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41
아마 그만큼 잘 먹고 잘 자랐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블라드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자그마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전쟁이 빨리 끝나서 다행이다.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수확량을 기대해봐도 좋겠어.”
어느새 식탁에는 라문드의 며느리들이 가져다 놓은 하얀 빵들이 가득했다.
사제 안드레아와 만나고서야 처음으로 맛볼 수 있었던 갓 지은 하얀 빵이었다.
“그러게요. 황금공이 그렇게 빨리 항복을 할 줄은 몰랐어요.”
“의무나 명예보다는 장사치처럼 손익을 우선시하는 자라고 했었지. 아마 이기기 힘들겠다는 계산이 빨리 섰던 모양이다.”
용혈공 사르누스의 발호로 시작된 대륙 전쟁도 2년째가 된 지금, 그 전쟁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개전 초기만 하더라도 북부를 집어삼킬 듯 강맹한 기세를 지니고 있던 중앙군이었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꺼진 불처럼 시들해져 가는 중이었으니까.
“물론 전쟁 초기에 구심점을 잃어버린 영향도 크긴 하겠지. 너 때문에 말이다.”
“······뭐 그런 이유도 있긴 하겠죠.”
북부의 강렬한 저항과 함께 곳곳에서 일어서기 시작한 이종족들.
그리고 그동안 중앙의 귀족들에 눌려 지내던 궁정공의 세력까지 합세해 대항했다고는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변수였다고 한다면 블라드와 사르누스간의 결투였을 것이다.
“그래도 이제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요.”
어쩌면 대륙의 모두를 피로 물들였을지도 모를 전쟁.
그 전쟁을 최소한의 희생으로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사내 때문이었지만 지금 그는 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어린 소녀에게 잘게 찢은 빵을 건네고 있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올해부터는 굶는 애들이 별로 없겠어요. 그렇죠?”
“······그렇지.”
모두가 칭송하는 대륙의 영웅.
건국왕 이후로 새로이 등장한 이 시대의 소드마스터.
그러나 지금은 그저 어린 소녀에게 먹일 빵을 건네는 평범해 보이는 청년일 뿐.
“그나저나 루트거 님의 계승식에는 언제 갈 생각이냐? 너 정도라면 미리 가 있어 주길 바랄 텐데.”
“가야죠.”
이제는 자신의 차례라는 듯 빵을 한껏 욱여넣은 블라드가 라문드를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가서 볼 사람들도 많으니까.”
“어쩔 거냐. 같이 갈까?”
라문드의 장원은 도시 바르나의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그렇기에 계승식이 있을 스투르마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정작 블라드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저는 거기 가기 전에 먼저 쇼아라부터 들러야 해서요.”
“왜? 굳이 내려갈 필요가 있나?”
바예지드 백작령의 도시 중 가장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 쇼아라.
그곳으로 다시 내려가 봐야 한다는 블라드의 말에 라문드가 의아해했지만, 이윽고 들려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항상 어디 갈 때는 간다고 말을 해야 하거든요. 이제는 그렇게 하기로 약속을 해놔서.”
“쯧쯧쯧. 아주 꽉 잡혀 사는구먼.”
날카롭기만 했던 소년에서 이제는 웃을 줄 아는 청년으로.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떠나야만 하는 작은 둥지가 아닌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둥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너무 늦지 말고 오도록 해라. 너 정도 이름값이면 한 달 전에는 도착해줘야 준비하는 쪽도 편할 테니까.”
“알겠어요.”
라문드의 말에 끄덕거린 블라드는 잠시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지금의 광경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말랑거리는 빵,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수프, 그리고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어린아이까지.
“······.”
예전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평화로운 풍경들.
그러나 그 풍경들을 눈에 가득 담은 블라드의 가슴 한구석에는 어째서인지 모를 쓸쓸한 심정이 머물고 있었다.
외전- 구슬치기
라문드의 장원을 떠나 쇼아라로 향하는 아침.
여름이어도 서늘한 초원의 공기는 초원 곳곳에 희미한 안개들을 뿌려놓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오직 북부의 초원이기에 느낄 수 있을 청량한 여름의 공기.
그러나 누아르는 그저 가만히 선 채 저 앞에 보이는 언덕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꿈쩍도 없이 멈춰 선 누아르를 보며 무슨 일인가 싶었던 블라드는 저 멀리 보이는 언덕을 향해 눈가를 좁혀 보았다.
검은 말과 금발의 기사가 같이 바라보는 초원의 언덕 위.
마치 초록색 파도처럼 솟아오른 그곳에는 어느새 따라왔는지 모를 야생마의 무리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거 네 친구들 아니냐.”
-푸르르륵.
블라드의 말을 들은 누아르가 괜스레 딴청을 하며 땅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지금은 검은 말 누아르였지만 블라드가 이름을 지어주기 전에는 초원의 아들이었던 야생마 누아르.
