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43
“그럼 할 일은 다 끝낸 거네? 이제 원래 자리로 복귀하면 되는 건가.”
“······그렇지.”
본래 하벤과 그의 선원들은 북부를 떠도는 평범한 상회였을 뿐이었다.
아마 이번 전쟁만 아니었다면 블라드가 가져온 인맥들을 이용해 천천히 세력을 불렸을 그들이었다.
“잘 됐다. 안 그래도 이번에 라브노마 가문에서 교역로를 연결할 상단을 알아봐달라고 했었거든.”
그리고 황금공 바르보사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난 지금, 이제는 모두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야 할 때.
이제야 함께할 수 있게 된 친구들을 보며 블라드가 신이 난다는 듯 들고 있던 소시지를 한껏 베어 물었다.
“도시 트리노바면 니다벨리르랑도 가깝지. 어쩌면 둘이서 항구를 공유할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지.”
“그러니까 여기에다가 거래만 트면 앞으로도 계속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올 거야. 그것도 푼돈이 아닌 목돈으로.”
명예를 좇는 소드마스터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전 시대의 소드마스터인 키하노와는 다르게 딱히 자신만의 기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게 지금 블라드의 현실.
그러나 어디에 묶이지 않은 채 언제나 자유롭고 싶어 하는 블라드였기에 결국 택할 수 있는 것은 상회를 통한 부의 축적 정도였다.
“우리 이번에는 좀 크게 가볼까? 배도 새로 사고 사람도 좀 모으고 말이야.”
그러나 단순히 돈을 벌 욕심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블라드의 목소리가 들떠 있는 것만 같았다.
“크게?”
“바르보사처럼 함대도 한 번 만들어 볼까? 함장보다는 제독이 더 낫긴 하잖아.”
어렸기에 배고팠던 시절, 뒷골목 어귀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예전의 모습처럼.
지금의 블라드에게 느껴지는 그때의 향수에 어느새 하벤도 조금씩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여기 애들도 좀 먹이고 고아원에 기부도 하고. 아니, 처음부터 애들을 미리 뽑아서 선원으로 키워보는 건 어때?”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아이들끼리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던 방법은 오직 둘만이 나누던 내일을 향한 상상뿐.
그렇게 나누던 이야기 속에서 굶주렸던 두 소년은 힘겨운 오늘을 버틸 이유를 만들고는 했었다.
“저기 블라드.”
“응?”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말이야.”
그러나 형제처럼 담요를 나누던 둘이라 할지라도 언제까지나 함께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왜냐하면, 소년이었던 아이들은 언젠가는 어른이 되고 마는 법이었으니까.
“내가······. 의뢰를 하나 받았거든.”
“응.”
아이들은 별을 바라보지만, 어른들은 별을 향해 걷는 존재.
각자가 보는 별이 달랐다 할지라도 함께 할 수 있었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 블라드와 하벤은 서로가 원하는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른슈타인 백작이 북극 항로를 개척해달라고 하더라고.”
“북극 항로?”
“응. 북극 항로. 북방한계선 너머에 있는 바다 말이야.”
푸른 눈의 소년은 별들이 반짝이던 밤하늘을.
절름발이인 소년은 좁은 강을 넘어 드넓은 바다를.
그때 나눈 이야기를 잊지 않은 소년들이 지금 어른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높으신 분들은 바르보사가 독차지한 남부 항로를 대신할 방법을 찾고 싶은 모양이야.”
들떠 있는 블라드를 배려해서인지 들려오는 하벤의 목소리가 무덤덤해 보였다.
마치 네가 붙잡는다면 억지로는 가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
“그 의뢰······. 한 번 받아볼까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러나 블라드는 태연해 보이는 하벤의 모습 속에서 반짝이는 그의 눈빛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술잔을 흔들어대고 있지만, 하벤의 갈색 눈동자 안에는 이미 숨길 수 없는 흥분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래. 그랬구나.”
강에서 태어난 하벤이 바다를 향해 가고 싶다고 한다.
절름거리는 자신의 발 따위는 상관없는 넓은 바다를 향해서.
이제야 자신의 길을 찾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였기에 블라드는 그저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
“아이고 씨. 머리야.”
이제는 떠들썩했던 뒷골목조차도 눈을 감아야 할 시간.
