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40
끔찍한 기세로 내려쳐 지던 사르누스의 검이 순식간에 튕겨 나갔다.
찰나도 되지 않는 그 순간에 일점의 균형을 비틀어내는 신기(神技).
그 기술을 일개 기사도 아닌 시대의 정점에게 구현해낸 블라드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끼릭!
튀어 오른 검을 억지로 붙잡아내려는 사르누스의 완력이 완고했다.
그러나 앞에 있는 블라드의 모습은 이미 흐릿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이런!”
점에서 선으로.
멈춰 있던 블라드가 어느새 바닥을, 벽면을 가르는 황금색 선이 되어 사방팔방을 누비고 있었다.
“흐아아아아!”
아무리 보아도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검의 본질 자체를 속도에 기반했기에 가능한 일격필살만의 움직임.
그 모습은 마치 먼 옛날에 보았었던 소드마스터의 모습과도 겹치는 것이었다.
콰지지직-!
“크으으윽!”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가능성을 선점해라.
그 묘리에 충실히 따른 블라드가 한 줄기의 번개가 되어 사르누스의 옆구리를 강타하며 나타났다.
“치잇!”
“······네 이놈!”
그러나 블라드의 살기는 짙었고 용의 본능은 날카로웠다.
보지는 못했어도 예측할 수 있었던 블라드의 움직임은 어느새 핏빛 오러에 막혀 다시금 점으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감히 키하노의 검술 따위로 나를 농락해!”
완벽을 추구하는 드라굴리아의 검술은 쉽게 흔들리지 않은 무게를 추구한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만 블라드를 향해 무게 어린 사르누스의 검이 찾아들고 있었다.
“내 핏줄을 타고났으면서도 감히!”
거대한 산과 같은 무게로.
그렇게 블라드를 짓누르려는 사르누스의 세계가 머리 위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쾅! 쾅쾅! 쾅!
“으으윽!”
한 번의 검격이 들어올 때마다 블라드의 온몸이 격하게 진동했다.
날카롭지는 않았지만, 감히 감당하기 힘든 무게.
휘두르는 검 한 번에 이리저리 휘청이고 마는 블라드의 모습이 그 위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빠져나와야 한다! 기세를 넘겨줘서는 안 돼!]“끄으으으!”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쉽게 빠져나오기 힘든 연격기.
그 사이에서 점점 넘어가기 시작하는 흐름을 눈치챈 블라드가 이를 악물었다.
“흐아아아!”
여전히 나를 짓누르려는 거대한 세계.
그 세계에 짓눌리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오직 다음을 향한 전진뿐.
“이런!”
스치기만 해도 지워질 것 같은 강맹한 기세를 향해 블라드가 뛰어들어갔다.
분명 무모해 보이는 행동이었지만 결투의 흐름을 비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강제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콰드드득-!
“크윽!”
어깨를 깊게 파고드는 사르누스의 검격에 드워프들의 갑옷이 깨져 나갔다.
유스티아에게 배운 갑주술로도 차마 상쇄할 수 없었던 끔찍한 고통과 함께.
그러나 지금의 고통과 상실은 분명 블라드를 사르누스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으아아아!”
각자의 눈동자로 서로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
그렇게 바라본 사르누스의 푸른 눈동자 안에서 블라드가 내지르는 일격이 작렬했다.
콰지지직-!
“크으으으!”
터져나가는 흉갑과 함께 황금빛 비늘들이 반짝였다.
그것은 루트거의 세계로 잔뜩 금이 갔었던 용의 비늘이 만들어낸 파편이었다.
“나는 너의 아들도 아니고!”
콰직!
“실패작도 아니야!”
콰드득!
날카롭게 번뜩이는 블라드의 검격이 계속해서 사르누스를 강타하고 있었다.
“네가 부르는 모든 이름에는 내가 없단 말이다!”
앞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강맹하고 내려치는 일검 하나하나는 매섭다.
이미 부상당한 사람이 내지르는 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
마치 번개가 휘몰아치는 것 같은 지금의 공격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오직 상상하기에 가능한 저 먼 곳의 경지를 끌어낸 것이었다.
“으으윽!”