가장 단단한 용인 데스웜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무리가 지금 바르나의 초원을 따라오며 자신들의 옛 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따라오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블라드의 말에 누아르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멀리 보이는 야생마들의 무리를 제외한다면 오직 둘 뿐인 초록색 바다 위.
그 위에서 누아르는 자신이 속해있던 예전의 세계를 보며 잠시 고민하는 듯해 보였다.
딸랑, 딸랑.
그렇게 멈춰서 있던 블라드와 누아르의 등 뒤로 자그마한 방울 소리들이 들려왔다.
조금씩 걷혀가는 아침의 안개를 가르며 나타나는 짐을 실은 수많은 수레들.
-워워.
-앞에 계신 분은 누구시오?
길게 이어진 수레의 행렬을 몰고 나타난 이들은 행상인들이었다.
그것도 수십 개의 수레를 한 번에 몰고 다닐 만큼 커다란 상회의 행상인들.
-우리는 칸노르 가문의 사람이오. 딱히 볼일 없다면 비켜주셨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없는 초원에서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
요즘은 아니었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초원을 누비던 야만인들 때문에 큰 피해를 보고는 했던 행상인들이었으니까.
“······칸노르라.”
그러나 블라드는 행상인들의 날 선 질문에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행렬의 한 가운데서 펄럭이는 낯익은 깃발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여기에 있으려나.”
블라드는 자그마한 혼잣말과 함께 안장 뒤쪽에 꽂혀있던 깃발 하나를 빼 들었다.
새하얀 배경 위에 온갖 문장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자그마한 깃발.
그 깃발에서도 오래전에 새겨넣은 듯한 문장 하나를 가리킨 블라드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포틀리 칸노르라고 알고 있습니까?”
“네?”
상인들은 갑작스레 들려오는 고용주 아들의 이름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는 금발의 기사가 들어올린 깃발을 보고 놀란 것이었지만.
“그 친구가 내 종자 시절 동기인데.”
세기도 힘들 정도로 빽빽이 들어차 있는 가문의 문장들.
그러나 지금 블라드가 가리키고 있는 칸노르의 문장은 그 가문들 중에서도 가장 빨리 새겨졌다는 듯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있으면 쇼아라의 블라드가 찾는다고 좀 전해주시죠.”
지금은 셀 수도 없을 많은 가문이 그의 이름을 증언하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건네주는 소시지 하나에도 감탄했었던 깡마른 소년.
말도 제대로 타지 못했었던 그때의 소년이 지금 옛 친구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
“우와.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한껏 웃는 얼굴로 마차 밖을 향해 고개를 쏙 내민 청년이 있었다.
얼마나 잘 먹었는지 양 볼에 윤기가 흐를 정도로 통통한 청년이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야? 스투르마? 아니면 바르나?”
“라문드 님의 장원. 거기서 농사 좀 배우고 왔지.”
평소보다 훨씬 커진 포틀리의 목소리가 행렬 한 가운데서 크게 울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기에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반가움만큼이나 커진 포틀리의 목소리는 아침의 고요를 깨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안 그래도 너를 한번 보고 싶기는 했었거든. 그런데······.”
한 명은 마차, 다른 한 명은 말에 탄 채 나란히 걷고 있는 둘.
그러나 같은 길을 걷고 있다 하더라도 블라드를 대하는 포틀리의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조심스러워 보였다.
“놀러 와. 당분간은 장미의 미소에 있을 거라서.”
그런 포틀리의 태도를 이해라도 한다는 듯 블라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대륙의 모두가 아는 소드마스터와 일개 상인 가문의 아들과는 감히 견주기 힘든 큰 간격이 있는 것도 사실.
그러나 블라드는 종자였던 시절과 다를 바 없다는 듯 소시지를 우물거리며 답할 뿐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도 너를 보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거기 주인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얼마든지 놀러 오라고.”
“그래도 돼?”
“······너는 뭐 여전히 변한 게 없는 것 같냐. 요즘도 누가 괴롭히고 그래?”
만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분명 둘은 서로가 필요한 것을 나눈 사이였다.
종자였던 시절과 비교해 훌쩍 커진 블라드의 키는 어쩌면 칸노르 가문이 내어주었던 고기들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다 뭐야. 쇼아라에서 이렇게나 많이 고기가 필요한가?”
“아아. 이거.”
화제를 돌린 블라드는 길게 이어진 칸노르의 수레들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고개를 빼 들어야 할 정도로 길게 이어진 수레들.
다섯 보스 중 하나인 검은 곰의 영역까지 먹은 칸노르 상회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까지 많은 양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쇼아라라는 도시는 크지 않았다.
“반 정도는 쇼아라에 내려놓고, 또 나머지 반은 배에다 실어서 서부까지 가는 거지.”
“서부까지?”
“응. 서부까지. 정확히는 니다벨리르로 가는 거야.”
드워프 해방전선을 가리키던 이름인 니다벨리르는 이제 조직이 아닌 도시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가장 거대한 용에 의해 가라앉고만 렘노스 섬을 대신해 새로이 드워프들의 보금자리가 된 도시 니다벨리르.
