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23
갈라진 틈 사이에서 (2)
길고 좁은 복도 위로 쿰쿰한 공기가 가득했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습기와 함께 떠오르는 저택의 악취는 숨을 쉬어야만 하는 요제프에게 있어서 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요제프는 지금만큼은 곳곳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악취조차 잊은 채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죽음을 어설프게 입었군. 숨소리 한 번에 날아갈 정도니.”
온통 색을 잃어버린 남자.
그러나 예전에는 그 누구보다 가장 찬란했던 빛을 지녔던 사람이 지금 자신의 앞에 있었으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들려오는 프라우센의 목소리에 심장이 뛰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세차게 뛰고 있는 요제프의 심장은 단순히 위기감에서만 비롯된 박동은 아니었다.
‘건국왕이라니······.’
어렸을 적 어머니가 읽어주었던 동화책 속에 나오던 남자가 지금 요제프의 눈앞에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동경해왔던 소드마스터라는 존재는 요제프에게 있어서는 닿을 수 없는 거품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를 폐하라고 부르지 마라.”
그러나 지금의 요제프는 그때의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그의 앞에 있던 남자 또한 이제는 영광된 기사가 아니었다.
본인들이 꿈꾸었던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곳을 걷고 있던 그들은 묵묵히 습기 찬 복도를 걸어 나갈 뿐이었다.
끼이익-
위기에 빠져 있던 요제프를 프라우센이 데려간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여태껏 보았던 방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잘 정돈되어 있던 방이었고 그나마 이곳에서는 요제프를 괴롭히던 악취가 새어들지 않고 있었다.
“앉아라.”
“네.”
촛불 하나 밝히지 않은 프라우세의 방을 보며 요제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 얼굴을 굳혔다.
지금 자신은 흑마법사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불려온 참이었으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예지드의 요제프. 언젠가 너를 한 번 만나볼 생각이었다.”
“······.”
너무 오랫동안 어두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불빛 하나 없는 방이었지만 요제프는 앞에 있는 프라우센을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네가 블라드라는 녀석을 처음으로 등용했다지?”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의 얼굴.
그러나 블라드라는 이름이 나올 때만큼은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표정이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습니다.”
“그래. 그럼 말해봐라.”
치이익-
그저 장식에 불과한 양초였을 것이다.
살아있지 않기에 조금의 빛도 필요하지 않은 프라우센이었으니까.
“처음부터 천천히. 녀석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그러나 지금 프라우센은 스스로 성냥을 당겨 어두운 방 안에 촛불을 지피고 있었다.
아마도 앞에 있는 손님을 위함이었겠지만 정작 앞에 있는 요제프는 지금 보이는 불빛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말았다.
“성심성의껏 대답한다면 이것은 못 본 척 해주마.”
그렇게 촛불 너머에서 보는 프라우센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요제프는 차마 그의 웃음을 보며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프라우센이 들고 있는 것은 요제프가 애써 숨겨두고 있던 자그마한 찻잔이었으니까.
여태껏 새까만 찻물을 담고 있었음에도 전혀 물들지 않은 드워프들의 찻잔을 보며 요제프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
그 참혹했던 전투가 있은 지도 이제 2주라는 시간이 지났다.
곳곳에 비어있는 자리들과 그 자리들만큼 생겨난 무덤들은 여전히 슬플 뿐이었지만 그들을 대신해 자리 잡은 푸르른 목책만큼은 엘프들에게 있어 큰 위안이 되어 주고 있었다.
“팔은 좀 괜찮아요?”
그리고 지금 블라드가 있는 방에서도 아우슈린의 푸르른 목책이 보이고 있었다.
어린 세계수가 그린 그림을 뒤에 한 채 자야르를 내려다보고 있던 블라드는 그의 팔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며 그만 복잡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팔이야 그렇다 치는데 지금은 다리가 좀 불편하다.”
블라드의 검이 꿰뚫고 간 자야르의 왼팔 부근에는 지금도 새하얀 붕대들이 둘둘 감겨져 있었다.
