식간에 푸르른 숲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어야 할 나무들이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이라니.
어찌나 당황스러운 광경이었던지 저 멀리에 있던 라마슈트조차도 쓰고 있던 베일을 올린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후우.”
그리고 적들이 당황한 이 순간을 노리고 있던 숨결이 있었다.
단 한 번의 움직임만으로도 잔뜩 기울어져 있던 전장의 기세를 가져올 수 있는 이 순간을.
자신이 나서야 할 최적의 순간을 읽어낸 블라드가 두 눈을 빛내며 순식간에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흐으읍!”
세차게 휘두르는 블라드의 검격 한 번에 시체들의 머리들이 수도 없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검은 물결이었지만 블라드의 검 끝에 맺힌 녹색의 세계가 더는 그들의 전진을 용납하지 않았다.
크아아아!
아아악-!
검은 바다 위로 뛰어든 금색의 등대가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블라드의 세찬 검격에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 허연 눈깔들이 치켜떠지기 시작했지만 세계수와 함께 하는 이 숲은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이미 자신의 세계와도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블라드!”
바라디스는 새까만 시체들에게 뒤덮여 가는 블라드를 보며 다급히 화살을 치켜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 모습도 잠시, 어느새 블라드는 몰려드는 시체들을 발아래에 둔 채 하늘 높이 솟구치는 중이었다.
“······아니?”
뀨-!
빛나는 두더지가 만들어준 계단을 타고 달려 나가는 세계수의 기사.
녀석이 치켜든 엄지손가락처럼 높이 솟아오른 블라드는 어느새 목책을 부숴버린 누더기 시체를 향해 뛰어오르고 있었다.
“흐아아!”
한 번에 베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세계수의 세계는 그보다 거대한 것이었으니까.
보이는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지만 품고 있는 것은 아우슈린 그 자체인 검이 누더기 시체를 향해 순식간에 꽂혀 들어갔다.
콰직! 꽈드드득-!
커다란 바위에 깔린 모습이 마치 이러할까.
블라드의 검에 꽂힌 누더기 시체의 머리가 처참히 뭉개지기 시작했다.
꾸에에에엑!
수백의 시체가 뭉쳐있었음에도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검의 무게.
누더기 시체는 그 무게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흉측한 두 팔을 마구 내젓고 있었지만 꽂아 넣은 블라드의 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요제프.”
왜냐하면, 넘실거리는 시체들 저 너머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요제프의 검은 눈동자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햇빛이 가득한 방 안에서 언제나 나를 보며 웃어주었던 남자.
그러나 이제는 내가 증오해 마지않는 자들과 함께 서 있는 그를 보며 블라드가 거친 포효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요제프 바예지드!”
콰지지직-!
세계수의 존재감을 감당하지 못한 누더기 시체가 기어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시체들 속으로 뛰어드는 블라드의 모습이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지만 높게 치켜든 검의 빛깔만큼은 너무나 선명한 녹색의 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 숲에서 당장 나가!]“다 비켜! 이 자식들아!”
어린 세계수와 함께 울부짖는 용의 외침.
그 외침을 가득 담은 별과 용의 검이 기어이 푸른 숲을 갈라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릉-!
마치 산과도 같은 거대한 검이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검이라는 형태만으로는 차마 담지 못한 세계수의 존재감이 하늘을 가리고 땅을 부수며 새까만 바다를 갈라내는 그 모습에 되살아 난 존재들까지도 두렵다는 듯 크게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맙소사.”
그리고 라마슈트는 그 파멸적인 그림 한가운데에서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는 황금빛 지평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프라우센이라는 하늘 아래서는 떠오르지 못한 태양이었지만 그가 없는 지금 이 자리에서는 아무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런 떠오름이었다.
-막, 막아라!
-저놈이 달려든다!
-라마슈트 님을 보호해!
매섭게 달려드는 블라드를 막기 위해 목 없는 기사들이 서둘러 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막으려 하는 존재는 한낱 검사가 아닌 숲의 의지 그 자체인 것.
콰득! 콰지지직!
휘둘러진 블라드의 검끝으로 목 없는 기사들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감히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에 얻어맞은 그들은 산산이 조각난 채 이리저리 휘날릴 뿐이었다.
