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22
갈라진 틈 사이에서 (1)
무성한 나뭇잎들 사이로 따스한 햇볕이 비치고 있었다.
어제의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늘의 숲은 고요했고 또한 청명했다.
오직 지저귀는 새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한 숲속에서 사납게 날뛰던 시체들조차도 이제야 안식을 찾았다는 듯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일어났네?”
그러나 영원한 잠이라는 것은 오직 죽어있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영원히 누워 있을 그들과는 다르게 이제 막 눈을 뜬 블라드는 귓가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그 아저씨 죽지는 않았대. 다행이다. 그쵸?”
세계수를 품은 대가가 만만치 않았다는 듯 지금도 블라드의 온몸에서는 참기 힘든 격통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말조차 내뱉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지만 어린 신녀는 이미 블라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쉼 없이 재잘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크게 다치기는 해서 한쪽 팔을 못 쓰게 될 수도 있대요.”
“끄응.”
어제의 치열했던 전투로 말을 내뱉을 기력까지 전부 소모한 블라드였다.
그렇지만 앞에 있는 신녀가 영 어색한 모양인지 애써 몸을 일으켜 허리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 정도면 다행이지.”
창가를 뒤로한 신녀의 머리 위로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백금발의 머리가 온통 새하얗게 빛나는 것이 이제야 막 눈을 뜬 블라드에게는 버티기 힘든 반짝임이었지만 그럼에도 신녀가 들고 있던 자그마한 화집(畫集)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뭐야. 계시야?”
“아니요.”
그림을 통해 계시를 주고는 했던 신녀였지만 오늘만큼은 그것이 아니라는 듯 빙긋 웃고 있었다.
“이제 블라드한테 계시 같은 건 필요 없잖아요.”
방금 한 신녀의 말은 왠지 모르게 묘한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말에 잠시 정신이 쏠려 있던 블라드는 어느새 자신의 손 위에 얹어져 있는 새하얀 도화지 한 장을 볼 수 있었다.
“고마웠대요. 자기 대신 멋진 그림을 그려줘서.”
“······그래?”
들고 있던 화첩에서 북 찢어낸 도화지였다.
충분히 성의 없어 보이는 도화지였지만 그 그림을 바라보던 블라드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는 여전히 그림을 못 그린다.”
“응?”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온통 삐뚤빼뚤한 그림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것만 같은 그 그림 위에는 나무임에도 활짝 웃고 있는 어린 녀석과 그 옆에서 검을 들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
엘프들의 도시에서도 아주 깊은 곳.
볕이 잘 드는 밖과는 다르게 온통 어둡기만 한 엘프들의 감옥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애처로운 소리가 있었다.
“신이시여! 제발!”
거꾸로 매달려 있는 비츠카야 백작에게서 다급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온통 피투성이가 된 것이 혹독한 고문을 당한 것 같았지만 정작 치명적인 상처는 없어 보이는 것이 꽤 고단수의 전문가가 취조를 한 모양이었다.
“피에르 주교! 신을 향한 저의 믿음은 흔들린 적이 없소이다! 지금이라도 기도문을 외우라면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끄아아아!”
치이이익-
간절한 목소리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백작이었지만 정작 그의 앞에 있던 사제는 딱히 고해성사를 들어줄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성서 대신 뜨거운 인두를 들고 있던 주교 피에르는 침착한 표정으로 남은 피부를 마저 벗겨내고는 백작에게 물을 뿐이었다.
“언제부터 내통하고 있었지?”
“끄으! 끄아아아!”
“5년 전? 아니 그보다 오래되었나?”
감옥 안에 울려 퍼지는 끔찍한 비명에 창살 밖에 서 있던 엘프들조차도 차마 지켜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의 뜻을 따르는 충실한 피에르만큼은 이 지옥 같은 광경 속에서도 진실을 찾기 위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낼 뿐이었다.
“내 앞에서 허튼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자네는 이미 교황청에서도 주시하고 있던 불순분자였거든.”
“흐으으!”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던 피에르의 말에 백작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
주교 피에르. 교황청이 자랑하던 구마사제이자 이단심문관.