블라드가 만들어 낸 이 세계는 할 수 있다 믿기에 가능한 세계.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할지라도 진창 위에 있던 소년이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소중히 품고 있던 상상력이라는 것이 필요한 법이었다.
“네 이놈!”
아주 잠깐 멈춘 공격에 서둘러 블라드를 떼어낸 사르누스는 재빨리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러나 잠깐 숨을 고를 수 있던 이 순간까지도 오롯이 블라드가 선택한 것이었다.
드드드득-!
땅이 울리고 있었다.
아니, 블라드가 만든 세계가 울리는 중이었다.
“너는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조용히 내쉬는 블라드의 입김이 하얗게 번지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이곳이 차가워서가 아닌 내뿜고 있는 블라드의 숨결이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고작 닿지도 못할 완벽함을 위해서.”
그렇게 달궈진 심장은 내 앞에 있는 사르누스를 향해 똑바로 매겨져 있었으니.
잔뜩 움츠린 블라드의 온몸이 마치 당겨진 시위처럼 팽팽했다.
“그래! 어디 한번 와 봐라!”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기회를 포착하는 일격필살의 검술.
그러나 지금의 블라드는 그 예측마저 뛰어넘는 속도로 사르누스를 가르려 하고 있었다.
[그래. 너의 길을 가 봐라.]이것은 배운 것이 아닌 내가 터득한 나만의 길.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그 길을 블라드가 지금 키하노에게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너에게 정당한 대가를 요구한다. 사르누스.”
언젠가는 나 또한 저 하늘의 별처럼 반짝일 수 있기를.
별처럼 빛나던 소년의 꿈이 지금 자신을 가로막는 시대의 악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네가 내놔야 할 차례야!”
콰가가가강-!
빛처럼 돌진하는 블라드의 등 뒤에서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것은 둥지를 떠나는 새를 위한 장미의 미소의 마지막 배려였다.
“내 시대에 더 이상 용은 없어!”
“끄으으으으!”
한 줄기의 섬전, 뻗어나가는 벼락.어쩌면 10년 후의 내가 되어야만 펼칠 수 있을 것 같은 강맹하고도 올곧은 일격.
“그렇게 하기로 내가 정했다!”
“끄아아아아!”
과거의 슬픔과 현재의 의무, 그리고 미래의 가능성까지 모두 끌어모은 블라드의 일격이 조금씩 사르누스의 심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블라드! 이 자식-!”
“그러니까 그만 죽어!”
가장 오래된 용이 품고 있던 완벽한 조각들을 향해.
그러나 그 조각들을 부수기 위해서는 블라드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했다.
[멈추지 마라!]“······!”
순간 블라드의 손잡이를 미는 또 다른 손이 있었다.
[이제 조금이면 되니까!]갈색 머리를 가진 빛나는 기사.
빛바랜 프라우센이 아닌 명예로운 검투사 키하노가 어느새 블라드와 함께 검을 밀어내고 있었다.
“키하노! 이 빌어먹을 놈들이!”
전(前) 시대의 소드마스터와 현(現) 시대의 소드마스터가 함께 내지르는 일격.
시대를 뛰어넘는 그 일격의 끝에서 완벽함을 향한 용의 욕망이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하나라면 몰라도 세 개의 조각이라면 힘들 거다.]이제야 마주 볼 수 있는 키하노의 눈을 보며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에 큰 파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리운 사람을 드디어 마주했기에 떨릴 수밖에 없는 울림 같은 것이었다.
쩍! 쩌저적!
사르누스의 비명과 함께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하는 용의 조각.
그러나 블라드는 쪼개지는 조각의 감촉보다 자신의 왼팔을 타고오르는 검은 번개의 형상에 더욱 경악하고 있었다.
“키하노?”
가장 완벽한 용을 갈랐던 루가 족의 신비.
그 신비가 지금 이 시대에 현현한 소드마스터에 의해 다시 발동되려 하고 있었다.
[이런 건 원래 한 번 해본 사람이 더 잘하는 법이지.]완벽한 조각을 부수기 위해 찬란히 빛나는 너의 영혼을 가르기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너희를 힘들게 하는 완벽한 조각은 결국 우리의 세대에서 끊지 못한 것이었으니까.