그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술잔을 주고받았던 블라드가 깨질듯한 머리를 쥐어 잡은 채 4층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좀 더 마실 걸 그랬나. 괜히 어설프게 취해 가지고.”
같이 술을 마셨던 하벤과 오타르,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제미나까지 모두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었다.
이제야 캡틴큐의 진정한 시음법을 알았다며 온갖 술에다가 그 빌어먹을 것을 섞어대던 하벤 때문이었다.
“응?”
그렇게 계단을 오르던 블라드의 시야로 희미한 불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오직 블라드의 손님들만이 묵을 수 있다는 4층의 복도, 그 방 중에서도 니벨룬이 머물고 있던 곳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었다.
“뭐하냐?”
“잉?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
평소라면 들르지 않을 방이었지만 취해 있었기에 고개를 든 호기심이 있었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다가간 니벨룬의 방은 누가 보아도 혀를 내두를 만큼 엉망진창인 모습이었다.
“······이게 다 뭐냐.”
어디서 가져왔는지 온갖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니는 니벨룬의 방.
개중에는 예전에 보았었던 기이한 훈증기며 양탄자도 같이 널브러져 있었다.
“배낭을 정리하는 중이에요. 한 5년 만에 하는 건가.”
“배낭?”
“네. 제가 평소 들고 다니던 거 있잖아요.”
니벨룬의 말에 블라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쪽 구석에 머물러 있는 배낭을 향했다.
위기의 순간마다 항상 무언가를 꺼내놓고는 했었던 마법사의 배낭.
언제나 빵빵했던 그 배낭이 지금 홀쭉해진 채 블라드를 맞이하고 있었다.
“항상 궁금했었는데 그 배낭에는 도대체 짐들이 얼마나 들어가는 거야?”
“짐이요? 그거야 뭐······.”
한참 물건들을 정리하던 니벨룬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딱히 정해진 양은 없구요. 그냥 제가 기억하는 만큼 담을 수 있어요.”
“기억하는 만큼?”
“네. 만약 제가 여기 넣은 것을 까먹어버리면 이놈이 가차 없이 먹어 치워버리거든요.”
“오······.”
그래서 니벨룬은 머리가 나쁜 자신은 예전 사용자들에 비해 많은 것을 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방을 넘어 복도까지 흘러나온 물건들은 하나하나 기억하기에 이미 벅차 보일 정도로 많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밤 중에 배낭은 왜 정리하는 거야.”
“저도 따라가려고요.”
“어디를?”
반겨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이야 많은 것이 바로 이 시대의 수인족들이었다.
거기에 신비를 찾는 마법사이기까지 한 니벨룬은 그야말로 방랑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하벤 님을 좀 따라가 보려고요. 아까 들어보니까 북극 항로를 탐사하신다던데.”
배낭 하나만 꾸리면 어디든지 떠날 수 있는 수인족 마법사.
그러나 이번만큼은 정처 없는 여행이 아닌 확고한 목적이 있는 여정이었다.
“······네가 북극 항로는 왜?”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곳이잖아요.”
블라드를 바라보는 니벨룬의 눈이 둥글게 휘어지고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그 눈이 괜히 심술이 날 정도로.
“신비를 찾는다는 목적도 있고, 게다가 요즘 점점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레몬 농사가 잘된다고 했던가.”
용들이 지배하던 시절 가라앉고만 수인족들의 땅이 있었다.
떠오르는 완벽함을 향해 가장 강렬히 저항한 만큼 후대까지 이어질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 만 그들이었다.
“어쩌면 얼음이 녹은 만큼 사람이 살 만한 땅이 생겼을지도 몰라요.”
“······.”
“그런 곳이 있다면 뿔뿔이 흩어진 부족들도 한 번에 모을 수 있을 텐데요.”
엘프들도, 드워프들도 이제는 자신만의 영역을 갖추게 된 지금이었지만 오직 수인족들만이 뿌리 내릴 땅을 찾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루가 족처럼 정착할 곳을 찾은 부족들은 그야말로 행운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 애들도 여기 애들처럼 마음껏 뛰고 놀 땅이 있으면 좋잖아요.”
내 인생을 건 신비를 위해서, 그리고 내가 몸담은 부족을 위해서 이곳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니벨룬.