“내 앞을 막지마라!”
목 없는 기사들을 부수고 도망치던 흑마법사들을 베고.
분노 가득한 세계수를 위해 합당한 제물을 바쳐나가던 드디어 블라드는 자신의 앞을 틀어막은 검은 상복의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너도 있었지.”
라마슈트를 알아본 블라드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녹색의 세계 위에 서 있는 검은색 동심원은 지금도 불길한 파문을 일으키며 숲을 더럽히는 중이었으니 라마슈트를 보는 블라드와 세계수 안에서는 동시에 같은 감정이 치솟기 시작했다.
“······너의 그 개 같은 술수도 이젠 지겨워!”
콰앙! 쾅! 쾅!
블라드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 떠오른 불길한 글귀들을 때려 부수며 그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신의 말씀을 거꾸로 늘어놓은 라마슈트의 결계는 불길한 만큼 섬뜩한 것이었지만 이 땅의 주인인 어린 세계수는 그녀의 존재 자체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크흑!”
언제나 여유만만하던 라마슈트도 블라드의 날 선 검격 앞에서는 잔뜩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신이 만든 세상 밖에 서 있는 그녀조차도 바로 앞에 있는 바로 앞에서 질러대는 블라드의 존재감만큼은 외면할 수 없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지랄을 하고 다니는 거야!”
블라드는 검은 눈물을 흘리며 죽어갔던 여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직접 눈을 감겨 주었던 불쌍한 창녀 또한.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그녀가 행한 행위는 너무나 악독한 것이었고 블라드는 이제 더는 그런 광경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개같은 년아!”
쨍그랑!
험한 욕설과 함께 마지막 결계까지 깨부순 블라드는 드디어 라마슈트라는 세계 앞에 다다를 수 있었다.
세계수의 분노와 함께 한 길 뒤에는 이미 수백의 시체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들 중 아무도 블라드의 전진을 막아 세운 자는 없었으므로.
“······!”
라마슈트는 자신의 베일을 휘젓는 블라드의 거친 손길에 실로 오랜만에 공포를 느끼고 말았다.
완벽한 조각을 이식한 프라우센조차도 재현할 수 없는 용의 분노가 지금 바로 그녀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어서도 사죄해라. 라마슈트!”
“크흑!”
평소라면 닿을 수 없었겠지만, 이곳은 아우슈린.
초록색 도화지 위에서 뛰노는 금색의 용은 이곳에서만큼은 얼마든지 자신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블라드!”
라마슈트의 머리채를 쥔 채 검을 치켜드는 블라드의 모습은 분노하는 숲의 모습 그 자체였다.
여태까지 쌓아 올린 분노를 단 하나의 일점으로 꿰뚫으려 하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가 당황한 듯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라마슈트의 목으로 세계수의 분노가 떨어지려는 그 순간, 블라드는 자신의 옆을 파고드는 아주 익숙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나라는 사람을 기사라는 세계로 이끌어준 스승의 기운이었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자야르가 차고 있는 안대에서부터 세찬 오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블라드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그의 검은 과연 자신이 배워왔던 대로 전장의 기세를 비틀고자 하는 매서움이 담겨져 있었다.
콰직-!
너무나 분노했고 또한 익숙했기에 차마 눈치 재치 못했었던 자야르의 일격이었다.
그렇기에 차마 방어하지 못한 블라드의 빈틈이었지만 그곳에는 어느새 삐죽 솟아오른 뿌리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자야르!”
“······!”
자신의 검을 막아 세운 뿌리를 보며 자야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찰나의 시간을 다투는 기사들의 순간이었고 다시금 기회를 잡은 블라드의 왼쪽 눈에서 이번에는 본연의 황금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불량한 눈빛은 여전하구나.”
잡고 있던 라마슈트의 머리채를 서둘러 휘둘러 낸 블라드가 재빨리 양손으로 검을 붙잡았다.
내가 알고 있는 자야르라는 기사는 고작 한 손으로 상대할 수 있을만큼 녹록한 기사가 아니었으니까.
“왜 막는 거예요!”
달려드는 자야르의 검 끝이 매서웠다.