[수고했다.]“키하노-!”
다하지 못한 의무를 위해, 막지 못한 비극을 끊기 위해.
돌아온 소드마스터가 완벽함이 내지르는 비명을 향해 마지막 일격을 내질렀다.
콰지지직-!
별이 부서진다.
내가 바라보던 저 별이 붉게 빛나는 완벽함과 함께.
“안 돼!”
아무것도 아닌 나를 향해 찾아주었던 유일한 별.
용으로 태어난 나를 기사라 말해주었던 키하노.
그가 지금 웃는 얼굴과 함께 나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다.
※※※※
콰르르릉-!
요란히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현실의 하늘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점점 넘어가는 검은 달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한 밤하늘 뒤로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오늘의 태양.
그렇게 천천히 걷히는 밤하늘 아래로 한 줄기의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햇빛이 가장 먼저 찾아든 곳은 힘없이 앉아 있는 블라드의 등 뒤였다.
“······잘했다.”
블라드가 앉아 있는 곳에는 심장이 꿰뚫린 채 죽어가는 사르누스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본래의 푸른색이 아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맑은 갈색의 빛이었다.
“키하노.”
사르누스가 죽고 만 육체에 자리 잡은 키하노.
그러나 창백해진 그의 안색은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네가 자랑스럽다. 정말 훌륭했어.”
아버지의 모습으로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키하노.
“너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용으로 태어났지만, 너만의 길을 걸은 블라드.”
그리고 지금 그에게서 들려오는 말은 어쩌면 블라드가 평생동안 듣지 못했을 그런 말이었다.
“······이렇게 다들 떠나가면 어떡해요? 나만 남으면요?”
난생 처음 마주하는 아버지의 앞에서 울고 있는 소년.
그 소년을 보며 키하노는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이별은 완성이자 또다른 약속이지.”
내리쬐는 햇빛이 비추는 둘의 머리색이 꼭 닮아 있었다.
그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그러니 이리 와 봐라.”
점점 희미해져 가는 눈동자의 빛.
그러나 웃고 있는 키하노는 마지막 힘을 다해 블라드에게 팔을 펼치고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너를 안아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여태껏 같은 세계 안에 있었지만, 서로의 온기만큼은 나눌 수 없었던 둘.
그러나 지금만큼은 안을 수 있는 키하노와 블라드가 서로를 껴안기 시작했다.
“고마웠어요. 키하노.”
“······그래. 그렇게 보내는 거다.”
겨울 날 시작했던 우리의 여정은 여기까지.
그리고 마주한 끝은 후회가 없도록.
그렇게 껴안은 둘의 머리 위로 밤하늘 사이로 태양이 비치기 시작했다.
소년이 품은 별.
별이 품은 소년.
그렇기에 둘은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
높디높은 밤하늘이 바라보는 둘의 이별은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 본편 끝-
작가의 말
본편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저는 조금의 휴식을 거친 후에 외전으로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겨울에서 시작해 봄에서 끝난 블라드의 여정을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외전- 여름의 시작
그해의 봄은 너무나 가혹한 시절이었다.
와닿는 공기는 따뜻했으나 딛고 있는 땅은 피로 인해 질척였고, 밭을 갈아야 할 농부들은 쟁기 대신 창을 들어야만 하는 그런 계절이었으니까.
가장 오래된 용이 만들어낸 환란(患亂)의 시기.
그러나 피로 물든 대지라 할지라도 자연은 여전히 싹을 틔웠고 이제는 해를 지나 새로운 여름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이곳은 변함이 없네.”
서부의 도시 트리노바.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그곳의 저택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서 얻어 입기라도 한 듯 큰 망토를 휘적이며 걸어오는 소녀는 여름의 빛깔을 닮은 초록색 머리를 지니고 있었다.
“3년 만인가?”
떠나기 전보다 부쩍 커진 키는 소녀의 눈높이를 높였다.
그러나 소녀와는 달리 여전히 그때와도 같은 저택의 풍경은 아주 잠시나마 샤를을 그때의 어린아이로 돌아가게 하고 있었다.
“······.”