“트리노바 옆에 드워프들의 도시가 새롭게 생겼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거기 드워프들이 술이랑 고기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거야.”
“그건 그렇지.”
자신들의 옛터를 찾아 다시금 뿌리 내릴 수 있게 된 드워프들.
다만 여전히 모래만이 가득한 그곳이 예전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그런데 거기 드워프들이 자꾸 캡틴큐라는 술을 찾는다 그러더라고. 나는 처음 듣는 술인데. 혹시 뭔지 알아?”
“······아니.”
어두운 뒷골목의 색을 담은듯한 끈적이던 갈색의 술.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들려왔음에도 애써 모른 척하던 블라드의 앞으로 저 멀리 성벽 한 귀퉁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 앞에 쇼아라입니다!
스투르마에서 쇼아라까지.
그렇게 길게 늘어서 있는 북부의 초원 끝으로 블라드의 고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소년이 태어난 고향이자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던 도시.
그러나 저 앞에 보이는 성벽은 익숙했어도 그 아래 있는 성문의 광경만큼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이 새치기하지 말라고!
-내가 언제 껴들었다고 그래!
북부 물류의 중심지였기에 언제나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던 쇼아라의 성문.
-나 지금 여기서 3일이나 기다렸수다! 도대체 언제쯤에나 들어갈 수 있는 건데!
-여기에 블라드 경이 있는 건 맞냐고!
그러나 지금은 마치 성문이 시장이라도 된 양 수많은 사람들이 진을 진 채 파고들어 갈 틈 하나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저기 왜 저러냐.”
“전쟁이 이제 막 끝났잖아.”
“그런데 그게 왜.”
“그게 왜냐니.”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채 묻는 블라드를 보며 포틀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싸울 곳 잃은 기사들이 다음은 어디로 가겠어.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 유명한 소드마스터라도 한번 보고 싶어 할 거 아니겠어.”
반짝이는 금화는 현실이나 소드마스터는 전설.
기사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단어 하나가 드디어 이 시대에 떠올랐으니, 대륙에 있던 기사들이 쇼아라로 몰려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나 어떡하냐.”
그러나 정작 모두가 만나고 싶어하는 소드마스터는 눈앞에 보이는 기사들의 향연에 그저 당황할 뿐이었다.
어림잡아 봐도 수백은 되어 보이는 성문 앞의 기사들.
그들 모두가 그저 악수 한 번 하자고 자신을 찾아오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이래서 황제가 되셨나 보네.”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았기에 모든 것에 자유로운 이 시대의 소드마스터.
그러나 누리고자 하는 자유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
도시 쇼아라에 있는 높고도 넓은 교회.
그 거대함에 비할 건물이라고는 저기 보이는 시청뿐일 교회였지만 지금 그곳에는 본래 흘러야 할 경건함 대신 아이들의 뜀박질 소리가 가득했다.
“복도에서 뛰지 마라.”
“······네.”
붉은 법복을 입은 주교 앞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세상 모르게 날뛰던 아이들이었으나 껑충하게 큰 키에 서늘한 회색빛 눈동자까지 보면 누구라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가 봐.”
“네!”
방금까지 알았다고 말했으나 다시금 내달리는 녀석들.
그 아이들을 보는 피에르의 이마 한구석에는 어찌할 수 없는 핏줄 한 줄기가 떠올라 있었다.
“······이 빌어먹을 도시 같으니.”
도시 쇼아라의 주교. 피에르.
이제는 교황청이 아닌 정교회의 주교가 된 그는 고작 몇 년 사이에 엉망이 된 교회를 보며 속으로 분을 삭힐 따름이었다.
쿵-!
“아이고 깜짝이야!”
기다란 다리를 성난 학처럼 놀리며 주교실까지 다다른 피에르.
그렇게 열어젖힌 자신만의 공간에는 허락받지 않은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냐.”
햇빛에 비치는 붉은 머리카락이 강렬한 사내였다.
하지만 개성 강한 머리카락 아래에 입고 있는 정갈한 갑옷은 분명 정교회의 성기사를 뜻하는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지요. 주교님을요.”
“기다리기는 무슨. 평소처럼 농땡이나 피우던 거겠지.”
들려오는 사내의 말에 짜증이 난다는 듯 거칠게 의자에 앉은 피에르는 긴 한숨과 함께 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렸다.
“왜 이렇게 요즘 따라 교회에 애새끼들이 많은 거냐.”
“그게 다 주교님이 부른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히죽 웃는 라두를 보며 피에르의 눈초리가 사나워졌지만, 앞에 있는 사내는 그런 위협 따위에 굴할 사람이 아니었다.
“소드마스터가 태어난 도시에 소아성애를 금지한 주교까지. 근방에 생겨난 전쟁고아들이 다 어디로 가겠느냐 이 말입니다.”
“······.”
“나 같아도 당연히 여기로 오겠다 싶죠. 가만히 있으면 무슨 험한 꼴을 볼지 모르는 세상인데.”
