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245
외전- 새로운 시대
높게 떠오른 정오의 태양이 제국의 수도 브리간테스를 비추고 있었다.
건국왕이자 소드마스터인 키하노 프라우센이 직접 세운 도시이며 용의 시대를 지나 인간의 시대가 왔음을 알린 상징과도 같은 도시.
그러나 영화로움으로 반짝여야 할 브리간테스에는 지금 숨죽인 침묵만이 가득 차 있었다.
“······어린 황제는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냈소.”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황실의 어느 방에서 궁정공 아르망이 앞에 놓인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곳인 듯 방 안은 온통 어두컴컴했지만, 창밖에서 들어오는 가느다란 한 줄기 빛만큼은 그가 보고 있는 찻잔에 머물러 있었다.
“그 아이가 제 명까지 살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
창가에 서서 찻잔을 기울이고 있던 강철공 티무르는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마치 모든 것이 멈춰 있다는 듯 고요한 황실이었다.
그 조용한 곳에서 들려오는 아르망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저 티무르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궁정에 관한 일은 궁정공께 맡기는 것이 맞겠지요.”
자신의 계획을 암묵적으로 허락하는듯한 티무르의 태도에 궁정공 아르망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은 끝났고, 거짓된 황제는 폐위했소이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비어있는 황실뿐이지.”
세월에 의해 잔뜩 녹슬어 있는 궁정공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티무르를 뒷모습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에는 마치 광기와도 같은 형형한 빛이 서려 있었다.
“정당한 태양을 하늘 위에 되돌려 놓는 것. 그것이 이번 대의 궁정공인 내가 해야할 마지막 의무라고 생각하오.”
황실을 지키고, 궁정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 궁정공 아르망은 결국 거짓된 황제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로 인해 흘렀을 수많은 피들이 제국의 신민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었지만,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빛나는 그의 눈빛은 북쪽에 있는 어느 기사를 향해 있었다.
“부디 도와주시구려. 여기서 제국의 맥을 끊을 수는 없지 않겠소?”
인간들의 시대를 연 제국은 한 사내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내의 정통성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프라우센으로 이어지는 황가의 핏줄과 은색의 기사를 통해 전해지는 검의 의지뿐이었다.
“그분의 검술뿐만 아니라 소드마스터의 칭호까지 얻었으니 이보다 더한 정통성은 대륙 내에 존재하지 않을 거요.”
“당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용의 핏줄을 이었음에도 말입니까?”
그러나 잔뜩 늙어버린 아르망을 바라보는 티무르의 눈빛에는 왜인지 모르게 냉소적인 빛이 어려 있었다.
용의 숨결에 의해 제국이 썩어들어갔음에도 결국 혼자서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던 낡디 낡은 궁정공.
진실하지만 무능한 그를 향한 티무르의 눈빛에 자그마한 멸시가 담겨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일인지도 몰랐다.
“······오히려 좋소. 용의 아들이면서도 제국을 위해 아버지를 베어내었으니.”
“제국을 위해서라.”
뒤에서 들려오는 아르망의 목소리에 강철공 티무르가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날의 결투가 궁정공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셨나 보군.”
같은 그림이라 할지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사실일 터.
그러나 블라드가 그려낸 그 날의 그림을 오직 자신의 의도로 가두려 하는 궁정공의 행태가 티무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와주시겠소?”
영광스러운 제국은 이어져야 한다.
비록 뿌리는 썩었고, 뻗어낸 가지는 옳지 못한 방향으로 자랐다 할지라도 제국이라는 세계 아래에는 여전히 그곳에 기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싫습니다.”
그러나 강철공 티무르는 아르망의 간곡한 부탁에도 그저 조용히 거절의 대답을 건넸을 뿐이었다.
“······어째서.”
말을 마친 티무르가 천천히 창가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거야 우리 둘만으로는 결정해서는 안 되는 문제니까요.”
티무르가 창가에서 물러날수록 그동안 가려져 있던 햇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 방 안에서는 여태껏 보이지 않았던 형체 하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페테르 백작이 아들에게 바예지드 가주직을 넘긴다고 하더군요.”