단 한 발자국의 전진 속에 수많은 의도를 감출 수 있는 그는 아주 잠시였지만 블라드를 막아서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아직은 안 되니까.”
자야르는 라마슈트를 부축한 채 달아나는 요제프를 확인하고는 다시금 블라드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가 세차게 검을 휘둘러대었지만 자야르라는 사람은 적의 기세를 흘려낼 줄 아는 훌륭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었다.
텅! 터엉! 텅! 텅!
“크학!”
비록 그 기세가 자신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뭔 놈의 검이······.”
평소처럼 비웃어보려 노력했지만 자야르의 팔 끝은 이미 세차게 떨리는 중이었다.
검 한 자루만으로는 도무지 감당해 낼 수 없는 블라드의 분노였지만 그럼에도 부득이 버텨내려 하는 것은 그 또한 주군의 의지를 받드는 기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키라니까! 제발!”
“안 돼!”
살아남은 몇몇 흑마법사들이 라마슈트와 함께 자욱한 연기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사라지는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가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러대었지만 지금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자야르라는 기사는 반격기의 대가이자 신묘한 발걸음을 지닌 검사인 사람이었다.
“아직은 안 된다. 블라드. 아직은······.”
마치 너만 들으라는 듯 조용히 속삭이는 자야르의 목소리가 귀 끝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신의 세계에 몰입해 있던 블라드에게는 그의 말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으아아아!”
저 앞에서 흐릿해져 가는 라마슈트와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가 분노에 찬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어린 세계수가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틈을 벌린 흑마법사들이 기어이 숲 바깥으로 나갈 길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제발 비키라니까!”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블라드는 자신이 한 맹세를 떠올려야만 했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해야할 일을.
저들이 또다시 앗아갈 어린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존경하는 스승이라도 베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콰직!
차마 받아치지 못한 블라드의 검끝이 기어이 자야르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고 말았다.
그 육중한 기세에 가누지 못한 몸이 바로 뒤에 있는 나무에까지 처박히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자야르는 웃고 있었다.
“크흑! 컥!”
아주 잠시이긴 했지만, 온 몸으로 숲의 분노를 막아낸 자야르는 결국 요제프에게 귀중한 시간 한 조각을 벌어줄 수 있었으니까.
“······너 인마. 코피 난다.”
그렇게 임무를 완수한 기사의 눈에서는 이제 바로 앞에서 울고 있는 제자가 보일 뿐이었다.
“빨리 눈을 떠라. 모르긴 몰라도 부담이 엄청난 것 같으니까.”
블라드의 검에 꿰뚫려 나무에 매달려버린 자야르의 모습이 처량했다.
그러나 그런 그라 할지라도 모셔야 할 주군 다음에는 유일한 제자였던 모양이었다.
“자야르.”
“결국,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만.”
빠져나가는 피와 함께 점점 창백해지는 자야르를 보며 드디어 블라드가 감고 있던 왼쪽 눈을 뜨고 말았다.
일개 인간으로서는 감히 감당할 수 없었던 세계가 떨어져 나가자 기어이 블라드의 온몸에서 격렬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럼에도 블라드는 자야르를 부축하려 애쓰고 있었다.
“건방진 놈. 너무 빨리 컸어······.”
점점 가물거리는 블라드의 시야 속으로 자야르가 웃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블라드는 어쩐지 위태로워 보이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두 눈을 부릅떴지만 아무리 용의 육체라 할지라도 세계수라는 존재는 쉽게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한테는 말해 줄 수 있었잖아요.”
그저 여태껏 품고 있었던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한계였을 뿐.
“그래도 나한테는요.”
“미안하다.”
새까맣게 감기는 시야 속에서 블라드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자신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주는 자야르의 모습이었다.
그런 자야르의 옷깃을 붙잡은 블라드는 이번에는 말없이 떠나가지 말라는 듯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고마웠어.]하늘은 맑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한 날이었다.
비록 옆에서 들려오는 성난 엘프들의 함성과 누군가의 비명들이 가득했지만 할 일을 마치고 쓰러진 블라드에게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오직 어서 쉬라 말하는 어린 세계수의 속삭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