어쩌면 방금 라두의 말처럼 부모를 잃고 떠도는 전쟁고아들에게 있어서 그나마 의탁할 만 곳은 북부의 도시 쇼아라 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마담 마르셀라가 고아원까지 열었으니 이것 참 옳다구나 싶죠.”
“······나가.”
한치도 틀림없는 말이었기에 더욱 골치 아픈 말이기도 했다.
지금도 쉼 없이 쇼아라로 몰려드는 기사들과 고아들.
원하건 원치 않았건 간에 이 도시의 주교가 된 피에르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사고들을 수습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나가요?”
“그래 나가.”
“안 돼요. 저 나가면.”
“왜!”
그러나 늙은 주교의 성에도 라두는 실실 웃으며 답할 뿐이었다.
“제가 나가면 주위에서 대결하자고 달려드는 기사들이 수십이란 말입니다.”
“······.”
“쇼아라의 블라드가 없다면 그다음은 드라굴리아의 라두랄까. 아 물론 이미 성은 버리긴 했는데. 아무튼 제가 나가면 오히려 도시 치안에 치명적인······.”
어디 분통 한 번 터져보라는 듯 계속해서 지껄이는 라두였지만 과연 그의 말은 아까부터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가라니까.”
그러나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모두가 바른말은 아닌 법.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이 바쁜 시기에 제 잘난 말만 해대는 라두를 보며 드디어 피에르의 성이 터지고 말았다.
“애새끼들 데리고 다 나가!”
“으악!”
나이에 맞지 않는 웅혼한 외침.
과연 늙은 지금에도 전혀 기세를 잃지 않은 주교의 외침이 문을 뚫고 복도 가득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
“흐으으으······.”
성문 밖의 상황과는 다르게 침묵만이 가득한 쇼아라의 뒷골목 어딘가.
그곳에 숨겨져 있던 자그마한 땅굴 속에서 빼꼼히 고개를 들어 올린 남자가 있었다.
“작긴 작네. 이제는.”
오직 뒷골목의 아이들만이 알아볼 법한 성벽 아래 개구멍.
성벽이 만들어낸 그림자 아래서 일어선 블라드가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누아르야 알아서 들어올 테고.”
칸노르 상단에 잠시 맡긴 누아르는 포틀리와 함께 도시로 들어올 것이다.
워낙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알아서 장미의 미소로 돌아올 테고.
딱- 따악-
“응?”
밖에 있는 기사들을 피해 몰래 쇼아라로 들어온 블라드.
그곳에 보이던 익숙한 풍경을 보며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블라드의 귀로 낯선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지.”
풍경은 익숙했지만 분위기만은 확연히 달라진 쇼아라의 뒷골목.
어둡기만 했던 그때가 아니라는 듯 햇빛이 가득한 길을 따라 걷던 블라드는 저 앞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보며 걸음을 멈췄다.
“와! 이 아저씨 진짜 못하네!”
“그래 가지고 어디 한 번 이기겠어요?”
밤이 아닌 낮에 모여 있는 뒷골목의 아이들.
예전이라면 다른 이의 빵을 구걸하고 지갑을 탐내야 할 아이들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손아귀 가득 반짝이는 유리구슬들을 쥔 채 웃고 있었다.
“······우리 한 번만 다시 하면 안 될까?”
그리고 그 아이들 가운데서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는 수인족 사내가 있었다.
“구슬치기 한 판만 더.”
한판만 더를 외치며 떠나는 아이들을 붙잡고 있는 마법사 니벨룬.
어딘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그를 보며 블라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외전- 장미 전쟁 Ⅱ
익숙한 길을 따라 장미의 미소로 향하는 블라드.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이었음에도 블라드의 표정에는 어딘지 모르게 언짢음이 가득했다.
“······쟤네 좀 못 따라오게 해봐.”
“제가 어떻게요?”
“너 쟤네랑 친한 거 아니었어?”
왜냐하면, 블라드의 등 뒤에는 지금도 뒷골목의 아이들이 따라붙고 있었기 때문에.
수없이 대결을 외칠 기사들을 피해 조용히 장미의 미소로 가고 싶었던 블라드였지만 어느새 잔뜩 따라붙은 아이들의 모습에 그만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나저나 너는 나이가 몇인데 애들이랑 구슬치기를 하고 있어.”
손에 들고 있는 유리구슬만큼이나 반짝이는 아이들의 눈빛.
선망이 가득 담긴 그 눈빛들을 향해 차마 꺼지라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던 블라드는 그나마 만만한 니벨룬을 향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슬치기를 하고 싶었으면 저 위쪽 골목 애들이랑 해야지. 여기 애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몰라?”
“그런가요?”
보호해 줄 이가 없어 너무나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뒷골목의 아이들이었다.
매사를 생존과 연결해 생각하는 아이들을 혼자서 상대하고 있었으니 니벨룬의 승률이 처참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꼭 여기 애들이랑 하고 싶었거든요.”
“왜?”
그러나 신비를 찾는 마법사는 꼭 이곳 아이들의 구슬을 갖고 싶었다.