죽여버린 사특한 존재들은 수십이며 직접 태워버린 불신자들은 수백이라던 그의 앞에서 비츠카야 백작은 그저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존재일 뿐이었다.
“······내통, 내통까지는 아니고.”
“이곳의 엘프들이 말하길 애초에 압실론이라는 물건은 자살까지 유도할 물건은 아니라고 하더군.”
피에르는 들고 있던 인두를 내려놓고는 자그마한 집게를 집어 들며 물었다.
누구 하나 해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집게였으나 정작 백작은 뜨거운 인두보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자그마한 집게가 더욱 두려울 뿐이었다.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은 있을지언정 말이지.”
“······.”
수도 브리간테스를 들썩였었던 엘프들의 마약 압실론.
그 약물을 접하고 자살했던 궁정 귀족의 수만 해도 수십이었으니 이는 보통 악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유통할 수 없는 그런 물건이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일까. 엘프들이 가지고 있던 복수심에 새까만 독이 더해진 시점은?”
그러나 정작 이 압실론을 만들었던 엘프들조차도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만든 약물은 아니라고 했다.
제국을 천천히 병들게 할 생각이었을지언정 이렇게나 극단적인 결과는 바라지도 않았다고 말하는 그들이었다.
정말 그렇게 했다가는 제국에 의해 아우슈린이 위험해지라는 것을 엘프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봤을 때는 자네의 영지에서부터 이 사달이 난 것 같은데?”
누군가가 제국에 독을 더했다.
엘프들이라는 방패를 앞에 세우고서는.
굳이 남의 이름을 빌려 서로 간의 증오를 부추기는 존재들이 있음을 피에르는 떨리는 백작의 눈을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용혈공이 한 짓인가?”
쉼 없이 서로간의 선을 긋고, 가르고.
그렇게 생겨난 깊은 갈등의 골 사이에서 웃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세계와 세계들이 만나는 면면마다 똬리를 틀고 있는 그들을 향해 신실한 신의 종이 드디어 자그마한 횃불 하나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말, 말하겠소! 그러니 제발!”
내가 믿는 올곧은 길을 위해 성스러운 신의 말씀 대신 분노를 행한 피에르.
그러나 애써 벌린 백작의 입을 통해 들은 독충들의 모습은 피에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추악한 것이었다.
※※※※
축축한 복도를 따라 성난 소리들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기이한 목소리들이었지만 정작 문틈에 숨어 몰래 엿듣고 있던 요제프는 귀를 세운 채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흩어져야 하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보여줬소.
-겨우 이렇게 뭉쳤는데 다시 흩어지자고? 그렇게 했다가는 몇백 년이 걸릴지 몰라!
요제프가 서 있는 문 너머에서는 지금 수십 명의 흑마법사들이 목에 핏대를 올린 채 격렬히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침묵하고 있을 흑마법사들까지 합하면 아마 수백은 될 인원들이었지만 정작 아무런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지금도 요제프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앞으로도 기회는 없을 거다! 지금만큼 제국이 혼란에 빠졌던 적은 역사상 없었으니까!
블라드에게 얻은 상처로 라마슈트가 잠시 물러난 지금, 그녀가 불러모은 흑마법사들이 천천히 이빨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같은 세계에 속해있었어도 꾸는 꿈은 각기 달랐던 그들은 지금이야말로 자신들의 목표를 이룰 기회라는 듯 서로 목소리를 높여가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나서서 제국을 지배해야 할 때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위대한 마도 제국의 탄생이지!
-그런 시시콜콜한 사정에는 관심 없소. 나는 그저 그녀가 원한다던 세계 창조의 술이 궁금할 뿐이지.
-일단 교황청과 북부정교회 놈들부터 칩시다! 그동안 그놈들에게 당한 동료들이 한 둘이오?
누구는 못다 이룬 야망, 누구는 찾지 못한 진리, 또 다른 누군가는 뼈에 사무친 복수를 위해서.