“그 청년이라면 강철공께서 충분히······.”
“이번에 열릴 제국 회의에는 아우슈린과 니다벨리르의 사람들도 참여할 예정이기도 하고.”
어둠이 걷힌 그곳에서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하얀 탁자였다.
그것도 원형으로 만들어져 있어 마주 앉은 사람들이 서로를 볼 수 있게 만들어진 탁자.
“······그리고 새로운 소드마스터 또한 언젠가는 저 자리에 오겠지요.”
촤악-!
햇빛이 모자란다는 듯 티무르가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덕분에 눈을 가리고 만 아르망이었지만 강철공 티무르는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용의 시대를 넘어 제국의 시대. 그리고 이제 어쩌면 새로운 시대가 자리 잡을지도 모르는 시기입니다. 궁정공.”
이제야 눈을 뜬 아르망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티무르는 문고리를 잡고 난 뒤였다.
“그러니 새로운 시대에 대한 결정은 새로운 사람들한테 맡기도록 합시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소드마스터.
그들을 위해 문을 열어젖힌 강철공이 조용히 방 밖을 나서고 있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원탁에는 자신의 자리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그렇게.
“······강철공.”
그렇게 북부의 찬 바람이 떠난 자리에는 오직 갈 곳 잃은 아르망만이 남아 있었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활짝 열린 문을 바라보고 있던 조금씩 방 안으로 스며드는 바람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
이제야 날이 풀리기라도 했다는 듯 스투르마로 향하는 길은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마부석에 앉은 고트가 조금 더 빨리 왔으면 좋았을 거라며 투덜대었지만 밖을 내다보는 제미나는 이 여행이 즐거운 모양인지 그저 싱글거리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저 탑같이 생긴 게 용이라는 거지?”
“응. 정확히는 데스웜이라고. 서부에서 서식하는 녀석인데.”
제미나가 바라보는 저 먼 평원 위에는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기다란 탑처럼 생긴 것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멀리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커다란 그것은 숨을 쉬기 위해 밖으로 나온 서부의 용 데스웜이었다.
“아까 지진이 났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지 뭐야. 나 태어나서 지진 처음 느껴보거든?”
“그래?”
블라드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는 듯 눈을 반짝여대는 제미나를 보며 빙긋 웃음 지었다.
너무 신기하다는 듯 지금까지 조잘대는 그 모습이 몇 년 전 데스웜을 처음 보았던 자신의 모습과도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맘때쯤이면 북부까지 올라와서 햇볕을 쬐고 간다나 봐.”
“그런데 저렇게까지 크면 엄청 많이 먹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안 잡아먹어?”
“쟤는 그런 짓 안 해. 땅속에 있는 광물 같은 걸 먹고 산다던데.”
루트거와 잡았던 녀석을 제외하고는 데스웜이 사람을 습격한 경우는 없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아마 그 녀석도 흑마법의 저주가 아니었다면 굳이 북부까지 올라와 사람들을 괴롭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이 똑똑해졌네 블라드. 그런 건 다 어디서 배웠어?”
마차 창턱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던 제미나의 시선이 블라드를 향해 있었다.
무엇이든 물어봐도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대답해주는 블라드의 모습에서 오늘따라 어른의 향기가 짙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걸 뭐 배우나.”
누아르와 함께 마차 옆을 걸어가던 블라드는 감탄했다는 듯한 제미나의 목소리에 그만 실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냥 오다가다 듣는 거지.”
딱히 배우지는 않았지만, 난생처음 보는 데스웜에 대해 설명해 주던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가 해준 말이 아니었다면 지금 반짝거리는 제미나의 눈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블라드는 그만 콧잔등을 긁적이고 말았다.
“아 위스키 먹고 싶다.”
“안돼 이건. 선물용으로 특별히 주문한 거란 말이야.”
“한 모금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그 정도는 루트거 님도 봐주실 거야.”
“얘가 미쳤나 봐 진짜.”
선물로 가져온 위스키를 먹고 싶다는 블라드의 말에 제미나는 기겁을 했지만 아마 정말 마시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예전에 걸었던 길을 걸으며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다는 것 뿐이지.