“왜냐하면, 여기 애들 구슬이 제일 빛나거든요.”
“응?”
#그것은 여태껏 보아왔던 구슬 중 이곳에서 굴러다니는 구슬들이 가장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야말로 니벨룬이 찾는 신비에 걸맞은 것이었다.
“······그래도 못 딴다니까. 너 이미 호구 됐어.”
“그럼 저 한 번만 도와주세요. 나랑 같이 편 먹고 구슬치기 한 번 해주면 안 됩니까?”
“지랄 났네. 진짜.”
이 시대의 소드마스터에게 같이 구슬치기나 하자고 조르는 마법사.
그 말을 들은 블라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어느새 다다른 건물의 뒷담을 손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애들이 다 없어졌네요?”
“여기서부터는 내 구역이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블라드의 뒤를 바짝 따라붙던 아이들이었으나 지금 골목에서부터는 한 발자국도 들어서지 않은 채 멀어지고 있었다.
아마 그것은 오랫동안 뒷골목에 뿌리내리고 있던 영역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벽은 왜 미세요.”
“이거 벽 아니거든.”
그렇게 아무도 없는 골목의 뒷담.
그중 한 곳을 짚어낸 블라드가 벽을 있는 힘껏 어깨로 밀어젖히기 시작했다.
“······이거 그동안 아무도 안 썼나 보네.”
지금 블라드가 낑낑거리며 밀고 있는 벽은 사실 벽으로 위장된 뒷문이었다.
오직 호르헤의 패거리들만이 알고 있는 장미의 미소로 통하는 뒷문.
“끄응!”
뒷골목이 한창 어두웠을 시기에는 쉼 없이 열어젖혔던 뒷문이었다.
그러나 고딘이 방문한 이후에는 아무도 쓰지 않았던 모양인지 숨겨져 있던 경첩에는 온통 녹이 잔뜩 슬어있었다.
끄드드득-
그동안 자신조차 문이라는 것을 잊었다는 듯 힘겹게 열리는 비밀 문.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오래된 먼지들을 맞으며 문을 열어젖힌 블라드를 반기는 것은 놀란 눈을 치켜뜨고 있는 검은 피부의 소년이었다.
“뭐, 뭐야!”
“······.”
돌아온 블라드를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커다란 술통에 올라탄 채 술병을 들이대고 있는 네드였다.
그러나 놀라는 모양새가 심히 수상한 것이 아무래도 보여서는 안 될 짓을 들킨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블, 블라드야? 언, 언제 왔어?”
“하아.”
설명하지는 않았어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블라드 본인도 소싯적에 자주 해봤던 그런 행동이었으니까.
“빼돌린 술은 알아서 채워놔라. 그 통에서 모자란 양은 네 형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잠깐만!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빨리 채워놓는 게 좋을 거야. 오타르가 모자란 값만큼 너를 후려치기 전에.”
이제야 사태를 파악했다는 듯 다급하게 술통에서 내려오는 네드였지만 이미 블라드와 니벨룬은 1층 로비로 향하는 계단 끝에 올라와 있었다.
“도둑질도 머리 좋은 놈이나 해 먹는 거라고 했잖아.”
“블라드! 잠깐만!”
등 뒤에서 간절히 외치는 네드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블라드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갑작스레 눈가로 비치는 휘황찬란한 빛무리들.
저 위에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의 불빛에 블라드는 잠시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여기는 언제나 변함이 없네.”
그러나 이윽고 다가오는 가게의 소음과 코끝으로 스며드는 음식 냄새에 찌푸리고 있던 블라드의 눈가가 점점 둥글게 휘어 들어가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나를 환영해주는 장미의 미소.
이제야 그곳으로 돌아온 블라드가 희미한 웃음과 함께 익숙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이제는 창관이 아닌 북부 유일의 고급 여관으로 변신한 장미의 미소.
예전의 모습과는 미묘하게 달라진 그곳의 복도를 블라드와 니벨룬이 걷고 있었다.
“방이 좁네요.”
“이 정도면 큰 거지.”
아무도 모르게 4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선 블라드는 여태까지 걸어왔던 화려한 복도와는 다른 소박해 보이는 공간에 짐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구석에다 방을 마련해 놨어요? 혼자만 쓰는 층 같은데.”
“그때는 들키면 안 됐었거든.”
오직 단 한 명의 손님만 들어올 수 있다는 4층의 복도는 왁자지껄한 아래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적막하기까지 했다.
“나 혼잣말하는 거 있잖아. 키하노랑 대화하느라고.”
“아아. 그랬었죠.”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기까지 하는 4층의 공간.
이제 더는 대화를 주고받을 사람이 없기에 더 넓어 보이는 4층의 복도를 보며 블라드가 조용히 콧잔등을 긁어대었다.
“이제 왔니?”
“······.”
그러나 내면의 키하노는 없었더라도 이곳에서 블라드를 기다리는 사람은 또 있었다.
“제미나.”