그런 그의 말에는 조금도 틀린 것이 없었지만 조금은 취하고만 블라드의 마음속에는 그저 서운한 감정이 흐를 뿐이었다.
“그래. 너도 가봐야지 그러면.”
내가 돌아왔기에 모두가 반겨줄 줄 알았지만 이제 어른이 된 소년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고 있었다.
예전에 자신을 떠났던 수많은 인연처럼 말이다.
“술이나 더 해야겠네.”
“거기서 더 마시게요?”
“오늘은 술이 잘 받네.”
떠날 짐을 꾸리는 니벨룬을 보며 블라드가 다시금 발걸음을 돌렸다.
모두가 잠들고 만 계단을 걸어 친구들이 엎어져 있는 테이블을 지나서.
그렇게 어딘가에서 빼 온 술병 하나만을 든 블라드가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어두운 새벽길을 나서고 있었다.
※※※※
“······누가 여기다가 울타리를 둘러놨네.”
잘 정돈된 수풀을 지나 울타리의 문을 열어젖힌 블라드가 익숙한 발걸음으로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이게 더 낫긴 하네.”
온갖 건물들이 난립한 뒷골목에서 유일하게 초록색을 볼 수 있는 곳.
예전에 비해 훨씬 잘 정비된 공동묘지를 걷던 블라드가 익숙한 묘비 앞에 섰다.
“잘 지냈어요. 키하노?”
가진 것이 없기에 초라한 묘비들이 가득한 공동묘지였다.
그러나 곳곳에 피어있는 색색의 꽃들만큼은 이미 죽은 자들을 보듬어 주듯 묘비들을 감싸주고 있었다.
“영감님도 한 잔 드려야지.”
그 꽃들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짓던 블라드는 앞뒤에 있는 묘비들을 향해 조용히 술을 따라주었다.
앞쪽에는 이름 모를 늙은 대장장이가, 뒤쪽에는 이름을 적을 수 없는 고귀한 기사가.
그렇게 그들이 누워있는 사이에 앉은 블라드가 이제는 자신의 차례라는 듯 술병을 들어 올렸다.
“다들 간다고 그러네요.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쉽사리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블라드였지만 아무도 없는 이 자리에서만큼은 자신의 진심을 꺼내놓을 수 있었다.
“다들 이렇게 가버리면 내 옆에는 누가 남아주나.”
키하노도, 요제프도, 그리고 그동안 스쳐 지나간 많은 인연도.
그러나 이제는 이어진 인연보다 헤어진 인연들이 더 많아진 블라드가 가슴 속에 차오르는 공허함을 달래며 다시금 술병을 들었다.
“그래도 잘 가라고 말해줬어요. 잘했죠?”
그래도 잘 가라고 등을 떠밀어줄 수 있었던 것은 여태껏 자신을 향해 그렇게 말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지금 누워있는 사람들처럼 누군가가 나를 떠밀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신 또한 없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거 뭐 대답들이 없으시네.”
그러나 아무리 물어도 이름 없는 묘비들은 대답이 없었다.
이미 고요한 침묵에 다다른 그들은 더 이상 블라드에게 해줄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오직 조금씩 터 오는 동만이 블라드의 등 뒤를 어루만져 줬을 뿐.
그 따스함이 좋았던 블라드는 원래 가기로 했던 시간보다 조금 더 앉아 있기로 했다.
그럴 리는 없었지만, 뒤에 있는 키하노가 자신을 어루만져 주는 것만 같았으니까.
외전- 이별의 준비
남쪽에서부터 올라오는 푸르름이 대륙을 물들이고 있었지만, 아직 이곳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듯 보였다.
바예지드의 도시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스투르마.
그곳에 있는 어느 방에서는 여전히 겨울에서 비롯된 기침 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다.
“······괜찮소?”
침대 맡에 밝힌 희미한 촛불이 페테르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페테르의 표정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색이 가득해 보였다.
“걱정이 되는구려. 시간이 갈수록 기침이 심해져만 가니.”
황금공과 가이다르의 침략을 막아내어 지금은 북부의 성벽이라 칭송받는 페테르 바예지드.
그러나 그런 그조차도 다사다난했던 지난 2년간의 세월이 무거웠다는 듯 얼굴 곳곳에 깊이 자리 잡은 주름이 가득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페테르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조금씩 색이 바래져 가는 여인 한 명이 누워있었다.