저기 보이는 정원에서는 어머니가 화초를 돌보고 계셨다.
바로 앞에 있는 모퉁이를 돌아서면 오빠들이 수련하던 연무장이 있었고.
그리고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을 쭉 따라 걸어가면 아버지가 계셨던 라브노마의 홀이 있었다.
“치워.”
“네.”
이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가 언제나 앉아 계셨을 것만 같던 그런 장소.
그러나 지금 그 홀의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빛바랜 가이다르의 문장이었다.
끼이이익-
병사들이 다급히 걷어낸 깃발의 뒤로 저택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화사한 여름과 맞지 않게 온통 어두컴컴한 그곳에는 굴러다니는 먼지와 함께 비릿하게 퍼져오는 죽음의 냄새가 가득했다.
“······이제 왔나. 애송이.”
아버지가 앉아 계시던 자리에 앉아 있는 낯선 남자.
정오의 태양조차도 차마 비추지 못한 그의 입가에서는 쉼 없이 흘러나오는 검붉은 핏줄기가 가득했다.
“지그문드 가이다르.”
아버지의 원수이자 가문의 원수.
그리고 가장 오래된 용이 일으킨 대륙 전쟁의 마지막 패배자가 될 지그문드 가이다르.
그런 그를 보는 샤를의 눈에는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서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내 아들은 죽었나?”
“아직은.”
“흐흐. 그 녀석도 참 내 말을 안 듣는군.”
깊게 뉜 등과 함께 기다란 한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삶의 끝자락에서 흘러나오는 깊고도 무거운 한숨.
아마 그것은 지그문드가 뱉어낼 수 있는 마지막 삶의 흔적일 것이다.
“곱게는 못 죽을 거라고 자살이라도 하라고 했더니만.”
“이슈트반의 신변은 이미 니다벨리르가 확보했다. 지그문드.”
길게 깔린 융단을 걸어 오직 군주만이 오를 수 있는 홀의 계단을 올라가는 샤를 라브노마.
그런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시퍼렇게 날이 선 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너 하나뿐이야.”
마지막 라브노마가 된 소녀가 어쩌면 마지막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가이다르에게.
그렇게 뻗어낸 검 끝은 어느새 지그문드의 목덜미에 멈춰서 둘의 세계를 날카롭게 잇고 있었다.
“아버지를 속인 비겁한 찬탈자.”
“쿨럭, 쿨럭!”
“······그리고 마지막까지 정당한 대가를 지지 않으려는 겁쟁이.”
거짓된 기습으로 소녀의 저택을 피로 물들인 서부의 찬탈자.
그리고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패배까지도 거부하겠다는 듯 독을 마시고만 지그문드를 보며 샤를의 미간이 구겨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
그러나 그런 그라 할지라도 샤를은 승자의 의무를 다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서늘하게 빛나는 검 끝은 지금이라도 당장 지그문드를 찌르고 싶다는 듯 부들거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의무를 다하려 하는 것은 당신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흐흐.”
비굴하게 죽지 않기 위해 독을 삼켰지만 결국 승자의 배려에 만들어지고 만 마지막 순간.
그 순간 속에서 지그문드는 한 남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거대한 풍채 뒤로 겁에 질려 있던 드워프들을 가리던 그 날의 기사를.
“······호르헤.”
이기리라 확신했건만 결국 나는 패배자가 되었고 쥐고 있던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을까.
나의 군사들이 데어마르를 넘지 못했을 때부터? 아니면 라브노마의 깃발을 불태웠을 때부터?
“결국, 네놈이 나를 찌르는구나.”
아니, 그것은 아마 블라드라는 녀석을 만났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차가운 뒷골목에서 태어난 북부의 기사를 만났던 그 순간부터 말이다.
“······네가 키워낸 검으로.”
후회로 가득한 마지막 유언을 뱉어낸 지그문드의 머리 위로 시퍼런 검날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지금 나를 향해 달려드는 저 검의 이름은 샤를 라브노마.
저 검을 이곳까지 데려온 기사의 이름은 블라드 아우레오.
그리고 그 검을 키워낸 것은 의무 대신 인의를 선택한 창녀들의 기사 호르헤.