어쩌면 다시는 검을 잡지 못할지도 모르는 큰 부상이었지만 자야르는 덜렁거리는 본인의 왼팔보다는 발목을 붙들고 있는 사슬들이 더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안 돼요.”
“아직 뭐라고 말하지도 않았잖냐.”
“지금은 포로의 신분이라는 걸 잊지 말라구요.”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인연 깊은 스승이었지만 아우슈린의 엘프들에게 있어서는 사특한 존재들과 함께 온 불길한 남자였을 뿐이었다.
이제는 안대조차 풀러낸 채 침대에 누워있던 자야르는 블라드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하긴, 지금 당장 죽여도 할 말이 없긴 하지.”
그 말과 함께 실실 웃어대는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언제 어디서나 상대방을 기만할 수 있는 자야르 특유의 여유로움.
검술만큼이나 배우고 싶었던 그의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자리에 앉았다.
“이제 말해 봐요. 도대체 왜 그랬던 거예요.”
“······.”
그러나 잠시 풀려 있던 둘의 분위기도 방금의 말로 다시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스승의 부상을 걱정하던 블라드였으나 어느새 자야르를 바라보고 있는 블라드의 푸른 눈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미리 말해두는데 지금 말하는 거 부탁 아니에요.”
단순한 인정으로 베풀 수 있는 배려는 여기까지라는 듯 블라드의 눈빛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자야르는 이제는 더는 감출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모양인지 남아있던 한쪽 눈을 감고 말았다.
“미안하다.”
“사과는 됐고. 지금 그 까만 여자는 어디 있어요.”
끼이익-
블라드가 바짝 잡아당긴 의자에서부터 날 선 소리가 들려왔다.
자야르의 귓가를 파고드는 그 소리는 이 자리에서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블라드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 여자가 죽인 사람들만 해도 내가 알기로는 수백이 넘어요. 모르는 것까지 합치면 천 단위는 넘겠죠.”
“······.”
“그 빌어먹을 년이 진짜 악질인 건 아이들 같은 약한 사람들만 찾아 죽인다는 거예요. 그냥 전쟁 치르듯이 아무나 죽이는 거였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나서지도 않았어요.”
블라드는 자신이 정의로운 사람이라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사람이라면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을 뿐이지.
그 시궁창 같은 뒷골목에서도 블라드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치열하게 지켜왔던 최소한의 양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년 지금 어디 있어요.”
그리고 블라드는 지금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받은 만큼 갚고, 인연 있는 만큼 지켜보겠다는 블라드의 결심은 지금 밖에 보이는 단단한 목책만큼이나 굳건한 것이었다.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자야르.”
“네가 말하는 그 년은 ‘어디에’ 속해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그런 블라드의 결심을 알아챈 자야르는 이제는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조금 이르기는 했지만 블라드라는 사람은 진실이 알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라마슈트라는 여자는 기억 속에 살아. 마법사가 아니라 자세히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있지는 않았지.”
자야르가 알아본 라마슈트라는 여인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허상 속에 자리 잡고는 이따금씩 악몽처럼 솟아오르는 존재였을 뿐이었다.
“다만 그 여자에게 닿을 수 있는 통로 몇 곳은 알려줄 수 있다. 지금도 통하려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러나 책임 있는 자들이 진작에 걷어냈어야 할 그녀의 어두운 거품은 어느새 현실을 위협할 정도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찍어봐요.”
차분히 지도를 들어 올리는 블라드를 향해 자야르가 그나마 성한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지도 위를 하나씩 찍어가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대답을 원하는 블라드도, 진실을 말하는 자야르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왜 안 물어보냐.”
“뭘요?”
“요제프 님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마지막 지점까지 찍어낸 자야르는 마른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지만 정작 블라드의 대답은 오랫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직접 가서 물어보려구요.”
“······그래.”
자야르는 요제프가 전한 마지막 전언을 전하려 했지만 방금 들린 블라드의 말에 그만두기로 했다.
이제 곧 만나게 될 둘 사이에서 굳이 전달자는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페테르 님. 보고입니다.”
아직 겨울의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도시 스투르마의 한 집무실.