요제프는 그들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마다 세상을 까맣게 물들일 새까만 독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극단에 서 있기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그들의 말은 지금까지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채 그저 공허하게 스러졌을 뿐이었다.
-······일단 지금이 우리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적기라는 것만은 사실이지.
라마슈트라는 여인이 그들을 하나로 모으기 전까지는 말이다.
순간, 요제프는 문 안쪽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옴을 눈치챌 수 있었다.
라마슈트의 심복인 이름 모를 목 없는 기사.
요제프를 깊은 복도 안으로 안내해주었던 그가 입을 열자 방금까지만 해도 열을 올리던 흑마법사들이 침묵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위해 라마슈트 님의 위업이 먼저 달성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동의했던 부분이고.
과연 라마슈트는 무슨 위업을 먼저 달성하려 했던 것인가.
그렇게 하기 위해 이들은 여태껏 어떠한 수작을 펼쳐온 것인가.
그것을 말하려는 목 없는 기사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요제프의 귀가 문가에 바짝 다가서기 시작했다.
-비록 용혈공이 배신하긴 했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용의 조각이 있소.
도시 모시암을 둘러쌌던 라두의 군대는 분명 수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아마 그때까지는 용혈공과 라마슈트는 한 패였으며 용의 조각이라는 물건을 통해 그녀를 꾀어내었던 모양이었다.
-그와 더불어 이제는 정령들의 정수를 포함해 아이들의 어린 가능성들까지 잔뜩 모아둔 상태지. 이제는 세계수의 뿌리만 있으면 되는 거요.
세상 가장 완벽한 조각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어린 가능성.
그리고 하늘 저 끝까지 솟을 수 있는 세계수의 뿌리까지.
-이제 그것만 모은다면 라마슈트 님은 스스로가 창조할 세상의 주인이 되시겠지.
그것들을 통해 라마슈트는 신이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지금의 세상은 그저 외면하고 있을 뿐인 여린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아마 그녀가 꿈꾸는 세상 속에서는 어떤 아이들도 고통받지 않을 테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여태껏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최악의 신성 모독이었을 뿐이었다.
“······!”
이제야 라마슈트의 진정한 목적을 깨달은 요제프는 숨죽인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필멸자의 상상을 뛰어넘는 그녀의 장대한 계획에 요제프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숨 한줄기를 내뱉고 말았다
끼이이익-!
그리고 아무도 숨 쉬지 않는 이 공간에서 요제프가 내쉬는 숨결은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
그 숨을 알아챈 목 없는 기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의자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누구냐.
문 안 쪽에서부터 저벅저벅 걸어오는 목 없는 자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땅히 도망칠 곳 없었던 요제프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너밖에 없겠지. 바예지드의 요제프.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목 없는 기사가 띄운 푸른 귀화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죽음을 담았기에 한없이 차갑기만 한 그의 눈빛이 자신을 쓸고 가자 요제프는 그만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고 말았다.
-······.
그러나 목 없는 기사는 더 이상 요제프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요제프의 머리 위를 쳐다보며 얼음장 같이 굳어 있었을 뿐이었다.
-돌아오셨습니까.
“그래.”
요제프는 순간 자신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심부름을 보내놨더니 아무래도 길을 잃은 모양이로군.”
요제프는 비록 기사는 아니었지만 타고난 기감은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뒤에는 어느새 온통 색을 잃어버린 남자가 서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모르겠는 그 남자는 앞에 서 있는 푸른 색의 귀화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은 내가 데려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프라우센 님.
“아 그리고.”
굳어있던 요제프의 어깨를 돌려세운 프라우센은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그를 데리고 나가며 말했다.
“아직 용의 심장은 너희 것이 아니지 않나.”
치켜세운 손가락으로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면서.
“이것의 정당한 소유권을 얻고 싶다면 약속대로 사르누스부터 죽여야 할 거다.”
너는 죽음을, 나는 조각을.
그것이 그날의 숲속에서 우리가 한 계약이었으니까.
그 말과 함께 죽음에서 되살아난 남자와 죽음으로 향하는 남자가 어두운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걸어도 걸어도 벗어나지 못할 복도였겠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걸어 나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