서걱-!
검에서 검으로, 세계에서 세계로.
그렇게 이어진 소녀의 검 끝이 너무나 아팠던 전쟁의 종지부를 찍어내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는 지그문드의 머리와 함께.
겨울을 지나 봄.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여름의 시작이었다.
※※※※
“아 씨. 이건 뭐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냐.”
넓고도 푸른 밀밭과 그 뒤로 늘어서 있는 오두막집들이 가득한 자그마한 시골 마을의 풍경.
멀리서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만이 가득한 평화로운 곳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누군가의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이거 끝은 나는 거예요?”
아직 여물지 못한 여름의 밀밭은 온통 초록색이었다.
그러나 그 위로 삐쭉 튀어나온 금발 하나만큼은 잘 익은 밀의 색을 지니고 있었다.
“이놈아. 입 놀릴 시간에 손을 놀렸으면 진작에 끝났겠다.”
“뭘 벌써 끝나요. 아직도 이렇게나 많이 남았구만.”
갑옷은 입지 않았지만, 검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등에 검집을 둘러맨 사내.
그것만 빼고는 평범한 농부의 차림을 하고 있던 블라드가 고개를 쑥 들어 올리고는 너른 밀밭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니, 이 정도면은 사람을 써야 한다니까.”
“사람을 쓰면 돈이 나가잖냐.”
“돈 많이 벌었잖아요. 이번에도 한 몫 크게 받은 거 내가 다 알거든요.”
계속해서 투덜대는 블라드의 옆에는 밀짚모자를 깊게 눌러쓴 라문드가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농부였다는 듯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 모습이었지만 그는 작년까지만 해도 데어마르의 전선에서 쉴 새 없이 적들을 썰어대던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벌었다고 무턱대고 써 대면 거지꼴을 못 면하는 거야. 하여튼 요즘 젊은것들은 절약의 미덕이라는 걸 몰라.”
그 말과 함께 쯧쯧하고 혀를 차대는 라문드를 보며 블라드가 질렸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아낄 걸 아끼셔야지. 그러다가 늙은 몸만 축나는 거예요.”
“거참 시끄럽네! 하여간 누가 도시 놈 아니랄까 봐 입만 살아서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호통을 질러대는 라문드.
그러나 블라드의 말이 맞다는 듯 어느새 그의 등 뒤에는 뉘엿뉘엿 해가 져가고 있었다.
“제가 도시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시골의 해가 짧다는 건 알거든요?”
조금씩 넘어가는 해와 함께 노을의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는 라문드의 장원.
그 아래에 서 있는 블라드가 점점 점점 어두워지는 주위를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잡초는 인제 그만 뽑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죠.”
“······하긴. 너 같은 놈한테 농사일을 도우라고 했던 내가 잘못이었지.”
농사라고는 지어본 적도 없던 도시 녀석에게 일을 시켰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
결국, 정해진 일과는 채우지 못했고 투덜거리던 블라드의 말만을 받아준 채 끝나버린 오늘이었다.
“가자. 빵값은 못했어도 수프 정도는 내주마.”
“흐흐. 여기 음식이 그렇게 맛있더라고요.”
그럼에도 라문드는 블라드에게 쟁기를 쥐게 한 것을 딱히 후회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잠시나마 검을 내려놓고 있던 블라드의 표정이 조금은 편안해 보였기 때문에.
※※※※
“너 몇 살이니?”
“4살.”
“······그런데 손가락은 왜 다섯 개를 피고 있는데.”
음식이 가득 놓인 식탁 아래서 어린 소녀가 자랑스럽다는 듯 손바닥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혹시 조금 있으면 다섯 살이 되는 거야?”
“아니다. 4살이 된 지 이제 한 달도 안 됐어.”
비록 틀린 대답을 했지만 누가 보아도 꼬집고 싶어지는 통통한 볼을 지닌 아이.
라문드는 자신의 가장 어린 손녀를 들어 올리고서는 무릎에 앉히며 말을 이었다.
“아직 어려서 손가락을 마음대로 못 접는 것뿐이야.”
“아하.”
살이 오른 볼만큼이나 쥐고 있는 주먹도 통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