푸석해진 머리만큼이나 갈라진 입술.
병자처럼 힘없이 누워있는 옥사나를 바라보는 페테르의 눈빛에는 차마 숨길 수 없는 걱정스러움이 맺혀 있었다.
“적어도 루트거의 계승식 때는 일어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요.”
그러나 이미 공허해진 옥사나의 눈동자는 페테르가 아닌 그저 옆에 있는 창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
옆으로 돌린 고개를 바로 세울 힘조차 없어 보이는 그녀를 보며 페테르는 조용히 입을 열 뿐이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소.”
삶의 의욕을 잃은 채 점점 시들어가는 와중이었으나 그럼에도 자신의 의무만큼은 다하겠다고 말하는 여인.
그 모습이 마치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누군가를 보는 것만 같아서 페테르의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바람이 춥소? 커튼을 닫아드릴까?”
창문은 닫혀 있었으나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아직도 서늘했다.
만물이 깨어나는 여름의 초입이었으나 북부에서는 아직 차가움을 머금고 있는 밤공기.
그 차가움을 우려한 페테르가 커튼을 닫기 위해 일어섰으나 뒤에서 들려오는 옥사나의 목소리가 있었다.
“닫지 마세요.”
점점 쇠약해지는 몸을 위해서라면 닫아두는 편이 좋으련만.
그러나 바깥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옥사나의 목소리가 단호했던 탓인지 페테르는 쥐고 있던 커튼의 끝을 스르륵 놓고 말았다.
“열어두세요. 바깥을 보지 않으면 답답하거든요.”
“······알겠소.”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퍼지기 시작하는 침묵.
나눌 말이 없어서 생기는 침묵이 아닌, 서로 조심하기에 생기고 마는 고요함이 방 안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기 시작했다.
“달빛이 밝구려.”
밤이 깊었기에 이제는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
그러나 여전히 머물고 있는 페테르의 발걸음은 어느새 창밖에 보이는 풍경을 향해 마주 서 있었다.
그것은 저 밖에 보이는 풍경 중 하나가 그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창문을 여는 게 낫겠어.”
떨어지는 달빛에 비치는 자그마한 묘비 하나가 있었다.
세워진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그 묘비는 침대에 누워있는 옥사나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
페테르는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붙들고 있는 커튼은 아마 한겨울에도 닫힌 적이 없었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가 그것을 바라지 않았을 테니까.
깊은 밤, 푸른 달빛 아래서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그들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오늘따라 시린 것만 같았다.
※※※※
“······차가 너무 달아요.”
오후의 햇살이 가득한 쇼아라의 시장실.
손님용 테이블에 앉아 있던 블라드가 혀끝이 얼얼한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일부러 네 것은 설탕을 적게 넣었는데.”
“제가 말했잖아요. 이렇게 달게 마시다가는 진짜 일찍 죽는다니까요?”
많은 것이 변한 지난 2년이었지만 쇼아라의 시장실만큼은 특별히 변한 것이 없었다.
비록 더는 이곳에 없는 몇몇 얼굴들이 있었으나 나를 반겨주는 방 안의 공기와 달콤하게 퍼져오는 차의 향기만큼은 여전히 같았으니까.
“일찍 죽는다고? 여기 쌓여 있는 서류들 좀 봐라. 어차피 나는 설탕 없이도 일찍 죽게 되어 있어.”
“······흠.”
단것 좀 그만 먹으라며 타박하는 블라드의 말에 보르단이 여기 좀 보라는 듯 손을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과연 방금의 말이 투정이 아니라는 듯 시장석 곳곳에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들.
그것들과 눈을 마주친 블라드는 아까의 말과는 다르게 슬그머니 찻잔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어제 다 치워놨는데 오늘 보니 또 이만큼이나 쌓여 있다. 도대체 이 도시는 왜 이렇게 빡센 거냐!”
전후 처리로도 바빠 죽겠는데 고아들은 쉴 새 없이 몰려들지, 게다가 요새는 소드마스터의 명성을 따라오는 기사들까지.
새로이 쇼아라의 시장으로 부임한 보르단에게 주어진 것은 빛나는 명성보다도 깔려 죽을 정도로 많은 업무뿐이었다.