“이렇게 화창한 날에는 위스키가 딱 맞는데.”
초록색 평원과 푸른색 하늘. 그리고 그사이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데스웜의 모습.
말도 타지 못했었던 그때를 기억하던 블라드는 오늘따라 요제프가 건네주었던 위스키가 그리울 따름이었다.
※※※※
“워워. 와 이거 뭐야.”
“······.”
마차 한 대를 몰며 쇼아라에서 스투르마까지 향하던 블라드 일행.
그러나 목표했던 도시까지 왔음에도 고트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대장. 내가 이래서 일찍 오자고 했잖아. 저 마차들 좀 보라고.”
오랜만에 보아도 여전히 강렬한 인상을 주는 스투르마의 성벽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빨리 블라드를 맞아주는 것은 성문 앞에서부터 길게 이어진 마차들의 행렬이었다.
“······블라드. 저기 좀 봐.”
“뭐?”
“저기 저거. 다들 마차 말고도 수레까지 엄청 가져왔어.”
각 가문당 한 대의 마차만 보냈어도 지금같은 정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몰려드는 사람들은 새로이 계승되는 바예지드의 가주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고작 맨몸으로 왔을 리가 없었으니 지금 스투르마 앞에는 온갖 비싼 물건들을 싣고 온 수레들이 한가득이었다.
“······우리도 선물 좀 많이 가져올 걸 그랬나? 여기서 우리가 제일 초라해.”
“초라하긴 뭐가 초라해.”
으리으리한 마차들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그런지 제미나의 어깨가 조금씩 움츠러들고 있었다.
고트가 신경을 썼다고는 하지만 그래 봐야 빌린 마차.
거기다 들고 온 선물도 옆에 있는 이들에 비해 보잘것없었으니 의기소침해 질 만도 한 상황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 사람들 다 귀족인 거잖아. 나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당연히 되지. 너 레이디 제미나야.”
이제야 처음으로 경험하는 높은 세계에 제미나의 어깨가 점점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블라드는 어떻게 해야 이 행렬을 빨리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장, 대장!”
“왜?”
“앞에서부터 누가 오나 봐. 마차들이 웅성거려!”
그러나 잠시 고민할 틈도 없다는 듯 성문에서부터 선 마차들이 조금씩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누구 높은 사람이 오나?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들 문을 열고 나오는데.”
“······누구지.”
높은 사람이 온다는 말에 마차 안에 있던 제미나가 재빨리 구석 쪽으로 몸을 옮겼다.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는다는 듯한 그 모습에 블라드가 입을 다셨지만, 불행히도 제미나가 경계하던 그 높은 사람은 일행이 있던 마차에 볼일이 있던 모양이었다.
“내려.”
“응?”
입은 차림새는 고급스러웠으나 마차를 두들기는 모양새는 영 불량스러웠다.
“내리라고. 괜히 여기서 시선 집중시키지 말고.”
거기다가 왼쪽 눈가에 두른 시커먼 안대까지.
충분히 위협스러워 보이는 그 모습에 제미나가 침을 꿀꺽 삼켰지만 정작 눈이 마주친 그는 마차 안에 있는 제미나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을 뿐이었다.
“자야르?”
“일찍 좀 올 것이지. 여전히 손 한 번 많이 가는 녀석이군.”
바예지드 가문의 새로운 기사단장으로 임명된 남자. 기사 자야르.
가장 명예로운 기사를 키워냈다고 명성이 자자한 자야르였지만 그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신의 제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외전- 변하지 않은 저택
오랜만에 들어서는 저택의 복도는 블라드에게 익숙한 정취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차가웠던 겨울날, 그저 검 한 자루만을 짊어든 채 요제프를 따라왔던 바예지드의 저택.
그러나 모든 것이 낯설었던 그때와는 달리 이제 이곳은 또 다른 고향이나 다름없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
“이 저택은 변한 게 없네요.”
“딱히 변할 일도 없지. 요즘 조금 번잡해지긴 했어도.”
자야르의 뒤를 따르던 블라드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저택의 정경을 훑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기에 정겨운 풍경들.