“이번에는 그래도 일찍 돌아왔네.”
난간에 팔을 기댄 채 조용히 블라드를 바라보는 붉은색의 레이디.
화려한 외모만큼이나 화사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은 제미나가 블라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반년 정도면 준수하지. 전쟁 끝내겠다고 1년 훌쩍 떠난 예전보다야 뭐.”
다만 지금 보이는 제미나의 눈빛에는 블라드조차 무시하기 힘든 날카로운 장미의 가시가 깃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있다 가려고? 한 일주일은 있을 거야?”
“레이디 제미나. 저는 이만 내려가 봐도 될까요?”
“그래. 고양이는 내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니벨룬이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등 뒤에는 가지 말라는 듯 자신을 붙잡는 블라드의 손이 있었지만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파악하는 것도 사회인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아 냄새 진짜 좋네요. 저 고기 스튜 진짜 좋아하거든요.”
“저거 감자 스튜야. 너 감자 싫어하잖아.”
“오늘부터 좋아하기로 했어요. 감자 스튜 진짜 맛있겠다.”
블라드의 조용한 만류에도 물 흐르듯 빠져나가는 니벨룬.
그렇게 제미나가 비켜준 틈을 타고 내려가는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가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손님은 계속 몰려드는 데 방은 없어. 이제는 4층도 개방할까 봐.”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어. 정교회에서 부탁한 거 너도 알잖아.”
“그래 나도 알아. 안드레아 님 부탁으로 흑마법사들 잡으러 간 거.”
전쟁의 불씨를 잠재우기 위해서, 때로는 살아남은 흑마법사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그렇게 2년 동안 블라드는 조금도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며 세상을 누비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좀 쉬어야 하지 않아? 그때도 거의 몇 달간은 누워 있었으면서.”
“물론 나도 쉬고 싶기는 한데.”
“하아. 지금이야 젊으니까 모르지.”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제미나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블라드는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슴 속에 뚫려 있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 늙으면 그거 다 골병 돼서 돌아오는 거야. 몸 함부로 굴린 용병들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는 네가 더 잘 알 텐데?”
“······.”
“이번에는 좀 길게 쉬었다 가. 마침 하벤도 돌아왔다는데.”
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칭송하는 주위의 사람들.
그러나 이제는 쉬어야 할 때라고 말해주는 유일한 사람을 보며 블라드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기······.”
지금이라도 온 것을 봤으니 되었다는 듯 등을 돌리는 제미나를 향해 블라드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왜?”
“이번에도 바로 어디 가긴 할 거거든.”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떠나야 한다는 블라드의 말에 제미나의 눈동자가 다시금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가든지 말든지. 나 바빠.”
누가 뭐라 해도 자신만의 길을 걸으려 했던 고집 센 소년.
그 소년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음을 아는 제미나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같이 갈까? 이번엔.”
그러나 지금 들려오는 말에는 제미나조차도 놀란 채 걸음을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닌 둘이서.
그 말에 놀라 뒤를 돌아본 제미나의 앞에는 바예지드의 편지를 들고 있는 블라드가 있었다.
“이번 루트거 님의 계승식 때, 나랑 같이 안 갈래?”
“······같이?”
북부의 모든 귀족이 모일 루트거의 가주 계승식.
그곳을 같이 가자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동행의 의미를 넘은 더 큰 의도가 담겨 있는 걸 제미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 가지고 되겠어?”
“당연하지. 너 아니면 딱히 데려갈 사람도 없어.”
“진짜?”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는 제미나의 얼굴을 보며 블라드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윽고 펼쳐든 제미나의 편지 앞에서는 웃고 있던 얼굴도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닌 것 같은데.”
“······음.”
제미나가 여기 좀 보라는 듯 품속에서 꺼내든 편지.
그 편지의 겉면에는 블라드도 익숙히 알고 있는 하얀 나무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오늘은 쉬라고 내일 주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네.”
그 편지를 들고 있는 제미나의 웃음이 어째서인지 몰라도 서늘해 보였다.
“결정해야겠네. 블라드. 계승식 때 누구를 데려갈지.”
장미의 미소로 보내진 레몬 향이 가득한 편지.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은 블라드의 또 다른 레이디인 알리시아 하이날 남작이었다.
※※※※
“올해 작황이 참 좋습니다. 남작님. 다들 풍년이 들었다고 좋아하더군요.”
여름의 향취가 가득한 도시 데어마르.
등 뒤에 비치는 창밖에는 올해 따라 더욱 푸르른 데어마르의 나무가 알리시아를 반기고 있었다.
“······그런가요.”
올해의 작황은 풍년.
엘프들과의 거래로 도시는 풍요롭고, 영지민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는 하이날의 영지 데어마르.
“그러면 뭐 해.”
“네?”
그러나 정작 이 도시의 주인인 알리시아의 얼굴에는 기쁜 미소가 아닌 짙은 그림자만이 가득했다.