꽂혀 있는 검만큼이나 책장에 있는 책들도 즐비한 그곳에서 조언자 라그무스가 몇 장의 종이를 들고 페테르를 찾아왔다.
“서부 관문을 향해 가이다르 가문이 북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
한참 서류들을 들춰보고 있던 페테르는 라그무스 말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몇 년 전 있던 데어마르에서의 대회전을 통해 크게 타격을 받고 돌아간 서부의 가이다르 가문.
그러나 이제는 그 피해를 복구했다는 듯 다시금 고개를 처들며 협곡을 가로막고 있던 북부의 방패를 치우려 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빠르군.”
“아무래도 황금공의 지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정확히는 용혈공의 속셈이었겠지만 말이다.
중앙에서부터 시작한 중앙의 군세와 발맞춰 다시금 북상하는 가이다르 군의 모습은 분명 누군가가 뒤에서 지시하지 않고서는 일어나기 힘든 교묘한 움직임이었다.
“그곳까지 지키기에는 전선이 너무 길어져. 일단은 후퇴 시켜야 한다.”
“어디까지 군사들을 물릴까요?”
북부의 일곱 가문이 연합해 있는 올랑바르 관문 요새였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황금공과 가이다르의 군세를 동시에 막아내기는 역부족일 것이다.
그곳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있던 페테르는 일단은 길어질 전선을 쳐내기 위해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데어마르까지.”
한참 지도를 지켜보고 있던 페테르는 들고 있던 펜을 쭉 들고서는 데어마르가 그려져 있는 지점에 표시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도시인 쇼아라와도 가까운 데어마르는 작기는 했어도 북부의 가문들이 집결하기에 부담이 없는 좋은 지점이었다.
“······그리고 페테르 님.”
“음?”
“여기. 요제프 님의 보고입니다.”
갑작스러운 적들의 진군에 한참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페테르였지만 방금 라그무스가 건넨 쪽지에서만큼은 날카로웠던 표정을 풀고 말았다.
“······오랜만이로군.”
“그만큼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었습니다.”
곱게 접혀져 있기는 했지만 정작 보고가 적혀 있는 종이는 급하게 준비했다는 듯 형편없이 찢겨진 모양새였다.
다급히 그것을 잡아당겼을 아들의 손을 떠올린 페테르는 복잡한 표정과 함께 접혀있던 쪽지를 펴내었다.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래.”
펴낸 쪽지 한가운데는 익숙한 아들의 필체가 적혀 있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흐릿해져 있는 필체였지만 피를 이은 아들이기에 알아볼 수 있는 그런 필체였다.
“전보를 준비해라. 라그무스. 강철공과 정교회에 알려야겠다.”
그 쪽지를 읽어 내린 페테르는 방금 보고 있던 지도를 유심히 보고는 펜을 꺼내 들었다.
“궁정공께는 알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분께는 강철공이 알리시겠지. 우리에게서 너무 많은 전보가 나가서는 안 돼.”
가여운 아들이 보내온 전보 앞에서도 페테르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영주이자 군주인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냉철하게 판단했을 뿐.
“방금의 지시를 취소하지. 북부 연합의 군사들을 쇼아라까지 물리겠다.”
지금 내뱉은 말과 함께 페테르는 데어마르에 쳐져 있던 표시에 굵은 가위표를 치기 시작했다.
데어마르를 넘어 쇼아라까지.
앞으로 고착화할 방어선을 최대한 당겨 그린 페테르를 보며 조언자 라그무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백작님.”
그 말과 함께 집무실을 나선 라그무스의 뒷모습을 보며 페테르는 그제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보았던 아들의 전보를 조심히 다시 펴낸 그는 뒤에 있던 책장에서 자그마한 책 하나를 꺼내고서는 그 쪽지를 조심스레 껴 넣었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요제프.”
페테르가 꺼내든 책의 표지에는 마치 어린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화려한 표지가 그려져 있었다.
어렸을 적 자신의 둘째 아들이 그토록 좋아하던 낡은 동화책에는 커다란 용을 향해 달려 나가는 기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