블라드는 종자였던 시절, 자신이 걸었던 길들을 밟으며 예전의 추억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사단장이 되신 줄은 몰랐어요.”
방금 포틀리와 함께 소시지를 나누었던 식당을 스쳐 지나갔다.
말을 타지 못해 망신을 당했던 연무장이 저 아래 보였고.
그러나 변하지 않은 풍경 속에서도 가장 와닿는 것은 지금 보이는 자야르의 뒷모습이었다.
“귀찮은 건 싫어하시더니 용케도 단장직은 수락하셨네요.”
“······나도 딱히 할 생각은 없었다. 옥사나 님의 부탁만 아니었어도 말이지.”
귀찮은 것은 싫고, 귀찮은 것을 몰고 오는 것들은 더 싫다.
평소 자야르의 성정을 잘 알고 있던 블라드는 그가 단장직에 수락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고 있었지만, 자야르에게도 딱히 거절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옥사나 님이요?”
“너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내 이름값이 높아졌어. 아마 옥사나 님은 그걸 좀 이용해보고 싶으셨던 모양이야.”
새로이 등장한 소드마스터의 존재에 지금 대륙은 열광하고 있었다.
건국왕 프라우센 이후로 처음으로 등장하는 소드마스터.
그것도 가장 오래된 용을 베어냄으로써 전설 속의 한 장면을 재현해 낸 블라드였으니 바예지드로서는 그 명성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제자 잘 둬서 출세하신 거네요.”
“······여전히 제 잘난 맛에 살고 있군.”
자야르의 발걸음이 점점 낯선 복도를 향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은 종자였던 시절에는 단 한 번도 닿을 수 없었던 저택의 중심부였다.
“여기는 처음 와보는데요.”
“와봤어도 문제인 곳이지. 종자 주제에 무슨.”
피식 웃는 자야르의 비웃음이 여전해 보였다.
그러나 그 웃음이 기분 나쁘지 않은 것은 자신을 여전히 돌봐줘야 할 대상으로 보는 자야르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들어가 봐라.”
“네.”
예전에는 페테르가 쓰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루트거가 기거하고 있는 방이었다.
그 앞에 선 자야르가 조용히 문을 두들기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무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
이제는 평안에 다다른 라그무스가 걸어놓은 신비.
그 신비를 따라 열리는 이곳은 오직 바예지드의 가주가 허락한 이들만이 들어설 수 있는 저택의 가장 깊은 곳.
“생각보다 늦었군. 블라드.”
그러나 온통 낯설 것만 같은 그곳에는 이미 잘 알고 있는 미소 하나가 블라드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아침서부터 까마귀들이 날아들더군. 네가 온다고 말이다.”
환하게 비치는 햇살 사이에서 블라드를 보며 웃고 있는 검은 머리의 사내가 있었다.
권위를 상징하는 장식들이 가득한 집무실이었으나 루트거라는 존재 하나만으로도 이미 눈앞의 공간은 정겨운 곳이 되어 있었다.
“옜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이제는 새로운 바예지드의 가주가 될 루트거 바예지드.
그가 블라드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무언가를 퉁겨내었다.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겠지?”
“······은근히 뒤끝이 있으시네요.”
루트거의 손을 떠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작은 것.
블라드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땅콩을 보며 실없이 웃고 말았다.
※※※※
“요즘은 뭐랄까. 하루하루가 나의 적성을 알아가는 시간이랄까.”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루트거가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쩍 벌린 다리며 길게 내쉬는 한숨까지.
모두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불편해서는 나오기 힘든 자세였다.
“이렇게 되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해왔지만 역시 한 가문을 이끄는 입장이라는 게 영 만만치가 않아.”
“그래 보이네요.”
도로테아가 내어준 찻잔을 든 블라드가 축 늘어진 채 앉아 있는 루트거를 힐긋거렸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창백해진 안색.
그리고 쏟아져 들어오는 격무에 지쳐 짙게 깔린 눈그늘까지.
평소에는 닮지 않은 형제라고 생각했으나 이렇게 보니 루트거의 얼굴에서 요제프가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만만치 않은 일 중에서도 네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꽤 크단 말이다.”
“제가요?”