“그러면 뭐 하냐고요. 이렇게 영지가 잘 돼봤자!”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는 순간이었으나 알리시아의 마음속에는 어찌할 수 없는 초조함만이 가득했다.
“영지만 잘 되면 뭐 하겠어요. 정작 하이날 자체가 말라 죽어가고 있는데.”
“알리시아 님······.”
그늘진 얼굴이었어도 아름다운 하이날의 영주.
그러나 정작 그 아름다움을 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에 알리시아는 슬퍼하고 있었다.
“······더 이상 저에게 오는 청혼편지들은 없나요? 귀족도 좋고 아무 기반도 없는 기사라도 괜찮은데.”
“그것이······.”
알리시아의 물음에 노기사 던칸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올해는 한 명도······.”
“한 명도?”
“네. 한 명도.”
왜냐하면, 예전이라면 쉴 새 없이 들어왔을 청혼자들의 연락이 요근래 뚝 끊기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부도 명예도 그리고 영지까지 가지고 있는 알리시아 남작.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알리시아였을지라도 그녀에게 쉽사리 도전하는 청년이 없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익! 이익! 이게 다 블라드 때문이에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소리를 질러대는 알리시아의 모습이 꽤나 기괴해 보였다.
그러나 던칸만큼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라도 한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왜 이렇게 잘나져서! 남의 혼삿길까지 다 끊어놓는데!”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 블라드 아우레오.
이미 손수건까지 주고받은 둘의 관계를 대륙의 모두가 알고 있는 지금, 감히 소드마스터의 레이디에게 청혼을 하는 멍청한 자가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여기서 하이날의 대는 끊어지게 되는 건가요? 나는 천하의 불효녀가 되고 마는 거예요?”
“오오. 알리시아 님.”
이렇게 내버려 둘 거라면 괜히 건들지나 말지.
이 가문의 보물까지 말아먹은 천하의 한량 같으니라고.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내가 어떻게 지켜온 하이날인데.”
창밖을 내다보는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점점 서늘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귀족의 푸른 피가 만들어 낸 유일한 하이날의 발악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씨라도 빼 와야겠어요. 어떻게든 대는 이어야 하니까.”
금발의 푸른 눈. 그리고 이 시대의 소드마스터가 보증하는 핏줄.
그것을 꿈꾸는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
그리고 그런 알리시아의 결정을 응원이라도 한다는 듯 저 위에 있는 데어마르의 나무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초록빛 가득한 나무 위에서 춤추고 있는 하얀 뱀과 그 뱀 아래서 몸을 흔들어대는 작은 정령들까지.
“얘네 왜 이래?”
“뭐야? 축제라도 하는 거야?”
파견 나온 엘프들까지 당황할 정도로 기뻐하는 정령들이 어서 빨리 그 씨앗을 데려오라는 듯 있는 힘껏 알리시아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외전- 노을빛 술병
녹음이 푸르른 동쪽의 숲. 아우슈린
누군가가 그리기라도 한 듯 성벽처럼 자라난 나무들이 품고 있는 이곳에는 지금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가득했다.
“이게 아닌가.”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리가 기껍다는 듯 살랑이는 세계수 아래, 여름의 햇빛과 함께 앉아 있는 백금발의 소녀가 있었다.
“흐으음.”
잔뜩 집중한 듯 찡그리고 있는 눈썹에는 진지함이 깃들어 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연필을 세워 각도를 재는 모양새는 흡사 전문가의 그것.
그러나 앞에 놓인 도화지에는 소녀의 진지한 모습과는 다르게 유치한 그림체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입술이 이렇게 생기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무슨 그림인가 싶어 슬쩍 몸을 숙여본 세계수조차도 가지를 흔들고 마는 솜씨.
여태껏 맞이한 신녀들 중에서도 가장 감응력이 좋다고 평가받는 소녀였지만 아무래도 그림 솜씨만큼은 가장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신녀님.”
“응?”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한참을 고민하는 신녀의 등 뒤에서 바라디스가 나타났다.
숲을 누벼야 하는 레인저답게 가벼운 복장을 하고 있는 그였지만 어깨 위에 달린 빛나는 휘장만큼은 분명 원로회 소속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오랫동안 바깥에 있으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아니, 그게······.”
신녀가 되기 위해 본래의 이름을 내려놓은 소녀는 자신에게 존댓말을 하는 오빠가 섭섭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바라디스의 얼굴에는 여전히 여동생을 향한 애정이 깃들어 있었으니 소녀는 그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스투르마로 언제 갈 거예요? 오······. 아니 바라디스 님.”
“스투르마요?”
“계승식이 있잖아요. 거기 이름이 바예지드라고 했던가.”
머리는 영민했으나 아직은 대륙의 정세에까지는 밝지 못한 세계수의 신녀였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갑작스레 북부에 관련된 이야기가 흘러나오니 바라디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그것은 왜······.”
대륙 전쟁의 승자 중 하나인 바예지드 가문.
그곳의 새로운 가주가 즉위하는 이번 계승식은 북부뿐만 아니라 대륙이 주목하는 행사이기도 했기에 아우슈린 또한 사절을 보낼 예정이기는 했었다.