“내가 명대로 못 죽으면 반은 네가 죽인 거야. 이미 유서에도 그렇게 써놨어.”
“차 드세요. 그러다가 식겠어요.”
달아오른 용광로처럼 뒤죽박죽 뒤섞여가는 쇼아라가 그나마 도시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보르단이라는 유능한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검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기사였으나 그럼에도 요제프가 그를 옆에 두었던 것은 이러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런데 왜 찾아온 거냐.”
“······부탁할 게 있어서요.”
“무슨 부탁?”
한참 바빠 보이는 그를 상대로 이런 말을 꺼내기가 미안한지 블라드가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 위에 있는 수녀원이요.”
“거기는 왜.”
“거기 소유권이 좀 애매하대요. 그래서 제가 그곳에 대한 보증을 서고 싶거든요.”
아무리 명성 높은 소드마스터라 할지라도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존중해야 하는 바예지드의 땅 안에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하벤이 좀 멀리 떠날 예정이거든요. 그래서 배 수리할 인원들이랑 보급 같은 것 좀 미리 지원해줄 수 없을까 싶어서.”
“······끄응.”
블라드의 말에 서류를 뒤적이던 보르단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묘하다 묘해. 진짜 묘하게 선을 타고 들어오는구나.”
블라드를 바라보는 보르단의 눈가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러나 잔뜩 찌푸린 눈가와는 다르게 보르단의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애매하게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만 요구하는구나.”
명성 높은 소드마스터의 요구라면 분명 무시할 수 없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미묘하게 선을 타고 들어오는 블라드의 부탁은 분명 철저하게 계산된 태가 나고 있었다.
아무리 바쁜 보르단이라도, 여력이 없는 쇼아라라도 들어 줄 수밖에 없게 하는 그런 요구였으니까.
“이게 다 여기서 배운 거예요.”
“그래. 잘 배웠다.”
날카롭기만 할 뿐, 세상 물정 모르던 뒷골목의 소년은 이제 이곳에 없었다.
지금 보르단 앞에 앉아 있는 청년은 경험한 만큼 상황을 알아볼 줄 아는 식견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요제프 님도 좋아하시겠어.”
“······그런가요?”
보르단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오자 블라드는 그만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비록 눈그늘은 짙게 내려앉았으나 언제나 나를 위해 자리를 내주었던 남자.
기억 속 깊이 자리 잡은 그의 모습은 아마 블라드의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럼 되는 거로 알고 갑니다.”
“그래 가 봐라.”
자리에서 일어선 블라드는 어느새 서류에 고개를 처박은 보르단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보이는 풍경은 예전과 같았으나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달라져 있는 시장실의 모습.
자리에서 일어난 블라드는 그렇게 미묘하게 달라진 모습이 더 어색하다는 듯 그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
“섭섭할 거야. 사람이라면 안 섭섭할 수가 없어.”
시장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가는 블라드를 보며 시청의 사람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떻게 다들 그렇게 자기 생각만 하는지.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게 다 누구 덕인데 말이야.”
그러나 모두가 황송해하는 소드마스터라 할지라도 지금 블라드의 옆에 있는 이 남자만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쉴새 없이 입을 놀려대는 중이었다.
“······제발 좀 닥쳐주면 안 될까.”
“닥칠까? 물론 그럴 수 있지. 나 고트는 대장이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누구는 소스라치게 놀랄 소드마스터의 짜증이었으나 오직 고트만큼은 능글맞은 웃음으로 답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 무덤가에서 취해 있던 대장을 부축했던 것처럼 말이야. 역시 기사 블라드의 옆에는 종자 고트가 있어야 한다. 그 잘난 마법사나 선장이 다 떠난다고 말할 때도 이 고트 만큼은 영원히 대장의 옆에서······.”
“닥쳐준다며.”
말을 끊지 않으면 계속해서 입을 놀릴 것만 같은 고트를 향해 블라드가 으르렁거렸으나 가장 명예로운 기사의 종자는 그저 잠시 떨어져 시시덕거릴 뿐이었다.
“그나저나 대장, 스투르마로는 언제 올라갈 거야?”
“따라오지 마.”
“안 그래도 내가 미리 다 준비해놓기는 했거든. 시종들이랑 마차랑.”
“마차는 왜?”
능글맞은 모습은 보기 싫었지만 고트는 분명 블라드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