“나는 거기에 바라디스 님이 갔으면 좋겠는데.”
“왜 그러시죠.”
자그마한 턱을 긁적이는 소녀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
말을 꺼내기가 조금은 민망하다는 듯 발을 까닥이던 소녀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리 가까이 와보라며 바라디스에게 손짓했다.
“나는 오빠가 거기로 갔으면 좋겠어.”
지금만큼은 세계수의 신녀가 아닌 나만의 모습으로.
그렇게 입을 연 소녀가 웃는 얼굴로 바라디스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왜냐하면, 그래야지 나도 같이 따라갈 수 있잖아.”
“······.”
평생을 세계수와 함께해야 하는 운명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바깥나들이를 해보고 싶다는 소녀.
그 소녀가 변명이라도 하듯 여태껏 그리고 있던 그림을 들고는 바라디스에게 펼쳐 들었다.
“그냥 바깥이 궁금해서 가고 싶다는 거 아니야. 이거 블라드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건데.”
소녀가 들고 있는 도화지에는 삐뚤빼뚤 그려진 그림이 가득했다.
그 그림은 예전의 계시들처럼 쉽사리 해석하기 힘든 난해한 그림체로 그려진 것이었다.
“계시······입니까?”
그러나 그림체는 같았어도 이번만큼은 어려운 해석이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왜냐하면, 바라디스 조차도 그 그림에 그려져 있는 뜻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거 블라드가 좋아할 거 같아. 그렇지?”
가지고 있는 귀의 형태는 달랐으나 같은 나무 아래서 뛰놀고 있는 수인족과 엘프들의 아이들.
그 아이들을 뒤에 둔 채 활짝 웃고 있는 소녀를 보며 바라디스는 무엇이 그림이고 현실인지를 잠시 헷갈릴 것만 같았다.
※※※※
도시 쇼아라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언덕.
그 언덕에 자리한 수녀원을 향해 짐을 짊어진 채 걸어가는 남자가 있었다.
“아이고. 이거 뭐 이리 무겁나.”
쿵-
바닥을 울리는 육중한 울림과 함께 선홍색 고기 뭉치들이 제 빛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려놓은 고기 뭉치 하나하나에 칸노르 가문의 문장이 찍혀있는 것이 누가 보아도 비싸 보이는 고급스러운 고기들이었다.
“······누구세요?”
“마르셀라. 저예요.”
일부러 큰 소리를 낸 덕분인지 여인 한 명이 주방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단단히 동여맨 여인의 머릿수건은 풍성한 흑발을 감추고 있었다.
입고 있는 치마는 방금까지 일을 하다 온 모양인지 잔뜩 얼룩이 져 있었고.
“블라드? 블라드니?”
“오랜만이에요. 반년만인가.”
그러나 블라드를 향해 환히 웃는 그 미소만큼은 초라한 겉모습과는 달리 여전히 아름다운 것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이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이!”
“이거 어디다 놓을까요?”
“어머 이 고기 좀 봐. 안 그래도 오늘 애들한테 뭘 먹여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한때는 쇼아라의 장미라 불렸던 마담 마르셀라.
그러나 화려했던 그 시절보다 품고 있는 미소만큼은 훨씬 영글었으니 블라드는 어쩐지 지금의 마르셀라가 더 편안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일부러 끓여 먹기 좋은 고기로 가져왔어요. 하나하나 굽는 것도 일이잖아요.”
“그렇지. 그렇지. 역시 너는 이런 배려가 있어서 좋아.”
다시금 고기를 든 블라드가 마르셀라의 손짓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섰다.
한때는 붉은 머리의 소녀가 울면서 설거지를 했던 그 주방.
“어머. 블라드! 오랜만이다!”
“이게 누구야. 얘 어깨 더 넓어진 거 봐!”
“함부로 만지지 마! 무려 소드마스터 님이신데.”
마르셀라를 따라간 주방에는 수많은 여인이 블라드를 반겨주고 있었다.
달려드는 손길 하나하나가 다들 낯이 익은 것이 아무래도 예전의 장미의 미소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다 여기 있었네요.”
“은퇴하고 딱히 갈 곳도 없잖아.”
“사내새끼들보다는 애새끼들 돌보는 게 더 낫지.”
한때는 반짝이는 동전 한 닢에 술과 웃음을 팔았던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넉넉한 미소만큼은 돈으로는 만들 수 없는 포근한 것이었다.
“다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자주 놀러 와 블라드!”
“그래 이제는 집에 좀 붙어있고! 제미나 속 좀 그만 썩여!”
한마디 말을 내어주면 열 마디 말로 화답하는 수다스러운 여인들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손님 덕분인지 점점 시끄러워지는 주방 분위기에 마르셀라가 서둘러 블라드의 어깨를 잡아 끌어내었다.
“그런데 용케 수녀원을 가지셨네요. 교황청이 가만히 있었나요?”
“교황청? 나는 모르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